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6
2월26일[연중 제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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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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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mHKn6XhXF0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준정 리차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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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집회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혜로움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여기며 지혜를 찬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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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lc4VthcT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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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요즘 우리나라엔 존경받는 ‘어른’이 나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저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따지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저를 알아서가 아니라 가톨릭 전체를 좌파 편향으로 보고 따지러 온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는 게 아니라 더 좁은 시각으로 편을 가르는 시각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혹은 넬슨 만델라처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소위 ‘어른’이 요즘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포용력이 있는 어른이 될까요? 이는 유명한 예화가 떠오르게 합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이 주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대의’(큰 뜻)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컴퓨터에 깔린 안 좋은 프로그램을 제거하면 좋은 것들까지 함께 제거되어 결국엔 윈도우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안 좋은 것은 뽑아내지 말고 함께 두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대의를 위해서.
19세기 초, 미국 예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사냥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축업자들은 늑대가 가축을 해치는 주범이라 생각하여 늑대를 몰살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늑대가 사라지자, 오히려 사슴과 엘크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초원이 황폐해지었습니다. 초목이 사라지자 가축들도 먹이를 구하지 못했고, 강물의 흐름까지 변하는 등 생태계 전체가 붕괴하였습니다.
큰 뜻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다가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대의를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포용력이 전혀 없는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진 어른이 꼭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임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훔쳐먹은 신하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당에도 그렇게 나라에도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영혼 구원이라는 뜻에 집중할 때만 그런 능력을 갖춘 포용력 있는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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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혼자 하는 말은 ‘독백’이고, 상대가 있는 말은 ‘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하고 나면 기분이 좋고,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를 통해서 뭔가 문제를 해결하고, 배운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만나고 싶지 않고, 기분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대화에서 조심해야 할 6가지 태도를 들었습니다. 이 6가지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어렵다고 합니다. 첫째는 ‘판단’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선입견을 품고 판단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리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은 들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잘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피부색으로, 외모로, 직업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곤 합니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한다면 상대방과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비난’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 학자들의 비난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왔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저도 비난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신부님들과 차를 나누어 타고 강화도로 연수 갈 때였습니다. 1호차에 탄 신부님들이 2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휴게소에서 2호차를 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1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화장실 가기도 겁났습니다. 제가 없을 때 저의 허물을 이야기할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자주 입에 올린다면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비교’입니다. 자녀에게 ‘네 형을 보아라. 얼마나 잘 하니. 내 친구를 보아라. 힘든 가운데서도 공부를 얼마나 잘 하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이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입니다.
넷째는 ‘강요’입니다. 자녀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지 않고, 부모님이 원하는 걸 요구하면 자녀에게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 집안은 모두 법대를 갔으니, 너도 법대를 가야 한다.’라고 말하면 아이의 재능을 가로막게 됩니다. 부모의 강요 때문에 법을 공부하지만, 사법시험에 실패하면 부모도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강요는 당장은 효과가 있겠지만 창의력이 사라지면 경쟁력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다섯째는 ‘충고’입니다. 자녀들에게나, 부하직원에게 ‘나 때는’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아직 미혼인 자녀에게 일찍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됩니다. 저는 ‘주민등록증’이 나온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충고하지 않는 편입니다. 성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운전할 때도 충고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충고를 잘못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여섯 번째는 ‘합리와’입니다.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교하고, 강요하고, 충고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렇게 말했겠니.’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화는 상대방과 소통하는 거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며 합리화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대사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도 ‘합리화’를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국회의원들이 의회 독재를 해서 경고 차원에서 했다고 합니다. 비상계엄은 국민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했기에 계몽령이었다고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합니다.
“지혜는 자기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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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우리 가운데 자기 집단 중심의 사고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수에게 유익한 일이나 공동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집단이 그 선을 행하고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다른 집단을 견제하고 비난하는 이른바 진영 논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승을 자기들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듯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견제하는 제자들의 옹졸함과 반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지지자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관용이 대조적입니다.
