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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요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22-30 / [침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그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지방에 얼마 동안 머무르면서 거기서 침례를 주셨다. 23-24) 이때 침례 요한은 아직 감옥에 갇히기 전이어서 살렘 근처의 물이 많은 애논이라는 동네에서 침례를 주고 있었다. 25) 하루는 어떤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의 침례가 더 낫다고 하는 바람에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요단강 건너편에서는 선생님이 전에 증거하신 그분이 침례를 주고 계시므로 모든 사람이 이리로 오지 않고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27) 요한이 말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에 맞는 일을 맡기신다. 28) 내가 맡은 일은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29) 군중이 그분에게 몰려가는 것은 당연하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한다. 나는 지금 그러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분은 더욱더 위대해지고 나는 더욱더 작아져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서 사역하시자 세례 요한의 사역과 혼선이 빚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요한의 제자들이 심기가 불편해하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유대 사역(22-24) 예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시다가 유대 땅으로 가서 세례를 베푸시며 사역의 영역을 넓혀 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직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기 이전이었기에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요한을 따르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과 예수를 따르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로 인해 미묘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증언(25-28) 요한의 제자들 중에서 유대인과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자 요한에게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게 됩니다.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깨닫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달리 여전히 요한을 따르는 자들에게 명확한 답변을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냄을 받은 자라고 증언할 자는 너희라고 깨우쳐 줍니다. 인간적인 관계에 얽매어 의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기쁨(29-30)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제자들에게 요한이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입니다. 요한의 마음에는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이제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모습으로 인해 불쾌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의 마음을 비유하며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음으로 기뻐하기 보다는 예수 덕분에 내가 흥하기를 원하고 있지 않는가?
적용: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나는 핍박을 당하고, 명예가 실추되고, 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이 있습니다(마 16:24; 히 12:2; 13:13).
길에 굴러다니는 쓸모없는 돌맹이 하나도 하나님 손에 들려지면 골리앗을 무너트리는 가장 강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 고난의 시간은 정금으로 빚어지는 시간입니다.
< 설 교 >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이
요 3:21-36 / 이수영 목사
본문이 들어있는 요한복음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아니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귀한 말씀이며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은 아마도 요3:16의 말씀일 것입니다. 누구나 다 외우고 있을 그 말씀과 뒤따르는 17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핵심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요약해놓은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이 간결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무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지독한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로 지독한가 하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실 정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 가운데서 하나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썽피우고 속 썩이는 아들을 내보내신 것 아닙니다.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편안히 쉬며 놀다 오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거기 달려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보통 희생과 자기포기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2:7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고 자기를 낮출 대로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갖는 일입니다. 강아지애호가가 있다고 합시다. 유럽 사람들의 애완견 사랑은 참 유별납니다. 너무 유별나서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비오면 우비 입혀서 데리고 산책하고 겨울철에는 스웨터 떠서 입히고 미장원에 가서 멋부려주고 휴가나 여행 다녀오느라고 장기간 집을 비워야 할 때는 사람 묵는 호텔보다 숙박료가 비싼 강아지호텔에 맡겨 호강을 시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아지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강아지애호가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자기 친아들 보고 “얘야, 너 강아지가 돼서 몇 년 살다가 다른 강아지들 대신 네가 잡혀 죽어서 보신탕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먹혀줘라. 그러면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살려서 내 품에 안기게 해주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지독한 일을 할 부모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지독한 일을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과 정죄와 멸망을 당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넷째는 이제 우리가 그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들의 은혜를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는 그 아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해도 누구나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둠을 사랑하던 데서 구원의 빛으로 오신 아들에게 나아오고 영원한 진리이신 그 아들을 따르는 이만이 심판과 정죄와 멸망을 면하고 구원과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요3:18-21).
이 위대한 복음의 말씀에 이어지는 22-30절은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오고간 대화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세상에 보내주신 그 분,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를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그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충설명이며 요3:16-21의 내용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을 말합니다. 31절에서는 그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라 하며,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존재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35-36절). 본문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를 “만물 위에 계신 이”시라 하고, 35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34절에서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는 것은 성령을 “한량 있게” 즉 제한적으로 받은 모든 인물들과 그를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선지자나 선생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시며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마11:9)라고 하셨으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마11:11)고까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례 요한이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의 관계를 말하며 “그는(즉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그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사셨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것처럼 성령과도 완전히 하나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봅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친히 보고 들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가 하시는 말씀은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증언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33-34절의 뜻이 그것입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하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참된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는 것은 그의 모든 말씀이 전적으로 참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 첫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이들과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36절을 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5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 즉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한 권세를 다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권세도 그에게 있습니다. 그는 만유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이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와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영원히 우리의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세력들이 창궐하는 때 우리는 이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음해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를 서슴치 않는 자들에 맞서기 위해서도 이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비난과 공격이 있을 때마다 이에 부화뇌동하여 기독교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를 일삼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 32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했습니다. 악하고 거짓된 세상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기독교를 배척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능욕하는 자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거할 자들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만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더욱 더 바르게 알고 더욱 더 확고히 지키는 일에만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 안에 굳건히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사랑을 깨닫는 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요일4:7-12의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사랑,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라 했습니다. 사랑,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길입니다. 사랑은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며 교회에 닥쳐오는 온갖 위기와 도전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교회를 부정하려 하는 자들 앞에서 우리의 진리를 타협하려 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사랑을 강화하고 확대함으로써 그들의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하는 사랑만이 모든 것을 바꾸고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
1. 세례 요한의 부모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부모 모두 제사장 가문인데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나이가 많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전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중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눅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가 하나님께 간구함이 응답되어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과, 그 이름까지도 요한이라고 지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 100세에 이삭을 낳은 것처럼,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장차 해야 할 사명까지도 말했습니다. 누가복음1:16-17입니다.
(눅1:16-17)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세례 요한의 사명은, 장차 선지자로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그의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행할 때, 세례 요한은 엘리야 선지자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 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두고, 그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인물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며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눅7:27-28)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리고 세례 요한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 구세주 그리스도인가 하고 심중에 생각했습니다.(눅3:15) 그러나 그는 자신은 메시야가 아님을 분명히 하며, 오직 자기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눅3:16-17)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이 때가 되어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가감하지 하지 아니하고, 그야말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거침없이 설교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로 세례 요한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례 요한을 따르는 무리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게 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자기들의 스승을 따르는 무리보다 더 많아지게 된 것을 보고 염려했지만, 세례 요한은 그러한 모습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삶과 사역의 중요한 원리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3:29-30을 보겠습니다.
(요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흥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구약의 마지막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유대의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과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참된 선지자로 인정하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와같은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질문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눅20:1-8)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예수께 무슨 권위로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역으로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에 대답하면 자신도 그들의 질문에 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질문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궁색해진 그들이 서로 대답할 방도를 찾습니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백성들이 요한을 참된 선지자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다.’ 하고 서로 의논하다가,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낸 참된 선지자로 믿고 그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짧게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명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며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그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이 안드레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소.” 하고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35-42)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렇게 세례 요한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흥해야 하리라.”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라며 칭찬하셨지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고. 세례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말하지 않고 소리만 내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는 있지만,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훈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말이 내 마음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처럼, 말씀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자세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증인, 곧 ‘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자신은 신랑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요3:26-30)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유대인들의 풍습에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결혼식의 세부적인 일들을 다 맡아 했고, 신랑을 신부에게 건네는 일까지 했습니다. 신랑 들러리들은 신랑의 음성을 멀리서 듣고 결혼식이 곧 열리게 될 것을 기뻐했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사랑하는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에게 모아졌습니다. 신랑의 들러리들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들러리로서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신랑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빛’이시고 세례 요한은 ‘등불’에 불과했습니다(요 5:31-35).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을 두고,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자라”(요1:8) 고 했습니다. 요한은 요단강을 비롯해서 그 자신이 사역해야 하는 제한된 지역만을 비추는 ‘등불’이었습니다. 제한적으로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사람들에게 비추어 생명을 얻게 하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었고, 영적 어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마4:13-16)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요 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은 빛을 전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어두운 세상에 빛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어두운 밤에 어두운 집 안을 걸어 다닐 때, 작은 야간 등 하나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빛이 되어질 때, 삶의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을 이렇게 세 가지 이미지로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간추려 말하면,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자신은 그 “말씀”을 증거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신랑”이시며,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이시는 “참 빛”, “생명의 빛”이시며, 자신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 이미지는 모두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등불을 밝히는 성령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신부된 교회의 신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비추이시는 “영원한 빛”, “참 빛”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의 모든 사역의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이 말씀은 온 세상에 “말씀”이 흥왕해지고,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거룩한 신부들이 되어 신랑의 기쁨이 충만해지며, 어둠에 묻혀 생명이 없는 세상에 ‘참 빛’, ‘생명의 빛’이 충만하여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종의 임무는 예수님을 점점 더 드러나게 하고 자신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 안에서 더 자라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고, 자신의 존재와 그 위치를 바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고, 그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셨던 위대한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요1:19-21)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 오기는 했지만, 자신은 장차 올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요1:21,말4:5,참고-마11:1-9, 17:10-13).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부르셨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특권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땅에서 났고, 그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장차 올 그 선지자도, 엘리야도 아니었습니다. 또 바람에 흔들리며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갈대도 아니었습니다(마 11:7). 세례 요한은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왕자가 아니었습니다(마11:8). 오히려 헤롯 왕의 지하 감옥에 갇힌 죄수였습니다(마 14:1-12). 그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그의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불륜과 불법이라고 담대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이 자신의 불륜을 고발한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유를 잃었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그것은 세상이나 세상 권력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는 일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10:40-42)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엘리야처럼 기적과 능력을 베풀지 않았어도,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말은 모두 참되다고 여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이 기적적으로 태어났고.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었습니다. 그는 “엘리아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 왔고, 엘리야는 많은 기적을 행한 선지자였습니다. 기적을 행했어야 할 하나님의 종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세례 요한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수많은 제자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입고 있었고,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한 종파의 지도자로서의 권세와 명망을 휘날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에 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제자들의 시기섞인 말을 일축하고, 오직 예수만이 흥해야 한다는 감격적인 증거를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먼저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세주이시며, 자신은 그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미천한 존재임을 자각한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에 대해 의구심과 시기가 가득한 눈빛을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인간은 예수를 바로 알 때만이, 비로소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약 인물가운데 요나단과 다윗은 여인의 사랑보다 승한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한 나머지, 온갖 수단방법을 다해 다윗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이미 떠났고 친구 다윗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살해 위기를 만날 때마다 다윗을 도와 그의 생명을 구합니다.
