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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18일
북한 반(半)잠수정 여수 앞바다
로 침투 중 발각되어 남해서 격침
거제도 남방 100km
해상에서 인양되는 북한 반잠수정
북한 반(반)잠수정이 17일 밤 전남 여수앞바다로 침투중 해안초소에 포착되자 1백여km를 달아나다 18일 오전 거제도 남쪽 1백km 공해상에서 해군 함정에 의해 격침됐다.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반잠수정이 고정간첩 등을 대동 월북하기 위해 침투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이며, 반잠수정을 싣고 온 북한의 공작모선을 추적중이라고 18일 밝혔다.
반잠수정엔 공작원 및 승조원 4명 정도가 탑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반잠수정이 격침된 뒤 오전 8시10분쯤 현장 인근 해역에서 잠수복을 입고 수류탄 한 발을 소지한 시체 한 구가 수면 위로 떠올라 인양했다.
무장간첩의 시체를 분석한 중앙합동신문조의 관계자는 『무장간첩은 독약 앰플을 깨물었고, 그 뒤 소총으로 확인사살된 것으로 나타났다』며 『18일 새벽 4시반 우리 해군함정의 위협사격을 받은 뒤 도주하면서 잠수정에서 자폭한 듯한 폭음이 들렸다는 첩보도 있어 탑승원 모두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합동신문조는 시체로 발견된 무장간첩은 고정간첩을 데려오거나 공작원을 침투시키기 위한 호송 안내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북한의 반잠수정은 17일 밤 11시15분쯤 전남 여수시 돌산읍 임포리 육군 모 사단 해안초소 2km 앞에서 상륙을 시도하다가 해안초병 김태완(김태완.21) 이병에게 발각되자 동남해상으로 도주했다. 육-해-공군은 초계함과 고속정 등 함정 12척, p-3c 대잠초계기와 링스 대잠헬기 5대, 고속정, f-5f 전폭기, cn-235 수송기 등을 출동시켜 입체적인 합동작전을 벌였다.
해군은 18일 새벽 4시35분쯤 반잠수정과 5∼7km로 가까워지자 위협사격을 가했으며, 반잠수정이 기관총을 쏘며 응사하자 76mm 함포 40여발, 40mm 기관포 2천여발, 20mm 발칸포 1천5백여발을 쏜 데 이어 폭뢰 5발을 터뜨려 오전 6시50분쯤 첫 발견 지점으로부터 1백여km 떨어진 거제도 남쪽 1백km 지점 해상에서 격침시켰다.
▶ 2014년 오늘,
미국과 쿠바가 53년만에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2009년영-불 해저터널에 고속열차
유로스타 4편 고립
▶2008년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일방 상정
▶2002년정몽준의원, `노무현 후보지지
철회` 선언
▶2000년세계 최고층 건물(464.5m)
부산 롯데월드 착공
세계 최고층 건물이 될 부산 제2롯데월드가 2000년 12월 18일 옛 부산시청 부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본격 공사에 들어갔다. 2005년 12월 완공예정인 부산 제2롯데월드는 지하 7층, 지상 107층에 건물 높이 464.5m로 현재 세계 최고층인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92층, 452m)보다 12.5m 높다. 또 2001년 완공한 중국 상하이 세계금융센터빌딩(94층, 459m)보다도 5.5m 높아 한국의 새로운 명물이 될 예정이다.
그러나 508.1m인 대만 타이베이 금융센터가 2003년 예정대로 완공한다면 당분간 세계 두번째 높은 건물로 기록될 전망이다. 건설공사에는 1조2,000억원이 투입됐고 연면적은 46만4,555평방미터이다. 107층 중 18층~58층은 특1급의 월드호텔로, 60층~87층은 특1급 톱그레이드의 타워호텔로 차별화 할 예정이며 건물 외벽은 심플하면서도 초현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유리와 스테인레스강으로 장식할 계획이다.
* 부산 롯데타운 현재 계획은 108층, 510m 높이, 2019년 완공 예정.
