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눈물이 나네요...
얼마나 힘드셨으면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셨을까..
늘 정직함과 깨끗함을 내세우셨던 분이기에
더 많이 힘드셨을거에요
진실은 밝혀질겁니다 꼭.
항상 국민들 곁에 계셨습니다
항상 국민들을 위하고자 하셨습니다
강자에겐 더욱 강하고 약자에겐 더욱 약하셨던
유일하게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셨던 분이셨습니다
이렇게나 훌륭하신 분이셨는데..
대한민국에 이런분이, 이런 대통령이 또 나올수 있을까요?
오늘 당신의 소식을 듣고 비통함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이제는 사진으로만, 추억으로만 남게된 노무현님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꼭 하늘나라에선 행복하고 편안하게 쉬시길..
사랑합니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대통령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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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 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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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어머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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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 형님의 영향을 받아 고시에의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66년 10월에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 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6년부터 시작은 했지만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였다. 합격하고 나서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그 후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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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예비(자격)시험부터 준비했는데 책 살 돈이 없어 결국 울산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많아 밥값도 모자랐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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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또 그 기간 중에 믿고 따르던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 한 뒤 19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 시절 원주의 사령부에 있다가 전방부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에 고향 마을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연애 결혼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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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도 있습니다. 몇 길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동화속의 세계같은 그 속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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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부림’사건이었다. 이는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 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학생들의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이후 시국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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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요트반 학생들과 요트를 타던 것도 아예 그만 두었고, 잘 나가던 조세전문가의 길도 접게 되었죠. 그때 얻은 별명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인권변 호사 ‘노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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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 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렸고 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운동 에 전념하여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행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해 9월 대우조선의 이석규 씨가 파업중 거리시위를 나왔다 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일이 발생하자, 임금협상과 보상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측의 편에서 상담을 해주었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3일만에 구석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의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에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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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시절)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님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원하다가 운동가가 된 셈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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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노무현은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의 허삼수 씨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의 대정부질문, 노동위 등을 통 해 활발한 활동을 정개하였는데, 노동위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 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에서 정주영, 장세동 씨 등에 대한 증인 신문에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을 보여줌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었다. 이는 노무현을 대중정치인으로 만들어놓는 기반이 되었으 며 아직도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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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출마) “재야 몫으로 처음에 남구를 제의 받았는데,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 를 역제의했다. 마침 사람들이 피하던 지역이라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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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노무현은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도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민자당으 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낙선에도 불구 하고 그는 92년 12월의 대선에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다음해인 93년 3월 전당대회에 서는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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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위원 출마) “낙선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당원들이 나를 민주당의 가장 젊은 최고위원으로 뽑아준 것은 나의 낙선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보다 큰 시야에서 정치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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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노무현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다. 그가 고집해 명칭 속에 들어간 ‘실무’라는 단어가 뜻하듯이 이 연구소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정치인의 계보 사무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풀뿌리민주주의의 기본을 세우고 지 방화시대의 개발전략을 연구하는 명실항부한 연구소로 활동했다. 이 연구소는 오늘날 지방시대의 주역이 된 인 재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대통령 선거 공약이 되었던 지방화시대의 발전전략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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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실무연구소) “조직적으로 지방의원과 시민운동을 묶어보려는 노력으로 만든 것이고, 시민사회연구소로 개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민사회, 시민운동이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 는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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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지방동시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 에게 패배,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당시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도 우위를 보였고, 조 순 서울시장후보가 부시장으로 러닝메이트를 제안했지만, 이를 단념하고 다시 부산에 도전했던 것. 선거초반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김대중 총재의 사실상 정계복귀 와 지역등권론 등의 역풍으로 최종적으로는 낙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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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장 출마) “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민주당 깃발을 들고 도전했습니다. 부산시민들이 민주 당을 탈당하면 뽑아 주겠다고 권유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일 입니다. 정치인의 원칙과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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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고 나서도 노무현은 민주당을 지켰다. 이후 96년 15대 총선 에서는 민주당의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상임대표 : 김원기) 활동을 하다가 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통추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자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11월에 ‘정권교체’ 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대선 기간동안 시청률 1위의 TV찬조연설을 하여 국민의 정부 탄생에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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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추)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은 우리들의 무한한 꿈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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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은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갈등의 현장에 적극 나서서 중재와 조정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활동은 98년 8월의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의 건, 99년 삼성자동차 매각 협상 중재의 건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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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농성과 갈등이 장기화되어 그것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더 이상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인기를 의식한다’는 언론의 보도도 있었고, 일부에서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중재에 실패할 경우 제가 뒤집어 써야할책임과 비난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갈등의 현장이 바로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저의 생각을 바꿔놓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 중재에 성공했고 분규는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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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에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노무현은 경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의 수평적 토론문화 확산, 다면평가등 인사평가 시스템 등을 만드는데 주력해 공 직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 한편, 낮은 자세의 리더십으로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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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 “제가 결정하거나 우리 해양수산부 직원들이 결정하거나 그 결과는 비슷한 것 입니다. 채택할 수 있는 시스템은 비슷합니다. 그 시스템을 채택하는 과정을 그분들이 토론에 의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스스로 결정한 그 시스템을 그대로, 약속대로 했습니다. 제 불 편은 제가 받은 쪽지를 소화할 수 없었다는 불편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 프로세스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 분들이 인사에 대해서 결과적으로 불만이 있더라도 그것을 수용해 주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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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2002년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 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한 노무현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 민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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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수락연설)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 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 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 를 물려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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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선거운동 방식은 전통적 선거캠페인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 져왔다. 돈, 가신, 계보, 측근 없는 정치를 펼쳐 온 노무현은 국민이 후원금 을 내고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 국민들의 자발적 인 참여에 의해 60억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았다. 희망돼지 저금통, 카드 결제, 휴대폰모금, 희망티켓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진행된 모금 행사는 기존의 선거자금 모금방식을 뛰어 넘었으며, 미디어선거,인터넷선거, 정책 선거의 원칙과 결합돼 국민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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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유세)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 정치의 수준을 하루 아침에 일류로 바꾸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정치혁명이다. 저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이 정치혁명을 성공시키겠다. 우리 정치를 왜곡시켜온 분열의 지역주의를 청산하고, 제왕적 권위주의를 몰아내겠으며, 부정 부패 없는 깨끗한 정부를 만들 것이다. 국민이 주인되는 국민참여의 정치, 모든 지역과 계 층이 화합하는 국민통합의 정치,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는 신뢰의 정치, 깨끗하고 돈 안드는 투명한 정치를 실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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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선언으로 인해 선거의 결 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결국 노무현은 48.9 %의 지지를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뜨거운 소망이 이루 어낸 국민의 승리이며 쾌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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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저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신 민주당 당원 동지 여러분, 개혁국민정당 과 노사모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거듭거듭 감사드린다. 저의 당선을 위해 뛰어주시 지 않은 분들이나, 저를 반대한 많은 국민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 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분들의 대통령으로,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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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악이 멋있네....
눈물난다.....
감명 깊게 잘 보았네...
아 슬프다
가슴아푼 일이네 잘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