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연금개혁 관철… 정년 62 → 64세 연장
정치생명 건 개혁, 의회 벽 넘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 집권 후 6년간 추진한 ‘더 내고 늦게 받는’ 방식의 연금개혁을 20일(현지 시간) 이뤄냈다. ‘의회 패싱’이라는 정치적 승부수까지 띄우며 개혁에 사활을 건 결과다. 16일 마크롱 대통령이 국민 원탁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 파리=AP 뉴시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정년 및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는 연금제도 개혁을 이뤄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 입법 절차를 건너뛰면서까지 연금개혁을 강행하는 데 반발해 야권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들이 모두 하원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다. 정치적 생명을 걸고 개혁을 밀어붙인 지 6년 만이다.
20일(현지 시간) 프랑스 하원 표결에서 야당인 자유·무소속·해외영토(LIOT) 그룹과 좌파 연합 뉘프(NUPES)가 공동 제출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불신임안은 재적 577석(공석 4석) 중 278명이 찬성해 절반을 넘지 못하며 부결됐다. 하원은 여소야대 상황이라 야권이 단합하면 불신임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연금개혁안을 사실상 좌초시킬 수 있었지만 우파인 공화당이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며 여당 편에 섰다.
의회 입법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프랑스 연금개혁안은 한국 헌법재판소 격인 헌법위원회의 승인과 마크롱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두게 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처음 집권한 2017년 대선에서부터 연금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국민의 저항과 팬데믹 위기에 한 차례 포기해야 했다. 2022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의회 패싱’이라는 승부수까지 띄운 끝에 개혁을 관철시켰다. 그는 22일 대국민 기자회견에 나설 예정이다.
미래 택한 마크롱, 6년만에 연금개혁… ‘사회적 합의’ 안돼 험로
의회 동의없이 정부입법 승부수 “국민설득 부족, 대가 큰 피로스 승리”
野, 국민적 저항 촉구… 憲訴 예고
주요 노조들도 “23일 9차 파업”… 남은 임기내 상당한 정치적 부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피로스의 승리’를 거뒀다.”
로이터통신은 20일(현지 시간) 마크롱 대통령 연금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한 것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가 큰 승리’를 뜻하는 피로스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국민의 거센 저항 속에 4년 이상 남은 임기에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대선 공약인 연금개혁을 관철시키자 이같이 비유한 것이다. 주요 노조는 물론이고 의회 내부에서도 ‘연금개혁은 얻었지만 민주주의는 잃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 ‘마크롱표 연금개혁’ 6년 만에 마무리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안은 재수 끝에 의회를 통과했다. 처음 집권한 2017년 마크롱 대통령은 직업별, 직능별로 42개나 되는 복잡한 연금제도를 통합하고 정년을 늦추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놨다.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정년퇴직과 동시에 연금을 받기 시작한다. 더 일하고 더 늦게 연금을 받는 개혁안에 거세게 반발한 노동계는 2019년 12월 총파업을 벌였고 나라가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며 연금 개혁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연금개혁 이슈는 지난해 4월 대선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을 뻔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마크롱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그는 지난해 10월 “오래 살기 때문에 더 오래 일할 수밖에 없다”며 정년을 62세에서 65세로 늦추는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올 1월 정식 개혁안을 내놨다. 프랑스 국민 약 70%가 연금개혁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잇달았지만 프랑스의 은퇴 연령이 선진국 중 가장 빠른 데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 올해부터 연금재정이 적자로 돌아서는 것으로 나오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마크롱 정부는 기존 연금개혁안을 고집하지만은 않는 유연성도 보였다. 의회 심의 과정에서 노조와 의회 의견을 반영해 정년 및 연금 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4세로 낮췄다. 또 일을 일찍 시작하면 조기 퇴직할 수 있도록 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로 연금 100%를 받으려면 더 오래 일해야 하는 ‘워킹맘’에게는 최대 5%의 연금 보너스를 지급한다는 야당 공화당 제안도 수용했다.
개혁안이 상원을 통과한 뒤 하원 처리를 앞둔 16일 의회 표결을 존중하겠다던 마크롱 대통령은 돌연 승부수를 띄웠다. 의회 동의 없이 정부 입법을 가능케 하는 헌법 49조 3항을 통해 반대 여론이 우세한 것으로 파악된 하원 표결을 건너뛰기로 한 것이다.
● “노조와의 대화 및 설득력 부족” 지적도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패싱’을 통해 연금개혁을 이뤄냈지만 반발하는 국민과 야권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만만찮다.
내각 불신임 투표를 주도한 뒤 9표 차로 밀린 야당들은 연금개혁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세다. 지난해 대선에서 3위를 차지한 극좌 정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이날 “의회에서의 불신임 투표는 실패했다. 이제 대중이 불신임 투표를 위해 나설 시간”이라며 국민적 저항을 촉구했다. 극우 마린 르펜 국민전선(FN) 의원은 “연금개혁을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야당 의원들은 연금개혁안 일부 또는 전체를 저지하기 위해 한국 헌법재판소에 해당하는 헌법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예정이다.
프랑스 주요 노조들은 23일 9차 파업을 예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18, 19일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연금개혁 반대 파업 지지’가 65%에 이른다. 좌파인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일간 르파리지앵에 “연금개혁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통과 과정에서 노조와의 대화가 부족했다”며 “협상은 잘못됐고 설득력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22일 대국민 연설을 하는 마크롱 대통령이 국면 전환을 위해 불신임 투표에서 살아남은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교체 카드를 꺼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파리=조은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