사실 누가 선을 행하는지보다는 선이 행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이, 공동선이 실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일행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입니다.
칼 라너가 말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그리스도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신론자라고 해도 삶으로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에 대한 가르침에 이바지하기도 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종교나 종교적 신념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복음과 예수님을 위한 실천으로 인간의 구원에 협력하는 이는 예수님께 지지자로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 의해서든 복음의 가치가 널리 퍼져 가기를 바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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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으로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인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이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 안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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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귀들을 쫓아내는 싸움에 중립이란 없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8-40)
1)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사도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빌려 드린 사람(마르 11,5-6), 최후의 만찬 때에 방을 내준 사람(마르 14,15) 등이 그 예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또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요한 19,38-39)
아마도 사도들은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함께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박해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숨기는 일이 훨씬 더 많았고, 신자들끼리도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자에게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을 때 암호 같은 것을 사용했는데, 그 암호들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바로 물고기 그림입니다. 물고기 그림을 사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머리글자를 모으면,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요한 사도가 그것을 막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에 무슨 마법 같은 힘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함부로 사용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 19,13-16) 또 요한 사도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기억하고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은, 우상숭배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을 금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우상숭배자들이 성사를 모독하는 것을 막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권한이 없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성사 집전을 한다면, 그것은 성사 모독죄가 됩니다. 요한 사도의 행동을 편협하고 옹졸한 집단 이기주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라는 계명은 ‘예수님의 이름’에도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3) 요한 사도는 ‘좋은 의도’로 행동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라는 말씀은, 그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켰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신자라는 것을, 당신의 권한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과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귀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쫓겨나기는커녕 그 사람에게 덤벼들 것입니다.(사도 19,15) 그런데 그냥 순순히 쫓겨났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을 나쁘게 말한다.’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인한다.’, 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한다.’, 또는 ‘자기는 예수를 안 믿는다고 공언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에는 중립이 없다.”, 또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싸움에는 중립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편이 아니면 마귀들 편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를 받지 않아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반대하지만 않으면 다 신앙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그렇지만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인이 되지 못했더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착하게 살고,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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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불어 함께>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더불어 함께>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믿음은 믿음을
막지 않으며
믿음은 믿음과
맘껏 어울립니다
희망은 희망을
막지 않으며
희망은 희망과
맘껏 어울립니다
사랑은 사랑을
막지 않으며
사랑은 사랑과
맘껏 어울립니다
믿음은 믿음과
다투지 않으며
믿음은 믿음을
한껏 북돋웁니다
희망은 희망과
다투지 않으며
희망은 희망을
한껏 북돋웁니다
사랑은 사랑과
다투지 않으며
사랑은 사랑을
한껏 북돋웁니다
믿음은 믿음을
시샘하지 않으며
믿음은 믿음을
오롯이 믿습니다
희망은 희망을
시샘하지 않으며
희망은 희망을
오롯이 희망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시샘하지 않으며
사랑은 사랑을
오롯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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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끼리끼리의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편협하지 않고 모두를 품습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독점적이어서도, 배타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않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로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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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마르코 9,38)
<그 사람의 시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봉사를 바라시는 이유가 뭘까요?” 어느 예비자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기도와 봉사를 통해 우리가 성화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고 혼자서 한참 그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편의 시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었지요.
최유수 시인의 ‘( )가 말했다’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선물과 편지 자체도 좋지만 물론 그렇지만, 이 선물을 사러 갔던 그 사람의 발걸음, 그 발걸음을 사랑한다. 책상 앞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편지를 썼을 그 사람의 허리춤을 사랑한다. 그 사람의 시간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기도와 봉사도 물론 기쁘게 받으시지만, 우리의 삶에 당신이 들어가는 것을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생각하고 마련하면서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가는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막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이 자라나기 때문이겠지요. 기도가 어렵게 느껴질 때, 우리도 천천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에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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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스마트폰에 소변이 튀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1) 손으로 쓱 문질러 닦는다. 2)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둔다. 3) 물티슈로 깨끗이 닦는다.
