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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이야기했던 귀歸, 무無, 허虛, 정靜, 졸拙 - 이런 것, 이 반대가 뭐죠? 동動보다는 정靜, 만滿-가득 찬 것보다는 빈 것, 유보다는 무, 교巧보다는 졸, 진보다는 귀- 이런 개념이다. 노자를 한 줄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말뚝만 여기저기 박아서 노자의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연,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고, 형식이 교묘한 것보다는 졸렬한 것- 붓글씨에서도 어수룩한 게 명필이다. 아주 빼어나면 안된다. 어수룩해야 한다. 패션도 졸렬한 것으로 상당히 변하지 않았나? 스티브잡스도 매우 졸렬하게 입는다.ㅎㅎ 반듯하게 하면 촌스럽다. 가득찬 것 보다는 빈 것, 뭔가 잘난척하는 것보다는 좀 못난척하는 게 노자다워보인다. 느린 걸음, 더딘 것. “왜 그렇게 자동차 타고 바쁘게 다니냐?” 했더니 그 복잡한 자동차 만드느라고 그렇게 바쁘다 한다.ㅎ
근본적으로는 사실 자연 상태에서 공룡, 파충류한테 쫓기고 이러는 사이에 비바람에 뭐 서럽고 이럴 때 문화, 성장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그런 궁핍 때문에 문화가 발전한 게 사실이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시스템과 맞물리면서 도를 넘었다.
지금 4만불, 747한다고 하는데, 만 불 정도면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안정적인 인간적인 시스템에 대한 고민,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자본가’지배의 세상이기에 발상의 전환이 어렵다.
그리스에 가보면 자연이 척박하다. 돌아갈 자연이 없다. 지중해 바다 외에는. 산물도 포도하고 올리브밖에 없다. 그리스 산에도 가보면 삼천리 대성연탄 쌓아놓은 듯한 산이 많고-석회석 산- 나무 한 그루, 계곡 한 줄기 없는 산이 많다. 그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도 폴리스라는 복잡한 문화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에도 노자같은 반성이 있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아도르노가 노자 읽었지 않았나?하는 심정이 간다. 도구이성이라는 개념적 사고를 비판했는데, 아도르노의 알고리즘-오딧세우스가 트로이를 함락하고 개선하여 돌아가다가 어느 협곡에서 사이렌이라는 림프가 부르는 달콤한 노래 소리에 모든 배가 좌초하여 거기서 배가 파선되었다. 그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전부 밀랍으로 노 젓는 사람들 노래 못 듣게 귀를 막았다. 자기만 노래 듣고 싶으니까 자기를 배에 묶은 후 노래 들으며 빠져나갔다.
이것을 아도르노가 설명하기를, 림프라는 것은 자연이고 자연과의 합일이다. 자연 속에서 거기에 살면 되는데, 트로이 함락이라는 인위적인 자기의 달성과 이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 모든 사람들의 귀를 막아 소통을 막고, 노젓는 노동에만 복무하게 만들었는데, 지배자인 자기 자신도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역설을 낳았다고 하였다.
호모의 오딧세우스에서는 바로 그런 고대사회의 문화, 노자 당시에도 진보나 성장이라는 게 지금 보면 아주 왜소할 거다. 그리스의 그 당시 문화나 사회적 성취도 대단히 약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때 이미 그런 비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이렌이 부르는 자연의 소리에 화답하고 가서 같이 사는 게 옳다. 트로이 함락이라는 작은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묶이우고 모든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억압 상태에 놓이게 하고.. 이게 문화가 아닌가.
그때의 비판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지만, 지금 만 불 정도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도, 굉장히 불안정한 세계 경제질서의 중하위권에 매달려서 올인하고 있는 이런 국가 경영은 ‘자본가’가 아닌 다른 ‘가’가 맡아야 되지않나?
그럼 노자는 어떠한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는가를 같이 읽어보고 싶어서 쓴 다음의 글을 같이 읽어보자.