(삼상19:1-7)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훗날 다윗은 이러한 요나단의 깊은 우정에 대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삼하1:26). 요나단은 왕자의 신분에 있으면서 정적(政敵)이라고 하면 정적일수도 있는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을 알고, 다윗을 오히려 섬김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겸손히 지킬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워 잇속을 채우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종, 청지기의 위치에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지위와 권세가 높아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인생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인생들에게 있어 물질이나 지식이나 능력 등은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그 모든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졌다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청지기 인생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돈이나 지식이 많다고, 권세나 지위가 높다 해도 피조물의 위치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주인(주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인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고, 그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요 1:6)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존재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영광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존재가 아브라함의 자손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6-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또한 성도 여러분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엡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40:5-9입니다.
(사40:5-9)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사도 베드로는 이를 인용해서 복음,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영광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도 세례 요한처럼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말씀이 참되다고 인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신랑되신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기쁨이 충만하노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십대 청소년이었을 때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신실하게 가르쳤습니다(눅 11:1). 그는 광야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의 짧은 사역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은둔하면서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생활을 하면서,(눅 7:33)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하는 ‘광야의 소리’로서 사명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그가 처한 환경과 처지가 몹시 어려움에 불구하고 항상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부모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눅 1:14,58).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요한이 어려서부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모습에 기뻐했고, 그가 자라가면서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눅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세례 요한은 어머니의 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음성을 듣고 기뻐했고, 나중에는 신랑되시는 메시야의 음성을 듣고 들러리로서 기뻐했습니다.
(눅1:39-45)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메시야를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켜 보여주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요한이 기쁨을 잃었던 유일한 때는, 그가 헤롯의 감옥에 갇혀, 예수님이 정말로 약속된 메시야가 맞는지 의아해했을 때였습니다(마 11:1-19). 그는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고, 좁은 감옥에 갇혀 지내는 생활은, 분명히 그에게 염증을 불러일으킬만큼 답답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대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외치며 헤롯 왕의 불륜과 불의를 고발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 태어났지만,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스가랴처럼 훨씬 더 힘들고 위험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강력한 메시야로부터 강력한 심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상하고 사랑이 무한하신 목자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양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던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대해 칭찬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마11:7-19). 그러나 그 칭찬은 성경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아마도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했고, 그가 성공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메시야로서 사역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암울하고 낙심되는 때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들조차도 기쁨을 잃고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을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유대 지도자들은 헤롯에게서 세례 요한을 구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자신의 어리석은 맹세 때문에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마 14:1-12). 경건한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고, 사악한 왕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이 폐하여지고 진리가 영원히 다스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의 헤롯들을 물리치시고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믿음으로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 되신 성도 여러분은 장차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인내로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딤후2:9-12)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예수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된 성도 여러분,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인내로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왕같은 제사장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서, 자신이 전하는 이 복음이 결국에는 온 땅에 퍼져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10:16-18)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을 믿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겨자씨처럼 작고 하찮아 보여도 성도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 같은 제사장임을 믿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내 몸에서 존귀하게 되며 흥왕하게 되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기뻐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유명한 교향악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대원들에게 폭군적인 지휘자였습니다. 그는 베토벤 해석의 권위자입니다. 한번은 제 9 교향곡을 연주했습니다. 연주가 끝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을 때, 단원 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속삭였습니다. “오늘은 정말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도 저 영감이 우리를 칭찬하지 않고, 우리를 또 나무랜다면 내가 밀어서 쓰러뜨리겠다.”며 내기를 걸었습니다. 토스카니니가 그 날 대원들에게 한 말은 아주 유명해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토스카니니가 누구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도 아무 것도 아니다. 베토벤이 최고다.” 이쯤 되어야 베토벤의 권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이 있었기에, 연주가는 그 작품을 훌륭하게 연주하므로 훌륭한 지휘자로 찬사를 받게된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인생관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작곡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인생관을 가질 때, 훌륭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시고 예수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목적을 바로 깨달으며,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오직 예수만 흥하도록 하는 신앙생활로, 성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이정익 목사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에는 사전에 누군가 준비자가 필요했습니다. 길을 닦는 자가 필요하였습니다. 그 역할을 세례요한이 하였습니다. 본문은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은 위인으로 태어납니다. 성경은 위인들이 태어날 때 분명한 동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에도 천사로부터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잉태될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계시하였습니다. 세례요한도 태어날 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예비자
세례요한은 철두철미 예수를 위해서 예비자로 태어났습니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게 되면 며칠 전에 선발대가 먼저 출발하여 길을 닦고 의전을 준비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태어나기 6개월 전에 먼저 태어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순전이 예수를 위해서 먼저 와서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11),”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눅3:16),”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한 번도 예비자로서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백성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냐(요1:23)” 하고 물을 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은 “예비자요 준비자요 길을 닦는 자”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나는 주연이 아니다 주연은 내 뒤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고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였고 자신의 역할에서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이 선을 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욕심이 나면 선을 넘고 유혹받고 길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가는 곳 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예수님은 인기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유다가 볼 때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곧 한자리를 하게 될 것 같이 보였습니다. 욕심이 생겼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지점에서 그만 선을 넘습니다. 길을 벗어납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와 형제 남매간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을 잘 따릅니다. 여기서 아론과 미리암이 욕심이 생깁니다. 나도 모세 못지않은 영성이 있는데 지도력이 있는데 우리도 모세의 형제 남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어느 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너만 지도자냐, 하나님이 너하고만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이 우리와는 말씀하시지 않느냐(민12:2).” 그것은 하나님께 도전행위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너는 모세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미리암이 선을 넘었습니다. 욕심이 생겨서 도전을 합니다.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셋을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하고 진노하셨다고 했습니다(민12:8). 그 결과 주동했던 미리암에게는 나병이 걸리게 하고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월간 잡지를 보니까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어느 철없는 장군이 다음 차례는 나다 하고 호언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옷을 벗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욕심입니다. 자기 분수를 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반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아주 충직했습니다. 그는 결코 그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의 분수와 사명과 역할에 아주 철두철미 합니다.
