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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에 우리는 매우 밝은 빛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의 빛에 의거하여 살고 있다. 사실 근대 이후로 이성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이 여파는 지금까지도 매우 강렬한 것으로써, 우리는 이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 이성의 빛은 절대로 빛의 전체가 아니고 일부라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비추는 것만을 부각시키고 그 나머지의 모든 세계를 더욱 큰 암흑 속에 몰아 넣는 탐조등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비판없이 수용했던 이성중심, 로고스 중심, 태양 중심, 지구 중심, 존재자와 현전중심, 인간 중심, 동일성 중심의 사유로부터 탈피해야 하며 이는 철학분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2. 사실 인류에는 다양한 문화가 나름대로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며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세계의 판도가 유럽에 의해서 하나로 통합되어 나가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듯 보여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럽 중심의 문화는 한계에 부및치고 있다. 물질적 측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을망정 정신적 측면에서는 사실상 그리스도교가 제대로 구실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한계점을 안고 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정신성, 영성, 종교성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3. 서양사안에서 종교개혁 이후 무너져간`신`의 영역의 부재는-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이며 이성 중심주의적인 추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간적인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감행한 신적인 것의 퇴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결국 성스러움의 영역이 사라져 간데 따른 현상이다. 하이데거는 이 영역을 마련해야함이, 즉 신을 다시 모셔옴이 바로 인류가 해야할 일임을 피력했다. 다석 류영모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과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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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우리는 서구중심 사상에 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존재는 생명의 강물 2020. 11. 14. 10:39
[이기상-신의 숨결] #존재_중심_사유로부터의_해방
#다석_사상의_철학사적_의미 : 존재중심의 사유를 벗어나 '참나'로서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
'#태양을_꺼라!' 서구중심 사상 비판 : 태양의 빛은 우주의 거대한 암흑에 비하면 깜빡이는 촛불과 같다.
<태양을 꺼라!>라는 화두는 다석이 직접 외친 말은 아니지만 서구사상에 대비해서 다석 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문구이기에 표제어로 삼았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서양사상은 눈앞의 존재를 강조하는 #현전의 _형이상학, 이성으로 어둠의 세력을 내모는 #계몽의 _변증법, 인간의 지배 의지를 무조건 관철시키려 드는 #의지의_현상학 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문화만을 중심권으로 인정하고 다른 모든 문화는 주변문화로서 계몽되어야 하고 선교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철저한 < 서양중심 사상>이다
#상호문화성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대화를 꾀하는 철학적 노력은 구체적인 상대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떤 특정의 형이상학, 종교, 문화, 논리학, 윤리학 등을 절 대화시키려는 경향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유럽 철학의 보편적 요구주장은 그전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통용될 수는 없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_철학 을 한 #문화의_철학 으로 ㅡ 그럼에도 자신을 유일한 보편적ㆍ포괄적 철학이라고 자처해온 그 런 철학으로 ㅡ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아 데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유럽의 민족들이 더 이상 역사 를 '만드는' 유일한 민족들이 아니라면, 그들의 정신적 문 화적 가치들도 더 이상 특권을 부여받은 것으로 남아 있 지 못한다. 하물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권위는 말할 것도 없다."[M. Eliade, Die Sehnsucht nach dem Ursprung (근원에 대한 갈구), Wien 1973, 16.]
인도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타고르는 #문화적_다양성 을 신이 그렇게 원한 것으로 보고 낯선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이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그러한 파국이 인류에게 덮쳐,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또는 오직 하나의 문화나 철학만이] 모든 곳에 차고 넘친다면, 신은 그의 피조물들을 그러한 정신적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두 번째로 노아의 방주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 문화적인 열린 수용과 배움의 대화를 강조한 사람으로 우리는 현대 서양 철학자의 한 사람인 #야스퍼스 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오직 자신의 역사적인 형태로써만 철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역사적인 형태는 ㅡ 그것이 참인한 -그 자체 어느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구원의_철학 의 한 표현이다."[K. Jaspers, Weltgeschichte der Philosophie. Aus dem Nachlaß (철학의 세계사. 유고 정리본), hrsg. von H. Saner, Munchen 1982, 20 이 하.]