부산 제2롯데월드 조감도.
▶2000년미국 신문재벌 랜돌프 허스트
사망
▶1999년스리랑카 폭탄테러로 대통령
부상, 3명의 장관 포함 32명 사망
▶1997년김대중 후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대통령 당선증을 받아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하고 있다.
▶1995년이수성 제29대 국무총리 취임
▶1992년제14대 대통령선거 실시.
김영삼 후보 당선
▶1991년노태우 대통령
한국의 핵부재 선언
노태우대통령은 18일 오후7시 "이 시각,우리나라의 어디에도,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춘추관에서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가진 한반도의 비핵화 관련한 발표 를 통해 이같이 핵부재 를 선언하고,"우리에 관한한 지난 11월8일 선언한 비핵화 정책은 완전히 실현됐음을 밝힌다"고 천명했다.
이로써 주한미군의 핵무기는 지난 58년 첫 배치된 이래 33년만에 완전 철수됐음이 공식 확인됐다.
노 대통령은 이어 "우리가 비핵화를 구현하고 남-북한 동시 핵사찰을 수용한 상황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사찰을 거부할 어떠한 명분이나 이유도 사라졌다"고 지적,"이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조치 협정을 조속히 체결,비준하여 아무런 조건없이 국제사찰을 수락하고 핵재처리 및 농축시설을 포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세계각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개발은 이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고 세계적인 핵확산을 촉진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중대사안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는 북한당국도 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믿으며,며칠후 열릴 판문점 회담에서 우리와 온 세계의 정당한 요구에 부응하는 조처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나는 올해안에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합의를 이루고,새해에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평화와 공동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1월8일 우리 정부는 핵무기를 제조 보유 저장 배비사용하지 않음은 물론,핵재처리 시설의 보유까지 포기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한바 있다.
이어 정부는 지난 11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주한 미군기지를 포함,남북한의 동시 핵사찰 실시를 제의했었다.
▶1989년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
협의회) 의장 한양대 임종석 검거
▶1984년구(舊)여권의원
민족중흥동지회 발족
▶1984년대처 영국수상 중국방문
▶1983년대전중앙시장 화재 115개
점포 전소
▶1983년청소년 탁구, 중국을 5:0으로
완파. 아주(亞洲) 정상차지
▶1982년국제축구연맹(FIFA) 북한에
2년간 국제축구대회 출전정지 명령
▶1981년한국-페루, 경제과학 및
기술협정 체결
▶1980년전 소련수상 코시긴 사망
▶1979년통신시설 확장에 관한
임시조치법 제정
▶1973년한국-방글라데시, 국교수립
▶1972년한-미간 국제전화 반자동화
▶1971년`스미스소니언 협정` 체결-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서
국제통화조정협정 서명
▶1965년한일수교 협상시작
14년 만에 비준서 교환
▶1964년한국-이탈리아,
로마에서 문화협정 체결
▶1964년브라운 주한미대사,박정희 대통
령을 만나 월남전에 한국군 파병 요청
▶1963년박정희 대통령,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大野)와 회담
▶1961년근로기준법 개정 공포
▶1961년인도정부, 포르투갈령(領)
고아를 접수완료
▶1956년유엔총회,
일본의 유엔 가입을 가결
▶1954년국회의원 집에 `남북평화협상
촉구 호소문` 투입사건
▶1950년캐나다 육군, 한국전 참전
▶1950년NATO, 유럽공동방위군 창설
▶1945년러치 미국 육군 소장,
미군정장관에 취임
▶1944년프랑스 ‘르몽드’지 창간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제일의 신문
`르몽드`지
▶1932년수정주의 사회주의 이론의
제창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망
▶1927년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소련 15차 공산당대회서 제명
▶1925년소련공산당 14차대회,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를 채택
▶1922년조선호적령 공포
▶1914년미국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선언
▶1913년빌리 브란트 출생
▶ 1908년 오늘,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설립.
