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을 쓴 이선호 박사는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했고, 국방대학원 교수,군사학회 부회장, 을 역임한후 현재,한국 시사문제연구소장으로 재직중입니다 ------------------------------------------------------------------------------------- 이 정권이 바뀌어야 북괴의 남침땅굴정체가 드러날 것인가 !
1. 연천땅굴과 화성땅굴 경기도 연천과 화성땅굴이 6.15선언을 전후하여 민간인에 의해 발견 신고 되었으나 당국이 무조건 이의 절개를 거부하고 덮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계속적으로 네티즌 여러분에게 알려드린바 있다. 만약 민간 탐사자들의 주장이 허위조작된 것이라면 당국이 이들을 어떤 죄목이라도 걸어 처단하였을 것이나, 그러하지 못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민간인들이 제시한 확실한 땅굴 징후 자료를 부정할 만한 보편타당성있는 과학적인 증거도 제시함이 없이 상투적인 탁상공론식의 일방적인 부인만 계속 반복하지 속시원하게 현장 절개나 쌍방 동석한 공개토의를 거부하고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국이 민간 탐사자들에 대한 물리적 제재나 법적 심판을 피하면서 사실 은폐와 여론 냉각에 치중하고 있음이 더욱 땅굴의 실존 가능성 의혹을 증폭시키는 모순 당착의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의정부 땅굴의 경우 6개월 간에 걸친 지하 굴착음과 진동을 현지주민이 기록제시한 일기장은 물론, 제2땅굴을 발견한 정명환 장군(예)과 대공수사관 출신으로서 땅굴탐지전문가인 정지용 준위(예) 외에 민간 시추기술자 들에 의한 2개소의 굴착결과 지하갱내의 북한인 음성과 갱차 이동음을 특수녹음기로 녹취해내고, 북한 작업원이 사용했던 은박지 뭉치 등 소모품을 지하에서 수거해냈으며, 직경 3m 기리 7m가량의 암반층내의 인공공간을 수중촬영하고 잠수부가 확인했던 바 완전무결한 과학적 증거가 제시된 바 있다.
그리하여 부분절개작업과정을 정밀 취재한 SBS TV가 2회에 걸쳐 방영까지했지만, 모두가 민간인들이 보상금을 노린 조작극이라고 당국이 일방적으로 묵살한지 벌써 3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과 국방부 그리고 육본 땅굴관련 요원들이 민간 탐사자들에 의해 직무유기 및 이적행위로 고소 당한 바 있으나 일부는 검찰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었으며, 일부는 아직 사건이 계류중이고 ,이와 병행하여 이들의 명예훼손으로 제기한 맞고소와 남굴사 요원의 항소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황해도 남단에서 직선 거리로 약 65km 지점인 경기도 화성시의 시화호 남쪽 물막이 끝 부분의 야산에서 6.15선언 직전에 우물을 파던중에 우연히 발견된 이후 현재 내륙 20KM 이상 굴진한 사실이다. 이곳에서도 지하 40m쯤에서 굴착음과 갱차이동음 그리고 육성대화소리까지 녹음을 해낸 것이다. 연천과 같은 탁상공론으로 당국은 또 다시 절개할 생각을 않고 무조건 자연동굴이라고 단정하여 덮어두고 있다.
이 쯤되면 휴전선 인근과 수원일대의 후방이 완전히 지하로 거미줄같이 땅굴로 연결된 것이 틀림없다. 현재까지 김포반도와 의정부, 동두천 행주산성, 구리 , 심지어 옛 서대문 형무소 뒷산까지 땅굴징후가 발견 신고된 곳 만 해도 20개소가 더 된다.
민간 땅굴전문가들은 이 지점들을 일일이 다 답사하고 현지주민의 신고내용을 토대로 대부분은 시추하여 확인까지 해놓고 있으나 당국은 무조건 사실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일을 자극시키면 햇볕정책에 지장이 있다는 망국적인 발상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지주민을 당국이 회유하여 땅값이 내리니 더 이상 땅굴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민간 탐사자들을 협박까지 하고 있다. 지금 국회에 이 땅굴규명을 위한 청원서를 2001년 4월 제출하여(한나라당 김종하 의원의 의견서 첨부) 국방위에 상정토록 조치되어 있지만, 1년이 다된 지금도 국방부의 거부반응으로 말미암아 야당의 국방위 소속 의원들조차 반신반의하고 있어 국방위에 상정조차 안되고 있다.
