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5
2월25일[연중 제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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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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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jUIDrs2U3Q
[군종교구 김영인 요한사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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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웅적인 순교의 비결!>
돈보스코는 꿈의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큼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꿈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그는 100년도 훨씬 전에 자신의 제자들인 살레시안들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돈보스코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약간 맛이 간 사람’ ‘지나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20%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살레시오회는 160여 개국에 진출해서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지속해나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두 명의 살레시오 회원이 금으로 된 큰 성 잔을 들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안에는 피가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황하가 흐르는 중국이었습니다.
돈보스코가 꾸었던 그 꿈은 50여년 뒤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 당시 중국에서 활발히 사목활동 중이던 베르실리아 주교, 카라바리오 신부, 두 살레시안이 공소 사목 방문 중에 악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으며, 시성되셨습니다.
베르실리아 성인 같은 경우 수도회의 꽃인 수련자들을 교육시키는 수련장 신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제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큰 스승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그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슬슬 뒤로 물러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인 루아 신부님께서 당시 베르실리아 신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그의 출중한 자질과 성덕을 파악하고 뭔가 부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 부탁이 뭔가 했더니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마카오에, 홍콩에, 중국 본토에 수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선교단을 좀 이끌고 가주셨으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교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중국이라...거의 지구 반대쪽 나라인데...경제, 정치, 종교, 교육 등등 모든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던데... 가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된다던데...사랑스러운 수련자들은 어떡하고...사랑하는 내 가족들은 또 어떡하지...
그러나 베르실리아 신부는 즉시 생각을 바꿉니다.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즉시 접습니다. 환하고 기쁜 얼굴로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루아 총장님, 그럼 제가 언제 떠나면 될까요?”
중국에 도착한 베르실리아, 카라바리오 두 분의 선교사는 홍콩,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 깊숙이 들어가 영웅적인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교리교사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려다가 안타깝게도 화적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십니다.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현실을 기꺼이 견뎌낸 배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신앙, 그것이 순교의 비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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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QnL2PlY5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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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되는 법: 마중물의 법칙을 어기면 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갈라 6,7)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세상 모든 일에는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콩을 거두려면 손에 쥔 콩을 땅에 심어야 하고, 재물을 얻으려면 먼저 투자와 희생이 따르는 법이죠.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심지 않고, 단번에 열매만 얻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오늘은 이를 무시하고 파멸에 빠진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악마가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무한한 쾌락, 지식, 권력’을 얻고자 악마(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합니다.
그는 정당한 씨앗이나 희생 없이 손쉽게 열매를 따려 했습니다. 예컨대, 육체적 욕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레첸(마르가레테)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헬레나를 차지하고 아들까지 가지려 들었습니다. 게다가 재물마저도 악령의 힘으로 한 번에 얻으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죠. 그 결과 자기 방종과 탐욕에 빠져 주변인들을 파멸로 몰고, 스스로도 영혼을 악마에게 넘기는 처지에 이릅니다.
사실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을 뿌리는’ 기회가 늘 있었습니다. 그레첸을 진정으로 책임지려 하거나, 헬레나를 갈망하기 전에 헛된 욕심을 비우고 청빈과 성실을 지켰다면, 탐욕 대신 다른 결실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중물을 붓지 않고, 단지 결과만 얻으려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듯, “아무도 심지 않고는 거둘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정의 시스템을 어긴 것이죠. 그것이 곧 ‘사탄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악령과 결탁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씨앗은 지키고, 남의 결실만 취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오늘 복음(마르 9,30-37)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첫째가 될지 다투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스스로 가장 낮은 길을 택하십니다.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희생 없이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모든 이의 종이 되라”(마르 9,35 참조)며 다시금 일깨우십니다.