<교재:20-22면>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中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노자』 제8장)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무수유(道無水有), 도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로써 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投降主義)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국이 됩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의 다른 표현이고 작위(作爲)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노자』 마지막 장인 제81장의 마지막 구가 '천지도이이불해(天地道 利而不害) 성인지도위이부쟁(聖人之道 爲而不爭)'입니다. "천지의 도는 이로울지언정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일하되 다투는 법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합니다.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자 사상이 민초들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노자』 는 지식인 내부의 비판 담론이며, 근본에 있어서 고도의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임은 물론입니다.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다.(以其善下之)'라는 66장의 선언이 그렇습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 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노자의 물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 역량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절대적인 역량에 있어서 취약하고 더구나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처럼 분산된 부문별 역량들의 결합 수준 또한 대단히 저급하기 때문입니다. 연대야말로 당면의 실천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대의 모델이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下方連帶)'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노동․교육․농민․환경․의료․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중소, 하청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이어야 함은 물론이며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양보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8장은 다음 구절로 이어집니다.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이 구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노자』 전체의 의미 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하고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물론 물입니다.
'거선지'(居善地)는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민중들과의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현실 노선과 대중노선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선연'(心善淵)은 마음을 비운다(虛靜)는 의미입니다. 사사로운 목표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여선인'(與善仁)의 여와 인은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동지적 애정으로 결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언선신'(言善信)은 그 주장(言)이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선치'(正善治)의 정(正)은 정(政)입니다. 바로잡는 것, 즉 개혁과 변혁입니다. 그 방법이 치(治)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도 방식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정(政)의 방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강제나 독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선능'(事善能)은 전문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선시'(動善時)는 그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 고무우(唯不爭 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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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들이 잘 읽어줘서 설명 안해도 될 것 같다. 물의 이미지, 강물, 시내, 물...물과 연관되어 있는 정서가 상당히 많다.
물이 참 자연스럽다. 물이 어디에서 왔는가? 가장 자연스럽다. 그런데 자연스럽지 않은 게 하나 있다. - 분수^^ 분수는 매우 서구적인 것이고 반자연적인 것이다. 동물원도 그렇다. 북극곰과 타조가 왜 같이 있어야 하나? 애들이 얼마나 혼란스럽겠나?^^ 어쨌든 자연스러워야 한다. 노자 사상이 자연이다.
물이라는 게 민초들의 철학이다. 사람을 물로 보면 굉장히 약하게 보는 거지만^^ 약한 사람들의 희망, 민초들의 철학, 난세를 살아가는 철학이다. 72개의 제후국들이 다 망하고, 하극상-밑에 있는 대부가 임금을 죽이 것이 36번이나 된 천하대란, 춘추전국시대에 제일 고생한 사람들이 민초였다.
서양에서는 전쟁하면 귀족들이 자기 비용으로 자기 사병 동원해서 했다. 임금도 맘대로 명령 못했다. 귀족들이 자기 돈으로 비용부담해서 군대 동원했던 것이다. 그리스 때는 일반 시민들도 자기 비용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동양에서는 임금이 전제 왕권이 그냥 지시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자기에게 오는 부담을 전가할 수 없는 제일 말단의 민초가 가장 최대의 피해자였다. 그래서 맹자에도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왜 그런 표현을 하느냐면 전쟁 때 백성들이 다 달아났기 때문이다. 전쟁이 민초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다 달아났다. 민초가 최대의 피해자였다. 이산의 아픔, 만리장성...
그 최대의 피해자들이 그 난세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노자는 물처럼 유연하게 대응하고 부딪치지 말고 서서히 서서히 연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노자는 연대, 전략전술이라는 말 안 썼지만, 노자를 민초들의 정치학, 민초들의 애환이라는 애정을 가지고 읽으면 보인다. 그게 바로 노자의 ‘물’이다.
민초들의 애환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야할 것인가?
물은 노자가 구상하는 ‘無’가 나타난 것,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 민초들이 잘 사는 것이다.