나석주
출생 - 사망1892.2.4. ~ 1926.12.28.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 의사, 1926년 12월 28일 경성 시내에서 일본 경찰들의 포위망 속에 홀로 격전을 치르며 외친 유언
“저희들은 조국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나석주(羅錫疇, 1892.2.4~1926.12.28)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아버지 나병헌(羅秉獻)과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서북지방 책임자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설립한 양산(楊山)학교가 있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양산학교를 거치며, 몸과 마음이 굳센 독립투사로 다져진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이 지방까지 번지면서부터 청년이 된 나석주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활동을 시작한다.
3월 하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의 집에 6인조 권총강도단이 들었다. 이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도답지 않게 모두 최 부자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최 부자도 그제서야 좌정을 하고 냉정을 찾았다. 그때 한 복면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최 부자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히려 6인조 강도들이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너, 석주로구나! 그 복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춘부장 어른께서도 편안 하신가?”
깜짝 놀란 석주는 복면을 벗고 최 부자 앞에 조아렸다. 나머지 다섯 명도 얼굴을 드러냈다.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가 그들이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이 것밖에 없으니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나!”
최 부자가 ‘강도들’에게 내놓은 돈은 무려 630원(圓)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6인조는 크게 감동하여 큰 절을 드린 다음, 인사를 올렸다.
“저희들이 떠나고 나면 즉시 일경에 연락하여 권총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일경이 눈치 채면 봉변을 당하십니다”
6인조 강도단은 4월에도 다시 황해도 안악(安岳)군의 부호들인 김응석(金應石), 원형락(元炯洛)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그 활동이 신출귀몰하였다. 수사망이 좁혀오기 시작하자 나석주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20년 11월 22일이었다. ‘6인조 연쇄강도사건’은 영구미제(永久未濟)로 남았다.
나석주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보낸 편지. 나석주 의사가 북경에서 인편을 통해 상해에 있던 김구 선생에게 보낸 서한으로 선생의 안부를 묻고 계획 중인 일이 완전히 준비되지는 않았으나 조만간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
나석주는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을 다시 만난다. 당시 백범은 임시정부 경무국장(警務局長). 이때부터 나석주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원․의정원(議政院) 근무와 함께 한인애국단․의열단 가입으로 폭파 활동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이동휘(李東輝)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략전술을 연마했다. 1926년 나석주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명한 독립운동가인 김창숙(金昌淑)과의 만남이었다. 그 해 5월 김창숙과 김구는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함께 모색했다.
이들 두 거두(巨頭)는 ‘지금 무엇인가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 이때에 일정기관(日政機關)과 친일부호(親日富豪)를 박멸하여 국내 동포의 잠자는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방략(方略)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를 실행할 인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김구가 먼저 제의를 했다.
“나와 친한 결사대원으로 나석주, 이화익과 같은 용감한 청년이 지금 천진(天津)에 있다. 또 그곳에는 의열단원도 많으니 무기를 구입, 천진으로 가서 기회를 보는 것이 좋겠다.”
김창숙은 두 명의 조선 청년을 만났다. 그리고 계획을 설명했다. 둘은 거침없이 나섰다.
“우리들은 일찍이 한번 죽기로 결심했는데,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나석주로 결정이 되었다. 이화익은 섭섭한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김창숙이 말했다.
“백범도 그대의 장도(壯途)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과 동양척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해 무운(武運)을 비는 바이오”
‘중국 산동성 출신. 나이 35세. 이름 마중덕(馬中德)’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에 상륙한 이 중국인은 다름 아닌 나석주였다. 마중덕은 열차를 이용해 평안남도 진남포로 향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민족혼 일깨우려 단신으로 귀국하여 서울로…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고향을 떠날 때 한마디 이별의 말을 하지 못한 부모님과 부인, 아들․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향 길에서 그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가 고향 일대에 펼쳐져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나석주는 바로 발길을 서울로 돌렸다. 피눈물이 흘렀다.