오직 외길 삶
세례요한은 평생(평생이라야 30년) 오직 한길만 걸어갑니다. 평생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곁눈질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인생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냐 하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소리 듣고도 전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분수를 넘지 않고 오직 자기 길만 갔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런 요소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융통성이 많습니다. 융통성이 많다는 말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복음의 중심이 불분명 하다는 말이고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중심이 모호하고 불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너무 적당히 적당히를 외치다 보면 타협하게 됩니다. 주일예배를 적당히 하다보면 5분 늦고 다음에는 10분 늦고 그 다음에는 빠지게 됩니다. 11조도 적당히 하다보면 나중에는 정신도 중심도 없어지게 됩니다. 교사가 성가대원이 적당히 하다보면 불분명해지고 나중에는 매번 늦고 적당히 빠지게 됩니다. 직장에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자주 옮겨 다닙니다. 돈을 더 준다면 미련 없이 옮겨 다닙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인생을 되돌아보면 하자와 흠집과 결점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직자 청문회를 보십시오. 오늘에 와서 되돌아보고 털어보니까 다 걸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융통성이 많았고 적당히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원칙과 길이 있었는데 적당히 편법을 적용한 결과입니다. 오늘에 와서 보니까 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낼 세금을 적당히 무마해서 내지 않았습니다. 아들 병역을 적당히 해서 빼냈습니다. 미리 정보를 캐내서 노른자 땅을 사 놓았습니다. 그 때는 많은 이익을 얻었고 그래서 좋아했습니다. 그 말은 원칙에서 이탈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관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니 너무 융통성을 발휘하고 편법을 누린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오늘 앞길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나라가 돈 좀 벌었다고 수출 좀 한다고 다된 것처럼 행사하면 안 됩니다. 돈 좀 벌고 선진국이 되려면 생각이 여물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융통성을 발휘하면 안 됩니다. 원칙에 가까워야 합니다. 원칙에 가까우려면 누가 보지 않아도 돈 낼 것은 내야 합니다. 의무도 이행해야 합니다. 세금도 자진해서 내야 합니다. 아들의 등을 떼밀어서라도 군에 보내야 합니다. 몸이 빈약하면 매일 밤 피자 사 먹여서 살찌게 해서라도 보내야 합니다. 척추가 고장 났으면 사전에 빨리 치료시켜서 보내야 합니다. 저는 군목에 입대할 때 가슴이 아파서 군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은 도저히 이 몸으로 갈 수 없다, 가면 쓰러진다고 집에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눈감아 달라, 나는 군에 가겠다, 당당하게 군을 마치고 싶다고 호소해서 군에 갔다가 마쳤습니다. 척추 수술을 한 청년이 군에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신체검사에서 걸릴 것 같다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군의관에게 호소해서 반드시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갔다 오면 한 평생 마음이 시원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당당해집니다. 삶에는 이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당당함은 내 삶에서 매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국가안전보장 위원회가 있습니다. 2010년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직후 이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청와대 자하벙커에서 대통령 국정원장 국방장관 외교장관 통일장관 행안부장관 국무총리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8명이 모여 진행되었습니다. 그 회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서 모인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 8명중 국방장관 빼고 2명은 면제자였고 1명은 보충역이고 1명은 조기제대자이고 만기 제대자는 3명뿐이었습니다. 말이 됩니까. 영국이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의무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여왕의 손자가 아프칸 전쟁 때 전투기를 타고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영국 여왕의 아들인 왕자를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 때 전쟁에 직접 참전시켰습니다. 오늘 미국에 대해서 우습게 말들을 하는데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미국인 부자들과 장성들과 정치인들은 아들들을 앞 다퉈 전투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6·25때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아들을 한국전에 참전시켰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 집정관들은 전쟁이 나면 자신들이 먼저 참여하였고 자식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혹 전쟁에서 자식들이 전사를 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그렇게 오래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외길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아버지가 현직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세습제입니다. 말하자면 세례요한은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처럼 취직하려고 이력서를 써 들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제사장직이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이 외길의 사명을 다 하려고 그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야인으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 시대 현직 제사장의 아들이,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 광야로 나아가 죽은 약대 털을 벗겨 걸치고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잡아 먹어가며 그 시대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눅3:7).” 그 소리를 그 시대 집권자들이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랬다고 누구도 쫓아가서 요한을 체포하거나 고소하거나 구속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요한을 구경하려고 광야로 나아갔다가 그 소리를 듣고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 한사람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요한을 두려워하였고 모두 그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세례요한은 예비자의 길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오직 외길만 걸어갔고 뒤도 처다 보지 않고 주어진 사명의 길만 갔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오직 예수
또한 세례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전에 와서 예수를 위해 제자들을 미리 양육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들(요 1:35-40)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일찌감치 에베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행 19:1-7). 아불로는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행 18:24-28). 베드로 요한은 세례 요한이 양육한 제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쫒았던 것은 그런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쳤고 귀신을 내쫓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직감으로 예수신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당신이 그분입니까”하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 눈먼 자가 보고 저는 자가 뛰고 나병환자가 깨끗하여진다고 전하라.” 그 말은 그 시대에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는 메시야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암호로 내가 메시아요 예수라는 사실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 연락을 받고 세례요한은 이제 내 사명은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나타나면 조연은 사라져 주어야 합니다. 이제 그는 보름달처럼 흥해야 하고 나는 그믐달처럼 쇄하여야 합니다.
그때부터 세례요한은 헤롯왕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세례요한을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당시 집권자인 헤롯왕에게 세례요한의 존재는 가시 같은 존재였고 거북스런 존재였습니다. 오늘 말로 말하면 극단의 재야인사입니다. 당시 왕은 헤롯 안디바였는데 이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탐내서 빼앗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탓을 못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거침없이 질타하고 힐난하고 고발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넣고 입을 막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요한은 타협이 안 되었습니다. 헤롯이 고민했습니다. 요한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헤롯의 아내 그 잘난 여인 헤로디아였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왕과 동거하고 있는데 세례요한이 자꾸만 방해를 합니다. 이 여인이 한을 품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전국에서 귀인들이 모여 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딸 살로매를 내세워 춤을 추게 하였고 흥에 겨웠던 헤롯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약속하자 어린 의붓딸 살로매는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래서 목이 달아나 순교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적당히 타협만 했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이 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입만 열면 예수가 튀어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라는 말만 듣고도 바닷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성을 다 바쳐 목숨을 바쳐 섬길 대상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대명사처럼 따라다니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광야의 소리”입니다. 소리는 말을 담아 외친 후에 곧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 말은 예수이고 소리는 세례요한입니다. 말은 한번 뱉으면 오래 남고 글로 쓰면 더 오래남습니다. 그리고 소리는 한번 뱉으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 소리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대로 세례요한은 예수를 전하고 그가 오심을 준비하고 그가 오신 것을 보는 순간 소리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을 향하여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11)”고 평하였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직 한길 오직 한 가지 일을 위해 철저하게 살아가다가 죽는 것은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젊었을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탐독하여 읽으면서 소설 속에 나오는 롯데에 대해서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호를 “롯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평생 예수만 연구하여 기독론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평생 3만 페이지 원고를 썼는데 그중 2만 페이지가 “예수에 관한 연구”라고 합니다. 음악가 헨델은 복음서 중에 유독 마가복음을 탐독하였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주제는 “수난 받는 예수“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던 중 그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 곡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그렇게 집중하고 탐독하고 매료 중에 있으십니까. 사람마다 지금 생각이 집중된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께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가. 깊이 들어가 있는가, 지금 내 인생에 예수가 얼마나 몇 %나 차지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주님께서 손해 보라고 하면 나는 얼마나 흔쾌하게 ‘예’ 하고 대답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세례요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무슨 말로 응답할 수 있을까.” 이 대답은 여러분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기간입니다. 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님은 보름달처럼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이것이 여러분 모두의 대답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이필재 목사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한 그 많은 종족과 국가들 가운데 가장 특이한 민족 공동체는 유대 민족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이 특이한가? 그들은 언제나 하늘의 소리를 들으면서 땅의 삶을 살아가는 특수한, 일종의 영적 공동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국법이 생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법도 따로 없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곧 국법이 된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대통령도 종교 지도자가 임명했습니다. 사울도 다윗도 다 그렇게 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절대 유일신을 믿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데 하나님의 소리를 전달하는 대변인이 항상 있었음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소리가 인간 상식에서 벗어날 때 문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실 때 배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에 배는 바다나 강물에 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상식의 정 반대로 산꼭대기에다 배를 만들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상식에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산꼭대기도 보통 산꼭대기가 아니라 제일 높은 장소 아라랏산 꼭대기에다 배를 만들고 있으니까 누가 봐도 상식이 아닙니다. 한번 현실감 있게 설명을 하자면 지금 어떤 예언자가 우리 사회에 나타나서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니까 저 백두산 정상에 만들어놓은 배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했다면 그 말을 따를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역자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했고, 요나는 상식에 맞지 않다고 도망을 갔고, 예레미야는 울었고, 엘리야는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호소기도를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야유하고 핍박하고 왕따를 시키면서도 한쪽으로는 하늘의 소리를 못 들으면 안타깝게 기다립니다. “네 소리는 듣기 싫다. 그만하라.” 하면서도 “그가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못살아.” 하는 애증의 관계가 계속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 많은 예언자, 그 많은 선지자 가운데 마지막 예언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왜 마지막이라고 하는가? 세례 요한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동시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요한은 오셨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사실 요한도 상식에 맞지 않는 생활을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의 모습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 이하에 보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저 광야 들판에서 혼자 살면서 낙타털을 몸에 걸치고 야생의 메뚜기를 생으로 잡아먹고 사는 야인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TV에서 본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 기억납니다.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이 추운 겨울에 저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남루한 천막 하나를 쳐놓고 난방 시설도 하나 없이 추위에 덜덜 떨면서 라면을 생으로 깨물어 먹고 물은 눈을 뭉쳐서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방영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왜 이런 곳에 와서 이렇게 사십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들 많은 동네에 가서 사는 것보다 훨씬 좋아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알 수가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똑같지는 않아도 세례 요한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야인 생활을 즐기는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설교를 하니까 온 나라 백성들이 다 그에게로 몰려갔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왜 몰려갔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예언자의 설교가 그 사회에서 끊어진지가 250년입니다. 이때를 중간기 역사라고 합니다. 말라기에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예언자의 소리가 없는가?” “메시야가 오시기 직전이라 그렇다. 이제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이때나 저때나 기다리고 있는 그때에 예언자의 소리가 나타났는데 보통 사람과 다른 야인이 한명 나타나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그가 오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의 소리는 영혼의 잠을 자고 있는 암흑기 시대 사람들의 하나의 불빛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민중들이 몰려가서 “아! 당신은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지요?” “아닙니다.” “아니, 그러면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진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내 뒤에 메시야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합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조연 역할입니다. 옆에서 주연 역할이 돋보이게 돕는 도우미 역할자입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때는 불쌍해 보이는 역할도 많습니다. 남에게 계속 얻어터지는 역할도 있습니다. 계속 꾸지람을 들으며 굽실대는 역할도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에도 없는 악역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별 역할이 다 있습니다. 이러한 조연 배우들이 잘 해줌으로써 주연 배우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영화문화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지금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지금 여기 오셨습니다.” 하고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할 때 “나는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분의 신발 끈을 감당치 못하겠노라.” 유대 나라 문화는 신발 문화가 양말 없이 발등을 얼기설기 끈으로 묶는 샌들입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은 그 신발 끈을 다른 사람이 매어주고 풀러주고 먼지 묻은 발을 씻어주는 문화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은 “나는 지금 그 역할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온 나라가 지금 와글와글 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때 “아니야. 이분은 메시야야. 지나간 세기 동안에 그렇게 하늘의 소리가 안 들렸는데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메시야다.” 그렇게 사람들이 메시야로 착각하고 세례요한한테 몰려왔는데 그때 예수님이 세례 요한한테 나타났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모든 사람들의 자기를 향한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 후로 세례 요한의 역할은 안 나오고 순교 당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왔다.”
