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목) 이사야 32:1-8 찬송 499장
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6.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7.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8.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개역 개정)
- 한 의로운 왕의 통치 예언 -
이사야서 문맥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의 내용 전개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는 각 문맥의 흐름이 구분되는 곳의 결론 부분 즈음에서는 반드시
메시야의 공의의 통치, 평화가 넘치는 복락의 메시야 왕국
도래에 대한 예언을 주고 있다.(2:2-4; 4:2-6; 9:1-7; 11:1-9; 27:2-6)
그렇게 함으로써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함하여
현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의와 모순이 사라지고
장차 전능자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로 말미암는 평화의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한
모든 세대의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을 더욱 앙양(昂揚)시켜 준다.
오늘 말씀의 예언도 제 28-31장에서 암시된 바 의롭지 못하고 연약한
인간 통치자가 남유다 왕국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징계에 이르게 한 것과는 완전 대조적으로,
오직 공의의 통치를 행할 ‘한 의로운 왕’(1절) 곧 메시야의 도래와
그에 의해 이룩될 복지 강토(福祉疆土)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한 의로운 왕의 통치의 양면성이 잘 나타난다.
그것은 그 의로운 왕을 보고자 하고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가 광풍과 폭우를 피하는 피난처가 되시며(1-4절),
마음으로 여호와를 거스리는 어리석고 궤휼한 자에게는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심판자가 될 것(5-8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 죄성을 지닌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항상 여호와를 향하여 있고 그 분을 의지하느냐 않느냐에 있다.
이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여부가 판가름 난다는 것이
이사야가 본문에서 교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가?
우리의 눈과 마음이 항상 어디로 향하여 있는지 돌아보고
지금 곧 그분께로 방향지워져 있어야 한다.(시121:1; 렘3:23)
8절)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6-8절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온다.
한 부류는 어리석은 자와 악한 자이다.
이들은 비록 두 그룹으로 표현되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동일한 부류이다.
즉 모두 악한 자들이다.
성경에서 어리석은 자란 곧 악한 자를 말하고 악한 자는 곧 어리석은 자를 말한다.
다른 한 부류는 존귀한 자이다.
존귀하다는 것은 지혜롭고 겸손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삶의 양태를 보인다고 말씀한다.
즉 어리석은 자, 곧 악한 자는 하는 일마다 악하고
존귀한 자는 하는 일마다 고상하다는 것이다.
7절에서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
이는 악한 자는 그 본질이 악하기 때문에
결국 하는 일마다 악한 짓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역(逆)으로 존귀한 자는 그 본질이 고상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고상한 일만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악한 자’는 궁극적으로 그 심령이 죄로 오염되어 있는
자연인(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인 상태의 인간은 그 죄악된 본성으로 인하여
하는 일마다 모두 악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과 상관없이 죄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상과 관련하여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존귀한 자’는 한 의로운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로 말미암아
그 심령이 새롭게 변화된 자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자 창조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심령에 내주하셔서 그 죄악된 본성을 제거하시고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각하는 일과 하는 일마다 다 고상하게 가꾸어진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그 심령에 받아 그 심령을 새롭게 한 자,
곧 거듭난 자만이 고상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 자타가 공인할 만큼 고상한 자라 할 수 있었던
바리새인 출신의 관원 니고데모를 향하여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요3:5)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중생(重生)이라고 하는데
본래 악하였던 심령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지극히 높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
곧 지극히 고상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지난 날의 죄악된 본성을 버리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될 때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진정으로 존귀한 자이며 고결한 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높이는 일, 자기를 고결하게 가꾸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좀 더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자 몸부림치며
좀 더 높은 사람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노력하며
좀 더 멋진 옷, 좀 더 아름다운 옷을 몸에 걸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의 본래적 신분,
곧 죄로 죽을 운명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자,
성령과 복된 교제를 나누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가
진정으로 고결하며 아름답고 영화로운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모가 아닌 내면, 껍데기가 아닌 본질을 변화시키시고
존귀하게 하시며 아름답게 가꾸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곧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받기에 힘써야 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