유가나 법가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가장 낮은 민초들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세계, 그것이 無의 세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자본가, 유가, 법가 등의 사람들이 이끌고가는 것은 有의 세계이다. 그래서 노자의 물이라는 것은 상당히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원문을 보자.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 진리는, 도는 물과 같다. 이유는 수선리만물水善利萬物-만물을 매우(very well) 이롭게한다. 생명이 물에서 탄생한다. 그러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쟁(爭)과 전戰은 다르다. 전은 한일축구전 처럼 편을 딱 갈라서 승패나는 싸움이다. 쟁은 다투는 것이다. 다툰다는 것은 객관적 조건이 아직 미성숙한데, 또 개혁이나 실천 주체의 역량이 열악한데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무언가 일을 진행하는 경우에 주체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서로‘다투는 형식’이 된다. 러시아혁명사에서는 그것을 모험주의, 중국에선 주관주의라고 표현했다.
물은 웅덩이가 있으면 건너뛰지 않는다. 다 채운다음에 나간다. 또 무언가 가로막으면 할수(割水)-나누어가고 큰 산이 막으면 돌아가고... 결코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는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식민지 해방투쟁, 또는 과거 군사정권 투쟁 때 사람들이 성급하게 대응하기도 했었다. 임시 혁명정부를 만들려고, 정치권력 탈취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사회개혁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노자는 그런 방식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최대의 정치권력 집단 두 개 있었다-나치스와 스탈린 프롤레타리아 독재. 둘 다 사회 개혁 실패했다. 물은 그런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물은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처중인지소오處中人之所惡- 낮은 곳으로 간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래서 바다를 만든다.
바다-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이니까 ‘바다’다. 이것도 내가 우기는 말인데 그렇게 해도 된다.ㅎㅎ 재밌잖아-^^
처음에 출소하니까 후배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감옥에 있으면서 궁금했던 친구들 다 만나게 되었는데, 깜짝 놀란 게, 몇몇 사람이 어느 결혼식에 와서 우연히 같이 앉았는데 자기들끼리는 말도 안하고 나하고만 말했다. 이상해하며 나중에 알고 보니 서로 인간적인 상처까지 주며 갈라졌다고 한다. 연대- 지금도 뿔뿔이 갈라져서는 안 되는 것 뻔히 알면서도 ...
87년 이후 일정하게 확보된 민주공간이 있었는데, 6.29로 후퇴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불사르고, 갇히고 희생하면서 만들어진 이 공간을 누군가 어느 정치집단이 먼저 깃발 꽂으면 자기들이 차지할 것이라는 기회주의 발상이 있었다. 그래서 합의도, 연대도 안하고 그냥 재빨리 가서 깃발 꽂았는데 그 후에 무참히 깨졌다.
거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래 아직은 진보정치 대한민국에선 시기상조야-’ 그것을 그렇게 쉽게 합의하더라. 제대로 된 대응도 안했으면서, 깃발 안 꽂은 사람들도 다들 꽂고 싶었던 기회주의적인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 이것이 오늘날까지 실패를 이어오게 했다.(다 소위 말하는 민초들을 버리고, 현장을 다 버리고 중앙에 몰리더니 거기서 뭔가 낮은 단계의 어떤 연합전선도 못 만들고, 각개격파로 그냥 먼저 꽂더니 끝나고 났더니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러고 얼른 합의하고. 이런 구조가 말도 안 되는 구조예요. 그래서 바로 그런 점, 우리가 대단히 경계해야 될 게 그런 주관주의입니다.)
사회 역량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양적인 역량과 질적인 역량으로 나누어 본다. 양적인 역량은 촛불처럼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만, 질적인 역량을 평가할 때는 양이 많거나 적거나에 상관없이 조직화되어 있는가를 본다. 그 점에서 우리나라는 60년대 말에 비하면 부문운동들이 엄청나게 조직화되어 있다. 교육, 노동, 환경...그것은 양적역량의 대소에 관계없이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부문 조직 역량들이 어떤 결합수준, 어떤 연대수준을 보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가장 낮은 형태의 연합수준-비대위, 연맹, 전선형태의 결집, 상당히 강고한 당 중심...이런 결합 형식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제로(0)다. 잘 알듯이 전혀 안 되고 있다. 이런 취약한 주체역량인데 엠비정권 이후에 양적 역량도 확 썰물처럼 많이 빠졌다.
이것을 극복 못하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국회의원 한 석 가졌건, 80석 가졌건, 전부 자기의 현재 위치에서의 有에 매달려 있는데, 보다 낮은 곳과 ‘연대’해가는 물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연대 안하면 안 된다.