이렇게 되니까 그 동안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따르던 그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한테로 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하나가 와서 세례 요한에게 쓸쓸한 보고를 합니다. “선생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갔나이다.” 그때 세례 요한이 한 말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즉 오늘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의 사역에 몸 바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진리 한 줄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지금 우리 모두는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를 흥하게 만들고 그 흥함 속에서 나는 쇠하여 지는 그 길을 가기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시초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죄의 기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파렴치하게 그 손을 내밀어서 하나님의 권위에 손을 대었을 때 “이것은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되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데서 죄의 기원이 생겼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세상 역사의 지나간 2천년 동안 특별히 우리 한국 같은 나라에서 자신을 메시야화한 운동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이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주 운동입니다. 대한민국에 특별히 재림 예수로 수십 명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믿고 이 사람을 재림 예수로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맞습니다. 나는 메시야입니다.” 했다면 유대 나라 사람들은 다 그를 메시야로 섬겼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 누구입니까?” “메시야를 소개하려고 온 사람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저분입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왔습니다.” 오늘 말씀 28절에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느냐?” 그러고 나서 29절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유대인들은 결혼 문화가 독특합니다. 세계 민족마다 결혼 문화가 다 다릅니다. 재미있습니다. 많은 친구 가운데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제일 친한 친구를 하나 정합니다. 그 친구는 결혼 준비에서부터 신랑, 신부의 첫날밤까지 지켜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보통 유대 나라 사람들은 저녁에 결혼식을 합니다. 성경에도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름을 준비해서 등불을 밝히고 결혼식을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신부들은 저녁에 반드시 등과 기름을 준비해서 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문화가 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면 신부가 먼저 신부 방에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직 신랑은 오직 않은 상태인데 이때 신랑의 친구가 신부가 들어있는 방문 앞에서 보초를 서줍니다. 아무도 그 방을 열지 못하게 잔뜩 지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신부는 신랑이 와서 첫날밤에 자기 모습을 보고 너무 좋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아이디어로 몸단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는 신랑이 올 때까지 파수꾼 역할을 하며 누구도 거기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신랑이 오는 시간은 신랑 마음대로 정합니다. 일부로 늦게 오는 신랑이 아주 많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다가 나타나면 신부가 훨씬 더 반가운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신부들이 졸면서 기다렸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친구들인 파수꾼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신랑이 나타나면 축하의 악수를 하면서 방문을 열면서 신랑을 들여보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랑은 그날 밤 일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는데 좀 우리 문화와 다른 것은 그러한 친구의 행복에 조금도 방해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친구가 밤을 새워 주변을 지켜주는 문화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뭐하나 하고 침을 발라서 문창호지를 뚫고 들여다보았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다 그런 것을 하시던 분들입니다.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아름다운 전통문화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랑신부의 첫날밤이 지난 아침에는 구멍이 수십 개가 뚫려 있습니다. 신랑은 밖에 있는 친구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내가 협조했다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너의 첫날밤은 내가 지켜주었잖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만약 보초 서는 친구가 질투심을 일으켜서 “야! 너는 재미 보는 시간에 나는 잠도 못자고 이게 뭐야?” 그런 사람은 친구도 아닙니다. 지금 요한은 메시야가 가는 길에 자기가 길 닦기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신랑, 신부가 기쁨을 누리는 그 시간을 내가 도와주는 기쁨이 나에게 충만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마지막에 나의 목숨까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잘못하면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서 이게 나타났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이 나타나야지 어디를 도망가는 겁니까? 성경에 보십시오.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하느니라.”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혼자 외로이 로마 군인들의 채찍을 맞으면서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사를 올라갔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삼일 후에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디가 있다고 했습니까? 갈릴리입니다. 나라의 끝에서 끝까지 가버린 것입니다. 그새 벌써 갈릴리까지 가버렸는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간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3년 동안 예수를 따른 그 마지막이 죽음으로 끝나는 거야? 그러면 이게 뭐야? 헛수고했다.” 허무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자들의 사명 목적이 잘못되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끝까지 나의 사명은 예수를 메시야로 세상에 알리는 역할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이 그 후에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왜입니까? 순교 당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고 “내 사명은 여기까지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허무주의에 빠지려는 군중을 보고 예수님이 설교를 하셨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무엇을 얻으려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느냐?”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왔느냐? 무엇을 기대하고 세례를 받았느냐?” 저 같은 목사에게 “네가 무슨 영광을 위해서 목사가 되었느냐?” 물으실 때 내 대답이 뭔가? 우리 모두는 세례 요한과 똑같이 예수의 흥함을 위해서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도우미 역할, 조연 배우인 것입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기쁨을 위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지켜주는 친구의 역할을 우리가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관찰했을 때 사실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문제가 오느냐? 백성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에 시기가 났습니다. 보십시오. 백성들이 로마 장교 이런 사람이 길바닥에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을 하면서 요청을 하고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마태 같은 사람도 자리를 차고 나가서 공무원을 집어 던지고 예수의 제자가 되고 제자들이 줄줄 서서 기도를 받고는 나았다고 신앙 간증을 하고 예수님 주변에는 5천명, 1만 명씩 떼를 지어 군중들이 따르고 예수님이 설교할 때 하루 종일 그의 설교에 심취가 되고 갈릴리에 그 많은 여자들이 예수를 돕기 위해 몰려다니고…. “이게 뭐야? 우리가 설교를 하면 아무도 안 오는데 이게 도대체 뭐야?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 없애버리는 거야. 죽여야 돼.” 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예수를 끌어다 죽였습니다. 신문 만화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선거 때 같은 지역에서 출마한 국회위원 후보자 둘이 산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신문에 났습니다. 한 사람이 산신령한테 기도하는 겁니다. “신령이시여! 이번에 제 생애 마지막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번만 나를 당선시켜 주옵소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옆에 사람이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신령이시여! 나는 당선이 안 되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옆에 있는 저 놈은 떨어지게 해주옵소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요?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이런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왜 예수님이 “너희는 국가를 위하여” 아니면 “인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그렇게 말씀을 안 하시고 “친구를 위하여”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친구는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내 경쟁의 대상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은 좀 떨어진 곳에 있지만 친구는 옆에 있는데 그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축복해주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보고 몇 가지를 평가했습니다. 요한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인가? 마태복음 7장 9절에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만든 사람은 모두 선지자들입니다. 성경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선지자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엘리야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민족 선두에 섰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선지자를 보고 요한이 더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결론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5장 35절에 “요한은 켜서 비추는 등불이다.” 아까 제가 암흑기 역사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 캄캄한 어둠의 시대에 요한이 등불을 켰다. 메시야를 알려준 등불을 켠 사람이다.” 최고의 찬사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 이렇게 세례 요한을 평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메시야로 소개한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메시야로 알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몰려 왔는데 “아닙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내가 재림 예수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아니, 이 암흑기 시대에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당신이 아닙니까? 당신이 하는 모든 일로 봐서 당신이 메시야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굽니까?” “예수의 오심을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역할로 온 사람입니다.” 그 한 가지 일을 하고 세례 요한은 죽었지 않습니까?
‘레이먼드 크래이머’라는 사람이 쓴 “예수의 심리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좋은 책입니다. 이 저자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예수에게는 승부욕이 없었는데 요한도 바울도 똑같았다.” 승부욕은 이 세상에서 게임할 때 필요한 것이지 영적인 일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항상 졌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당시 대제사장,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야바 법정에서 패소판결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 같은 로마 정치인에게 졌습니다.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민중들의 데모에 졌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에 항변 한마디 못하고 끌려가셨습니다. 나중에는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에게마저 실패했습니다. 참패를 당하고 은 30냥에 인신매매로 팔려가셨습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하시면 집니다. “나는 참패를 당했다. 나는 졌다.” 영적인 일을 이 승부욕에 잡히면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어서 추악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신랑의 기쁨을 옆에서 도와주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 기독교 단체 이런 곳에서도 불필요한 것을 가지고 법정 투쟁까지 난리를 치는 경우를 보지 않습니까? “네가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무슨 문제가 일어나겠습니까? 잘못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고 신앙은 어디로 가는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승부욕에 사로잡혀서 추악한 악령의 노예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심리적 문제가 이렇습니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은 절대 나와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실제로 도와줍니다. 그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열리게 됩니다. 그의 고난스러운 면을 해결해주려고 내가 열심히 옆에서 도와줍니다. 문제가 어디서 오는가? 나보다 우월한 사람을 볼 때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촌이 땅을 사면 별안간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의 문제에는 좋은 마음을 갖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에는 질투의 마귀가 따라붙어서 나를 괴롭힙니다. 신랑의 기쁨에 나도 기뻐하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 힘든 일을 세례요한이 지금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그렇게 칭찬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영적인 일은 지는 겁니다.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최고의 공로자 역할을 한 선거 참모 Lee Atwater씨가 있습니다. 선거의 천재입니다. 그가 선거의 전략을 짜면 반드시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책에서 그 승리의 비결을 알아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는 “마키아벨리의 황태자”이고, 또 하나는 “손자병법”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의 주장은 하나입니다. “내가 승리하려면 간단하다. 상대방을 파괴하라. 승리는 저절로 따라온다. 그 방법을 하면 이긴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참모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9살에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그가 미국 사회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웃의 파괴는 승리가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사형 언도 집행관이었습니다. 예수는 사형수로 끌려가 처참한 죽음을 빌라도에게 당해서 참패를 당하고 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나 그에게 참패를 당하고 쓰러져 피 흘리며 처참한 죽음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약삭빠른 사람이 승리하고 악착같은 사람이 이기고 성공한다고 평가합니다. 세상일은 그럴지 몰라도 영적 일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교회 오는 것이 “나는 쇠하고 예수는 흥해야, 교회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나의 쇠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예수는 흥하게 되고” 이것을 배우러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살면 이것이 영적 승리자가 되어 예수님의 최고 칭찬을 받게 되는 진리를 세례 요한이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쇠하고 교회는 흥하고, 나는 쇠하고 예수는 흥해야” 이 신앙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기쁨이 충만한 사역자가 되려면
이재철 목사
♬ 여기에 모인 우리 ♬
1.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언제나 주님만을 찬양하며 따라 가리니
시험을 당할 때도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2.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주님의 뜻 안에서 내가 있음을 믿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어느 교회 장로 임직식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입니다.