아마 기겁하면서 3번을 대부분 선택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방금 만들어진 소변에는 세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스마트폰 표면에서는 7,000여 종이 넘는 세균이 득실거립니다. 스마트폰이 화장실 변기보다 500배 더럽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주저하면서도 스마트폰 만지는 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2,000번 이상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으면 당연히 변기보다 스마트폰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 판단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이 먼 훗날 크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요한은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누구보다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어디에서 나오든 그 궁극적인 원천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울타리 밖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움직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세상의 역사 안에서 영적 체험을 한 많은 성인 성녀의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참 진리 안에서 참 기쁨에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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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코.9,39,40)
영혼의 활동과 선을 위한 우리의 열정은 흐르게 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막아서는 안됩니다.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 흐르게 되어있는 우리의 열정이 내면에서 막히면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이 우울하게 되고 모두를 해치게 됩니다. 내면에서 막힌 우리의 열정은 밖으로 흘러야 사람과 세상을 위한 구원의 씨가 됩니다.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 흐르는 우리의 영도 잘 흐르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타오르는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의 영의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일에도 그 영이 잘 흐르도록 할 때 서람들과 세상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을 사람이 막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공동선을 위한 일들은 영혼의 활동이요 영의 흐름이요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선, 정의와 평화를 향한 내적 외적 영의 흐름에 우리는 민감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활동인 선한 영의 흐름을 인간적인 질투나 경쟁으로 막아서는 안됩니다. 공동선을 향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일이 됩니다.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주님의 일을 할 때, 그 일을 누가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하는지보다, 주님의 일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집회서4.11)
하지만, 세상은 지혜로 주님의 일인지 아닌지를 보지 않고, 누가 그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집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행여 자신이 모르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면, 시기와 질투로 주님의 일마저 외면하거나 때로는 거부합니다. 지혜보다 어리석음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거나, 예수님을 모르더라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어수선한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공정과 정의, 공동선과 진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을 지지하는 사람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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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어제 복음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가 부족하여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했던 제자들이, 그런 일을 겪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지 믿음이 깊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이 더 옹졸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는 질투심과 자격지심이 생겨서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조치를 취할 정당한 이유도 명분도 부족했기에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에 마음이 상한 요한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그 상황에 대해 ‘고자질’하기에 이릅니다. 또래 친구와의 싸움에서 진 어린 아이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달려가 자기 대신 그 친구를 좀 혼내달라고 청하는 것과 비슷한, 참으로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그 사람에 대해 성토하면서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강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 뒤를 따르는 자기들이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감히’ 우리 편도 아닌 이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수고도 고생도 하지 않는 이가 자기들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구마에 성공했으니 그 모습이 아니꼽게 보였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즉 교회에서 ‘우리’라는 특정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주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면 교회는 ‘나만 옳다’는 교만과 독선,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아니지요.
비단 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되면 ‘스포츠’가 되고, 부정적인 에너지로 변질되면 ‘패싸움’이 되는 겁니다. 끊임 없이 편을 갈라 상대방을 증오하고 싸우는 패싸움은 우리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지요. 그러니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차별과 배척의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누구 편에 서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분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와 너희라는 구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같은 믿음 안에서 구원과 참된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동료이자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팍팍한 우리 삶에 동료와 형제는 많을수록 좋지요. 그러니 편 가르고 싸우는 일은 이제 제발 그만하고 마음과 뜻을 모아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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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를) 막지 마라.”>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코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코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코린토 2서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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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고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 된다는 독선을 부리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해도 되지만 너희는 해서는 안 된다고 편을 가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라는 특권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의 양떼가 아니라 당신의 양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울타리를 거두고 손짓하여 부르게 하소서!
스스로에게 갇히는 일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게 하소서!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와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볼 줄을 알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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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지혜>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사랑의 지혜뿐이다”-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는 무엇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시편 119,165)
얼마전 수도공동체가 선물로 받은 책들 제목이 언뜻 눈에 띠었습니다. 어느 영성심리 상담 사제가 쓴, “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루카복음서에서 찾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힘”이란 책이었습니다.
