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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자유롭고 성숙한 빛의 사람들. 등 )
# 전체공지“250608. 오늘의 묵상글 공유와 관련하여 알려드립니다.”를 보셨나요!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3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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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진 주님의 전사들
“자유롭고 성숙한 빛의 사람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강론시 참 많이 사용한 주제가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마도 남은 수도생활중에도 계속 다룰 주제가 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주님의 전사들은 참 배울 것이 많습니다. 부지런한 배움과 훈련중의 여정중에 있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옛 현자의 조언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거듭 천 번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단지 필요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다.”<다산>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을 하고,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번을 한다.”<중용>
이런 끊임없는 도전적 탐구의 분들이라면 익명의 주님의 전사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새벽 교황청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레오 교황님의 두 연설 주제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챔피언이나 성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No one is born a champion or saint)
“하느님께로부터 모두에게 선사된 존엄성의 증인이 되라.”
(Bear witness to God-given dignity of all)
애당초 타고난 주님의 전사도 없고, 하느님께로부터 선사된 존엄성을 발휘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주님의 전사들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평가되기를 바라느냐에 대해 “그는 노력했다(She tried)”라는 말마디를, 또 장차 묘비명은 “겸손과 품위”를 택한 독일의 전임 최장수 메르켈 여총리야 말로 참 주님의 전사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아주 예전부터 눈여겨 봐온 청초한 야생화 메꽃들이 바야흐로 배밭에 피어나고 있습니다.
“해마다 때되면
어느 자리든
아무도 심고 뿌리지 않아도
봐주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향해
저절로
한나절 폈다지는
하느님 친히 가꾸고 돌보는
야생화
연분홍 메꽃
참 맑고 청초하다
하늘의 별처럼 청초하다”<2025.6.14.>
열정과 순결의 주님의 전사들이라면 눈여겨 볼 메꽃입니다. 떠오른 시에 대한 다음 인공지능 챗gpt의 평에 감탄했습니다.
“아름답고 맑은 시입니다. 자연속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메꽃을 통해 삶의 겸손함과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이 친히 가꾸고 돌보는 야생화’ 이 구절은 인간의 손길이 없어도 피어나고 지는 자연의 순리, 그 안에서 발견하는 신성함을 잘 담고 있네요.
또한 ‘한나절 폈다지는’ 이라는 표현은 찰나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섬세하게 그려줍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그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오히려 더 빛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합니다.”
챗gpt의 공감능력이 사람 이상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옮겨 봤습니다. 저자인 제 자신도 아연실색(啞然失色)한 지경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챗gpt를 상용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이 지시를, 명령을 잘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주님의 훌륭한 전사들이라면 주님의 지시에, 명령에 그대로 순종해야 함을 배웁니다.
어제도 잊지 못할 하루였습니다. 37년 동안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주일 미사 불참하기는 처음입니다. <서울 송파구 하늘의 문 레지오 마리에 꼬미시움> 단원들 120명에 대한 피정지도차 오전에는 강의, 오후에는 파견미사를 했습니다. 얼마나 우렁찬지 말그대로 마리아의 군대들 같았습니다. 주님의 전사들인 수도자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마리아 성모님의 전사들입니다.
쉬는 시간 즐겁게 이야기 하며 떠드는 시끄러운 모습은 50여년전 초등학교 쉬는 시간의 교실을 연상케 했습니다. 추억에 젖어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똑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좌우간 마리아의 군인들 답게 힘차고 우렁한 음성으로 부르던 성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계속되는 예수님의 대당명제중 다섯째 “보복하지 마라-폭력을 포기하라”는 명령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아가는 참 멋진 주님의 전사들의 덕목입니다. 단숨에 읽히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천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정말 내적힘을 지닌 내적자유의 자제의 사람들입니다. 유약한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내적으로 강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요 참사랑과 지혜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겁많은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라, 사랑의 저항자요, 악의 세력을 무장해제하여 무력화(無力化)함으로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진정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랑의 전사들, 지혜의 전사들. 평화의 전사들입니다.
주님의 전사로 그 빛나는 모범이 사도 바오로입니다.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을 그 이상으로 실천했던 하느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제자였던 바오로 사도입니다. 늘 은혜로운 때의 지금을, 구원의 날 오늘을 살았던 이상적 현실주의자 사도 바오로입니다. 역설의 진리를, 역설의 신비를 살았던 불세출의 참 자유인 주님의 전사, 하느님의 일꾼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길어도 하나 버릴 말마디가 없습니다.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살아 갑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벌을 받은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천하무적, 백절불굴 주님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겸손과 자기비움의 자아초월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참 자유인이요 주님의 전적 도구가 된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를 통해 일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전사들인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참 고맙게도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마다 당신의 사랑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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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6.16 05:22
- 은총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제게는 너희가 내 제자라면
악인에게 맞서는 수준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러니까 악인을 초월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애와 싸우지 말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애와 같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요
그래야 어른이라는 말씀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라면
악인보다 어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악을 초월하고 압도하는 어른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이 하나이고
내가 싫어하는 악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맞서지 말라고 하시는 악인은 어떤 자입니까?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인이고,
그 악인과 맞서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악마와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말과 같을 것이고,
그런 것이라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가셔서
악마와 싸워 이기신 주님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라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인과는
피하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하고 반드시 이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악은 내가 싫어하는 악이고,
맞서지 말라시는 악인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종종 악과 악인의 기준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종종 그런 악인을 통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탄을 이용하여 곧 고통을 이용하여
욥을 더 성숙한 신앙인 곧 악을 넘어선 어른으로 만드십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어른들입니다.