세 분이 장로 임직을 받게 되었는데 누구 이름을 먼저 쓸 것이냐에 대해 얘기하였습니다.
한 분은 득표수에 따라, 한 분은 연령에 따라, 또 다른 한분은 가나다 순에 따라 해야 한다고 각각 자신의 이름이 먼저 나오길 바라면서 얘기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이 나보다 앞서 있으면 시기심, 질투심이 생깁니다.
본문의 말씀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가 유대인과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에 보면 제자는 예수님이 세례를 주고 있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오려던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연장자인 세례요한에게 말도 없이 그럴 수는 없다고 이 제자는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에게 올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데도 나는 기쁨이 충만하다” (29절)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섭섭해서 그만 둬야 할 상황입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버립니다. 처음에는 불덩이였는데 나중에 보니 숯만 남았습니다.
나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른 데로 가면 강도 만난 심정이겠지만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서 나옵니까?
◈ 기쁨을 가지고 사역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27절)
세례요한은 모든 사람과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 주신 기쁨을 가지고 끝까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형들에 의해 팔린 요셉은 많은 고생을 하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이 사는 곳에 흉년이 들어 형들이 요셉을 찾아왔을 때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두려움에 떠는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 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많은 고생을 하고도 억울함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다가 많이 흔들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인간적인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②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일에 충성하십시오. (28절)
세례요한에게 맡긴 것 2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예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여기에 충성했습니다. 예수님이 증거 되면 됐지 뭘 더 원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일에 충성하고 그 기쁨을 가지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칭찬을 받지만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책망을 받습니다.
달란트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나에게 맡겨주신 본연의 일에만 충성하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③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29-30절)
신랑신부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동역할 줄 몰라 기분나빠했습니다.
▶ 어떻게 하면 됩니까?
㉠ 남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남을 높이는 방법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남을 높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높여주는 나를 높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보시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들러리 역할을 잘 하십시오.
신랑의 친구들이 들러리 역할을 하고 함께 기뻐했습니다.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도록 살짝 뒤로 물러서십시오.
분가할 때는 새로운 목자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의 목자님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하나님만 드러날 수 있다면 내가 뒤로 물러나더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부흥
요 3:22-36 / 석원태 목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이 말씀은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① 신부를 취하는 신랑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29).
② 위로부터 오시는 이, 곧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31).
③ 그는 하늘의 것을 보고 들은 자라고 하였습니다(요 3:32).
④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34). ⑤ 만물을 주관하는 권세자라고 하였습니다(요 3:35).
⑥ 영생과 심판의 주라고 하였습니다(요 3:36).
이러한 증거들 가운데 또 하나가 ‘예수는 흥하여야 할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흥한다’(aujxavnw)라는 말은 수나 양이 점점 많아진다(증가)는 단어입니다. ‘쇠하다’(ejlattovw)라는 말은 수나 양이 점점 줄어든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흥하여야 하겠고…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겠고 …하여야 하리라’고 한 영감의 표현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또 되고 만다는 필연적인 도래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강조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계획이나 주장이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필연적인 사건을 뜻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필연적으로 기어이 흥해야 하고, 자기(세례 요한)는 필연적으로 쇠하여야 한다는 세례 요한 자신의 증거입니다.
Ⅰ. 먼저 나(자신)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 하반절에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적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 자신의 활동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27).
② 또 나(자신)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27).
③ 자신은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하여 그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요 3:28).
④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라고 하였습니다(요 3:29).
⑤ 그는 그리스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막 1:7).
⑥ 자신은 회개를 위한 물세례를 베푸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막 1:8).
그리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그의 제자들 중에서 예수에게로 가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온 대답입니다. 아니 세례 요한 자신이 제자들을 예수에게로 보냈습니다(요 1:35~37). 자신의 수(數)는 점점 줄어들어야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세례 요한 자신도 투옥이 되었습니다(막 1:14, 눅 3:18~20).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마저도 순교를 당함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마 14:8). 우리는 이러한 세례 요한의 최후 증거가 바로 구약시대의 마감을 선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고 하였습니다(눅 7:28). 인류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인물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온 하나님의 사자로서 메시야의 전령사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자신에 대하여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으로 시작된 구약은 세례 요한 자신 한 사람으로 줄어든다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약이 끝나고 바야흐로 신약이 도래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구약 여러 시대, 여러 모양, 여러 사람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예언이 이제 세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구약의 마침표였습니다. 율법과 예언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구약종결의 선언입니다.
Ⅱ. 예수, 그는 흥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한 분’(one)에서 ‘많은 사람’(many)으로 불어나고 늘어나는 수적군세를 의미합니다. 예수 한 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사실을 가리킵니다(요 12:24). 그는 흥하여야 한다! 이 말씀 속에는 많은 지역적 확대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뿐만 아닌,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의 전 우주공간의 영역을 실감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 한 사람에서 열두 제자, 70인 제자, 120문도, 3,000명, 5,000명, 안디옥 교회, 아시아 일곱 교회, 더 나아가 세계 교회… 마침내 14만 4천인(계 7:4, 14:1, 2), 곧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나오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합친 온 이스라엘(롬 11:26)의 충만한 수가 담겨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약도래의 선포입니다. 새 시대 출현의 선언입니다. 그 분의 오심이 율법과 사망의 끝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감금과 종말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옛것이 물러가고 새것, 새세상이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도래한 새세상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시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영감의 증언 속에 숨어있는 신약 도래의 큰 내용을 음미해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 예수의 흥함이란 무엇을 의미함인가?
1. 성령 충만의 흥함을 담고 있는 증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33년 동안 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떠났습니다. 율법사와 제사장들의 곁을 떠나 예수에게로, 예수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실로 막을 수 없는 새 시대의 물결이었습니다. 마침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권력과 합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예수가 흥하는 동인(動因)이 되었습니다. 그가 땅에서 들림으로 많은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요 3:14, 8:12, 12:32).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사망에서 인류를 해방하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속죄성취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그의 죽으심이 우리 대속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사흘만의 부활이 우리 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이 그의 흥함의 기초가 되고,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 분이 다시 그의 약속대로 보혜사로 이 세상 우리 중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이었습니다(요 14:16, 23, 15: 26, 16:7~14, 행 2:1~3). 이것은 ‘이 세상’(this Age)에, ‘오는 세상’(Age to come)이 들어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의 흥함은 바로 그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는 세상’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임재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에게 이끌림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수효가 땅에 충만해져버렸습니다. 예수의 흥함이었습니다.
