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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로살리아 동정녀, 은수자(9.4)◀
△ 팔레르모의 성녀 로살리아 (Rosalia)
1.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인명: 로살리아 (Rosalia)
축일: 9월 4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은수자
활동지역: 팔레르모(Palermo)
활동연도: +1160년?
같은이름: 로살리, 로쌀리아, 로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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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설명 :
• 오래전부터 시칠리아(Sicilia)에서는 성녀 로살리아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되었으나 옛 순교록에는 그녀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녀 자신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비문은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40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는데, 그곳에는 "퀴스퀴나의 영주인 시니발디 백작과 로사의 딸인 나 로살리아는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이 동굴에서 살기로 결심하였다."라고 적혀 있었다.
· 이 비문과 전설에 따르면, 성녀 로살리아는 퀴스퀴나(Quisquina)의 영주인 시니발디(Sinibaldi) 백작과 로사(Rosa)의 딸로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그녀는 바실리오회의 수녀였다가 그 뒤에 몬테 코스키나(Monte Coschina)와 팔레르모 근처에 위치한 몬테 펠레그리노(Monte Pelegrino)의 동굴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운명하였다.
• 1624년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어 장엄한 행렬을 따라서 팔레르모로 옮겨졌고, 그 후로 팔레르모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1630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는 그녀의 이름을 로마의 순교록에 포함시켰다.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 날인 7월 15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하지만, 현재 축일인 9월 4일은 그녀가 죽은 날로 추정한 날이다.
· 그녀에 대한 공경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널리 퍼졌으며,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으로 해외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녀가 살았던 동굴들에 소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의 유해는 팔레르모의 주교좌 성당의 아름다운 소성당에 모셔져 있다.
팔레르모에 페스트가 퍼졌을 때나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성녀에게 기도해서 큰 피해를 모면한 팔레르모의 주민들은 성녀 로살리아를 특별히 페스트와 지진에서 구해 주는 성녀로 공경하고 있다.
그녀는 로잘리(Rosalie)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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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9월4일 팔레르모의 성녀 로살리아 동정 >
......... (안젤라 | 2010.09.01 Ud.)
▶ 축일 : 9월 4일
< 성녀 로살리아 동정 >
- Santa Rosalia Vergine, eremita di Palermo
- Santa Rosalia Vergine
- St. Rosalia of Palermo
(- 성녀 로살리아 동정, 팔레르모의 은수자
- 성녀 로살리아 동정
- 팔레르모의 성녀 로살리아)
- at Palermo, Sicily - c.1160 apparently of natural causes
(- 시칠리 팔레르모에서 출생 ~ 1ㅣ60년에 자연사)
- Rosalia = dal nome del fiore
(- 로사리아Rosalia = 꽃 이름에서)
*注: 위(한역韓譯 /"18.9.4 -아타시 韓)
• 13세기부터 시실리아에서는 성녀 로살리아 공경이 보편화 되었으나,
옛 순교록에는 그의 생애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스틸팅 신부의 연구에 따르면, 성녀 로살리아는 젊어서 고향을 떠나
시실리의 비보나 교외 몬떼 꼬쉬나의 어느 동굴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후일 그녀는 팔레르모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그녀는 이 도시의 주민을 구했기 때문에 그녀가 팔레르모로 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그녀의 은둔소 위에 큰 성당을 세웠다.
• 1624년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시에는 무서운 페스트가 발생하여
어떠한 치료 수단도 효과 없이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사람들도 매우 불안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우심 외에는 구할 길이 없다하여 모든 성인의 호칭 기도를 외우며 시가행진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주님의 묵시나 받은 듯이 제각기 다른 길로 열지어 가는 성가대원들이
성녀 로살리아의 이름을 호칭 기도문에 덧붙여 노래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이 행렬이 끝나자 그처럼 맹위를 떨치던 열병도 즉각 멈추었다는 것이다.
• 로살리아는 어렸을 때에 부친과 같이 팔레르모에 와서 부친이 왕궁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녀는 왕비 마르가리타의 총애를 받아 그 감독 하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성년이 되어 어떤 귀족에게 출가시키려는 무렵 로살리아는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우선 어떤 수녀원에 숨었다가 곧 인기척 없는 동굴 속에서 살았다.
그 소재지를 안 사람을 왕비 마르가리타 뿐이었으며,
그녀는 더 조용한 장소를 로살리아에게 택하여 주며 일생을 그 곳에서 지내도록 했다.
☞ 로살리아는 기도와 묵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비바람을 가릴 만한 집이 페레그리노 산 위에 있었는데,
때때로 한 신부가 찾아와 그곳에서 미사를 지내 주었다.
로살리아가 아무도 모르는 이런 산중에서 일생을 마쳤으므로
그녀의 죽음과 묘지를 안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묘소와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셨다.
팔레르모에서 시가행렬이 끝난 후였다.
성녀는 어떤 노인에게 나타나서
"페레그리노 산에 가 보세요, 거기에 내 무덤이 있습니다"했다.
노인이 가보니 과연 가르쳐 준 장소에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무덤을 헤쳐보니 한 부인의 시체가 나왔다.
△ 동굴안에있는 성녀 로살리아의 동상
-STATUE OF SANTA ROSALIA IN THE CAVE
•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과연 성녀 로살리아의 시체인가?
이런 의문을 둘러싸고 의사와 신부들이 면밀한 조사를 한 결과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다.
☞ 즉 묘지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돌 한개에는
성녀 자신이 새겼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새겼는지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퀴스퀴나 및 로제스의 영주 시니발도의 영양 로살리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동굴에 거처하기로 정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즉시 그녀를 주보 성녀로 결정했다.
성녀가 살던 곳에는 아름다운 성당을 건립하고,
주교좌 성당 옆에는 조그마한 성당을 세워 그곳에 성녀의 유해를 안치했다.
☞ 성녀 로살리아는 팔레르모 시민의 신뢰를 어기지 않고 주보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우선 전술한 페스트 종식을 시작으로 1693년의 대지진 때에도
구원의 손을 뻗쳐 다른 도시 촌락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났었지만 팔레르모 시민만은 그 참화를 면했다.
그 뒤 성녀 로살리아에게 대한 흠모는 각국에까지 퍼졌고,
특히 페스트와 지진에 대한 구원의 성녀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4.Occuli Omnium-베네딕도수도원
Occuli Omnium - Catholic Hymns, gregorian chant:
https://youtu.be/BB28bC7wZWc
▷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10월7일)
• 이 축일은 성 비오 5세 교황이 레판토 해전(1571년) 승리 기념일에 제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 군사들은 그 때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 이 축제는 하느님 아드님의 사람이 되심, 수난,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로사리오란 말은 장미 꽃다발(Rosario: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로살리아Rosalia 축일:9월4일
*로사리아Rosaria 축일:10월7일. 인창동성당게시판681번,1409번
ㅡㅡ끝.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