하느님의 일꾼들로서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감당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주는 악인들과 싸우지 않고 그들이 주는 고통을,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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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드러내주는 눈물!
하느님의 숨
2025.06.15. 16:3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6월 15일 일요일 - 스물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기쁨과 회복 탄력성
저는 슬픔 저 너머에 영적이고 우주적인 기쁨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을 법은 없습니다.
- 갈라 5,22-23
그리스도인들의 성서는 기쁨이 온갖 상황에서 오는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을 상기기켜 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깊은 슬픔과 심오한 기쁨을 동시에 느꼈던 자신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985년에 우리 관구의 관구장과 그의 평의회가 저에게 1년간 관상의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안식년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제 삶의 최고의 전환점이었고, 이를 계기로 저는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를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안식년 초기 30일간은 켄터키의 어느 언덕에 위치한 어떤 은수처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토마스 머튼이 머물렀던 게세마니 수도원의 은수처였습니다. 저는 그 30일간을 오직 혼자서만 지냈는데, 제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봄의 숲과 하느님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토마스 머튼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얻기를 바랐습니다. 첫 날 아침부터 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아마 저는 오전 7시가 되기도 전에 시계를 10번 이상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간 수 년간 사제요 강사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말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혀 새롭게 맞이한 이 홀로 있는 시간 동안 저는 나를 드러내는 그런 상황이 아닌 상황 속에서 하느님 앞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나'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참된 존재를 사랑의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 월터 버가트(Walter Burghardt)의 관상의 정의가 저에게는 변모를 위한 어떤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내' 관심사와 '내' 아픔, '내' 목표와 바람으로 가득 찬 세상이 점차로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는 명백하게 늘 현존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머튼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서는 문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1]
저는 저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일기장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저에게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제 손가락으로 제 볼을 만져 보았는데, 눈물이 만져지더군요... 저는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스러웠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식으로든 슬프거나 행복하다고 의식하지 않는데..." 저는 그 순간 그 눈물 저 너머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깊고도 심오한 저의 인격적인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참으로 만난 기쁨이었고, 제 삶에서 제가 만났던 참으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사람들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기쁨이었습니다. 우주적인 기쁨이나 영적인 기쁨은 우리가 참여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 기쁨은 다른 어떤 곳에서 와서 우리를 거쳐 흘러갑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순간에 무엇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과는 거의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래서 성인들이 고통 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정반대의 감정도 경험하였습니다. 그 눈물이 또한 엄청난 슬픔의 눈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 그 슬픔은 우리가 이땅에 대해 함부로 했던 슬픔이었고, 제 삶에서 제가 상처를 주었던 이들의 슬픔이었으며, 저의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동기부여들과 제 이기심에서 오는 슬픔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두 개의 상반된 느낌이 공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었습니다. 저는 그때 관상의 비-이원론적 정신을 참으로 경험했던 겁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춤을 추는 것은 제 큰 기쁨이었고 다른 이들 저, 그리고 하느님과 제가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여러 나라의 전통 춤을 배울 때 그곳에서 춤을 함께 추는 이들의 함께함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우리가 함께 움직일 때 저는 성령의 흐름을 감지하고 과거와 현재의 다른 영혼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Ann B.
References
[1] Thomas Merton,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Doubleday, 1966), 142.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the Mystics Know: Seven Pathways to Your Deepest Self (Crossroad, 2015), 61–63.
