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파병 이유
유엔(UN)이 한국전쟁에 개입(介入)을 결의(決意)하고 회원국(會員國)들에게 동참(同參)을 권유(勸誘)하자 많은 국가들이 호응(呼應)하고 나섰습니다.
태국(泰國, Thailand)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유엔의 요청(要請)을 받아들여 7월 20일 1개 여단 규모인 지상군(地上軍) 4,000명의 파병 의사(意思)를 밝혔습니다.
당시 미국, 영국처럼 공산 세력(共産勢力)의 팽창(膨脹)을 저지(沮止)하기 위해 참여(參與)한 경우도 있었지만
사실 모든 참전 국가들의 입장(立場)이 같았던 것은 아니었고 태국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50년 방콕의 시내 전경 모습
태국군의 파병(派兵)을 주도(主導)한 인물은 당시 수상(首相)이었던 피분 쏭크람(Plaek Phibunsongkhram, 1897년 7월 14일~1964년 6월 11일, 또는 피분 송크람)이었습니다.
군인(軍人)이었던 그는 1932년 민족주의(民族主義)를 주창(主唱)하며 쿠데타(Coup d'État)로 정권(政權)을 잡은 후, 독재(獨裁)를 펼치다가 제2차 대전 당시에 미묘(微妙)한 행적(行蹟)을 보였습니다.
나찌와 파시즘에 호의적(好意的)이던 쏭크람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시작되고 1942년 12월 일본(日本)으로부터 위협(威脅)을 받자 차라리 동맹(同盟)을 맺고 태국을 추축국(樞軸國)에 가담(加擔)시켜 안위(安危)를 보존(保存)하는 방법(方法)을 선택(選擇)하였습니다.
↑한국 파병을 주도하였던 피분 쏭크람
하지만 전세(戰勢)가 불리(不利)해지자 그는 반대파(反對派)이자 반일 노선(反日路線)을 견지(堅持)하던 프리디 파노몽(Phra Phimonlatham, 1903-1998) 등의 정적(政敵)들에 의해 1945년 축출(逐出)되어 전범(戰犯)으로 체포(逮捕)되었습니다.
그 결과 태국의 추축국 가담은 국가나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로지 피분의 단독 행위(單獨行爲)에 의한 것이라는 명분(名分)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영국(英國)의 반대(反對)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를 수용(收用)하면서 가까스로 패전국(敗戰國)이 되는 위기(危機)를 모면(謀免)하였습니다.
↑태국 왕궁 앞을 지나는 일본군 전차부대
그런데 1946년 석방(釋放)된피분은 이듬해 추종 세력(追從勢力)을 규합(糾合)하여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태국을 패전국이 되지 않도록 적당히 사면(赦免)해준 미국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혹(困惑)스러운 일이었고,
여차하면 외세(外勢)의 개입을 불러올 가능성(可能性)도 충분(充分)하였습니다.
하지만 노회(老獪)한 그는 냉전(冷戰)이라는 새로운 환경(環境)을 이용하여 이번에는 철저(徹底)한 반공친미(反共親美政策)을 추구(追求)하며 권력(勸力)을 보존(保存)하였습니다.
↑1955년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는 피분 쏭크람
동남아(東南亞) 일대에 준동(蠢動)하는 공산 세력(共産勢力)의 진압(鎭壓)에 앞장서는 방법 등으로 미국의 신임(信任)을 얻고자 애쓰던 그에게 마침 벌어진 한국전쟁은 좋은 기회(機會)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엔의 요청(要請)이 있자마자 대규모 병력(大規模兵力)의 파견(派遣)을 즉시 약속(卽時約束)하였는데, 이는 미국에 이은 두 번째 파병 선언(宣言)이었습니다.
먼저 연락 장교단(連絡將校團)을 급파(急派)하고 육, 해, 공군을 모두 참전(參戰)시키기로 하였을 만큼 적극적(積極的)이었습니다.
