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roubled now. Yet
what should I say? ‘Father, save me from this hour’? But it was for this
purpose that I came to this hour. Father, glorify your nam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을 약속하신다. 시나이에서 맺었던 계약을 이스라엘이 깨뜨렸어도,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다시 맺어 주신다. 새 계약은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하기
때문에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맺으신 새 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새 계약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심으로써 맺으신
계약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괴로워하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시지만, 당신의 죽음을 피하려 하지는 않으신다. 당신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많은 이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삶은 씨앗과 같은 삶, 죽어 열매를 맺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레미야서에
예고된 새 계약을 예수님께서 이루셨다고 강조하는데(히브 8장 참조), 그 새 계약이란 예수님께서 대사제로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루어진 계약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새 계약을 위해서 오셨고,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해 주는
내용입니다. 여기까지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2,25 참조). 결코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경쟁 사회, 아이들 땅따먹기 놀이를 하듯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고 더
커지려고 애쓰는 세상, 남들보다 늘 우월적 지위를 누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 제발 세상모르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들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바꿀 수도 없고, 예수님의 삶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나’라는 밀알 하나를 보전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 수는 없습니다. 복음대로 살기 위하여
‘나’를 미워할 수 있을 때,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같은 가치들을 위하여 내 이익을 포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회를 옥토로 만들어내는 퇴비
-이기정신부-
돋보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누가 잘 난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선준비의 모양새, 정치출마 등의
모습에서 살벌한 불안만 느낍니다. 살기 좋은 사회 만들겠다며 내 놓는 제안이 사실 살벌한 느낌
주네요.
풍요로운 수확은 좋은 흙이라야 하고 좋은 흙이려면 퇴비가 깃들어야 되지요. 풍요로운 평화는 좋은
사회라야 하고 좋은 사회려면 무엇이 깃들어야 할까요. 겸손 순진 애덕 같은 게 사회를 옥토로 만들어내는 퇴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축복과 은총으로서의
십자가
-양승국신부-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때 받은 감동이 마음속에 생생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정말이지 환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깊이 한번 묵상을 해봤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효과적이고 활기차게 운영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비결이
무엇일까?
거시적인 안목과
멋진 비전도 세웠겠지요. 세부적으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마련된 알찬 활동 계획도 마련했겠지요. 양질의 인적 자원도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는 그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식별 작업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성공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누군가의 구체적인 헌신과 희생이었습니다. 익명이지만
그 누군가의 공동체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열렬한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 완수, 그로 인한 결과는 찬란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화려한 꽃으로 만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찬란함과 화려함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수님의 크신 자기 낮춤과 헌신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는데, 썩음 없이는 새로운 생명도
없는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다른 사이비 종교들이나 유사영성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목청 높여 외치는 달콤한 신앙을 우리 그리스도교는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현세에서의 지속적인 축복과 성공, 만수무강과 무병장수를 우리 그리스도교는 믿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교는 수난 중인 예수님의 얼굴과 그분의 십자가를 내세웁니다. 깊어가는 사순시기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없애주시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십자가 무게를 덜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평생에 걸친 십자가로 힘겨워하는 우리 앞에 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서 눈물을 없애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이 끔직한 병고를 단번에 낫게 해주시지
않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 옆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함께 병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혹독한
지상 현실을 단번에 뒤집어 주시지 않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이 암담한 현실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대신에 고통을 끌어안고 수용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십자가 길을 걸으셨듯이
우리에게 지워지는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는 교회, 십자가를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결국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박재식신부-
원고를 쓰기 위해
한글판 성경을 보면서 문득 한국 교회가 신자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신자들을 정말 똑똑한 지성인으로 생각하는지, 혹은
성경을 읽지 않는 신자이기를 바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앞뒤 없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 성경을 보니
요한복음 1장 19절(머리글 다음) 앞에는 ‘표징의 책’(II. The Book of Sings), 13장 앞에는 ‘영광의 책’(III. The
Book of Glory)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또한 「라티노아메리카노」(Latinoamericano)라는 스페인어 성경에도 설명과 더불어
곳곳에 메데인 문헌(1968년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문헌)을 비롯한 교회 문헌을 첨부해 신자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을
만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에게 딴죽을 걸거나 그분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쯤 이런 부분을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골 본당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저도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신자분들의 기도나
성경에 대한 열정은 다른 지역 교회보다 월등합니다. 그에 반해 자신의 신앙 증거, 타 종교인과 대화에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도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전체 맥락 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장 19절에서 12장까지 예수님은 7가지 기적 사건과 7문장(나는 …이다)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군중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관점과 시각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라는 결말이 나옵니다.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못한 원인을 “그들은 눈이 멀었고 마음이 무디어졌다”(요한 12,40)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기본으로 오늘 복음의 핵심
문장인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이별의 순간에 여러 번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영광일까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고통의 내용인 요한 복음 13장 이후 부분을 미국
성경은 왜 ‘영광의 책’이라 했을까요?