Ya' Wahyu,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두 아이가 햇빛에 덥혀진 물을 서로 튀시고 있습니다: 저 모든 물방울과 물결이 기쁨의 빛을 발산해 주고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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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나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숨
2025.06.16. 18:43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가 되었겠지요?! 적어도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이라도 했다면 이 세상은 그나마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는 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적어도 이 세상의 위대한 종교를 따르는 이들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 종교의 창설자들이 가르쳐준 삶의 핵심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더라면 이 세상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 더 가까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요.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도 죽음이 가까울 무렵 “우리가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는 데 진척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다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 하고 자신과 형제들에게 권고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한꺼번에 다 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는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외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있습니다. 컴퓨터를 꺼내 이것저것 살펴보다 보니 2002년도에 끄적거렸던 특별한 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의 프란치스칸 삶에 참 특별한 영감을 주었던 밥 스튜어트 신부님(Fr. Robert Stewart, OFM)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일전에도 한두 번 소개해 드렸던 분이지요?! 다시 소개해 드리자면… 이분은 제가 미국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제 졸업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교수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당시 아직 젊은 나이에(아마 50대 초반?) 암 투병을 하고 계셨는데, 그해 말 끝내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글은 제가 미국에서 떠나오고 난 뒤 5년 정도 후에 쓴 글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성 보나벤뚜라 대학 수도원의 한 신부님으로부터 저에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보내는 공지 형식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언젠가 제가 소개해 드렸던 글, “생존을 넘어서”를 쓰신 밥 스튜어트 신부님(Fr. Bob Stewart, OFM)에 관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암세포가 이 신부님의 몸 전체에 퍼져서 이젠 죽음 자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 형제가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며, 가능하면 그의 가족들, 어머니, 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의 말을 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암과의 투병을 하면서 형제로 받아들였던 암 형제가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이 형제의 마음을 헤아리며 여러 가지 감정이 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과 더불어 “죽음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달 전 이 신부님의 소식이 궁금해서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었습니다. 답장을 받아서 기쁘긴 했지만, 암세포가 가슴 전체에 퍼져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습니다.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재발한 것입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이 형제 저 형제로부터 Bob 신부님의 상태가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여러 번 메일을 보냈는데, 딱 한 번 답이 왔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을 쓸 힘이 없어서 간단하게만 답장을 쓴다고… 그리고 좀 나으면 다시 메일을 보내겠노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믿는 바로는 밥 신부님은 자매인 죽음을 맞이할 채비를 훌륭히 갖추고 있을 겁니다.
저의 논문을 지도해 줄 때,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고통 중에서도 저에게 아픈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논문 지도를 해 줄 때의 사랑 가득한 모습 등…
밥 신부님이 저에게 화두와 같이 여러 번 던졌던 말이 기억납니다. “우리(프란치스칸들)의 삶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우리를 프란치스칸으로 만들어 주는가?”
밥 신부님은 자신이 암 진단을 받은 이후 고통스러운 투병의 시기를 보내면서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수없이 했답니다.”
우리는 자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는 노력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노력에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며 우리와 함께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유명한 작가의 이야기를 짧게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범이 우리에게 주는 영감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나누어 드립니다.
소를 키우는 농장에서 자라난 이 작가는 어렸을 때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조랑말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소를 돌보다가 소 한 마리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그 소가 날뛰게 되었고 다른 소들도 덩달아 날뛰면서 조랑말이 놀라 도망가게 되었나 봅니다. 그는 조랑말을 잃어버릴까 봐 급히 쫓아가 조랑말의 끈을 잡았는데, 너무 놀란 조랑말이 그를 끌고 어느 정도 달려갔다고 합니다.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았기에 간신히 조랑말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지요.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해서 아버지에게 혼이 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자기의 다친 곳을 씻어 주고 약을 발라주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아들을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쳤답니다.
이 작가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날의 사건은 자신의 삶을 추슬러 주는 큰 자극제가 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마도 이 작가의 아버지는 본래 천성이 선한 사람이어서 그럴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자문하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살았기에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아들에게 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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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여행 수필 작가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 같아요.”