↑1950년 10월 22일 한국으로 가기 위해 수송선에 승선하는 태국군
↑복장과 무기가 새로이 바뀐 6.25 참전 태국군의 모습 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태국의 국내 사정(國內事情)과 상관없이 위기(危機)에 빠진 대한민국(大韓民國)에게 태국군(泰國軍)의 참전은 천군만마(千軍輓馬)와 같았던 구원(救援)의 손길이었습니다.
사실 정부의 명령에 따라 파견되었지만 태국군에게 그러한 정치외교적(政治外交的)인 이유는 별로 중요(重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부여(附與)된 열심히 싸우라는 임무수행(任務遂行)에만 철저(徹底)했고 이러한 노고(勞苦)는 이후 두고두고 길이 빛날 용맹(勇猛)한 전설(傳說)을 한반도(韓半島)에 남겼습니다.
↑1950년 11월 17일 대구의 보충대에서 검열을 하는 모습
그런데 본진(本陣)의 파병이 예정(豫定)되었던 1950년 10월이 되면서 한국전쟁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었습니다. UN군이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으로 전세(戰勢)를 일거에 역전(逆戰)시키면서 12월이면 종전(終戰)도 가능(可能)하리라는 예상(豫想)이 감돌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미군조차도 본국(本國)에 군수 지원(軍需支援)을 줄여달라고 요청(要請)하고 내부적(內部的)으로 미 2사단을 제일 먼저 철수(撤收)시킬 부대로 낙점(落點)하는 등 전황(戰況)을 낙관적(樂觀的)으로 예상(豫想)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즐거운 모습으로 북진 중인 호주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최초 1개 여단(旅團)으로 예정되었던 태국군의 규모도 대폭 축소(大幅縮小)되었고 오늘날 평화유지군(平和維持軍)처럼 전후 처리 임무(戰後處理任務)만 수행할 것으로 예측(豫測)되었습니다.
마침내 10월 22일,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地上軍)과 의무대(醫務隊)로 구성된 원정군(遠征軍)이 출항(出航)하였고,
16일간의 항해(航海) 끝에 11월 7일 부산(釜山)에 도착하여 바로 대구(大邱)에 위치(位置)한 유엔군 보충대(補充隊)로 이동(移動)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전쟁은 이상해지고 있었습니다.
급격히 변한 전선
태국군이 한창 바다를 건너던 중인 10월 26일,
한반도 북부(北部)에 중공군(中共軍)이 출몰(出沒)하였고 그것은 한국전쟁이 전혀 새로운 국면(局面)으로 빠져들게 되는 신호탄(信號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한 11월 7일이 되었을 때 최전선(最前線)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낙관적(樂觀的)이었지만 자칫 종전(終戰)은커녕 전쟁이 엉뚱한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는 분위기(雰圍氣)였습니다.
↑한국 도착 직전에 중공군이 출몰하며 상황이 급변하였습니다
그런데 후방(後方)의 보충대(補充隊)에서 전열(戰列)을 정비(整備)하던 태국군은 곤혹(困惑)스러움을 느꼈습니다.
11월 중순이 되었을 때 대구 지역은 늦가을이었지만 방한복(防寒服)이나 장비(裝備)라고는 평생 구경도 못해본 열대지방(熱帶地方)에서 온 그들에게 자고나면 급속히 떨어지는 한국의 기온(氣溫)은 상당히 생소(生素)하고 불편(不偏)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앞으로 한반도에서 겪을 고통(苦痛)에 비한다면 아직 약과(藥果)에 불과(不過)하였습니다.
↑대구에 위치한 보충대에서 군장 검사를 하는 모습
전선(戰線)의 상황(狀況)이 악화(惡化)되자 미 8군은 아직 현지 적응(現地適應)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태국군에게 즉각 북(北)으로 이동(移動)하여 후퇴(後退) 중인 아군(我軍)을 엄호(掩護)하라는 명령(命令)을 하달(下達)하였습니다.