반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아슬란이 배신한 아이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 떠안고 돌탁자에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나니아 세계를 구원하고 “진정한 왕”이 됩니다. 자발적인 희생을 ‘마중물’로 써서, 더 큰 자유와 존경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실제 역사에서도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에 맞서 27년간 감옥에 갇힘으로써 물리적 자유를 내놓았고, 그 덕에 백인·흑인 모두의 신뢰를 얻어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던 희생이, 오히려 더 큰 평화와 존중을 낳은 셈입니다.
결국, 콩을 심지 않고 콩을 얻으려 하면 그것이 곧 ‘악마가 되는 법’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성취를 악령과의 계약이나 부정한 방식으로 단숨에 얻으려 하면, 파우스트처럼 죄책감과 파멸만 손에 쥐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마중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어 인류를 구하신 그분의 길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 시스템을 제대로 지킨 사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영광이나 열매를 바란다면 먼저 그에 합당한 ‘뿌림’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씨 뿌린 이에게 열매를 배로 더해 주신다”(마르 10,30 참조)는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내 자유, 내 시간, 내 자리를 과감히 마중물로써 내놓는 사람이, 결국엔 더 큰 수확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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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6년 전에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며, 아이의 할머니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와 찍었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이도, 저도 해 맑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가장 좋은 추천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년이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16년 전의 사진을 보며, 배우 ‘손지창’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배우 ‘더스틴 호프만’ 닮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의 얼굴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저의 표정이 웃는 모습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 때문에 유명해진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저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원본을 보았습니다. 표정으로 유명해진 그림도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입니다. 뭉크의 절규는 얼굴이라기보다는 표정에 가깝습니다. 거울 보고 활짝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얼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표정을 통해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얼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갈망을 뜻합니다. 시편 27장 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으니, 주님, 당신 얼굴을 찾나이다."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대면하며 대화했고, 그 만남 후 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얼굴은 더 평화롭고 기쁨에 차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얼굴과 표정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신앙인의 얼굴이 어두우면 다른 이들이 하느님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고,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슬픔을 겪으며 병고를 아는 이였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굶주린 이의 얼굴, 병든 이의 얼굴, 외로운 이의 얼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는 늘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정과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불친절한 얼굴이 아니라, 희망과 자비가 담긴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남겨 주셨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빵을 떼실 때야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분과 깊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을 증언하는 도구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빛나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이웃을 향해 따뜻한 얼굴과 사랑의 표정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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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수난과 죽음 부분에만 머물러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진실을 알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아는 것에만 머물러 있고 싶은 유혹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에서 지금 누리시는 존경과 권위에만 머물러 그분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세에서 지금 그분을 따르면서 큰 사람이 되려 하고 작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나무가 높이 자라려면 먼저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야겠지요. 낮은 곳에서 시작하지 않고는 높이 오를 수 없습니다. 그처럼 제자 직분은 낮아지고 작아지면서 성장하는 신비입니다. 일등이 되려고 모든 것을 거는 세상, 일등만 환호하는 세상에서 꼴찌가 되라는, 어린이와 같은 작은 이를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진정한 첫째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높고 훌륭한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면 거부감이 덜하겠지만 자신보다 작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죄인들의 종이 되라고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셨고(마태 25,40 참조) 죄인인 우리의 종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을 섬기시려고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처럼 “모든 이”(마르 9,35)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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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툰다.(34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되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초대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으로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 모습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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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0-37)
1) 35절-37절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높아지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충실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 바로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면, 하늘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역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묻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라. 그리고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낮춤’과 ‘섬김’은 바로 ‘사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이 말씀에 대해서 “그냥 사랑하면 안 되나? 꼭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만 사랑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랑’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사랑하는 이를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는 내려가지 않고 상대방에게 올라오라는 요구만 한다면, 또 자기는 상대방을 섬기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섬기라는 요구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고, 그 경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빈말’을 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낮추어서 내려가 주고 섬기는 사랑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0-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신 일이고, 우리를 섬기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합시다.”라는 뜻입니다.
