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하면 마치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세모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혹은 한 해의 마지막 날 괘종시계가 12번을 치자마자 ‘짠’ 하고 내가 바라는 새 사람이 되면 좋겠는데, 세상에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기적은 바라지 말고 스스로 애써 자신을 바꾸어 갈 수 밖에 없겠지요.
어떤 사람이 될까 ? 나는 올해를 시작하며 조금 더 양심과 신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룰까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갈까도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목표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그 결과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가려지는 사회는 지나치게 목표와 성과주의적 편협성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강처럼 흐르는 것이므로 도달해야하는 곳에 얼른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흐름 자체가 곧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어떤 사람으로 인생의 굽이굽이를 흘러왔는 지가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마침 양심과 신념에 대해 짧은 편지를 보낸 분이 있어 생각해 보고자 여기 발췌하여 옮겨 적습니다. **********************************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입니다. 조금 뜬금없는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독선과 아집 그리고 양심과 불굴의 신념,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남이 옳다는 대로 행동하기 보다는 나의 양신과 신념이 옳다는 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의견에 귀기울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양성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누군가가 저에게 너는 독선과 아집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정작 너는 너 만의 진리에 사로잡혀 독선과 아집의 덩어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니냐고 말하더군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직장 다니는 친구에게 자기 개발에 더 신경을 써 보는게 어떻겠냐고 도를 넘는 조언을 하다가 들은 소리입니다. )
저에겐 신념과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지켜나가던 것들이 타인에게는 독선과 아집으로 비춰지다니 인생, 이거 쉽지가 않습니다. *************************************************** 이 편지를 받고 저는 이야기 하나를 하고 싶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 ‘순자’라는 책 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가 한 때 노나라에서 사구라는 직책을 맡아 섭정을 한 적이 있다한다. ‘사구’는 지금으로 치면 아마 검찰총장 정도 되는 자리로 생각된다. 권력을 잡은 1주일 만에 공자가 한 일은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공자는 당시 유명한 대부였던 소정묘라는 사람을 주살한다. 공자같이 ‘어짐’을 중요시하는 인물이 권력을 잡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말들이 많아지자 공자가 이렇게 해명했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죄가 있다. 물건을 훔치는 죄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는 중대한 죄다. 첫째는 머리가 빨리 돌면서 마음이 음험한 것이다. 둘째는 행실이 한쪽으로 치우쳤으면서도 고집불통인 것이다. 셋째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달변인 것이다. 넷째는 추잡한 것을 외고 다니면서고 두루두루 아는 것이 많아 박학다식해 보이는 것이다. 다섯째는 그릇된 일에 찬동하고 그곳에 분칠을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다면 죽여도 된다. 그런데 소정묘는 이 죄악을 두루 겸했다.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 중 2번째 죄악, 즉 '행실이 한쪽으로 치우쳤으면서도 고집불통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군요.
편협되고 고집불통인 사람들은 어떤 경우 의지력이 강한 신념의 사람들, 난관에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럴까봐 공자는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군자는 하늘아래 일을 하면서 죽어도 이렇게 해야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일도 없고, 또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다만 그 마땅함을 따를 뿐이다”
공자 스스로는 어떤 고정관념이나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강의할 때 교안을 만들어 두지도 않았다. 똑 같은 것을 물어도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달리 대답해 준다. 성질이 급한 자에게는 용기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대답해주는가 하면, 늘 망설이는 자에게는 용기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장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스스로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어떤 선입견도 없다” (無可, 無不可)
그러나 이것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양가론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다. 그랬다면 소정묘는 주살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정묘도 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를 죽였다. 그를 죽이는 것이 공자에게는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마땅함이라는 기준이 이리저리 전횡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자가 마땅함의 근거로 사용한 개념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하자. 이 개념이 명확해야 어떤 사람이 ‘편협하고 폐쇄적인지’인지 아니면 ‘누가 뭐래도 제 길을 가는 의지가 굳고 추진력이 있는 것’인지를 구별해 낼 수 있다.
공자는 ‘고기양단(叩其兩端)’ 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즉 ‘대립되는 논리의 양극단을 다 두드려 본다’는 뜻이다. 마땅함을 찾을 때 공자가 사용한 것은 바로 중용의 미덕이었다.
중용은 사물의 가운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평균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적절한 타협과 협상의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마음의 저울질을 해야하는 작업인 것이다.
자, 이제 막대 저울을 이용하여 물건의 무게를 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막대 저울의 한 쪽 천칭에 물건을 담았다. 지지끈을 잡고 그 물건의 무게를 재기 위해 추를 이동하여 균형을 이루는 눈금에서 그 물건의 무게가 결정되듯이 중용이란 늘 막대 저울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작업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이나믹 이퀄리브리움 포인트 dynamic equilibrium point 찾아내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
그러므로 고정된 기준으로 사물을 보게 되면 늘 편협되어 편을 가르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려있고 살아 있어야 사물의 균형점을 찾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과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잘 생각하여 편협됨이 없게 하고, 스스로 조화와 균형을 지켜 늘 마땅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양이고, 확신이며, 신념인 것입니다. 그때 이 신념이 아집과 편협을 넘어 보편적 가치와 지지를 얻게 됩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종종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게 되고, 그 질문에 대답해 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신이 성숙하게 됩니다. 이것이 철학의 유용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질문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까요.
첫댓글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독종 이란 별명을 많이들 가지고들 있더군요... 독종이 좋케 표현 될때는 정신력 일수도 있겠네요..
또 퍼갈께요. 저도 경전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