화는 언제 생기게 될까요? 무시당할 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오해나 소통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입시, 취업, 승진, 결혼, 육아 등에서 경쟁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 안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됩니다. 아마 이런 이유로 화낼 준비가 된 사람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감정을 억누르는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이 있습니다. 화병은 화를 많이 내는 병이 아니라, 적절히 표현되어야 할 울화와 억울함 등이 내재하여 있는 병입니다. 문제는 이 화병이 터지면 큰 일인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기가 당한 것을 언젠가는 다시 되갚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가 가득한 세상 안에서, 일상 속 깊숙이 스며있는 이 화를 주님 뜻에 맞게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성경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는’이라는 부분은 피해자와 동일한 정도의 피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복수법인 탈리오 법칙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라는 것은 모욕에 대해서도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으로 왼쪽 뺨을 치는 행위는 유다인 사회에서 수치심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겉옷까지 내주어라.’라는 말은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 권리조차 사랑으로 기꺼이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는 말에도 재미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로마 병사가 유다인에게 강제로 천 걸음까지 짐을 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걸음까지는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동행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마음을 사랑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기준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세상을 넘어선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사랑을 베풀기 힘든 대상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보다 사랑할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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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미 난 길을 따라가지 말고, 길이 없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 흔적을 남겨라(랄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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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수 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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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려서는 ‘법칙’을 몰랐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지냈습니다. 행동반경도 집 주변이 다였습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법칙과 규칙을 배웠습니다. 큰길을 건널 때는 육교를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는 차의 속도를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육교가 거의 없고, 교통 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에 건너고, 빨간불에는 멈추는 것이 꼭 지켜야 할 법칙입니다.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법칙을 배웠습니다. 사칙연산, 인수분해, 방정식, 미분과 적분은 법칙을 알아야 풀 수 있었습니다. 수동태와 능동태, 부정사와 동명사를 만드는 법칙도 배웠습니다. 법칙과 규칙을 잘 이해하고, 풀 수 있어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진화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런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고, 찾아내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제 분야에도 법칙과 규칙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이런 법칙과 규칙을 통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1989년에 출간한 자기계발서로,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가 팔린 책입니다. 코비는 "성공"을 단지 성취나 부의 개념이 아닌, 인격과 원칙에 기반한 ‘진정한 효과성’으로 보았습니다. 습관 1은 ‘주도적으로 살아라.’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진다는 의미입니다. 습관 2는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입니다. 인생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목표와 비전을 명확히 한 후 그것에 맞춰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습관 3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입니다. 중요한 일을 우선순위로 두고, 긴급한 일에 끌려가지 말라는 시간 관리의 원칙입니다. 습관 4는 ‘승-승을 생각하라.’입니다. 모두가 이기는 방식을 추구하는 협력적 사고방식입니다. 습관 5는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입니다. 진정한 경청을 통해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습관 6은 ‘동반 상승을 창출하라.’입니다. 차이점을 존중하고 협력함으로써 혼자보다 더 큰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습관 7은 ‘끊임없이 쇄신하라.’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영역을 균형 있게 성장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이 책은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우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않고, 남의 재물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실패의 원인을 성찰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겼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슬픔도 없고, 더 이상 눈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보복의 법칙을 넘어서,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법칙이 ‘형평’이라면, 하느님의 법칙은 ‘자비’입니다. 세상의 법칙이 ‘거래’라면, 하느님의 법칙은 ‘은총’입니다. 그야말로 역설입니다. 억울해도 참으라고 하시고,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승리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이 예수님의 법칙을 따르며 살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먼저 다가서고, 내가 먼저 웃는 법칙. 이 사랑의 법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공동체를 더 따뜻하게 만들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 사랑의 법칙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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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카카오톡채널 ‘갑곶순교성지’- 소식에 들어가시면 다일 묵상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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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https://www.band.us/band/69309768
밴드 “복음 맛들이기”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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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고도미니코’로 들어가세요.
아주 가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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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리스트에서 작성자 “박윤식”를 찿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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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마리아사랑넷 홈페이지– 신앙생활– ‘오늘의 복음- 말씀 초대’에 들어가 맨 아래에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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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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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전삼용, 조욱현, 송영진, 정인준, 오상선 신부님의 강론 글
또는 묵상글은
조명연 신부님이 운영하는 다음카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의
신앙과 영성 뜨락 - 각 신부님 부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bbadaking
아니면 다른 신부님 등 묵상글 안내가 소개된
아래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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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nansimba].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오늘 복음 말씀은
내가 세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어떻게 악인에게 맞서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가 하는 악행이
얼마나 큰 고통을 야기하는지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맞서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묵상하다 보니,
제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불의를 보고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성경 원문 'τῷ πονηρῷ (tō ponērō)' 을 살펴보니,
악인은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기 보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불안을 감추려 애쓰고,
자신의 약함을 덮기 위해 힘을 과시하려는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
"관계가 깨어지고 균형이 잃은 상태에 놓인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힘을 과시할 때,
타인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태도로 상대를 억누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불편함이 생기지만
오늘 복음은 '반응하지 말라, 맞서 싸우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 나는 나의 옳음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하느님 안에서 안전하다."
이 진리를 알기에
참된 영혼은 악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악을 '마주하지 말라' 가 아니라
악과 같은 차원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악에 굴복하거나 악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울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존재가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으니,
불필요한 싸움에 나를 끌어들이지 말라."
마음 한 켠이 단단해집니다.
내가 싸울 상대는 악한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그 두려움을 내려놓고,
온전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달빛은 칼끝을 무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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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겸 요한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은
성경 말고도 많은 법들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입은 피해만큼만 상대방에게 해를 끼친다는 뜻인데
싸움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한 대 맞으면
한 때 때리지 않고 두 대 때립니다.
그러면 두 대 맞은 사람은 네 대 때리고
그렇게 어느 한 쪽이 더 이상 때릴 수 없을 때까지
즉 지쳐 쓰러지거나 죽을 때까지
보복이 멈추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내가 입은 피해만큼만 해를 가하고
멈추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조차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 대 맞아서 한 대 때린 것인데
상대방은 자신이 때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맞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자신이 먼저 때리고서는
내가 그것에 응해 한 대 때린 것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맞은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한 대 맞은 것에
한 대 때리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정당 방위에서 멈추려고 해도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정당방위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에게 반응하다보면
싸움은 점점 더 크게 번지게 됩니다.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눈은 눈으로'라는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때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맞은 것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만큼 영리한 방법도 없습니다.