저는 축구, 야구
등 스포츠를 즐기고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많은 남미 축구선수들은 경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 선수들은
경기 중 종종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과연 그런 행동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을 앞두고 누군가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독일과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님들이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상상한 그림이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어떤 이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교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루터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길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건가요? 시험에 떨어지거나 취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부족해서인가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성이 언제 가장 잘 드러나는가’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 정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진정한 정의, 평화를 체험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김 추기경님의 명언
중 하나인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느님 자비를 느꼈습니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열광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멋진 외모와 미소, 아니면 검소한 생활 태도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셨고, 그들 이야기를 들어주셨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교황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강론이나 행동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자주 느낄 수 있어서 열광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밀알, 그 위대한
사랑의 씨앗! -김영훈
신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한 주 앞둔 이번 주 복음 말씀은 죽음이 멀지 않은‘어린 양’의 고뇌를 다루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 달리‘자기 살림’이 아니라‘자기 죽임’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따라서 반드시 외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자기 죽임’은 자학이나 자폭이 아니라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선택할 수 있는 달가운 멍에이고 아름다운
희생입니다.
교우
여러분,‘~때문에’와‘~를 위하여’의 차이를 아십니까? 우선‘~때문에’라고 말하는 사람은 의무감으로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부양
책임 때문에, 교회법이 정한 의무 때문에 성실함을 다하는 그들은 희생적인 삶을 살지만 결코 기쁘지 않습니다.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남을
탓하고, 남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런 유형의 사람은 성실히 책임을 다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반면에‘~를 위하여’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록 고달픈 삶이지만 그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동료들을
위하여 자신이 망가지고 병들고 무시당해도 그것을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의무감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십자가는 그저 고통의 멍에이거나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이 밀알의 비유는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영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땅속에서 껍질이 썩으면서 씨앗 속에 들어있던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추수 때가 되면 하나에 마흔 개 정도의 밀알이 맺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해 마흔 개의 밀알이 땅에 뿌려지면
1,600개의 밀알이, 다음 해는 6만 4천 개, 또 그 다음 해에는 250만 개, 그 다음 해에는 1억 개 이상의 밀알을 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밀알 하나에 천문학적인 밀알들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작은 희생과 수고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 밀알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어 나중에는 엄청난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십자가의 신비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풍년은 한 톨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니 그 씨앗의 자기 내던짐은 얼마나 값진 희생이고
수고로움이겠습니까?
내가
머무르다 간 자리에 남는 것?
-박영식신부-
저마다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 법이다. 새가 나무 가지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간 뒤에는 그 나뭇가지가 한동안 흔들린다. 연못에 돌을 던져도 파문이 일어난다. 봄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든 꽃을 남기고, 가을이 지나간 자리에는 풍성한 열매를 남긴다. 부모는 자녀들을 남기고, 스승은 제자를 남긴다. 작곡가는
오선지에 아름다운 곡, 화가는 그림, 조각가는 조각 작품을 남긴다. 착한 사람은 훌륭한 일을 남기는 반면, 나쁜 사람은 불의한 일을 많이
남긴다. 철학가는 인생의 의미를 남긴다. 성인은 사랑과 자비를 남긴다.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는 인생무상의 가르침이 남는다. 더구나 사람은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사라져도 반드시 자취를 남겨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리고 있다. 가정, 직장, 동네, 사회에서 과연 어떤 자취를
남겼고, 어떤 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어떤 자취를 남길 것인가? 내가 가지고 갈 것은 재산도 아니요 지위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며 업적도 아니다.
나는 자식들에게만 재물을 남기고 갈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신나게 살다 가며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남기고 가야
하겠다.
