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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특권의 유혹
1999년 1월 나는 인도의 뭄바이에서 사우디아라비아항공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를 거쳐 런던까지 갈 예정이었다. 나는 뭄바이 공항에 도달해서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했다. 대략 일흔다섯 명이 탑승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작은 여행가방을 든 인도 남자들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인도와 같은 곳에서 대부분의 노동력을 수입하는데, 이 747기가 아라비아해 상공을 가로질러 오가며 주로 이주 노동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나는 통근을 위해 비행기를 타려는 인도 남자들이 길게 늘어선 줄 끝으로 갔다.
인도에서 모든 줄 서기가 그렇듯이, 이 줄도 앞뒤로 빽빽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한낮의 열기로 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가 우리 없이 이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별로 급할 것은 없었다. 멀리 떨어진 카운터에서 여행객들의 탑승 수속을 담당하는 직원은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오래 기다릴 각오를 했다.
그런데 5분도 채 안 돼서 그 직원이 카운터를 나오더니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와서는 “저와 같이 가시죠”라고 말했다.
당신이 집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데 항공사 직원이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베버가 말한 헤어샤프트가 실제로 적용되는 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따라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일흔 다섯 명의 인도 남자들을 지나 줄 앞쪽의 카운터로 갔다. 그는 말 한 마디 없이 내 여권을 가져가 살펴보고는 탑승권을 출력하고서 “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 마지막 말을 들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내 파워 지도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빠져 있는지에 대해 뭔가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내가 방금 혼자만 구별되어 곧바로 새치기를 하라는 효과적인 명령에 따랐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당황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층젹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내 앞에서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 짧은 말 한마디라도 할까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가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줄 앞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는 이렇게 안 해요!”
하지만 내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져서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어 나갈 때, 그 줄에 남아 있는 남자들에게서 놀라움이나 불쾌감을 조금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가 줄 앞으로 안내받는 것에 놀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 그 상황을 예상했다는 것을 점차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나보다 훨씬 전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특권의 파워였다.
특권의 파워
특권은 특별한 종류의 파워다. 그것은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파워다. 사실, 오직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나마 의식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특권은 그것을 가진 사람이 조금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을 위해 그냥 작용한다.
내가 알기로 특권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과거의 성공적 파워 행사에 따르는 지속적 혜택이다. 특권은 과거의 파워 행사의 결과로 그저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우리가 얻으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는 모든 좋은 것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단순한 예로 책의 저자에게 지불되는 인세가 있다. 출판사가 책을 판매하여 수익을 얻으면, 저자의 작품에 대한 대가로 저자에게 수익의 일정 비율을 지불한다. 때로는 출판사가 저자에게 인세를 ‘선금’으로 지급하기도 하는데(이렇게 사전에 지불되는 금액이 특별히 눈에 띌 만큼 크면 뉴스에 등장한다), 출판사는 선금을 충당할 만큼 충분한 양의 책을 팔고자 한다. 현실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기는 하나 만약 작가와 출판사 모두 운이 좋다면, 책이 예상보다 더 잘 팔려서 선금을 충당하고도 계속되는 판매로 발생하는 수익들은 인세의 형태로 지불된다.
책을 쓰는 것과 출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의 즐거운 유산인 “그렇게 될지어다”와 “우리가 만들자”의 순간들로 가득한, 창조적 파워의 특정 행위 또는 일련의 행위다. 그런데 인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또는 모든 창조적 작업이 끝난 뒤에야 지불된다는 것이다. 만일 선금이 지급되었다면 인세가 지불되기까지는 2년이나 3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책의 수명이 길다면, 인세를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받을 것이다. 당신이 오래전에 한 작업에 대해 해마다 인세를 받는 다는 것은 놀랄 만큼 기분 좋은 경험이다. 책은 오래전에 출판되었고 당신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없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들을 섬기면서 새로운 수익을 발생시켜 주므로 당신은 수입의 물줄기를 즐기게 된다.
