그리스도의 향기
믿는 이에게 주님의 기도만큼 가깝고 늘 떠나지 않는 기도가 있을까? 버릇처럼 입을 열면 으레 주님의 기도가 흘러나올 정도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렇게 정겨운 기도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기도문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건성으로 읊어서는 안 될 기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신부님이 수녀원의 피정에서 수녀님들에게 하루 피정 일과를 전부 “주님의 기도”를 묵상 주제로 주었다고 합니다. 종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저도 마음잡고 조배실에서 시작해봤지요. 와~ 버릇대로 해보니 채 1분을 넘길 수 없더군요. 큰맘 먹고 해보다가 천천히 다시 또 시도하고… 무조건 한 시간 정도는 해봐야지 어거지를 써 봐도 맘먹은 대로 될 리가 없더라고요. 시간 늘인다고 대순가요? 하다가 또 해보다가,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고 해봐도 “하늘에…”서부터 분심이 들고 정신 헷갈리게 내 묵상의 나래는 고향으로 갔다가 감곡성당 총상 맞은 성모님상으로 오간 데 없이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풀이 죽고 맙니다. 본디 묵상한다고 앉으면 내 상상의 날개는 이렇게 세상을 팽팽 돌아다니고 만다. 시속 6천 7천 킬로를 넘나드는 속도라 내가 어지럽다. 파타고니아 산에서 몬세라또까지. 왠 파타고니아 산 이름이 왜 나오느냐 고요? 파타고니아 산은 남미의 맨 아래쪽, 남극에 가까운 산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시나이 산을 거쳐 아씨씨까지야 좋다지만 에펠탑에서 루체른의 카폐다리에서 필라투스 산 … 온갖 관광지까지 상상의 나래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 가라앉히고 간절히 성모님한테 도와달라고 빌었더니 진득하게 오래오래 머물러 묵상하는 은총을 주시더군요.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처음에 당연히 하늘, 푸른 하늘(天), Sky라고 알았다. 익숙해진 후에도 하늘이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이 계신 곳이니만큼 푸르고 푸른 하늘이라 믿었다. 사실 푸른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시라 … 그림이 되잖은가? 철이 들고서야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 가슴에, 마음 안에 계신다고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시작하면 푸른 하늘을 떠올리는 것은 그대로다. 그분이 계신 곳을 연상하기에 시커먼 내 마음 안에 계신다고, 떠올리기에 송구했다. 아직도 내게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궁전이 계신 곳은 푸르디푸른 하늘나라의 예루살렘이라고 믿는다.
2)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나는 신자로서 의무를 다하고서 천국에 가는 것이 신자의 도리라고 믿었다. 나름 나대로 생각한 바이다. 그러나 문득 나 혼자 천국 가는 것으로 그치기에는 너무 염치없는 것이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 그분이 계신 곳을 일러 천국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리 세상에서의 삶이 하늘나라에 가는 여정에 불과하다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뭔가 해야 할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지 않을까? 옳거니, 우리가 지향하는 하늘나라가 그렇게 좋다면 지금 이 자리에 그 하늘나라를 당겨 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건 아닌가? 다시 말해 천국을 바로 이 자리, 내가 디디고 선 이 땅에 세우자는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 시민으로서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비로소 힘이 솟아난다. 그래, 지금 그렇게 살아보자고. 암!!
3)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매일 우리가 먹는 밥상이 그분이 주신 것이라고? 과공이 비례라고 수긍할 수 없었다. 너무 지나친 거 아냐? 쐐가 빠지게 내가 일해서 버는 돈으로 우리 식구가 먹고 사는 걸. 그런데 살아보니까, 실감이 나더라고. 주님이 주시는 양식이 그냥저냥 내 입으로 들어오는 밥에 그치는 것이 아니더라고. 먹는 것에 그치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의 원천이 그분이 주시는 양식인걸. 영육의 양식. 살아가는 나날이 그분이 보호하심이 없다면 어찌 살았을까? 하룬들 살아냈을까? 아침 출근길에 나서는 게 바로 전장 터에 출전하는 비장한 장수의 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그분이 계심을 몰라본다면 믿는 신자 된 도리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밥상에 앉으면 허겁지겁 식사 전후기도 바치기 바쁘게 수저를 들고 마는 이 무참한 기분을 알까?