“무엇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갔음을 증명할까? 예술, 작품, 일, 업적, 지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다.”(알베르
카뮈)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 있었다는 증거는 누군가를 얼마나 진지하게, 헌신적으로 사랑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랑은 신체의 한 부분을 활용하여 얻어내는 예술, 작품,
업적, 지위 들과는 다르다. 사랑은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하고 목숨까지 바쳐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관여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만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양쪽에 삶의 의미를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삼심삼
년을 사시며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쳐 사랑의 십자가와 영원한 생명과 영복을 남기고 하느님 아버지께 올라가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견이며, 죽음은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자연의 수법이다.”(괴테)
“말라비틀어진 씨앗이
땅에 뒹굴고 있다. 사람들은 씨앗이 거기 있다가 부풀어 깨어져 없어지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그것은 생명을 받는다. 그것은 껍질을
부수고 잎을 내밀고 줄기도 성장한다. 그리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이삭이 달린다. 그것은 동일한 씨앗이다. 그러나 새로 맺힌 씨앗은
심겨졌을 때의 씨앗과 얼마나 다른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의 껍질은 뒤에 남겨질 것이다. 몸은 몸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부활한다. 그러나 그 몸의 모습은 얼마나 초월적인가? 하나는 지상의 영광을, 다른 하나는 하늘의 영광을 입는다.”(존 번연)
제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기심을 충족하는 데 사로잡혀 이웃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고 만다. 생명은 나와 너와 그의
만남 가운데서 싹이 트고 자라나며 꽃을 피우는 법이다. 생명은 어디든지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나뭇잎에게, 당신은 혼자서 살 수 있나요?
나뭇잎은 “아니요. 나의 삶은 가지에 달려 있답니다.” 가지는 “나의 생명은 뿌리에 달려 있어요.” 또 뿌리는 “나는 잎과 가지와 둥지가 없으면
못산답니다.” 사람도 이러하다. 나를 웃게, 울게 하는 사람도 타인이다. 그 인연의 덕목은 서로 마음을 주는 데 있다. 사람이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은 타자의 마음에 스며든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자. 내 삶의 뿌리는 하느님과 이웃,
예컨대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충고, 친구와 친교 들이다. 남의 존재이유를 인정하는 것이 제 삶의 뿌리를 아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하느님의
창조와 이웃의 희생 덕분에 살고 있듯이, 나도 그분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도리다. 나아가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당신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영생과 영복을 누린다. 이러한 사랑의 희생 가운데 영생이 창조된다.
사랑이 생명을 창조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머무르다 간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기쁨이 남아 있어야 한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마르
8,35)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이
원하는 그 모습과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영원한 것을 남기고 갈 수 있다. 돌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느라고
미쳐버리고 말더라도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붓다도 그렇게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보리수 아래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무아無我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작인 반면,
하느님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생명의 시작이다.”
(레오 톨스토이)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자들에게 청하고,
제자들은
그 말을 예수님에게 전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을 실제로 만났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보전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런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육칠십 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신앙에 대한 일종의 명상록(暝想錄)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리스 사람을 등장시킨 동기가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전혀 모르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비 유대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를 알리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인물이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인물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그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은 그 죽음으로 그분의 중요성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중요하고,
감동스런
것인 지를 구약성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삶은 그분의 죽음 후,
제자들
안에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삶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삶의 특징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이
하셨던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두 그렇게 실패하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실패의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 시대 유대교 실세들이 가르치던 바와는 다른 하느님을 그분이 믿었고,
그
하느님의 일을 공공연히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의 문자(文字)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주는 하느님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하늘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을 보아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와
꽃도 돌보아주는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말고,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유대교는 믿었습니다.
물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였습니다.
인간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그 생명이 하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쳤습니다.
유대교가
가르치듯이,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교도인 백인대장의 종(루가
7,1-10)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마르
7,24,30)도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병든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이런
불행한 생명들을 당신 한 몸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인간은
자유를 지녔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가족도,
직장
동료도,
모두
자기 한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기
가족 외의 다른 모든 인연을 외면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과의 인연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이 아끼시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고,
양극화를
비난하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사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불렀습니다(요한
15,15).
제자들이
떠나가서 각자 자유로이 열매 맺을 것을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존경스런 호칭이나 복장으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서,
그분과
같은 열매를 맺겠다고 약속한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강자(强者)
앞에
약하고,
약자(弱子)
앞에
강하게 처세하여 입신출세하고,
그것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주장하는 속물들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따라 맺은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실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주변의 허약한 생명들,
외로운
생명들,
고통
받는 생명들을 특별히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그들도 행복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자기
주변의 버려진 이웃들을 백안시(白眼視)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열매 맺는 신앙이 아닙니다.
주변의
생명들이 우리와의 인연으로 기뻐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