책을 쓴다는 것은 파워의 행위이며, 적어도 꿈 많은. 초보 작가들에게는 아마도 거의 실현되기 어려운 이 가상 상황에서는 , 성공적인 파워 행위다.
파워 행사가 끝난 이후로도 오랫동안 계속 혜택을 받는다는 점에서, 인세를 받는 것은 특권의 경험이다.
인세와 지대
인세는 충분히 기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보다 더 적게 요구하는 다른 형태의 특권도 있다. 인세를 벌기 위해서는 어쨌든 실제로 책을 써야 한다. 그러나 실제 저술 작업의 불편함과 어려움 없이 책 쓰기의 혜택을 모두 얻을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한 가지 방법은 성공한 작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저작권법 덕분에 인세는 작가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 나올 수 있다. 그 작가의 자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좋은 부모를 만났다는 행운을 누리면서, 과거에 그들 자신이 일구어 낸 성공적 파워 행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파워 행사로 인해 더 순수한 형태의 특권을 지금 누린다. 사실, 모든 유산이 바로 특권의 예가 된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낸 작업물이 충분히 성공적이어서 그들 자신이 사는 동안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큰 풍요를 생산한다면 그들의 상속자들은 그것을 위해 일할 필요 없이 그 풍요의 지속적인 혜택을 받는다.
창조적 파워 행위가 성공한 이후에 계속 지불되는 금액을 ‘로열티’(royalty)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본래 로열티를 받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왕족(royalty)이었다. 왕가의 일원들은 그들의 땅과 그들의 백성의 수고에 세금을 부과하는 특권을 대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형태의 다른 특권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재계에서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지주에게 지불하는 지대와는 다르다.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시장 지배력’(market power)이라고 부르는것을 측정할 때 ‘지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의 능력인데, 특정한 상황에서 그 사람이 자기 일을 할 때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대가를 지불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출판 시장에서 프로 스포츠계로 이동해야 한다. 모든 프로 스포츠는 우리 세상에서 경제적 지대의 가장 환상적인 본보기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프로 선수들은 필드에서, 코트에서, 경기장에서 그들의 실력을 사용하는 데 대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는다. 영국의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2007년에 로스엔젤레스 갤럭시와 계약을 체결했을 때 그는 매년 500억 원을 약속받았다. 1년 동안 35번의 경기에 대해 그가 받는 돈은 한 경기당 14억원, 또는 매 경기 1분당 대략 1,555만원이다. 베컴 및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시장이 그들의 기술을 아주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이러한 환상적인 액수를 받는다.
만약 당신이 이미 의심할 여지 없이 기량이 뛰어난 축구 선수였던 14세의 데이비드 베컴을 ㅁ나나 그에게 성인이 되면 축구 한 경기당 얼마의 돈을 요구할 것인지 묻는다고 해 보자. 경기당 200만 원? 아니면 2,000만 원? 아마도 소년 베컴은 야심 차고 자신만만했을 것이고, 어쩌면 한 경기당 1억 원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한 경기당 14억 원은 받아야겠다고 주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데이비드 베컴이 축구를 사랑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최소한 14세의 베컴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는 것은 우리네 인생에서 보기 드문 선물이다. 그는 확실히 14억 원보다 덜 받고도 경기를 뛰었을 것이다. 그가 받아야겠다고 주장하는 금액과 국제 축구 시장에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드는 그의 실제 능력 사이의 차이가 바로 경제학자들이 지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대는 그것을 벌기 위해 추가 작업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다. 데이비드 베컴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경기를 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이 두 배 또는 열 배를 받는 데는 창조적 파워의 어떤 행사도 추가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지대는 파워 행사에 대한 일종의 부자연스럽게 풍부한 보상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많은 사람이 일하지 않고도 급여가 나오는 경제적 지위를 찾는 ‘지대 추구 행위’에 참여하려 한다고 말한다. 사실, 지대를 받는 것은 신과 같아지는 경험이다. 일할 필요도 없고 위험을 무릅쓰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필요도 없이 당신은 과도한 보상을 받는다.