최근에 10여년간 땅굴 부인 논리를 개발해 온 육본의 실무 과장(3사출신 대령)이 정년퇴직하기 직전 어느날, 민간 땅굴 탐사팀과의 접촉 약속을 한 직후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도 미스테리가 아닐수 없다. 과업시간이 아닌 시각에 땅굴책임자인 그가 직접 운전하다가 급사한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에 인민군 대위로 귀순하여 육군에 특채되어 정보사의 대령까지 승급하여 장기간 요직을 맡아 온 신중철이란 자가 6.15선언 이후 어느 날 갑작이 자기 재산과 짐을 다 처분하고 행방불명이 되었으나 제2의 이수근일수도 있는 이자의 행방에 대하여 쉬쉬하고 있음은 뒷맛이 매우 씁쓸하다. 그가 귀순하여 땅굴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한 바 있으며, 정보사의 요직을 맡아 한국군의 전 전방사단지역을 모두 답사연구한 자임을 전제할 때, 6.15이후 우리의 이완된 군기강과 안보의식 해이 현실과 무관치 않음을 생각게 한다. 그가 엄청난 고급 군사 정보를 갖고 평양으로 금의환향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는 한 적절한 사후조치가 반드시 취해져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재차 주의를 환기시킬 문제가 있으니, 땅굴의 존재를 부정하는 당국자와 이를 확인하려는 민간탐사자가 한자리에서 공개토론으로 시비를 가리자는 요구를 한사코 수용치 않으려 하는 저의가 의심스러우며, 불과 5,000만원 미만의 예산으로 민간인들이 수억원을 드려 가산을 탕진하면서 애써 부분 절개해 놓은 곳을 완전절개 마무리 작업하여 땅굴의 존재여부를 확인만 하면 되는데 이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당국의 꿍꿍이속이 훤히 내다보인다는 것이다.
국고낭비니, 국민 불안 조성이니, 보상금을 노린 사기행각이니 하는 괴변은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다. 연간 15조원을 쓰는 국방부가 국가안보예방활동으로 단돈 5,000만원을 못쓴다는 말인가? 국가안보유관 기관에서 일생을 바친 원로들이 국민을 불안케 하려거나 사기 놀음으로 돈벌이 하려 한다는 소리는 언어도단이며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납득할 수 없는 오늘의 실상을 유념하면서 1975년 3월에 제2땅굴을 찾아낸 집념의 사나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사단장 임기동안 불철주야로 진두 지휘 탐사하여 사소한 땅굴징후를 포착하여 끝까지 기지와 인내로 그 정체를 확인하여 파해쳐 낸 유명한 정명환 장군의 비화를 소개한다. 정장군은 지금도 민간탐사자들과 함께 당국를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중이다. 이하는 1993년 12월호의 NEW WORLD란 월간지에 실렸던 수기중 한 부분이다. . ======================================================================= 2. 제2땅굴 발견의 비화와 교훈
1977년 내가 5.16민족상을 받았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씀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 수상식이 끝난 후 다과회에서 대통령이 일부러 내게 다가와 "정장군이 땅굴을 찾지 못했으면 우리가 한번 당할 뻔했지"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그 후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제2땅굴이 발견된 것은 1975년 3월이다. 당시 박대통령은 "1975년 11월에 전쟁이 날뻔했다. 이 놈들이 한 바탕 쳐 내려올 징후를 보였다"라고 했는데, 제2땅굴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후에 발견된 판문점의 제3땅굴 공사도 더 진척되었을 것이고 서울로 더 가까이 접근 침투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며, 당시의 북한군 전진배치병력과 장비가 전체의 65%를 넘는다는 정보보고에 의한 상황판단에 근거한 말씀이었다.
그 당시 보안상 보도 안된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은 박대통령과의 대화가 오고 갔다." 각하, 북한이 스웨덴으로부터 자동굴착기(BTM)5대를 구입해 갔다는 정보가 육본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내 말을 들은 박대통령은 깜짝 놀란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북한이 앞으로 장거리 땅굴을 팔 수 있다는 말 아닌가?" " 네 ,공법을 달리하면 가능합니다. 직경 2m짜리 자동굴착기는 하루에 30m를, 직경 5m짜리는 60m를 팔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동굴착기를 사용한다면 서울까지도 얼마던지 파 내려올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북한은 스웨덴제 최신형 자동굴착기 300여대를 보유한 것으로 외신이 전하고 있으며 일부 탈북자의 증언에서도 밝혀진바 있다. 우리나라의 진로건설 등 일부 건설회사가 이 자동굴착기로서 지하철공사를 한 바 있으며 국내엔 겨우 10여대가 있을 뿐이다. 지난 2001년 4월 3일 용사의 집에서 제2차 모임을 가진 "남굴사" 회의시에 자동굴착기모형을 갖다놓고서 기계적 성능과 작업능력을 평가한바 있다.
땅굴작전은 사소한 나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사단장으로 부임한 3일째 되는 날, 전방을 순시하면서 갑자기 만약 적이 땅굴을 파고 공격해온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후 나는 땅굴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자나 깨나 이생각만 하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가 한다. 나는 특별한 징후도 없이 제로시계에서 땅굴을 찾기로 결심했다. 지금처럼 정밀장비나 전문인력이 있은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나의 신념과 병사들의 노고가 유일한 도구일 뿐이다.