2. 말씀 충만의 흥왕을 담고 있는 증언입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폭풍은 그의 제자들의 가슴과 입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성령 설교였습니다. 그 결과는 3,000명, 5,000명으로 그 수가 많아지는 예수 백성의 흥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흥왕은 예루살렘 뿐 아니고 사마리아인과(행 8: ), 고넬료 가정(행 10: )과 안디옥(행 11:19~26) 여러 이방 지역으로 확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6:7, 12:24, 19:20). 마침내 성령은 사도들을 영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흥함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입니다. 계시의 성문화였습니다(딤후 3:16, 벧후 1:20~21).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 우리가 그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20:31). 그래서 예수의 흥함은 하나님의 말씀의 흥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기적인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3. 교회의 흥함으로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영감의 증언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흥함을 담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겠다! 이것은 예수님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확장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끝 날과 함께 새로 시작되는 신약은 사실상 종말의 영역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히 1:2) 종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시하신 종말의 위대한 표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선포였습니다(막 1:14~15).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화육강세하시고, 다시 오순절에 성령(보혜사)으로 오시고, 그 성령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친히 말씀하게 하고, 또 기록하게 하여(성경) 남기시는 끝 날의 표적이 바로 ‘하나님 나라’ 곧 ‘교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이 세상에서는 교회 운동을 표현하지마는 그것은 사실상 더 넓고, 높고, 영원한 하나님 자신의 구속사적 통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흥함은 교회의 흥함으로 우리 중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역사 가운데 남기신 불사조적 표적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역사의 알맹이입니다. 교회는 영생 얻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행 13:48).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망할 수 없고 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언제, 어디서, 무엇에든지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1세기에도 복음이고, 10세기에도 복음이고, 21세기에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복음이면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이고, 또 땅끝에서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이면 어른들에게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남자에게 복음이면 여자에게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이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어야 하고, 주인에게 복음이면 종에게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 큰 이유는,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히 13:8).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1세기는 세계화 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국제화 시대,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치권력의 중심 시대, 경제 중심 시대, 과학 중심 시대, 문화 중심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21세기도 예외 없이 예수 중심 시대입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중심이 B.C와 A.D이기 때문입니다. B.C와 A.D는 세계 역사의 연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역사가 계산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는 바로 교회 중심의 역사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흥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역사의 필연적 내용이고 목적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인 구원인의 정족수가 찼을 때 이 세상 역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마지막 심판이기 때문입니다(벧후 3:7~13). 이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지상의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가 됩니다. 흥하는 집, 흥하는 교회, 흥하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됩니다. - 아 멘 -
세례 요한의 강점을 이어 받아라
요한복음 3:22-36 / 홍문기 목사
요한복음 초반부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니고데모에게 맞춥니다. 그러다가 이제 서서히 스포트라이트를 세례 요한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 밤에 찾아왔고,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주님을 따를 일에 있어서도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론과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의 문약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본문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세례 요한은 주변 환경 때문에 그의 믿음과 자세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모습이요, 가장 본받을 만한 종의 자세가 바로 이 세례 요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을 향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요즈음 연륜도 있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연륜은 있는데, 깊이가 없다”, “믿는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신앙의 인격이 자라지 못했다”라고 말들 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이러한 부끄러운 비판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세례 요한의 믿음과 인격과 종의 자세를 배워 성숙한 믿음으로 변화 받는 충성스러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웃시야가 나옵니다. 16세에 왕이 되어서 5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왕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 옆에서 말씀을 듣고 양육 받으며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끊이지 않을 때는 형통함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웃시야가 마음에 교만이 넘쳐나서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었던 제사를 자기가 스스로 드리겠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말년에 문둥병으로 별궁에 거하다가 부끄러운 모습,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 마지막 인생을 마치는 것을 봅니다. 웃시야의 사례에서 겸손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남들의 평판에 대해 참을 수 있는 힘입니다. 남들이 비웃고 비평하는데도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초연함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당한 상황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25,26절을 보니까 세례 요한이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을 제자들로부터 받습니다. 아마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유대인과 더불어 결례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던 모양입니다. 이제 세레 요한의 그룹들도 한물갔고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도 옳지 않다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기를 얻으면서 세례 요한들의 제자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은 주어진 모든 위치를 지킬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은 사명감 때문에 사역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아내가 자꾸만 충동질하거나 자기 나져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사람은 쉽게 무너져버립니다. 자기 밑에 있던 사람들이 무어라고 할 때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주위에서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제일 먼저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를 공격하는데도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면 우리 주변을 움직입니다. 아내를 움직이고, 자녀들을 움직이고, 우리 제자들을 움직입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장 잘알 수 있는 것이 욥의 시련입니다. 욥이 믿음을 지키자 재산, 자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어라”. 이것이 욥의 부인이 말한 것입니다. 주변 환경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이렇게 충성스러운 자세를 갖게 하였습니까? 그 내용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받은 대로 충성하겠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3장 26절을 보면,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것이 요한의 자세였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대로만 일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머리가 되는 것과 일등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신 능력을 가지고 충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 차등 있게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분량만큼 성실히 일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불만만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 주인으로부터 게으른 종이라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달란트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받았습니다. 건강을 받았습니까? 건강을 받았으면 건강을 가지고 열심히 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재물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고 또 헌신하는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받은 바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더 많은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기만 하면 잘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달란트를 전부다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서 사용하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는 백성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만을 증거하겠다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28절을 보면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이것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이다. 그런데 왜 딴 짓을 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자세였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내가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스타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종 증거하는 자가 잘못된 보습으로 드러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자 자신을 증거해서 목표를 잃어 버리고 헤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자들도 많은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 이 갈급한 심령을 채울 수 있습니까?” 이런 말에 대한 해답을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증거해야 합니까?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퍼다가 갖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갈급함이 해갈될 것이고, 그들이 시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자세였습니다.
셋째로, 들러리의 기쁨에 만족하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들러리의 기쁨을 알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신랑이 아니다. 그러나 신랑 옆에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신랑 들러리의 기쁨이 있다.” 남의 들러리가 되어서 기뻐해 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 차례 경험해 보았습니다. 가끔 연합 집회 같은 곳을 참석하게 됩니다. 연합 집회 뒷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하면 제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여기 않아 있지’,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가봐’, ‘앞자리에 왜 나를 안 불러주지?’ 이런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들러리로서, 옆에 있는 사람으로서 남 잘되는 모습에 기뻐하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싸움입니다.
심지어 목회 현장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면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나라가 확장이 되는구나.’ 그런데 제가 잘 아는 목사가 부흥했다고 하면 싫어집니다. ‘그 목사가 별것도 아닌데, 왜 부흥을 하지? 이해할 수가 없네. 왜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쓸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요, 답답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싸워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강원도나 제주도 그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을 살려달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원수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것이 진짜 성도의 싸움입니다. 정말로 내 속에서의 싸움이 더 큰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잘되고, 남들이 부흥하고, 남들이 성공하는 모습에 대해,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원수보다 더 큰 원수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과 싸워 이기지 않으면 세례 요한처럼 충성스러운 길로 가는 하나님의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타가 한 분밖에 없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예수만 드러나고 사람은 숨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들러리로만 기억되기를 자처합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한마디의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져서 이 말씀이 역사하는 세례 요한 같은 은혜의 종이 모두 다 되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섬기면 존귀를 만난다
문기태 목사
기독교의 역사가운데 성자라고 불릴 만큼 큰 업적과 아울러 흠모할만한 신앙과 인격을 지녔던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질문했다고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럼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였답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이라고 했고 "모든 미덕의 바구니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지식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능력도, 돈도, 아름다움도, 권력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질 때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가리키며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겸손한 사람에게 임합니다. 벧전 5:5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겸손을 이루지 못할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일을 이룰 때 그 일을 이루는 능력뿐 아니라, 그 일을 이루는 과정 속에 우리의 태도도 매우 중요합니다. 즉, 어떤 일을 참 잘하면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데 우리의 태도가 겸손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받거나 외면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의 생애를 바라보며 우리가 요한에게 배워야 할 겸손은 어떤 성격일까요?
1.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예수를 드러낸 겸손입니다.
요한은 빈들에서 유년기로부터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자신을 삭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물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고 경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가지고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다양한 주제로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단 두 가지만을 외쳤습니다. '죄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분이 곧 오신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본래 광야는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광야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침례를 받습니다. 요한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습니다. 요한이 강력하게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선포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달게 받아들이고 회개를 상징하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삶이 경건했기에 대단한 권위와 능력이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분분왕 헤롯까지도 요한의 질책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차 요한이 오실 메시야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을 스승으로 받들고 따르는 제자들도 여럿 생겨났습니다. 온 나라가 요한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뿐이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며 나는 그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할 수 없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것이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다가오시자 요한은 큰 소리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분이 침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오셔서 이분위에 머물렀느니라. 나는 이분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려고 보냄을 받았다."하고 외쳤습니다.
어떤 이는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때는 요한이 누가 봐도 인정해주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까지 예수님은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일을 전혀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가르침을 시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던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만큼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 그의 눈앞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한 대단한 종교지도자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반해 예수님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전망조차 불확실해 보이는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별볼일 없어보이는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쏟아부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보냄받았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았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고, 자기의 미모를 드러내고,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자기의 믿음과 성취를 과시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를 드러내는데 집중하다보면 예수님을 높일 기회는 날라가 버립니다.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순간 예수님은 숨겨집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자기 과시에 도취되어 사명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요한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을 우러러 보고 칭찬하고 떠 받들어도 거기에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즉 사명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회있는대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고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많이 나타나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우며 살아가면 아무리 겸손한체하여도 겸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입술로 예수님을 많이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생활로 예수님을 많이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경건하게 살아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닙니다. 그것이 참 겸손입니다.
2. 자기 만족보다는 예수의 만족을 추구하는 겸손입니다.(29)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에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요한에게 집중되던 관심이 하루 아침에 예수님께로 옮겨간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지 않고 예수님께 침례를 받으러 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갑니다.
뿐만이 아니라 요한의 증거를 들은 제자중에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관심과 사랑이 옮겨갈 때 힘듭니다. 연예인들이 왜 마약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하늘을 찌를듯 하던 인기가 하루 아침에 곤두박질을 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그렇게 견디기 힘들 수 없다고 합니다. 가정마다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가 가장 힘들어합니다. 왜 그렇죠? 이제까지는 엄마와 아빠가 모두 자기에게 관심을 쏟고 사랑을 쏟아 부어주었는데 하루 아침에 관심과 사랑이 동생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에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요한도 그런 허전함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려고 온 사람이고 자신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해서 그렇게 되었어도 서운함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신부이고 예수님은 신랑입니다. 자신은 사명을 다하여 예수님께 백성들을 인도하였으니 만족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족을 자신의 감정이나 성취에서 찾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빗나가기 쉽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것은 본능입니다. 관심을 내 한 몸에 집중시키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감정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에 머물면 예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중에 내가 섭섭할 때, 서운할 때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손해가 아니다. 이로인해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든든하게 선다면 나는 기뻐해야 하지 않는가?' 여러분의 전도한 사람이 다른 교인과 더 친해진다고 질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섬기는 셀원이 다른 리더와 잘 지낸다고 섭섭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많이 기도해주고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것을 몰라주고 외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잘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기의 만족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만족보다 예수님의 만족을 앞세우며 살때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겸손한 삶의 자세입니다.