이제 오직 태양의 밝은 빛 아래서 나타나고 있는 것만을 <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의 빛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만을 <현실>인 것으로 사유해온 서양사상을 한 마디로 < #빛의_형이상학>이라고 보며 <태양 빛을 끄라!>고 외치고 있는 다석의 생각을 뒤밟아 보자. 다석은 태양의 빛이 우주의 거대한 암흑에 비하면 깜빡이는 촛불과 다를 바 없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태양(太陽)이 크다고 '클 태(太)를 씁니다만 '큰 대 (大)'에 점을 하나 찍고 한 번 더 크다는 뜻으로 이렇게 씁니다. 엄청나게 크다고 태양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그렇 게 엄청나게 크다는 말입니까? (..) 우리가 언제 빛이라는 것이 있어서 완전한 빛을 보았습니까? 기껏 태양 하나, 큰 불덩어리를 가리켜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 산에 해가 지면 왜 캄캄해집니까? 무슨 빛이 얄팍한 구름 한 점에 가려져도 금세 캄캄해집니까? 광명이 흑암을 쫓는 것을 보았습니까? 우주를 생각해보십시오. #우주는_호대한_ 암흑입니다. 태양이 엄청 크다고 하고 그 밖의 발광체도 많지만, 우주의 어두운 것을 쫓아냈습니까? (..) 갇힌 몸으로 생각하니까 그 정도밖에 생각이 안 됩니다. 정말 진리인 하느님이 베푼 말씀으로 보면 우리는 광명을 결코 본 일이 없습니다. 대부분 흑암 속에서 아물아물합니다. 흑암이야말로 큰 것입니다.
태양은 큰 게 못됩니다. 그러한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호대한 것은 흑암이요 광체는 미미한 것이라 하였습니다."[유영모, r다석강의J, 485/6.]
거대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태양계에 살면서 그 태양을 유일한 빛으로 여기며 그 빛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서양인의 눈에는 그 #무한한_ 빈탕한데가 보일 수 없으며 그 빈탕한데에 없이 계신 하느님 또한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태양 빛 아래에서 하느님을 찾을 생각일랑 말고 어둠 속에서 하느님과 교통하라고 충고한다
'하느님이 있다면 그 호대한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광명 속에는 하느님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광명은 허영이요, 이 허영 속에서는 하느님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찾을 수 있 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광명에서 신을 찾는다고 하는 것을 뒤집어서 흑암에서 신을 봅니다."[유영모, r다석강 의 ,494.]
다석은 #무에서_유가_유래 하고, 무 없이 존재가 있을 수 없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아주 빈 것[#]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것이 참이다. 이것이 하느님 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물건과 물건 사이, 질과 질 사이, 세포와 세포 사이, 분자와 분자 사이, 원자와 원자 사이, 전자와 전자 사이, 이 모든 것의 간격은 허공의 일부이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류영모, r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 망에 희망을, 박영호 편, 홍익재, 1993, 161.]
태양계가 아닌 너른 빈탕한데에 사는 우주인으로서 다석 은 태양보다는 #우주의_숨소리 에 더 관심을 쏟았음을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천문학자에게는 낮이란 별로 가치가 없다. 우주의 신비를 캐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저 태양을 가릴 수 있 을까 하고 바란다. 별의 영원과의 속삭임을 더 많이 듣고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영원과 늘 같이 있고 싶은데 낮이 있으므로 해서 단절되곤 한다."[류영모, r다석어록], 29.]