인세와 지대는 종종 함께 간다. 책이 잘되었을 때 받는 추가적 인세 때문에 저자들이 창조적 파워를 더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인세는 기분 좋은 놀라움이고 예기치 못한 보너스다. 그래서 인세는 작가 세계의 지대다. 즉 예기치 않게 더 많은 돈이,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 없이 지불되는 것이다.
베컴 같은 스타들이나 또는 기대치 않게 성공한 책의 저자들에게 지대가 지불될 때, 우리 대부분은 질투를 느끼며 떠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대 추구가 항상 그렇게 온화한 것만은 아니다. 기업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규를 만들거나 경쟁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종종 지대를 추구하는 행위다. 그들이 자신의 일을 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보상, 즉 현실의 어려운 작업에 투자하기 보다는 곧바로 이윤을 발생기킬 수 있는 순수하고 비생산적인 초과 수익이 그것이다. 정부의 타락한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뇌물을 요구하면서 총 수입에서 지대를 빼내지만, 종종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고 자신이 급여를 받는 이유인 본래의 업무 수행조차 하지 않는다. 지대는 때때로 하나님의 진정한 형상을 지녔다는 표지가 될 수도 있지만 신 행세를 하는 것의 신호가 될 수도 있다. 지대의 근거가 선하든 악하든, 지대가 축적되면 특권이 된다.
특권의 중립
과거의 성공적 파워 행사에 따르는 지속적 혜택으로서의 특권은 그 파워의 행사가 창조적인지 억압적인지, 하나님 형상을 지닌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우상숭배와 불의에 뿌리박혀 있는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실, 특권의 근거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나는 영어를 쓰는 원어민으로서 내가 얻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엄청나게 혜택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특권의 정의다. 나는 풍부한 문학 전통, 여러 세대에 걸친 재능 있는 스승들, 그리고 앵글족과 색슨족의 때때로 영광스러웠던 모든 역사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나는 또한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진출의 유감스러운 역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영합하는 서구 미디어의 지배, 미국 기업들에 유리한 무역 조약, 여행용 전대를 둘러찬 수백만의 미국 여행자들로부터도 혜택을 받았다. 선한 파워 행사로부터 받는 혜택과 후회스럽거나 더 나쁜 파워 행사로부터 받는 혜택을 구별할 도리는 없다. 그것들은 모두 혜택이다. 그것들이 모두 특권이다.
특권은 나쁘지 않다. 반대로 그것은 혜택의 형태를 띤다. 그리고 특권은 반드시 배타적인 것도 아니고 널리 공유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행사된 셀 수 없는 문화적 파워로부터 혜택을 받는다. 실내에 설치된 수도 배관부터 킹제임스 성경 번역까지, 그리고 독이 있어 보이는 토마토를 최초로 용감히 먹어 보고는 매우 맛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문화적 유산은 이런 의미에서 특권이고 모든 사람은 지배적인 문화에 속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의 부모나 더 먼 선조들이 과거에 행사한 파워로부터 혜택을 받는다. 아이작 뉴턴은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파워 행사는 많은 경우 우리의 특권을 이용해서 우리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게 함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특권은 나쁘지는 않다 해도 여전히 위험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는 진정한 파워 행사가 아닌 다른 많은 목적을 위해 특권의 혜택을 이용할 수 있다. 진정한 파워 행사는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우리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특권을 이용하여 위험으로부터 차단되고 때로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차단될 수 있다. 내 유창한 영어 실력에 의존해서 나는 널리 여행하면서도 다른 언어를 이해하거나 다른 언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인세의 형태로 충분한 지대를 받는 저자든 다시 글을 쓸 필요가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창조성의 소명을 가진 저자에게는 좋은 것이 아니다. 특권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삶은 점점 더 여려 겹의 방어막에 싸여 더 많은 보호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서 점점 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특권은 너무나 쉽게 모습을 감추기 때문에 위험하다. 뭄바이 공항에서 겪었던 사건은 그 이후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선 그 줄 앞에 끼어들기에 합당한 일을 나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그런 대접을 받기에 더 합당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합당한 것보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넘치는 무임승차권이라는 특권과 지대의 수혜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은 이것이다. 얼마나 자주, 나는 줄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줄의 맨 앞에 서게 되었을까? 나에게는 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쾅 소리를 내며 닫혀 버리는 문을 통해 나는 얼마나 자주 걸어 들어갔던가? 특권의 삶에서 내가 가로챈 줄이 얼마나 많을까?