“꼭 그렇게 낮춤과 섬김과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 그냥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진심으로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또는, “나를 섬긴다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섬겨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5)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낮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낮추어야 하고, 섬긴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만일에 자신이 낮춤과 섬김을 실천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곧바로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낮춘다는 것, 섬긴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려야 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루카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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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사람일 수만 있다면>
마르코 9,30-37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가장 큰 사람)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 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만 사람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4)
다만
사람일 수만 있다면
높든 낮든
뭐 어떻습니까
낮은 사람
올려야
참으로
높은 사람이요
높은 사람
받쳐야
참으로
낮은 사람이니까요
다만
사람일 수만 있다면
크든 작든
뭐 어떻습니까
작은 사람
품어야
참으로
큰 사람이요
큰 사람
돋우어야
참으로
작은 사람이니까요
다만
사람일 수만 있다면
앞서든 뒤서든
뭐 어떻습니까
뒤선 사람
이끌어야
참으로
앞선 사람이요
앞선 사람
밀어줘야
참으로
뒤선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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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철현 가브리엘 신부님]
모든 것이 뚜렷하고 명백한 예수님에 비해 제자들은 인간적인 욕심과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툽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전혀 싸울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에 드러나는 지위의 고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내가 더 큰 사람일 거야.’라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안일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명백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하는 ‘사랑’을 실천하기보다 서로 자기가 옳다면서 ‘다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것이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안일한 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꼴찌가 되라고 합니다. 사실 꼴찌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의 일에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버릴 때 가능합니다. 눈에 ‘나’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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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아름다운 집회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우리 가운데 누가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오십 배 백 배로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삶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집회서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여기서 ‘시련’은 우리에게 좋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가장 값진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면서 집회서는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며, 금이 불로 단련되듯이 주님께 맞갖은 이들도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그때마다 “그분을 믿어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하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그리고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관련하여 좀 더 명확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시련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혼란이나 망설임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주님을 따르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반부 이후에는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이 당신 곁을 떠나 있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련 가운데서도 당신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길은 신앙의 참기쁨을 얻는 길이지만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올바로 걷고 있다는 분명한 표징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에도 언제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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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 신자 분들은 혹시 어린 시절 하느님께 어떠한 기도를 청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순간순간 많은 기도를 했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셨나요? 저는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시곤 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오락실에 가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서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툴툴 거리면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지요. ‘하느님, 오락실이 정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라고.
순간 머릿 속에서 집안 곳곳에 숨겨져 있던 동전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침대 밑에 들어갔던 오백 원짜리, 장롱 속에 굴러들어갔던 백 원짜리 등등, 참으로 많은 돈들이 제 주위에 흩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열심히 찾았고, 장롱 속에 30 센치 자를 집어넣고 열심히 휘저어서 겨우 동전을 찾아서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시자, 경악을 금치 못하고, 혼을 내주셨습니다. 침대 밑의 먼지와 장롱 밑의 먼지를 다 끄집어내서 온 집안에 먼지가 굴러다닌다고~
신나게 어머님께 꾸중을 들었고, 하느님께 있는 대로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실 거면 곱게 들어주시지, 결국 돈을 찾긴 했지만,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어머님께 배부르도록 욕을 먹게 하셨으니, 당신은 성격이 참 안좋다고~
훗날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그것은 우리의 청원이 때때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해주시려고 하느님이 살짝 비틀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 그것은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잡아주실 때,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도 두렵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뒤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되지요. ‘우리 아들 자전거 혼자서도 잘 타는데’라고.
그 순간 저는 두려움과 걱정스러움 속에 넘어지고 말았지요. 하지만, 한번 두 번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지요. 어느 순간 아버지의 도움 없이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그러나 교만은 나를 위험으로 이끌 듯, 가끔은 건방진 자세로 자전거를 타다가 다치곤 하면, 그제서야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신자여러분, 우리는 마음 속으로 어떠한 청원을 품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신자 분들의 청원이 이뤄졌습니까? 아니면 아직까지도 과정입니까? 행여 어려움이 있다고 하신다면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고, 또다시 일어서려는 마음 잊지 않길 희망해봅니다.