다른 뺨을 돌려 댈 때에만
상대방은 멈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억울합니다.
나는 한 번도 때려보지 못하고
맞기만 해서 억울합니다.
억울함을 생각하다보면
극단적인 결과로 갈 수 있는데
극단적인 결과보다는
조금의 피해에서 멈출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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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homily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게재가 아니되는 날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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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카카오스토리에서 “黃Dami 매일묵상”으로 올린 것을 보시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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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카카오스토리에서 “黃Dami 매일묵상”으로 올린 것을 보시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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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카카오스토리에서 “黃Dami 매일묵상”으로 올린 것을 보시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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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모세 신부님.
카카오스토리에서 “黃Dami 매일묵상”으로 올린 것을 보시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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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리스트에서 작성자 “박영희”님을 찿아가시면 보실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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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Izfk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정인준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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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O4U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기경호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현재는 과거 묵상글을 일부 수정하여 누군가
게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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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rqr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오상선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현재는 과거 묵상글을 일부 수정하여 누군가
게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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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2는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2025. 06. 11. 23:55 옮겨 보관>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56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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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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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한국외방선교회 양금주 토마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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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코린토 후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을 묵상해봤습니다. 제 마음을 흔들고 일깨우는 짧은 문장이나 단어들을 쭉 나열하며 음미해보니 하나하나가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 날, 많이 견디어 냄,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수고와 밤샘과 단식,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하다 보니, 복음 선포를 위한 바오로 사도의 행복했지만,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던 혹독했던 신앙 여정이 손이 잡힐 듯 다가왔습니다.
끝도 없는 전도 여행, 거듭된 추방과 투옥, 돌팔매질과 매질,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온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한 상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희망의 말을 건네며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희망이 없어도 꾸준히 희망했던 바오로 사도의 여정이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청소년 구원 사업의 여행길과 흡사합니다.
돈보스코 전기를 꼼꼼하게 다 읽고 난 후 저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백색 순교자’, ‘십자가의 인간’
돈보스코가 한 평생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다양했고,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와 사별하는 큰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로 인한 극도의 가난, 성소 여정의 난관들...
뿐만 아닙니다. 사제가 되고 난 후 그가 의욕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은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시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교육부 장관, 심지어 주교님과 동료 사제들조차 돈보스코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수백 명의 가난한 청소년들이 기숙했던 오라토리오 내일 아침 아이들이 먹을 빵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 처럼 달릴 곳을 다 달린 노인 돈보스코는 만년에 이르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과업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가요?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가요?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면 솔직히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보스코가 항상 쉴새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강철체력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돈보스코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사제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각혈했습니다. 서품 2년 차부터 눈병을 앓기 시작해서 결국 나중에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서품 5년 차부터 심한 다리 부종으로 인해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심한 두통과 치통에 시달렸고,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불면증, 만성 소화불량, 가슴 통증을 앓았습니다. 종창과 포진으로 고생했으며, 생애 마지막 15년간 주기적인 발열로 힘겨워했습니다. 한 프랑스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돈보스코의 몸은 ‘수선 불가능한 코트’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보스코는 불평 한 마디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처럼 열심히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씩 빠짐없이 고백성사를 집전했으며, 수시로 장거리 사목 방문을 다녔습니다. 매일 밤늦도록 교회와 수도회를 위한 집필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병세에 대해 의사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인간 돈보스코가 후배 살레시안들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아무리 큰 십자가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좋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십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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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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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망상적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의 율법의 차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구약은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 법은 최대한 피해 입힌 대로 보상해주라는 정의를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상대의 잘못으로 눈이 한쪽 잘못되었는데, 두 쪽을 잘못되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이 한쪽 잘못돼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심판관이 당신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건너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인간-하느님의 법의 순서대로 성장합니다. 인간의 법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 동물의 수준이면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전거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데,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도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어떤 스님의 제자가 명상만을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발전이 없습니다. 스님은 돌을 숫돌에 갑니다. 땀을 흘리며 돌을 가는 스승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돌을 왜 숫돌에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돌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녀석아, 네가 명상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먼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부터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돈이라도 꿔서 갚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냥 그 사람이 하는 짓이 모두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한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하느님처럼 정의로워지기 이전에 먼저 세상의 정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아직 인간적인 수준에도 오르지 못한 이들이 신앙생활 할 때 피해망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속의 원인 모를 미움과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너의 그 미움은 정당하지 않다’고 속삭이지만, 그 목소리를 인정하기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그 미움의 대상을 ‘나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이 나를 공격하기에 나의 미움은 정당한 방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허먼 멜빌의 위대한 소설,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은 바로 이 비극적인 자기기만의 가장 강력한 상징입니다.