3. 자기의 성공보다 예수님의 흥함을 바라는 겸손입니다.(30)
요한은 이에서 더 나아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점점 더 몰려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다 몰려가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절히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을 기대하십니까? 실패를 기대하십니까? 당연히 성공이지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기를 소망하지요? 우리에게 그런 희망이 있으니까 지금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병들었어도 기도하며 질병과 싸우는 것 아닙니까? 고난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이는 점점 흥하기를 기원하고 자신은 점점 더 쇠하기를 소망하는 이가 있습니다. 누구죠? 예, 요한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요한의 인생의 특징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수많은 세월 광야에서 경건한 능력을 쌓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였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에 다 쏟아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따르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다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 그것도 한 사람을 위해 쏟아 붓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그렇게 사는 분들이 여러분중에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휘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자녀들을 위해 전인생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자녀를 위해, 인생을 사는 목적도 자녀의 성공을 위해, 심지어는 자녀교육을 위해서 부부간에도 헤어져사는 기러기 가족들도 많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그런 자세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요한이 단 한 분 예수님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처럼 교회안에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쏟아 붓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가치 없어 보이고 나보다 못나 보이고 나보다 늦게 풀발했으며 나보다 갖추고 있는 것들이 형편없어서 전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바로 여러분이 섬겨야 할 작은 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쏟아부을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드리십시오. 그에게 사랑을 쏟아 부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겸손히 내어 드리십시오.
요한의 인생이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평가될까요? 그가 얼마나 많은 이에게 침례를 베풀었는가에 의해 상이 주어질까요? 그가 얼마나 설교를 여러번 했느냐?로 평가될까요? 오직 한 가지 기준에 의해 평가될 것입니다. 그가 보냄받은 목적대로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얼마나 충성되게 살았느나?에 의해 평가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령받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 사람을 섬기고 돌보기 위해 3년씩만 시간을 투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30년 신앙생활을 한다면 10명의 영혼을 구원하여 양육하고 우리와 같은 일군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60년 신앙생활을 한다면 20명을 살리고 키우고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처럼 한 사람에 집중하여 온 힘을 다해 섬긴다면 세상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인생의 의미를 주려고 맡겨 주신 사람을 요한이 예수님을 섬기듯이 섬긴다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늦게 믿은 사람들이 기도하면 응답이 쏟아지고, 전도하면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지고, 성령충만하여 천국을 날마다 경험하며 달려가는 그날을 꿈꾸며 겸손히 섬기는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 자는 흥하리라
요 3:27-30 / 남서호 목사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세상에 던져진 돌처럼 허무한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일이 나를 아시고 그리고 불러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세워주셨습니다. 나를 아시고 불러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소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며 철저히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알아야 자신의 존재, 직업의 선택, 결혼의 이유, 직분의 책임, 운명의 행복까지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명료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이 어수선 하고 복잡하게 살며 시온으로 축복으로 뻗은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도 소명의 문제를 풀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모든 것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소명의 확신이 철저하면 10년, 20년, 30년, 40년이 지나가도 그대로 한결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평양이든, 와싱턴이든, 런던이든, 동경에 있어도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불황이고.... 잘되고 쉽고 호황이든 변함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소명에 충실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둘째 주로 이 교회 부임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서울 변두리에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한 소명 즉 이 교회를 통하여 이루실 일이 있었고 그것을 나에게 알게 하셨고 나는 그 일에 최선을 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유수의 교회에서 청빙이 왔습니다. 조금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소명의식에 자신을 바로 세워 나가다 보니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명이 확실한 사람이 되면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자신을 바쳐야할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항상 소명에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달려오셨습니까?
자신이 하고 싶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 때문에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누구든지 어느 날 자신 안에서 발견되어 그 소명대로 살도록 성령님이 역사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길을 가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존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이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구체적 소명을 주시며, 그 소명이 우리에게 자신이 행할 의미 있는 일과 세상을 섬길 방식과 신적 목표의식을 가져다준다.’ 고 했습니다.
이렇게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첫 번째라면, 소명은 두 번째에 해당되는 예수님 다음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발견은 믿음의 원인이라면, 소명의 발견은 믿음의 목적입니다.
구원은 시작이며 출발입니다. 구원은 끝이 아니며 거듭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 이후 반드시 가야할 길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명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철저하게 인식해야 될 핵심입니다.
왜 소명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1. 소명은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해 줍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7-28절에서 요한은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것을 전하는 사람, 예수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체에 대해 말했습니다.
요한과 같은 자기 인식,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실한 사람은 자신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결코 무너지는 환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요한의 사역초기 모습은 엄청났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군중들과 환호성 앞에 얼마든지 그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할 수 있고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세력들인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보다 자신이 추종을 받을 정도였기에 교만과 야심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회개의 외침이 능력으로 나타나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앞에 엎드릴 정도이면 메시아라고 물을 때 고개 한번 끄덕이면 굉장한 세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능력의 그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내면, 요한의 중심은 이미 잘 정돈되었기 때문에 그릇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인식이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별력이 있으십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바울은 마음의 눈을 밝혀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소명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중심으로 알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교회를 잘 나오고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도 자신을 잃어버리든지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소명의 확실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작은 일에도 심각한 후유증이 생깁니다.
싸울 것을 위해 싸우지 않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싸웁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전에는’ 그러나 ‘이제는’
바울은 과거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볼 수 있었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전에는 소명을 모르는 자로 이제는 소명에 충실한 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한 복판에는 소명의식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말씀도 성령도 믿음도 잃게 됩니다. 자신을 찾으셔야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인식, 자신의 존재, 자신의 정체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분별된 사람으로 분별되게 살아야합니다.
소명은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2. 소명은 자신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세례 요한을 사복음서는 소개하면서 핵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광야’입니다(마3:1,막1:3,요1:23).
누가복음 3:1-2절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등장할 때는 이미 세상은 권력과 밀접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은 궁정이 아니었고 빈들, 즉 광야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로서 경건하게 자란 그는 예수님을 전해야할 사람으로 광야로 보냄을 받아 거기서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광야이어야 합니까?
화려하고 웅장하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곳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당시 황제나 유대인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케 하지 않고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도록 하지 않고 광야의 홀로 살고 있는 요한에게 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요한의 등장 A.D. 26년경)은 로마 제국의 황제(디베료 가이사 15년), 유대 총독(본디오 빌라도), 팔레스틴 분봉왕(헤롯(갈릴리), 빌립(이두래, 드라고닛), 루사니아(아빌레네)), 대제사장(안나스, 가야바)이 정치하며 지역관할과 감독을 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이곳 광야에서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마3:4)을 먹으며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도시의 분주하고 바쁘고 시끄럽고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사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 것입니다.
왜 도시와 광야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습니까?
황제와 왕들과 총독의 화려한 정치 도시(욕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시장)와 고독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먼 하늘과 달빛이 비춰지는 광야를 무슨 이유로 대비시켜놓은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은 교만의 장소인 도시를 떠나 겸손의 장소인 광야에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소명의 사람은 광야를 즐거워하고 광야를 찾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교회 타락하자 소명이 있는 사람들은 사막으로 산 속으로 많이 떠났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는 고통, 고난, 고독의 장소이기에 자연히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버티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광야에 있으면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배고픔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있으면 무엇을 의지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기에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도시, 교만의 도시를 좋아합니다. 도시에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유로운 도시 속에서 마음껏 인간이 원하는 만족을 얻기 위해 자신을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도시의 화려한 불빛의 위력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뿐 광야의 달빛에 비하면 초라할 뿐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도시는 사람들이 보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먼저 광야로 가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스테이크나 햄버거, 스타벅스의 아메리카 커피향, 숯불갈비 대신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에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하나님을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 사람은 환경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을 먼저 선택합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편리함, 교육하기 좋은 곳, 문화혜택, 직장, 친구들, 땅값이 오를 곳을 찾기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준비하는 곳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내가 입은 옷이, 내가 먹는 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한 것들입니까?
아니면 세상 황제들과 정치하고 권력을 쫓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짓을 따라가는 불쌍한 사람입니까?
소명이 분명한 것을 아는 방법은 무엇을 듣고 누구를 만나며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능력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황제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거저 듣고 소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라도 어려움이 오면 스스로 한계를 느낍니다. 화려한 도시의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아픔도 문제도 없이 행복하게 자랑하며 삽니까?
육체는 자랑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 소명의 사람은 약한 것의 기준이 일반 사람과 다릅니다. 아픔의 기준도 다릅니다. 싸움의 기준도 다릅니다.
그래서 소명은 자신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3. 소명은 자신의 목표를 보게 합니다.
본문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요한의 최상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의 선지자로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존재로서 목적의식도 분명했지만 자기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확고했습니다.