진짜 나를, 바로 참나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혜롭고 겸손한 자들이요 내적 부요의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부단히 참나를 깨달아 발견해 갈 때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이런 지혜에 있음을 봅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지혜 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를 뽐내기 위해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지 마라. 어른의 근심은 과시가 아니라 귀감이 되어야 한다.”<다산>
읽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과시하는 어른이 아니라, 귀감이 되는 어른임을 깨닫습니다.
“덕을 수양하지 못하고, 학문으로 사리를 밝히지 못하며, 의를 듣고도 전하지 못하고,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이다.”<논어>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공자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즉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써놓고 자족하며 나눴던 ‘바다와 산’이란 글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고 넓은 바다예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이예요”
가만히 산같은 자세로 바다같은 마음으로 주님 안에 머무는 묵상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바다가 지혜를 상징한다면, 산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요 분별의 지혜도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의 사람’은 바로 사랑과 지혜의 사람입니다. 산같이 어진 사람이 바다같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둘이자 하나인 참 좋은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바다와 산’입니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의 조건중 하나가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집이 남쪽을 향하고 있을 때 북쪽에는 산이, 남쪽에는 강이 있는 것을 뜻하는데 역시 지혜와 사랑이 함께 함을 봅니다. 제 요셉수도원의 경우 배경의 불암산에 넓게 열린 전방의 푸른 하늘은 바다로 생각하며 자주 자족한 적도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라는 수도좌우명도 이를 노래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사랑과 지혜를 추구하는 이상적 삶을 향한 갈망을 노래한 시입니다.
오늘 집회서 말씀도 지혜 찬가처럼 들립니다. 이 모두 역시 깊은 사랑에서 나온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지혜를 사랑합니다. 지혜를 사랑할 때, 사랑의 지혜가 되어 갑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이런 사랑의 지혜뿐입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지혜를 사랑하는 어질고 관대한 자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께 그대로 해당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옹졸하고 편협함과 예수님의 관대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스승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다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지혜로운 자는 결코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하며 겸손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이 그러했습니다. 바다같이 깊고 넓은 마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랑입니다. 사랑이, 섬김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아무도 심지어는 교회도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진리를, 사랑을, 정의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누구나에게 차별없이 열려 있는 하느님의 나라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와 지혜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당신 구원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당신 가르침이 저의 즐거움이옵니다.”(시편119,1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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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주님!>
오늘 복음(마르9,38-40)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9,38)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받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39-40)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고, 그 따름 너머에 있는 부활로 나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지금 부활을 살고 영원한 부활(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우리를 좀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세례받지 않은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칼 라너(K.Rahner) 라는 예수회 신학자 신부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지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제2차바티칸공의회 선언인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치와 화해의 공의회'인 제2차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는 가톨릭 교회도 개신교처럼,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외치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모두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몸과 마음으로 온전하게 믿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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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막지 마라."(마르 9, 39)
그 어떤 것도
고집하거나
독점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다양한 빛깔과 향기로
하느님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들또한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장과
주장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들은
함께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니편 내편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향하는
성숙된 삶이 중요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언제나 힘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끕니다.
사랑의 실천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마십시오.
유대와 연대를 통한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막지 말고
응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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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막지 마라."(마르코 9장 39절)
주님의 보편적 진리는 막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아집과 편견의 무서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의 일이다.
독점할 수 없는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일은 결코 막지 못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반대와 지지 사이에 우리의 자아가 있다. 우리의 자아는 개방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 개방된 삶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반대하게 된다. 반대하는 이들의 마음엔 배타적인 마음이 있다.
맹목적인 반대와 맹목적인 추종도 올바르지 않다. 지나친 편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편견과 아집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남용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다. 대립과 차별모순과 불일치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성찰에 있음을 믿는다.
되돌아가야 할 길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막지 않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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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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