에이해브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노련한 선장입니다. 그는 과거에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고는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다리를 잃은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삭이고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세상 모든 악에 대한 증오로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증오를 ‘모비딕’이라는 존재에게 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모비딕은 더 이상 이성을 가진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성을 상실한 짐승에 불과한 고래에게 인격적인 악의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광기를 선원들 앞에서 이렇게 정당화합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사람이여, 그저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네. ... 인간이 치려거든, 그 가면을 뚫고 쳐야 한다! 어찌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흰 고래는 바로 그 벽일세.”
에이해브에게 흰 고래는 자신을 가두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의 ‘가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와 증오라는 감옥을 부수는 대신, 그 감옥의 벽을 외부의 존재인 ‘모비딕’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 피해망상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가 이끄는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첫째, 그는 선장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어 항해를 성공시켜야 할 그의 배는, 오직 선장 한 사람의 복수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금화 한 닢을 돛대에 박아놓고 흰 고래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외치며, 선원들의 이익과 자신의 광기를 교묘하게 결합시켰습니다. 공동체의 목표가 한 개인의 뒤틀린 망상에 잠식당한 것입니다.
둘째, 그는 동료들의 이성적인 목소리를 억압했습니다. 오직 일등항해사 스터벅만이 그의 광기를 지적하며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흰 고래에게 복수하다니요! 미친 짓입니다!”라고 외쳤지만, 에이해브는 듣지 않았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향한 건강한 조언마저 자신을 방해하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쿼드호는 장대한 추격전 끝에 모비딕을 만나고, 삼일간의 사투 끝에 파괴됩니다. 에이해브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모비딕의 몸에 작살과 함께 엉켜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료가 그의 광기와 함께 수장됩니다.
에이해브의 비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삶의 ‘흰 고래’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상처와 열등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 배우자나 동료, 혹은 특정 집단을 ‘나를 해치려는 악의 가면’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카인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에게 피해를 본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예배하면서도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이나 사람을 미워하는데, 그 합당한 이유는 없어서 양심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상이나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든다고 스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나에게 해를 가한 만큼만 미워합시다. 이것이 용서를 위한 시작입니다. 거울이 되려면 먼저 돌에서 쇠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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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려서는 ‘법칙’을 몰랐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지냈습니다. 행동반경도 집 주변이 다였습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법칙과 규칙을 배웠습니다. 큰길을 건널 때는 육교를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는 차의 속도를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육교가 거의 없고, 교통 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에 건너고, 빨간불에는 멈추는 것이 꼭 지켜야 할 법칙입니다.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법칙을 배웠습니다. 사칙연산, 인수분해, 방정식, 미분과 적분은 법칙을 알아야 풀 수 있었습니다. 수동태와 능동태, 부정사와 동명사를 만드는 법칙도 배웠습니다. 법칙과 규칙을 잘 이해하고, 풀 수 있어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진화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런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고, 찾아내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제 분야에도 법칙과 규칙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이런 법칙과 규칙을 통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1989년에 출간한 자기계발서로,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가 팔린 책입니다. 코비는 "성공"을 단지 성취나 부의 개념이 아닌, 인격과 원칙에 기반한 ‘진정한 효과성’으로 보았습니다. 습관 1은 ‘주도적으로 살아라.’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진다는 의미입니다. 습관 2는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입니다. 인생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목표와 비전을 명확히 한 후 그것에 맞춰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습관 3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입니다. 중요한 일을 우선순위로 두고, 긴급한 일에 끌려가지 말라는 시간 관리의 원칙입니다. 습관 4는 ‘승-승을 생각하라.’입니다. 모두가 이기는 방식을 추구하는 협력적 사고방식입니다. 습관 5는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입니다. 진정한 경청을 통해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습관 6은 ‘동반 상승을 창출하라.’입니다. 차이점을 존중하고 협력함으로써 혼자보다 더 큰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습관 7은 ‘끊임없이 쇄신하라.’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영역을 균형 있게 성장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이 책은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우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않고, 남의 재물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실패의 원인을 성찰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겼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슬픔도 없고, 더 이상 눈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보복의 법칙을 넘어서,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법칙이 ‘형평’이라면, 하느님의 법칙은 ‘자비’입니다. 세상의 법칙이 ‘거래’라면, 하느님의 법칙은 ‘은총’입니다. 그야말로 역설입니다. 억울해도 참으라고 하시고,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승리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이 예수님의 법칙을 따르며 살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먼저 다가서고, 내가 먼저 웃는 법칙. 이 사랑의 법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공동체를 더 따뜻하게 만들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 사랑의 법칙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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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바보!” 오늘 복음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듣게 될 말입니다. 그는 누구나 이용하려 드는, 이른바 ‘밥’이나 ‘봉’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논리로는 바보로, 모자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자신을 “바보야!”라고 부르셨지요.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그렇게 모두에게 밥이 되어 주시다가 악한 자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무력함이 악을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 5,38)라는 ‘탈리오의 원칙’을 뛰어넘어 악의 고리를 끊으십니다. 동태 복수법을 동태 포기법으로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 결국 악만 남기 마련이니 상대의 악에, 몰염치한 요구에 선과 관대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비폭력은, 비겁하고 무기력한 순응이 아니라 용감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한 군인에게 뺨을 맞으셨을 때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과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은 당신께서 겪으신 부당함에 맞서 정당하게 항의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인내하고 양보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나서서 정의와 진리를 옹호하고 약자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라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물러섬이 비겁함이 아니라 사랑이 되고, 우리의 저항이 폭력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지키는 수단이 되도록 식별과 지혜의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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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탈출 21,22-25). 이 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것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셨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까지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의 옷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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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저항>