당신이 얼마나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의 피부색이라는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쇼핑몰이나 가게에서 경비원과 문자 그대로 말 한마디도 섞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친구들 대부분은 아이비리그에서 학위를 받고 나보다 더 높은 지위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가게에서 경비원이 따라오거나 실제로 검문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들이 내게 이런 경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의 상태에서 특권은 눈이 멀게 하고 우리의 신 행세를 태평스럽게 지속하게 하면서도 매일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모욕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특권의 공포
많은 미국인들에게 2001년 9월 11일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얼음장 같은 위험과 위협의 공포 속으로 갑자기 내던져진 듯한 날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도심 테러와의 조우는 그보다 10년 더 일찍 뉴욕의 펜실베니앙역에서 일어난 9월 11일의 공격만큼이나 그 자체로 불길했던 한 사건이었다. 1992년 5월 1일 나는 브롱크스에서 열린 뉴욕시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기차를 타고 미드타운 맨해튼에 도착했다. 나는 열차에서 내려 그 아수라장에 발을 디뎠다.
그 이틀 전에 로드니 킹이라는 이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폭행한 경찰관 네 명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지자 로스앤젤레스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헬리콥터에서 찍은 로스엔젤레스시 주택가의 불타는 모습과 성난 군중의 모습이 계속해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미국의 도시들은 적대감과 두려움으로 일촉측발의 상태였다.
뉴욕에서는 그날 정오쯤 폭동의 소문이 맨해튼 전역에 퍼졌다. 회사들은 급하게 문을 닫고 직원들을 집으로 보내고 길가 쪽 창문들을 막았다. 오후 두 시 펜실베니아역에는 보통 러시아워가 한창일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열차 승강장을 빠져나오면서 내가 목격한 것은 두려움에 빠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이미 미어터지는 통근 열차에 어떻게든 끼어 타려고 거의 패닉 상태로 서로를 밀쳐 대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들이 출발을 기다리는 열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때 누군가 옆 사람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흑인들이 맨해튼을 불태우려고 다리를 건너오고 있어.”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거의 다 백인이었다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폭동의 소문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 그 오래전 금요일 오후에 펜실베니아역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고 희미하게라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소문은 터무니없기도 했다. 그 주말 로스엔젤레스나 미국 역사상 거의 모든 폭동에서, 인종간 분노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지역은 분개한 나머지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 자신의 동네였지 신뢰할 만한 치안이 유지되는 특권층 지역이 아니었다. ‘흑인들’(믿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일반화다)이 미드타운의 상점들과 사무실 빌딩들을 어떻게든 공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사실상 비웃음을 살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백만의 통근자들에게는 롱아일랜드 철도회사가 그들을 실어줄 수 있는 한 빨리 그 도시를 떠나고 싶어지기에 충분할 만큼 믿어지는 이야기였다.
그날 오후에 나는 내가 자라 온 교외 주택가 중산층이 누리는 삶의 평안함이란 싸구려 텔레비전 수납장의 호두나무 베니어합판만큼이나 얄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 바로 아래에 취약성과 위험성에 대한 벌벌 떨리는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은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해서 현실적 위협에 대한 최소한의 조짐만으로도 공포에 떨며 도주하도록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내가 펜실베니아역에서 목격한 공포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실무근이었지만 오후 4시 19분 몬탁행 퇴근 열차의 지루한 일상만큼이나, 그리고 십 년 후 청명한 가을날 아침에 전국을 휩싼 두려움만큼이나 실제적이고도 강력하게 힘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특권이라는 우상숭배는 표면 아래 조용히 자리잡은 채 지도에서 표시되지 않지만, 격렬한 분노의 행동을 촉발시킬 사소한 도발을 기다리고 있다.