1926년 12월 28일 중국인 전용여관 ‘동춘(同春)전’에 들었다. 날씨는 투명했으나, 조국의 겨울 바람은 차가웠다. 나석주는 아침밥을 든든하게 들었다. 그리고 낮이 될 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오가는 동포들의 표정이 어두웠고, 슬프게 느껴졌다.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굉음(轟音)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뒷벽 기둥에 던져진 폭탄은 불발(不發)이었다. 절망적인 생각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다. 폭탄을 입수할 때 시험을 하지 못한 점, 6개월간의 보관기관 중 뇌관에 녹이 슬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회한(悔恨)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다행히 일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나석주는 태연하게 정문을 나섰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 나석주 의사의 의거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지난해(1926년) 말 일어난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소개하기 위해 호외를 특별 발행했으며 ‘게재금지 금일해금’이라고 ‘동아일보’ 제호 밑에 설명하고 있다. “백주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 동척(동양척식회사)과 식은(신산은행)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하야 일거에 7명 저격”이라고 큰 제목을 뽑았다. 전면을 모두 나석주 의사 소개에 할애했다.
“2천만 민중이여 분투하라.” 서울 을지로에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 끝에 장렬하게 자결
동척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나석주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1층에서 일본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 2층으로 뛰어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에게 사격한 뒤 놀라 도망가는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 기술과장실에 나머지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 쏜살같이 1층으로 뛰어내려오며 2명의 일본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거리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게 또 웬일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이, 시야가 노랗게 변해갔다. 황금정(黃金町)(지금의 을지로1가) 쪽에서 달려온 경찰을 쏘아 쓰러뜨릴 때까지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황금정2정목에 이르렀을 때에는 일경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졌다. 나석주는 운집한 군중을 향해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는 3발을 쏘았다. 이어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격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나석주는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田畑唯次] 등을 사살한 후에 자신이 지녔던 총으로 자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02년영국 보통교육령 반포
(의무교육 실시)
▶1890년라디오 발명자 에드윈 H
암스트롱 출생
▶1865년미국, 노예제 공식 폐지
미국 노예제도 폐지 - 인종 장벽에 ‘균열’
11월4일 미국 흑인들은 울었다. 오랜 차별과 핍박의 설움을 눈물 속에 녹여냈다. 검은 피부를 가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이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라는 데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밤 여러분이 그 답을 보여줬다”며 자신의 승리가 미국의 승리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이 본래 이런 나라는 아니었다. 1619년 아프리카 흑인들이 네덜란드 배를 타고 버지니아로 팔려온 이래 미국은 오랫동안 “유럽계 백인들에게만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였다. 유럽계 백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부렸고, 1808년 노예 수입이 불법화된 뒤에도 노예와 그 자식들을 ‘소유’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미국을 향해 “평등에 토대를 둔 제도를 갖고 있다고 공언하면서도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라고 비판했다.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1833년)할 즈음 미국에서도 노예제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폐지 움직임이 힘을 얻기 시작한 계기는 노예제 도입의 동기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상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 자유로운 신분의 노동자가 필요하게 된 반면, 면화 농업 중심의 남부에서는 농장에 거주하며 집중적으로 노동할 노예가 절실했다. 이 같은 갈등은 1861년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9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하고 1863년 1월1일 ‘노예 해방령’을 공포한다. 이후 남부의 흑인들이 대거 북부로 넘어오고 유럽 국가들은 남부동맹을 지원하려던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상당수 사가(史家)들은 노예 해방령이 링컨의 정치·군사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예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인 1865년 12월18일 “노예제는 미국 연방 및 미국 연방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지역에서도 금지된다”는 내용의 수정헌법 13조가 의회를 통과했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된 것이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까지 함께 사라지지는 않았다. 1956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까지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들의 옆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투표·교육·고용·공공시설 이용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것은 64년의 일이다.
미국 워싱턴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노예를 묶었던 쇠사슬
▶1859년이준 열사 출생
▶1811년홍경래의 난
▶1786년독일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출생
▶1593년송강 정철
사망318년중국 서진 멸망
출처 행디의행복블러그,솦투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