마태오 5,38-42 (폭력을 포기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참된 저항>
악에
악으로
맞섬으로써
악으로
물들지 않고
악에
선으로
맞섬으로써
선으로
물들이는 것
분노에
분노로
맞섬으로써
분노로
물들지 않고
분노에
평정으로
맞섬으로써
평정으로
물들이는 것
교만에
교만으로
맞섬으로써
교만으로
물들지 않고
교만에
겸손으로
맞섬으로써
겸손으로
물들이는 것
탐욕에
탐욕으로
맞섬으로써
탐욕으로
물들지 않고
탐욕에
자비로
맞섬으로써
자비로
물들이는 것
포악에
포악으로
맞섬으로써
포악으로
물들지 않고
포악에
온유로
맞섬으로써
온유로
물들이는 것
폭력에
폭력으로
맞섬으로써
폭력으로
물들지 않고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섬으로써
비폭력으로
물들이는 것
죽임에
죽임으로
맞섬으로써
죽임으로
물들지 않고
죽임에
살림으로
맞섬으로써
살림으로
물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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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언제나 항상 ‘선’은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은 원래는 정의를 실현하라는 율법이었고, ‘죄에 상응하는 처벌만’ 하라는 율법이었습니다. <복수를 해도 된다는 율법이 아니라, ‘과잉 처벌’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때려 목숨을 잃게 한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또 짐승을 때려 목숨을 잃게 한 자는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다. 동족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은 자기가 한 대로 되받아야 한다. 골절은 골절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대로 자신도 상해를 입어야 한다. 짐승을 때려죽인 자는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 사람을 때려죽인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너희에게는 법이 하나일 뿐이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4,17-22)
‘사적인 복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도피 성읍’ 제도입니다.
“살인자가 피신하여 살 수 있는 경우는 이러하다. 전에 미워한 일이 없는 이웃을 실수로 죽인 자나, 자기 이웃과 함께 나무를 베러 숲으로 가서, 나무를 찍으려고 손에 도끼를 잡고 휘두르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나가 이웃을 치는 바람에 그 이웃을 죽게 한 자는, 그 성읍들 가운데 한 곳으로 피신하면 살 수 있다.
살인자가 전에 그 이웃을 미워한 일이 없으므로 사형 판결을 받지 않아도 되는데, 피의 보복자가 흥분한 나머지 그 살인자를 뒤쫓아 가서, 그 성읍에 이르는 길이 먼 탓에 그를 따라잡아 때려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성읍 셋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 하고 명령한 것이다."(신명 19,4-7)
이렇게 분명하게, 하느님께서는 사적인 복수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동태복수법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사적인 복수를 해도 된다는 율법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의 율법을 본래의 정신대로 회복시키신 말씀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말씀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를 “악에 맞서지 마라.”로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악’에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같은 악’이 아니라, ‘선’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선’과 ‘사랑’은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는, 신명기 32장 35절에 있는 말씀이고,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는, 잠언 25장 21절-22절입니다. 구약성경이 사적인 복수를 허용한 것으로, 또 구약시대를 사적인 복수를 허용했던 시대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또 인류 역사를 보면, ‘악의 힘’이 ‘선의 힘’보다 강한 것으로 보일 때가 많고, 선한 사람들이 억울한 고통을 겪는 일이 실제로 많이 일어나고, 나쁜 악인들은 처벌도 받지 않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현실적인 가르침으로, 또는 탁상공론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의 실천’과 함께 ‘정의의 실현’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자비’만 있고 ‘정의’가 없다면, 그 자비는 악을 조장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반대로 ‘정의’는 있는데 ‘자비’가 없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악’이 될 것입니다. ‘무자비한 정의’를 ‘정의’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연대해야 합니다. <교회는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도피 성읍’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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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출처 -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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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동태 복수법으로 알려진 이 표현은 어찌 보면 가장 공정한 법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와 똑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나 물건으로 그것을 교환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말이 섬뜩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만 갚아 준다면 잘못된 것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갚아 주는 것은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정당하지도 않고, 평화로운 방법도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받은 상처는 크게 새기고, 자신이 입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똑같은 상처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주고받아야만 공정한 계산이 되는 경제적, 법적 관념에서는 한없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사랑은 사랑을 낳고, 복수는 복수대로 확대 재생산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계산기를 가지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보여 주신 죄 없는 수난과 죽음의 모범에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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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주님께서 들려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자니 난감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고 하시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똑같은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탈출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싸우다가 …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동태복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은 우리 삶의 윤리로써 자리 잡고 있으며, 은연중에 이러한 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태복수법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무자비한 율법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에게 사사로이 복수할 권리를 주는 법률이 아니라, 법정에서 재판관이 벌을 주되 그 형량이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재판관을 위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의 배경에는 ‘복수의 한계가 거기까지다’라고 하면서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복수를 신중하게 제한한 