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2000루피아에 얽힌 영웅담
2000루피아 앞면의 초상화는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인 술탄 안타사리(Antasari)
지난 5월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의 방한으로 한-인니 관계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지하자원과 3억 가까운 인구 그리고 지정학적인 위치 등 여러 면에서 인도네시아는 한국이 놓치면 안 될 국가 중 하나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부족한 것 같다. “2억을 넘는 인구에 1만여개 섬으로 이뤄진 이슬람 국가 아니야?” 라고 넘어가면 안 된다. 인도네시아는 그 이상이다.
다민족-다종교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으뜸 과제는 사회통합이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87%가 이슬람교이지만, 기독교·불교·힌두교 등도 허용되며 민족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사회통합을 위해 동원한 몇가지 대책이 있다. 하나는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처음으로 제시한 헌법의 기본원칙인 ‘판차실라’다. 판차실라는 고대어로 5개의 원칙이라는 의미다. 다섯가지 원칙은 △일신교 신앙 △정의와 문화적인 인간성 △인도네시아의 단결 △합의제와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인도네시아 국장(國章)에 있는 독수리 위에 보이는 5개의 상징이 판차실라 원칙을 의미한다. 즉 별은 일신교 신앙, 사슴은 정의와 문화적인 인간성, 나무는 인도네시아의 단결, 버팔로는 합의제와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 그리고 쌀과 목화는 국민들 간의 사회정의를 상징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일신교의 개념이다. 즉 일신교는 이슬람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과 함께 총 6개 종교를 일컫는다. 개신교·천주교·힌두교·불교·유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는 국가영웅(Gelar Pahlawan Nasional Indonesia)이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는 17세기 말기부터 19세기초까지 현지인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지속됐다. 이 시절 식민지 세력과 전쟁을 주도하던 지도자들이 이들 영웅의 명단에 속해 있다. 이들 영웅의 명단에는 거의 모든 민족과 종교 지도자가 망라돼 있다. 인도네시아는 화폐에 영웅들을 담고 있다. 1000루피아에서 10만 루피아까지 총 7가지인 인도네시아 지폐에서 앞뒷면에 실린 아이템들에는 지역과 민족이 함께 소개돼 있다.
각국 화폐 위에 실린 인물을 중심으로 근대사 건국 주역들을 다룬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를 최근 펴낸 필자는 이 책에서 인도네시아 화폐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매거진N>에는 필자의 책에서 다루지 않은 2000루피아를 소개한다.
2000루피아 앞면의 초상화는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인 술탄 안타사리(Antasari)다. 그의 재임기간은 단 7개월로 매우 짧지만 영웅적 삶은 지금껏 숱하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남부 칼리만탄 주의 반자르 술탄국 왕자였다. 증조할아버지대까지 술탄이었으나, 아버지는 술탄이 아니었다. 안타사리는 일신의 영달보다 국가의 미래에 더 많이 관심을 쏟았다. 당시 인도네시아 남부 대부분을 식민지로 점령한 네덜란드는 북부로 향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북부 술탄국들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그 지역마저 식민지로 강탈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57년 반자르 술탄국의 아담 술탄이 사망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탐지드를 술탄으로 즉위시켰다. 히다야트 왕자를 술탄으로 기대했던 반자르 사람들은 크게 반발했다. 반발은 곧이어 내전으로 발전했다. 내전은 히다야트 왕자의 즉위로 마무리되었지만, 네덜란드는 이를 기화로 2년 뒤인 1859년 반자르 술탄국를 침략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가 동남아를 식민 지배하기 전에는 인도네시아 지역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술탄국이 서로 경쟁하며 분쟁과 전쟁을 벌였다. 안타사리는 반자르 술탄국의 공식 지도자는 아니던 시절에도 주변 술탄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동맹관계를 맺으며 네덜란드에 저항했다. 제국주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은 안타사리는 네덜란드 군대로부터 강화제의를 받을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히다야트 술탄이 네덜란드 군대에 잡히고 망명을 가자, 안타사리는 1862년 마침내 술탄이 되었다. 당시 칼리만탄 섬에서 네덜란드 군대를 패퇴시킨 지도자는 그가 유일했다. 이에 반자르 사람들뿐 아니라 칼리만탄 섬 주민들도 그를 영웅으로 숭앙했다. 하지만 영웅 안타사리도 자신에게 닥치는 운명은 이기지 못했다. 그는 그해 10월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반자르 술탄국이 예전에 존재했던 칼리만탄 지역에 관한 팁 하나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칼리만탄 지역은 말레시아와 부르네이가 위치하는 보르네어 섬의 남부를 말한다. 보르네어라는 이름에 이어 부르네이라는 나라까지 있어서 국제적으로 이 섬을 ‘보르네오’로 규정하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 큰 섬을 칼리만탄이라고 한다. 똑 같은 섬의 이름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각각 다른 점을 보면 양국 사이에 영토분쟁이 있었다고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0루피아는 앞면에는 안타사리와 반자르 사람들이 등장한다면 뒷면에는 다약족 혹은 다약 사람들이 나온다. 2000루피아 뒤에 실린 그림에는 춤추는 사람들 모습이 있다. 이 춤은 다약족의 전통춤이다. 다약족도 칼리만탄 섬의 대표민족 중 하나다. 이 민족의 대다수는 기독교나 자기네 전통 종교인 ‘카하린간’(Kaharingan)교를 신봉한다. 카하린간교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힌두교지만, 소를 희생시키는 점에서는 전통 힌두교와 다른 모습도 있다. 카하린간교에는 재미있는 소재가 많아 이것만 다뤄도 상당한 분량이 될 것이기에 다음 기회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