성공회대학에 노동대학이 있는데, 지금 졸업생들이 1000명 이상 된다. 민노총 위원장, 구청장, 구의원...등 훌륭한 졸업생들 많다. 거기서 첫 번째로 강조하는 것이-“노동가치설 맞긴 맞다. 노동이 잉여가치 만들어 내는 것 맞지만 그러나 그런 고전적인 경제학에 매달리면 안 된다.”이다.
돈으로 물건을 만들어서 이보다 조금 큰 C' 만들어서 또 돈으로 바꾼다.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잉여노동을 하여, 노동이 가치생산을 하는 게 맞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치는 이런 가치가 아니다. 만든 물건을 파는 것, 생산된 것이 팔려야 한다. 화폐가치- 상품체가 금체(body of gold, 화폐)로 건너뛰어야 한다. 이것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 한다. 이것 못하면 아무리 자기들이 잉여노동해서 만들어도 가치생산 못한 거다. 그래서 노동계급이 모든 가치를 원천적으로 생산한 계급이라고 해서 노동계급이 모든 잉여가치를 전수하려고 해선 안된다. 자기들이 비극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생산현장만이 수탈현장인 것은 아니다. 배추값 한 포기에 만원 주고 산 사람이 누구한테 수탈당한 것인가? 유통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탈당하고 있는지? 교육, 환경, 교통... 엄청난 생활의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 수탈당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권리 주장해선 안 된다.
그건 바로 고전파 경제학-생산물과 상품, 생산물과 화폐가치를 혼동했던 시대-고전파적 사고에 머물러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연대하라고 한다. 노동자만이 피수탈자가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든 분야에서 다 수탈당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다 소위 기득권자로 넣고 자기들만이 비극의 중심에 있다고 보면 안 된다.
실제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대기업 중심이다. 연대 안하면 안된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면서 노자의 물 이야기 많이 했다. 역량 키우는 방법으로 연대 이야기 많이 했다.
연대라는 것이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특히 객관적 조건은 훨씬 더 나빠졌다. 특히 우리나라 지금 재경부에서 독자적인 경제정책 거의 못할 거다.(깊이 있는 정보는 없지만) 3000억 달러의 외환보유를 EU나 중국화폐나 엔화로 다변화 못한다. 부시, 오바마 절대로 용납 안한다. 그 밑에 다 기어들어가려고 하니 힘든 거다.
연대라는 것은 물론 역량을 결집하는 전술전략적 측면이지만 민초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만남’에 있다. 만남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맹자에서 이야기 했다. 죽고 사는 게 만남에 달려있다. 사람 만난다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연대야말로 바로 삶이다’ 그런 철학적 의미를 읽어야 한다. 정치적 의미보다는.
그래서 노자는 민초의 철학이다. 없는 사람들이 그 전쟁-대쟁지세, 춘추전국시대-에 살아가는 방법이 우선 서로 만남에 있었다.
에피쿠로스 행복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우정’이다. 우정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규정하나?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음모(陰謀)’라고 했다. 매우 멋있다. 같이 음모하는 것, 대안담론, 비판담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이 만남이다.
노동대학도 보면 교실에는 그렇게 열심히 안하고, 끝나고 나서 가는 삼겹살집에서 진도를 다 나간다. 강의할 때 여러 가지 이론 소개하고 하니까, 좀 구체적으로 실천방법 이야기 해 달라고 질문했었다. 그러면 강의 끝나고 나가서 삼겹살 구워먹을 때 잘 뒤집는 행위를 하라. 잘 집어먹는 것 대신에 잘 뒤집는 것을 해라-고 매우 구체적인 실천방법 얘기해줬다.ㅎㅎ
그게 삶이고 우정이다. 삶 자체로서 해야지, 개혁투쟁, 운동, 교육 운동 그 자체가 아름답고 행복해야지 - 그래야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래서 ‘길’을 이야기한다.
도로가 아닌 길의 마음으로 해야한다. 도로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이 없다. 고속도로는 훨씬 더 그렇고-. 도로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시간이 4시간이 아니라 2시간, 1시간, 제로가 되면 도로의 자기 존재 합목적성이 최대가 된다. 자기가 없어져야 최대가 되는 자기모순이다.