예정했던 1개 여단(旅團)보다 줄여 파병(派兵)하였을 만큼 낙관적(樂觀的)이었던 전망(展望)은 이처럼 다급(多級)하게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태국에서 배를 탔을 때와 부산에 내렸을 때의 상황은 180도로 달랐고 오히려 아군은 단 한명의 병사(兵士)도 당장 아쉬운 지경이었습니다.
↑평양에서 철군하는 미 8군의 모습
11월 26일, 중공군(中共軍)의 대대적(大大的)인 2차 공세(攻勢)가 재개(再開)되자 아군은 미련 없이 평양(平壤)을 포기(抛棄)하기로 결정(決定)하였을 만큼 전황(戰況)이 극도(極度)로 불리(不利)해졌습니다.
이처럼 중공군에게 놀란 아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기 바빴고 이런 행렬(行列)에는 남으로 향하는 수많은 피난민(避難民)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태양의 나라에서 달려온 태국군은 후퇴하는 아군을 돕기 위해 북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북으로 이동 중인 태국군, 지원을 받아 미군식으로 복장과 장비가 바뀌었습니다
1950년 12월 5일,
허겁지겁 개성(開城)까지 북상(北上)한 태국군은 이곳에서 철수로(撤收路)를 엄호(掩護)하는 임무(任務)에 투입(投入)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다가오고 38선 이북(以北)에서 아군의 방어(防禦)가 힘들어 보이자 개성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12월 13일, 수원(水原)으로 이동하여 미 8군의 예비(例批)가 되어 다시 부대를 정비(整備)하였습니다.
이처럼 태국군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 달 동안 종횡무진(縱橫無盡) 정신없이 달려 왔습니다.
↑부산에 정박한 태국 해군의 수송선, 태국은 육, 해, 공군을 모두 참전시켰습니다
바쁘게 뛰어 다녔지만 태국군은 정작 교전(交戰)을 벌이지 못하였습니다.
중공군의 2차 공세 당시에 아군이 택한 전략(戰略)은 최대한 접촉(最大限接觸)을 거부(拒否)한 체 북위(北緯) 37도선(導線)까지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에 대한 공포(恐怖)가 너무 커서 벌어진 결과(結果)였습니다.
청천강(淸泉江)에서 한강(漢江)까지의 거대한 공간(空間)을 그냥 포기하면서 적들이 아군 추격을 오히려 힘들어 하였을 만큼 피아간(彼我間)의 간극(間隙)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1.4 후퇴를 불러온 중공군의 3차 공세도
중공군(中共軍)이 정월 공세(正月攻勢)로 불린 3차 공세를 개시(開始)하자 태국군은 1월 2일 고양군 신둔리(高陽郡新芚里) 지역을 담당하던 영국군 29여단에 배속(配屬)되어 방어전(防禦戰)에 나섰습니다.
1월 3일,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여단 지휘소(旅團指揮所) 부근으로 침투(浸透)하자 이곳을 담당(擔當)하던 태국군들은 참전(參戰) 이후 처음으로 교전(交戰)을 벌여 중공군 격퇴(擊退)에 성공(成功)하였습니다.
이후 1월 4일,
서울 소개(疏開)가 완료(完了)된 후 태국군은 여단 주력(旅團主力)과 함께 한강(漢江)을 건너 다시 수원(水原)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매서운 한반도의 겨울은 태국군에게 공포였습니다. 1.4 후퇴 당시의 사진만으로도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당시 태국군에게 적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겨울 추위는 끔직한 공포(恐怖),
바로 그 자체(自體)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이런 날씨를 극복(克服)하는 방법(方法)을 그들은 몰랐고 당연히 전투력(戰鬪力)이 감소(減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1.4후퇴가 벌어진 1951년 1월은 한국인들도 고통(苦痛)스러워하였을 만큼 기록적(記錄的)인 혹한(酷寒)이었습니다.
당연히 평생(平生) 상하(常夏)의 나라에서 살아온 태국 병사들에게는 지옥(地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