4)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를 용서하시고 …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외우며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처음에는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그분도 우리를 용서할 수도, 용서 안 할 수도 있다면, 하느님의 용서는 뭔가 조건이 달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우리한테는 절대적인 용서를 요구하시면서, 당신이 우리 인간을 용서하실 때에는 조건적이라면 불공평하잖은가? 송봉모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다. “용서에 대한 요구를 조건적으로 보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용서하오니’ 는 용서를 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이라고 했다. 무조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기에 우리도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알기 쉽게 이렇게 풀어주었다.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듯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게 하옵시고…” 이럴 수가. 용서가 그리 말대로 쉽게 되던가? 아마도 믿는 이들이 제일 쉽게 걸려 넘어지는 게 바로 용서가 아니던가? 조배실에서도 용서해야지 맹세라도 할라치면 미운 놈 얼굴이 자꾸만 떠오를 게 뭐람.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대목에 걸려 넘어지고 또 넘어지게 될 것만 같다. 미치겠다. 병원 환우교리 봉사를 할 때, 용서 문제로 학질을 앓았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의절한 후배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세례준비를 하다가 “나 세례 받지 않겠소”하는 환우를 달래다 지쳤던 어느 날 간병인이 내게 말했다. 아니,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 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분은 세례를 받고서 환한 얼굴로 선종하셨다. 어쩜 용서 못할 사람은 없다고 본다. 사소한 오해로 벌어진 사람과 사람간의 문제는 기도로 청하면 답을 주시더라고. 내 문제는 해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다가도 미운 놈 생각에 잠을 깨고 하던 버릇이 많이 가벼워지고, 척이 진 사람과 사이에 얽혔던 좋은 추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래, 네가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 밝히자면 내 모든 비밀번호는 일흔일곱 번씩 일곱 번에서 따왔다. (집회서 28장)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5)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신부님 말씀이 고해소에서 자주 듣는 말이 “사는 게 죄이지요.”라고 했다. 주로 할머니들이 그리 말한다고. 올바른 고해성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살아가면서 악에서 오는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는 것은 사실이고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약점이다. 그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바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 보려는 믿음이 아닌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에 맡겨볼 일이다. 과연 우리 힘으로 유혹에 벗어날 수 있을까? 천만에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소망하는 기도를 통해 그분의 말씀을 눈치 채야 한다. “깨어 있어라” 는 주님의 부르심을 기억하자. 유혹 ; 남을 꾀어서 정신을 어지럽게 함(민수,욥) 그릇된 길로 꾐(신명,루카) 하느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데려다 놓으시고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2,16-17)
이런 하느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3,4-6) 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다. 인류의 첫 범죄는 바로 유혹이다. 사람에게 유혹이라는 고약한 놈은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우리를 끈질기게 잡고 놔주지 않는다. 창세기의 순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는 아담과 하와, 인간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2장에서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유혹이란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방법은 있다. 인간이 자기 욕심에 이끌리거나 사탄이 꾀는 ‘유혹’(temptation) 두 종류가 있다.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기도하고, 인내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도움을 의지해야 한다. 주기도문의 마침은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로 끝난다.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바치며 몸과 마음을 바짝 차리고 세상의 모든 악으로 이끄는 악의 세력에 이끌려 갈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에 온 몸을 바쳐 따라야 할 것이다. 어린이 미사의 성가는 율동이 따른다. 주기도문을 부를 때는 율동이 힘찬 동작으로 바뀐다. “ … 악에서 구하소서𝅘𝅥𝅯~𝅗𝅥~𝆺𝅥𝅮" 어린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굳세게 움켜쥐고서 어깨 높이까지 힘차게 올린 다음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유혹을 뿌리치고 악을 물리치려는 병사가 부르는 군가와 같이 힘차다. 정말이지 내 손으로 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듯 힘이 들어간다. 악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군인의 임전무퇴의 정신이 필요하다. 왠지 주기도문을 바칠 때는 말씀의 갑옷을 입고 전장터로 출전하는 장수처럼 용감해진다.
… 그대는 어떠한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