몇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잘 탈 수 있는 자전거처럼, 우리의 기도도 끊임없이 올바르게 하느님의 대전에 닿을 수 있도록 올곧게 기도하는 마음 잊지 않고 잃지 않길 희망합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같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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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생활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젊은 교사들조차 제가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치우면 먼저 달려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고 왜 신부님이 이런 일을 하게 놔두었냐며 서로 핀잔을 줍니다.
그러다보니 사제에게 있어서 자아 성찰은 언제나 필수적인 일입니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본질은 잊고 타성에 젖기 쉽기 때문입니다.
타성에 젖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은 곧 나의 편의를 찾고 나의 즐거움을 찾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고자하는 감정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두 번째 예고를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와중에도 누가 더 높은가 하는 우위 다툼에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불리게 되었는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난에 대한 예언 앞에서 그 의미를 깨닫기는 커녕 묻기조차도 두려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실 따지고 보면 제자들과 같은 출신 성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여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자 모였으며 주님의 모범을 따르고자 저마다 약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종 인간적인 욕심과 현실 앞에서 불리움의 의미를 망각하기도 하고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신앙인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없고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한 봉사 직무에 초대된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며 이것이 결국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봅시다. 우리는 본당 안에서 혹은 이 사회 안에서 지나치게 나 자신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지위와 우위를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기도는 온통 나를 위한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 그 외의 이웃을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지위는 우위 다툼과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봉사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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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아니 가장 크신 하느님을 내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 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커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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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회사도 잘될 때만 있지 않고 잘 안되어서 큰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물론 계속 잘되어서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는 때는 없습니다. 분명히 나쁜 일도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낙하가 너무 가파르지 않게 잘 조절하는 사람이 훌륭한 경영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잘 안된다고 모든 책임을 물어 경영자를 퇴출하면, 회사는 더 큰 위기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만 생기지도 않지만 반대로 나쁜 일만 생기지도 않습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그래도 인생의 그래프가 우상향하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강의 시간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선택이 됩니다. ‘나같이 무능한 사람은 필요 없어!’라면서 스스로 퇴출해도 안 됩니다. 나의 인생은 ‘나’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늘 깨어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잘될 때는 교만을 멀리하고 더 큰 겸손을 갖춰야 하고, 잘 안될 때는 되돌아보며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생각하면 주님의 ‘늘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이 떠올려집니다. 삶과 주님 말씀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보다 바른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특히 희망의 주님이시기에 절망과 포기의 순간에서도 커다란 힘을 주님에게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처럼 영광이라는 상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하강도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예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이에 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이 길에 서로 논쟁합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보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관점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기에 깨어 있어야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에 맞게 지금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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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9,35)
첫째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수많은 갈채 소리에 아직도 우리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꼴찌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꼴찌라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꼴찌가 되어서 받았던 상처가 너무나 아프기 때문입니다. 꼴찌 자체보다 그 아픔을 다시 겪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두렵기에 우리는 꼴찌보다 첫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첫째가 되면 함께 기뻐하지만 꼴찌가 되면 혼자 슬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홀로 슬퍼해야 하는 무대 뒤의 서러움을 꼴찌 홀로 감당하기가 너무 버겁기 때문입니다. 첫째에게 보내는 갈채만큼 꼴찌가 감내해야 할 서러움은 크기 때문입니다.