적진지에서는 수시로 폭파음이 들렸으나, 최초의 3개월 간은 아무런 징후도 발견못하였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웃었고, 혹자는 진급병환자라고 힐난하기까지했다. 드디어 1973년 11월 20일 최초로 전방 청음초에서 이상한 지하처음을 청취하기 시작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할만한 것은 되지 못하였다. 주야로 땅속으로부터 울려퍼지는 굴착음의 시간대별 청취기록을 유지 분석하면서 결정적인 징후를 확증하기 위해 신경을 쓰면서 초소근무를 강화하였다.
이로부터 4개월 후에 철원지역엔 땅굴이 없으니 병력을 철수하란 상급부대로부터의 명령을 받았을 때 참으로 참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장 감각이 없는 상급부대의 탁상공론에 의한 부정적 단정은 같은 행태인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나름대로 땅굴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바, "병력을 철수 시킬려거던 나를 면직시켜라"고 상급부대에 대항하면서 땅굴징후포착에 정성과 노력을 가일층 경주하였다.
나는 담대하게 지휘관으로서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전제하에 1973년 12월 3일,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는 군단장의 지시를 어기고 땅굴출구예상지점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사계청소하고자 불을 질렀다. 수목이 울창하면 땅굴을 파고 나와도 쉽게 발견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북한군이 암반을 뚫고 내려온 다음 지상으로 돌출할 지표면가까이에 출구굴착을 진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난 몇 달 동안의 청음과 땅김 올라오는 현장 목격 등으로 굳혔던 것이다. 상당한 불꽃과 연기가 전방방어지역을 뒤덮었던지라, 북한지역에서도 그 위치와 현상을 관칙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불이 꺼진 다음 2일만에 땅속의 굴착음이 딱 그쳐버렸다. 적은 눈치를 차리고 굴착작업을 일시 유보한 상태였다.
전사단 장병들은 땅굴의 존재에대한 가능성을 믿고 굴착음의 재개를 숨을 죽이고서 청취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드디어 8개월이 가까워온 1974년 7월 25일 새벽, 요란한 굴착음이 바위틈으로부터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굴착재개작업이 착수 된 것이 확실시 되었다. 기간중의 청음 및 관찰기록을 첨부한 땅굴징후상보가 대통령에게까지 지체없이 보고되었다 .대통령의 최종결단으로 절개확인작업이 시작되기 까지는 시일이 소요되었다. 1974년 12월 20일 절개공사가 착수되어 1975년 2월 20일 오늘의 제2땅굴 정체가 백일하에 덜어난 것이다. 실제로 현대건설이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역갱도를 관통시킨 것은 같은 해 3월 19일이었으니, 사단장이 땅굴의 최초 징후를 발견한 후 1년 3개월만에 거둔 쾌거였다.
당시 농업진흥공사의 우물 파는 기계 10대를 들여와 영하 20도의 혹한하에서 시추공을 뚫었는데, 24시간 돌려도 6m밖에 팔 수 없었다. 그리고 땅굴 내 잔적 소탕작전을 하면서 장교 1명이 중상을 입고 사병 8명이 적이 설치한 지뢰와 개스로 말마암아 사망하는 사고도 겪어야 했다. 국립묘지에 잠던 이들 부하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마다 나를 비롯한 땅굴 작업참여자들은 해마다 4월 8일 묘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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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국이 남침 땅굴을 은폐하는 이유 제1, 2, 3, 4 땅굴의 징후를 전제 할 때, 현재 발견된 연천과 화성땅굴의 징후는 너무도 확실하고 긴급대책을 요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국가안보불감증환자 일색의 당국자들을 김정일에게 자극 준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이 중대한 정보를 깔아 뭉게고 있으니 국립묘지에 잠던 호국영영들이 대성통곡할 노릇이다.
하기야 대통령이 국립묘지에가서 순국선열들 면전에서 만고역적이며 민족의 철천지 원수인 김정일을 치켜 세우면서 어서 오소서 하고 간청까지 하는 판이니 땅굴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남굴사"요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어코 이 땅굴을 파해쳐 북한의 남침의혹을 폭로하고 국가안위를 염려하는 국민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잘못 되어 가고 있는 햇볕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결의를 다지고 있다.
남침땅굴 은폐에 가세한 체제전복세력이 정,관,군,산의 각계각층 요직에 석권포진하고 있는 현실은 자유민주헌정 붕괴 5분전으로 치닫게 할지 모른다. 땅굴이 공개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항세력이 만만치 않다. 김정일과 그 지지세력에게 매수당했거나 연방제통일 성취시 보상약속 받은 무리가 분명히 현 체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자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입다문 대가의 엄청난 반대급부가 권력자의 비자금에 의해 비급자들에게 공급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국민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고 힘을 합처 대처해 나가야할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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