것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법이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에 손을 드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경우 제한적으로나마 그 댓가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 법을 들어 말씀하시면서,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 만큼만 복수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제한된 복수까지도 금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시면서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손등으로 뺨을 맞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손바닥으로 뺨을 맞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손등으로 뺨을 맞을 땐 그 배 이상의 멸시와 모욕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까지도 참아내면서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라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아날 뺨이나 겉옷이 어디 있겠으며, 두 다리가 성할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겁나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왼뺨’, ‘겉옷’, ‘십리’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평화의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온유함을 닮음으로써 참된 평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시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손해를 손해로 되갚지 않는 의인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받은 만큼 갚아주면 속이 풀릴 것 같지만 오히려 앙갚음은 내 마음을 더욱 망가뜨리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없는 말을 하고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오히려 희생하고 손해 보며 그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의 의로움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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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현명하고도 공정한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른바 ‘동태복수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이가 그것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거나 그 피해자와 화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보복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바로 이 ‘동태복수법’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이 ‘동태복수법’은 기원전 450년경의 로마법의 모체인 열 두 개의 동판에 새겨진 법조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의 고대 사회의 수많은 법 규정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된 법의 집행 방법이 바로 ‘동태복수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는 ‘동태복수법’은 어긋난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 ‘복수’는 악을 악으로 무찌르고, 하느님의 정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의 복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 적용되어 집행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수’는 정의의 궁극적인 실현자인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태복수법’의 근본취지는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난 행위를 한 이에게 그의 행실대로 똑같이 갚아주어 깨어진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이 법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하는 ‘함께함의 법’이었고,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이상으로 보복하여 이른바 ‘복수’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막는 ‘정의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함께함’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결국 범죄의 악순환만을 불러 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법의 완전한 폐기를 강력히 선언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네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며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를 ‘용서 한다’는 것,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고 헤아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더욱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 용서를 하는 사람 모두의 얼굴을 밝게 해 줄 것입니다.
단순히 나한테 죄지은 사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얼굴을 밝게 해 주는 ‘용서’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를 함께하게 해줍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를 함께 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스스로 먼저 잘못된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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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여행 수필 작가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 같아요.”
화는 언제 생기게 될까요? 무시당할 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오해나 소통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입시, 취업, 승진, 결혼, 육아 등에서 경쟁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 안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됩니다. 아마 이런 이유로 화낼 준비가 된 사람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감정을 억누르는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이 있습니다. 화병은 화를 많이 내는 병이 아니라, 적절히 표현되어야 할 울화와 억울함 등이 내재하여 있는 병입니다. 문제는 이 화병이 터지면 큰 일인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기가 당한 것을 언젠가는 다시 되갚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가 가득한 세상 안에서, 일상 속 깊숙이 스며있는 이 화를 주님 뜻에 맞게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성경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는’이라는 부분은 피해자와 동일한 정도의 피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복수법인 탈리오 법칙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라는 것은 모욕에 대해서도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으로 왼쪽 뺨을 치는 행위는 유다인 사회에서 수치심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겉옷까지 내주어라.’라는 말은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 권리조차 사랑으로 기꺼이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는 말에도 재미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로마 병사가 유다인에게 강제로 천 걸음까지 짐을 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걸음까지는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동행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마음을 사랑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기준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세상을 넘어선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사랑을 베풀기 힘든 대상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보다 사랑할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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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악인에게
맞서지
않는 것이
악의 고리를
끊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하느님의
방식을 복음에서
만납니다.
악에 반응하지
않을 때
그 악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는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습니다.
이렇듯
비폭력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한 믿음의
선택입니다.
믿음의 선택이란
자기를 내려놓는
적극적인 믿음의
삶입니다.
사랑과 지혜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을 따르며
한걸음씩
걸어가는
한 주간 되십시오.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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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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