갈채를 바라는 세상은 끝없이 경쟁을 부추키지만 위로하는 세상은 다양성을 지향합니다. 경쟁적 사회는 더 빠른 발전을 추구하지만, 위로하는 사회는 조금 느리지만 첫째와 꼴찌가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첫째를 바라고 꼴찌가 두려운 것은, 우리에게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에게 보내는 갈채보다 꼴찌에게 보내는 위로가 더 그리운 세상입니다. 꼴찌에게 보내는 위로는 상처를 치유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가 되고 종이 되는 꼴찌의 영성은 세상을 위로하며 치유하는 영성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꼴찌가 실패한 삶처럼 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낮은 그곳이 바로 십자가의 뜻인 위로를 통한 치유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 평화를 잃지 않는 사람은 내면의 상처가 치유된 사람입니다. 꼴찌의 아픔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위로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첫째가 될 수 있는 준비가 된 성숙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종인 봉사자들은 꼴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꼴찌가 되어 오셨기에, 주님은 꼴찌에게 영광을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당신이 겪은 꼴찌의 아픔은 위로자가 되기 위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자존감이 풍부한 꼴찌만이 또 다른 꼴찌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진정한 첫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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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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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생활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젊은 교사들조차 제가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치우면 먼저 달려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고 왜 신부님이 이런 일을 하게 놔두었냐며 서로 핀잔을 줍니다.
그러다보니 사제에게 있어서 자아 성찰은 언제나 필수적인 일입니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본질은 잊고 타성에 젖기 쉽기 때문입니다.
타성에 젖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은 곧 나의 편의를 찾고 나의 즐거움을 찾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고자하는 감정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두 번째 예고를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와중에도 누가 더 높은가 하는 우위 다툼에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불리게 되었는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난에 대한 예언 앞에서 그 의미를 깨닫기는 커녕 묻기조차도 두려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실 따지고 보면 제자들과 같은 출신 성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여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자 모였으며 주님의 모범을 따르고자 저마다 약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종 인간적인 욕심과 현실 앞에서 불리움의 의미를 망각하기도 하고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신앙인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없고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한 봉사 직무에 초대된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며 이것이 결국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봅시다. 우리는 본당 안에서 혹은 이 사회 안에서 지나치게 나 자신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지위와 우위를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기도는 온통 나를 위한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 그 외의 이웃을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지위는 우위 다툼과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봉사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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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그 길을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 길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가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곧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나아가 ‘종’이 되대,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실현을 내려놓은 이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곧 어린이 같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 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서,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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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나 다 같이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나 다 같이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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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
전쟁터같은 세상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며 갈망하지만 참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입니다. 인류사는 전쟁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면 정말 영원히 없어져야 할 전쟁입니다. 읽고 있는 두권의 책, <십자군 전쟁에서 배우는 평화를 위한 지혜, 철학자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과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눈에 띈 ‘전쟁’이란 말마디에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이미 예전부터 수도생활은 영적전쟁이요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란 말이 정의처럼 쓰였고 저 또한 무수히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주님의 전사라고 말입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요, 이런 이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하십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살아온 세월을 맹신하면 축적한 내공이 편견이 된다. 일가견을 이룬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다산>
“어른이란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맹자>
일가를 이룬 대가의 품격은 아이다움입니다. 마냥 순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유연하고 자유로움으로, 또 사랑의 지혜로 표현되는 아이같은 대가의 품격입니다. 전쟁터같은 세상에서 이런 품격의 어른이라면 평화의 사도로 손색이 없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이런 어른은 그대로 예수님께 해당된다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껴안으시는 예수님의 순수한 동심이 빛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결코 마냥 아이같은 순진함은 아니며 사랑의 지혜로 빛나는 순수함입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환대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자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진리가 계시됩니다.
여기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순진함이 아니라 상처받기 쉽고 소리없는, 약하고 무력한 가난한 이들이요, 믿을 것이라곤 오직 하느님뿐! 하느님께 의탁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아나뵘입니다. 이는 앞서의 말씀에 대한 답이 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그의 형제자매들중 가장 작은 이들, 즉 약하고 가난하며, 상처받기 쉽고 소리없는 이들이요, 이들을 따뜻한 환대로 맞이하는 자들이 진정 가장 위대한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아나뵘의 영성’을,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사는 진짜 신자들이요, 이의 영원한 모범이 바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런 결론에 이르는 발단이 된 것이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을 예고한 후 논쟁입니다.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몽 오합지졸의 제자공동체가 예수님께는 참 환멸스러웠을 것이며 내적 외로움과 고독도 참 컸을 것입니다.