길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야 한다. 삶이다. 사람들도 만나고 자기 발자국도 남기고 코스모스도 만나고-. 바로 그런 것.
물을 이야기할 때는 물처럼 유유하게 갈 수 있는 것, 그런 정서를 키워야 한다. 관계론-우리 강의의 주제어인데,‘연대는 실천적 관계’이다.
또 한 가지 더 얘기해야 되는 것은 물이 왜 이기냐? 이다.
노자는 물이 이긴다고 하는데,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능히 이긴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이 다수이고 많아서 이기는 것이다. 민초가 훨씬 많다. 지배권력의 힘이 어디서 나오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때문에 나온다. 그렇다면 지배당하는(피지배) 사람들이 권력자보다 훨씬 많다. ‘다수’라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모든 사람들이 책임이 있는 것, 다 위반하는 것은 벌할 수 없다. 굉장히 많은 차들이 계속 신호위반할 수밖에 없는 곳에 교통순경이 숨어있다가 사람들을 잡아선 안 된다. 신호체계를 바꿔야한다. 중衆-다수라는 것이 정의이다. ‘다수’라는 사실이, 더구나 이 다수가 그 사회 물질적인 생산자라면 그 사람들 자체가 정의이다.
그것을 어디로 지도해서 이끌고가겠다- 이런 발상들이 지금까지 역사의 기본패턴이었는데 그래선 안 된다.
백성들, 주민들과의 접촉 국면을 최대화하고, 주민들과의 정치목적을 공유하는 것-말은 쉽지만 절대 안한다. 국가 경영, 서민들을 위한다며 이념(利念, 이해관계)을 내세우지.
바로 그러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취약한 역량 최대화하고, 하방연대, 잠들지 않는 시내가 되어 바다로 바다로 가야한다. 그 가는 길이 멀기 때문에 즐거워야 한다. 가다 못 가도 어쩔 수 없는 것,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행복했었다고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가야한다.
노자 이야기 하도 엄두가 안 나서 두 개 주제만 뽑았다.
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노자의 현재적 독법, 또 금융자본이 이끄는 자본축적 구조, 세계적 질서, 진과 성장의 신화를 반성하는 그런 관점에서 노자를 읽는 게 옳다.
또 하나는 민초들의 희망 만들기- 그 두 가지로 뽑아 읽었다. 첫 번째는 바람으로, 두 번째는 물로 읽었다. 물의 정서, 바람의 정서 매우 좋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 4-5학년 때 친한 친구가 옆반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맞짱 뜨게 했다. 싸움 연습하게 해서 강가 솔밭에 가서 맞장을 떴는데 이 친구가 졌다. 코피가 나와도 싸우면 될 텐데 그냥 바로 포기하고 안하겠다고 해서 졌다. 이긴 놈은 가고, 이애는 강물에 쪼그리고 앉아서 코피 씻어주던 기억이 났다. 강물과 코피에 관한 애잔한 기억-ㅎ 이때 했던. ‘꼭 정의로운 놈이 이기는 건 아니구나.’는 생각, 저렇게 신나게 이기고 가는 놈이 있으면 여기 쪼그리고 앉아서 코피씻는 패배자도 있구나- 하는 無와 有의 대비-아마 노자가 들으면 반가워할 거다.
남아공에 갔을 때 거기 요하네스버그에 가면 조지해리슨이라는 금광을 발견한 이의 동상이 황금을 들고 환희에 찬 모습으로 서 있다.
거기에서 조금 더 가면 광산이 있는데, 거기 사진을 보면 어린애들이 지하 3300미터, 지열이 섭씨 60도 되는 곳에 가서 애들이 노동하고 있다. 밖에는 황금들고 환희하는 놈의 동상이 있고-. 이 두 개를 대비해서 사물을 보는 기본 관점들을 만들어내는 일- 고민을 많이 해야한다. 이렇게 노자 상당히 친근하고 매우 경쟁력있는 철학이다.
첫댓글 전에도 올리지 않았엇나요? 상선약수, 수선만물이 부쟁, 처중인지소오~~~~
백 번은 읽은 것 같은데 ~~~
머리가 불러오면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