줄에서 우리의 위치
또 하나의, 훨씬 더 의심스러운 형태의 특권이 있다. 여러 종류의 특권 중 많은 수는 그 특권을 만들어 내는 파워와 마찬가지로 양적으로 제한되지 않고 널리 공유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영어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조금도 빼앗지 않으면서 영어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손실을 가하지 않고는 공유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특권도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희소하고 그것의 추구는 신 행세를 하는 가장 지독한 행위들로 이어진다. 그것의 이름은 지위다.
지위(status)는 그 어원이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으로, 늘어선 줄에서 당신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지위는 다른 사람보다 앞선 서열에 오르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지위는 꼴찌가 되지 않으려고 교실 문 앞에서 서로 밀쳐대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종종 어떤 공간에 들어갈 때 그 속에서 누가 가장 유명하고 누가 가장 예쁘고 누가 가장 파워 있는지를 가늠하는 미묘한 계산이다. 지위는 숫자를 세고 순서를 매기고 서열을 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배제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지닌 존재로, 각자 무한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우리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는 날부터 일정한 지위를 물려받는다. 지위는 순수한 특권이다. 지위는 우리가 지금 열망하거나 성취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일, 때로는 아주 오래전에 이루어진 일에 근거한다. 우리는 더 낫거나 더 못한 경제적 수단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아주 매력적이거나 지극히 평범한 자질들을 물려 받는다. 우리가 사는 곳은 ‘좋은 학군’이거나 ‘나쁜 학군’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속된 자질들에 때로는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이고 간접적으로 서열이 매겨진다. 우리는 이 서열에서 우리가 어디에 설지에 대해 거의 아무런 통제권도 갖지 못한다. 지위는 우리보다 한참 앞에 일어난 현실들에 근거해서 할당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위는 우리의 뒤를 따르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위를 맴돌며, 특정한 문을 열어 주고 다른 문들은 닫아 버린다. 특권에 따라 분배되는 제한된 자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지위가 작동한다.
지위는 정의상 희소한 자원이다. 줄의 맨 앞에는 한 사람만 설 수 있다. 펜실베니아역에서 그 5월의 어느 날 보았던 광경이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것은 공간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열차로 몰려든 통근자들의 경쟁은 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이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틈새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었다. 뭄바이 공항에서의 내 경험은 마찬가지로 일반적 특권의 경험만이 아니라 특히 지위에 대한 경험이었다. 사실 그것은 나의 사회적 지위, 즉 파란 미국 여권을 가진 분명히 중산층으로 보이는 키 큰 백인이라는 지위와 탑승 수속 대기 줄에 서 있는 나의 위치 사이의 부조화가 항공사 직원에게 빚어낸 불편함의 결과였다. 내 지위가 내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중요했기에 그는 그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이 불균형을 수정해야 했다. 나의 보이는 위치를 나의 보이지 않는 지위와 일치시키고서야 그 직원의 스트레스는 해소되었고 그 줄에 서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특권이 중립적이고 때때로 혜택을 주는 것이라 해도 나는 지위란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물론 성취를 인정하는 것이나 심지어 서열을 매기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축구 경기장에서 데이비드 베컴만큼 가치 있는 사람인 체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특정 운동경기나 직업, 사업 같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많은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결정하고 또 축하하기 위해 서열과 희소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제한된 영역 안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지위 그 자체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충분한 지위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가 줄에서 한 칸 앞으로 간다는 것은 누군가 한 칸 뒤로 밀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지위에 대한 추구는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지닌 우리 동료들과 대치하게 만들다. 거의 폭력적이었던 펜실베니아역 승강장은 인간이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무서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바깥의 더 넓은 세계는 상황이 훨씬 더 안 좋다. 모든 주민이 자신의 지위, 즉 자신보다 특권을 덜 가진 사람들보다 한 발 더 앞서 있는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위는 완고한 우상이다. 이 우상은 결코 충분한 구원을 베풀지 않고 당신이 이 우상을 따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열두 제자에 속했다. 물론 우리는 이 열두 제자가 어떤 특별한 장점이나 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부와 세리가 뒤섞인 오합지졸이었고 거친 억양의 사투리를 썼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만족감과, 핵심층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데 그들에게만 입장이 허락될 때 느끼는 자존감의 매력을 맛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를 얻어 예수님께 다가가 지위에 대해 물었다. 마태가 전하는 설명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녀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모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예수님의 대답은 무관심이라기보다 거부였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을 얻을 것이니라.”(마 20:22-23)