뒤늦게 잘못됐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묵묵부답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깨우치려 예수님께서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어린이를 받아들임의 깊은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새로운 충격적 참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으리라 생각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종과 섬김의 영성’을 또 동심의 어린이성을 회복하여 어린이를 맞아들이듯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영성’을 살 수 있을런지요. 오늘 집회서가 답을 줍니다. 역시 섬김의 영성을, 환대의 영성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전쟁 같은 삶의 시련 중에도 주님을 경외하며 다음 집회서의 가르침을 실천 훈련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하기 아까워 오늘 제1독서 집회서 전문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말그대로 영성훈련의 필수요목들입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주신다.”
값싼 은총도, 값싼 영성도, 값싼 제자직도, 값싼 평화도 없습니다. 이런 부단한 영성훈련과 함께 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단히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을 훈련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버팀목 삼아 참고 견디며 버텨내야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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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섬김의 단계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첫째가느냐를 놓고 다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뒤에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때 자기 아들들이 주님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여 제자들이 불쾌해하며 자리다툼을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섬기려고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등에 업고 한 자리 차지하려고 주님을 따른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이 들으라는 듯 또 제자들과 마찬가지인 제가 들으라는 듯 오늘 집회서는 주님을 섬기러 나갈 때의 자세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그래서 저는 오늘 섬김의 단계에 관해서 묵상해봤는데
첫 단계는 시련에 대비하는 단계라고 집회서는 얘기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면 제자들처럼 부귀영화를 기대하지 말고, 시련을 각오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기본자세이고 올바른 자세이지요.
이런 자세가 아니라면 앞서 봤듯이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 출세나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제자이고 종이면서 시련은 전혀 관심 없고 영광만 꿈꿔서는 안 되는 거지요.
둘째 단계는 실제로 시련 당하게 된 단계이고
이때 지녀야 할 자세는 인내와 단련의 자세입니다.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그렇습니다. 이때 지녀야 할 자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련을 단련의 기회로 삼는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시련과 단련이 실은 같은 거지만 억지로 당하면 시련이고, 스스로 겪으면 단련이지요. 이렇게 단련의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시련을 묵묵히 참고 견딜 수 있겠지요.
섬김의 세 번째 단계는 믿음과 희망의 자세를 지니는 단계입니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두 번째 단계가 자기 내면에서 자기와 싸우는 단계라면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단계입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서 여기서 미완성인 채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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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첫째가 되는 길!>
오늘 복음(마르9,30-37)은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의 수난(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이유이며, 이 마지막 하느님의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고,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그리고 그 중심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전쟁 3년 째를 맞이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지역의 전쟁, 그리고 우리나라의 극심한 혼란 상태인 탄핵정국,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지도자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땅에 많은 지도자들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모든 이의 종, 백성의 종이 되는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고, 이런 지도자를 한 나라의 지도자로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평온하고 나라가 평온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88세)의 건강이 위중하시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쟁과 분쟁 지역에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메시지를 내셨다고 합니다.
"주님, 육체적 건강의 위중 상태에 있는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을 지켜주시고, 그에게 평화를 주소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기 위해서, 모든 이의 종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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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섬기시는
예수님과
모든 이들의
꼴찌는
친분이
깊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꼴찌가 세상을
바꿉니다.
모든 이들의
꼴찌가
우리에게
오십니다.
십자가의 힘은
모든 이를 섬기는
꼴찌의 힘입니다.
꼴찌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법 없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꼴찌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길을 찾아
나섭니다.
못 박히는 것은
언제나
꼴찌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꼴찌가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꼴찌의 본명은
예수님이십니다.
꼴찌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복음입니다.
꼴찌의 행복이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섬김의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꼴찌입니다.
꼴찌의
미덕과 함께
가득해지는
은총입니다.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오늘
되십시오.
은총은
섬김으로
더욱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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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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