요한은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29절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신랑이 신부를 차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신랑의 친구가 된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질문자들에게 신랑의 친구가 된 것이 기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신랑의 친구란 신랑의 들러리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된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좋고 기쁘지 들러리가 되면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들러리가 된 기쁨에 충만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예수님께 집중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신과 관련된 것을 놓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것 중에 제자들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웠던 것은 기도나 전도나 병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강조한 것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소명의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가 주목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헌신은 일을 위한 헌신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헌신이 최고의 헌신입니다. 일을 위한 헌신을 하다가 자기 자신이 헌신되지 못해 일도 자신도 망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자신이 주목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의 올무, 자기교만, 자기 고집에 잡혀 더 이상 다른 것을 볼 수 없는 편집증에 걸립니다.
요한은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흥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소명의 사람은 예수님을 높이고 크게 여기는 것이고 자신은 낮추고 작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중심주의와 인본주의, 휴머니즘에 사로잡혀 소명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길을 가기보다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 달성하고자 하는 자신의 업적과 계획에 하나님과 교회와 믿음을 활용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소명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원형으로 보여준 롤모델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로 먼저 이 세상에 보냄을 받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이 아니라 당연히 그가 될 수밖에 없음을 충분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에 분명한 사람으로, 여유가 있지만 냉철한 사람, 부드럽지만 예리한 사람, 물러서는 모습 같지만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서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를 흥하게 하고 자신을 쇠하게 하는 믿음의 영웅입니다.
예수님의 들러리
이규왕 목사
인간의 삶을 드라마로 비유한다면 우리는 평생을 통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는 연기자들입니다.
세상 드라마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미리 대본을 쓰고 거기에 맞추어 똑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여 리허설을 하고 엔지를 여러 번 내면서 그 중에서 좋은 장면만을 골라서 편집한 것을 관객이 시청하는 것입니다.
인생 드라마에는 리허설과 같은 연습이 없으며, 엔지는 마치 교통 사고처럼 예외가 없이 곧 바로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인생 드라마의 주연이 되기를 원하지 조연이나 단역을 자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역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그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 보면 누구보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또한 얼마든지 주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드라마에서 주연이 아니라 영원한 조연을 자청하고 만족해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역배우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지라도 원망이나 불평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남을 시기하기보다는 낫게 여기며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세례 요한에게서 배우고 본받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며 실천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세례 요한의 제자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지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겸손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같이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선생님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만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들의 선생님인 세례 요한의 전문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사역을 기록한 공관복음 어디에도 세례 요한 외에 예수님이나 다른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이 아직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일행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주는 것을 예수님이 세례를 주시더라고 오해하고 과장한 잘못된 보고로 예수님은 생전에 한 사람에게도 세례를 베푸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요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사실을 전해 듣고서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분노하면서 그 문제를 여론화하여 논쟁을 벌렸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날로 인기가 높아져만 가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까지 주신다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허탈감과 충격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세례 요한보다 그의 제자들이 더 민감하게 받아드리는 이유는 정말 자기들이 추종하는 세례 요한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세례 요한을 따르는 자신들의 이해 관계 때문이었을까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행과 세례 요한의 일행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한 팀이요, 동역자요, 협력자가 아닌 둘 중에 하나는 물러나야만 하는 경쟁자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유다 땅에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처럼 세례를 준다는 소식을 듣고서 분노하여 세례 요한에게 달려와서 그 소문을 보고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간에는 경쟁의식 때문에 보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세례를 두고 충분히 그렇게 분열하고 갈등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자연이 두 제자들 사이에 논쟁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는 첫 단추부터 잘못되는 것이며 세상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분열된 인류를 화합시키는 참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예수님 당시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분열하여 대립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로 그들은 다 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네 조각으로 분파를 만들어 갈등하던 일입니다.
(고전 1: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원수 사랑을 말하지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사회법정 고소를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떻게 처신을 해야만 할까요?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추종하는 세력을 선동하고 자극하여 정적을 모함하고, 사소한 문제를 확대시켜 그것을 빌미로 정적을 매도하고 죽여야만 자기가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적인 영웅주의가 만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들이 비단 정치계에만 있는 일이며,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만이 하는 일입니까? 이제는 성과 속을 구분하기 어렵고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상대방만 죽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도 죽고 마는 공멸의 고속도로일 뿐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나 홀로 사는 길은 없으며, 남을 죽이고 나와 자손이 잘되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잘되는 길은 남을 살리는 일이며 남을 세우는 일이며 남과 더불어 협력하며 사는 길인 것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2. 세례 요한의 겸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큰 피해를 당할 장본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아니라 세례 요한 자신입니다.
그러한 경우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사실 여부를 확인도 하기 전에 입에 거품을 품고 과거사를 들춰가면서 그 사람을 험담하기 시작하며 내가 그냥 내버려두나 보자고 사생결단의 복수를 단언합니다.
그 후로는 그 사람과 원수가 되어 사사건건 반대 아닌 반대를 하며 상대방을 괴롭히고 손해를 주고 망하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과연 그것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만이 취하는 행동 양식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도 큰 차이가 없는 일반적인 행동 양식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신다면 이제 세례 요한은 아무런 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구멍가계 앞에 대형 할인 마트점이 세워진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것을 자신의 손익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석하려고 하였습니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지금까지 자신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게 된 배경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시는 일도 하나님의 허락으로만이 가능한 일이라면 그것을 사람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차별성을 앞세워 그의 제자들이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높이거나 예수님과 동등하게 하려는 시도에 대해 제동을 걸었습니다.
(요 3: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이는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증거자로서 예수님은 영원한 우승자인 반면에 자신은 그 메시아를 섬기는 자로 영원한 이등으로 제자들도 그 사실을 증거 하여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그가 혹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몰려드는 인기 절정의 삶을 살고 있었을 때인 반면, 정반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아니하였을 때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는 것만큼 세례 요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지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세례 요한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세례를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고 예수님을 비하시키는 대신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더 높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침에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기 위해서는 저녁에 해가 져야만 하는 것처럼 자신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서 저녁 해와 같이 저물어 가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침해처럼 힘차게 돋아 만천하를 비취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에 대해 어떤 주석가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정말 입으로는 쉽지만 행동으로는 어렵고 아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말입니다.
세례 요한 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는 우주만이 아니라 인간의 대소사까지 세밀하게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내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고 내게 손해가 되는 것처럼 생각될 때 그것을 가지고 이해 타산을 따지고 돈 몇 푼과 자존심 때문에 친구나 교우를 원수로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세례 요한처럼 그 뜻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그것이 지금은 내게 손해 같으나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내게 유익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높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역행할 수 없으며 다만 순종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설령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그것이 지금 당장은 내게 불이익과 손해처럼 보이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이 존귀하게 되고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을 더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예수님이 승리하시는 것이며, 예수님의 승리가 바로 나의 승리가 되는 것이며 나의 진정한 영광은 내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만이 높아지시는 것임을 믿고 세례 요한처럼 사는 믿는 것은 맹신이 아니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3. 세례 요한의 기쁨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무슨 중대 뉴스처럼 여기고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제자들처럼 시기하거나 분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그렇게 마음의 그릇이 큰 사람일까요? 그것은 세례 요한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줌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을 월권하고 있다고 흥분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찾아와 그 사실을 고할 때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1) 위로부터 오시는 이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위로부터 오시는 이 곧 만물 위에 계신 분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실 정도 위인 중에 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러나 세례 요한은 교만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늘에서부터 오시고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므로 제자들의 마음 속에 의구심을 씻어 주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나니
너, 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말만 진리이고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옳은 반면에 다른 사람의 말은 비 진리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문제가 많은 것처럼 은근히 남을 격하시키려고 하는 못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세상에 그 무엇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두터운 콩크리트 벽보다 더 강퍅한 죄인들의 굳은 마음을 부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이 자기를 예수님보다 더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아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분의 사역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하신 힘으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사역임을 증거함으로 자신과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차별성을 그의 제자들에게 증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요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우리가 요한 복음을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의제가 되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영생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누구를 믿고 따라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더 이상 세례 요한을 따를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례 요한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위험부담이 그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의 제자들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정직하게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일에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처럼 대접을 받게 될 때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코 잊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명자로 하나님이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메시아처럼 알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철새처럼 예수님께로 몰려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시기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랑과 신부를 중매시키는 들러리처럼 자신의 사명이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중매시키는 일이 자기의 사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이며, 오늘 우리가 그 때문에 우리가 낮아지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힐지라도 마지막 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과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유명하게 되고 부자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물론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한 통속이 되어 줄을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가 좋은 사람을 찾고 만나는 것을 행복과 기쁨을 알고 살아가지만 신랑과 신부를 중매하여 결혼까지 성사시켜 예식장에 입장시키는 들러리는 아무리 자신이 못생겨도 신랑 신부가 아름다워도 시기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잘 살아도 배가 아프지 않고 그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뻐하고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날 전도자의 기쁨이며, 양육자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고 신앙이 성숙되어 교회 안에서 인정을 받아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때 그 사람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전도하고 양육한 영적 들러리인 것입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 하나님을 불신앙하며 불행한 삶을 살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의 삶은 백년도 채 되지 못하지만 사후의 삶은 영원합니다.
세계 곳곳에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들을 예수님께 중매시켜 구원을 받게 하는 들러리가 되어 그리스도와 중매시켜야 할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무슨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세례 요한처럼 내가 낮아지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날 지라도 그로 인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이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지는 것을 가장 큰 기쁨과 보람으로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예수님의 들러리가 되기도 다짐하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