야고보와 요한은 지위를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파워에 대한 질문으로 응답하셨다. 곧 모든 것을 걸고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마시게 될 그분의 방식대로, 그들이 실제로 모든 것을 걸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제자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특별한 예언을 하셨다. 실로 그들은 이만큼 깊게 그들의 주님과 같아질 것이다. 언젠가는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과 같은 잔을 마실 것이다. 그들은 최대한의 대가를 치른 후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예수님의 영광에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지위에 대해서는 그들을 물리치셨다. 그것은 예수님도 관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첫째가 될 것인가? 누가 아는가? 예수님은 아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될 것이다. 그에게 묻지도 않고 그를 위하여 예비될 것이다. 이 두 형제가 새치기를 하려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화를 내자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5-28)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지위와 특권을 경계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예수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특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다. 바울이 초대교회의 찬송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표현한 바에 따르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실 수 있고 모든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하신 분이 그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이는 그분이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분이 지위와 특권을 단단히 붙잡는 데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은 바로 그분이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형상을 지니신 분이시고 진정한 하나님의 성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지위와 특권을 붙잡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것들도 그분을 붙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분이 만물의 마지막이 되셨고 종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고 만물의 주님 곧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땅 아래서나 줄에서의 자리를 얻기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 되셨다.
도시의 평화
1992년 5월의 그 금요일에 나는 브롱크스에서 열리는 기도회에 참석하려는 참이었다. 이날은 로스엔젤레스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오래전에 예정된, 뉴욕시 전역에서 모여 주말 내내 진행될 기도회의 첫날이었다. 나는 내 친구이자 이 기도회의 주최자이고 오랫동안 뉴욕시에 있는 교회를 섬겨 온 맥 파이어와 함께 7번 기차에 올라탔다. 그 당시에는 아직 어퍼웨스트사이드까지 고급주택화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 도시가 창문을 막고 게이트를 폐쇄하고 후퇴한 그날 오후에 브롱크스로 가는 열차를 자발적으로 탄 백인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우리가 기도회가 열리는 스페인어 사용자들의 작은 오순절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브롱크스의 모든 민족과 언어권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날 밤 벌어진 일은 내가 기대해 왔던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실현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특별한 예배 경험이었다. 중보와 슬픔과 희망과 기쁨이 쏟아지면서 교회의 지붕이 들썩였고, 여러 시간 동안 찬양과 기도와 노래와 외침과 춤과 눈물이 이어졌다. 그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몇 명의 특권층 손님들 외에는 모두 어떤 지위도 없는, 911에 구조 요청을 해도 경찰이 와 줄 것 같지 않은, 고난의 때에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신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가정과 이웃을 지켜 달라고, 그리고 그 도시의 평화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들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신 분을 찬양했다. 예배가 끝난 후에 그들은 두려움에 빠진 도시의 텅 빈 거리로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쏟아져 나왔다.
그날 밤 11시 뉴스에서 경황없는 뉴스 진행자들이 위성 송출 영상에서 뭔가 보도할 만한 것을 찾으면서 브롱크스 같은 지역의 현장에 나가있는 어리둥절한 기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거리는 고요했고 폭동도 약탈도 없었다. 그날 밤 한 기자가 뉴스 데스크의 진행자에게 말했다. “글쎄요, 오늘 밤 뉴욕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특권과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파워가 세상 속으로 풀려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