어둠 속에서 #없이_계신_하느님과_교통 하는 것을 유일한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던 류영모는 자신의 호를 < #다석( 5 )>이라고 정하며 그 변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어둠을 싫어하기보다 빛에 혹함이 많았던 탓이었다. 무 사(無事)만 하고 보면 암흑이나 사망의 두려움이 없다. 빛을 기(忌,꺼릴 기)함은 사람의 것을 도적하는 자이지만 어둠을 기((忌)함은 하느님의 것을 도적하는자(생명을 하는 私有하는 자) 이다. 사람들은 흔히 대낮에는 살림을 위해서 다니고 일하고.배우고.놀고 밤에는 그것을 위해 쉬고∙잠자고.꿈꾸는 것으로 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밝은 것이 있는 뒤에는 크게 잊어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은연중에 통신으로써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 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저 잠이나 자고 있다
한 낮에만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없는 소리다. 빛을 가리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낮에 영원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 우리가 정말 밝게 사는 것은 영원과 통신할 수 있는 데에로 나아가는 것이요, 영원의 소리를 빨리 들을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낮에 허영에 취해서 날뛰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밤에까지 연장하여 불야성을 만들려는 것은 사실은 점점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원과의 통신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건 인생을 몰락시키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낮보다 더 밝게 하는 길은 바로 이 길이다. 보이는 것이 빛이 아니다. 햇빛:달빛∙별빛 다 본들 뭐가 시원한가. 우리는 우주의 영원한 소식을 받아들이고 숨은 길로 들어서는 것이 정말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나 사랑이 하느님이 될 수 없음 같이 하느님은 빛이시나 빛이 하느님은 아니다. 흔한 사랑이 치미(痴迷)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 빛은 허영을 꾸미도다. 암흑을 타는 소적(小賊)이 있지만 광색을 쓰는 대간(大姦)이 많도다. 불을 위하고 해에 절한 일이 있다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 불은 바래진 세상의 한 때 자랑이다. 창세기에 '(먼 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하였고, 묵시록에 '새 하 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없다'하였으니 처음도 저 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처음과 나중이 한가지로 저녁 이로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이 영원한 저녁이 그립소이다. 파동이 아닌 빛 속에서 쉼이 없는 쉼에 살리로다."[류영모, 성서 조선], 1940년 8월호 통권 139호. 박영호, "다석 류영모 의 생애와 사상. 하권1, 69~ 71에서 다시 따옴.]
대낮이란 촛불 태양이 흔들리는 곳이요, 수많은 별빛은 못 보는 세계다. 자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도 #촛불_문명 이요, 육의 문명이요, 죄의 문명이다. 모두 난 반사요, 진물 나는 허영의 문명이니 촛불이 꺼지듯이 멸 망할 문명이다. 밤의 우주는 칠흑 같은 밤이요, 지척을 분 간할 수 없으나 억만 광년 먼 별이 반짝이고 있다. 어둠 속 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다
그러니까 촛불에 가려져서 별빛을 놓치지 말고 거짓 문명에 가려져서 참 문명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 문명은 명도(命道)정신문명이요, 하느님의 은밀한 밤세계 별세계 은도(隱道)의 세계다. 이 별세계를 정관(貞觀)하라 그리하여 직진(直進) 미광(微光)정직하게 사는 올바른 정신이 되라. 가온찍기 진리를 깨달은 정신이 되라. 태양의 빛 때문에 정신의 별길을 막지 말고 정신의 숨길로 들어가는 참빛, 영의 빛을 정직하게 따라가 보라.[류영모, 명상록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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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철학자, 다석 유영모
※ 이 글은 이기상 선생님이 소개한 다석 유영모에 대한 글입니다.
한국이 낳은 철학자
다석 유영모 선생을 긔립니다
새로운 자아론에 입각하여 <참나>를 찾아가는 길을 마련하였다. ‘몸나’에 사로잡히지 말고 ‘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뜻나’와 ‘얼나’로 솟나 하늘과 땅 사이에서의 ‘제 긋’을 다해야 하는 ‘인간의 사명’이 강조되고 있다.
'하루살이'의 삶을 산 사람
다석 유영모 선생은 1890년 3월 13일 태어나셨다.
40년을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걸어다닌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칠성판이라고 하는 죽음의 널판자에서 자고 하루의 시작과 더불어 그 위에서 사색하고 공부하면서 하루를 살다가 밤이 되면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다시 죽음의 널 위에서 눈을 감는, 매일같이 그렇게 하루[할우]를 사는 ‘하루살이’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로 그가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고 설파하면서 인류의 모든 문제는 식(食)과 색(色)에 달려 있다고 외친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1890〜1981)이다. 그처럼, 그의 주장대로 산다면 21세기 인류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처럼 하루 한 끼니만 먹고 걸어다니면서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정신과 가르침에서 암울한 이 시대를 헤쳐 나갈 ‘삶의 지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석 유영모, 그는 누구인가?
다석 류영모, 그는 누구인가? (다석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길잡이 글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박영호, 『씨알.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 홍익재, 1985; 『다석 유영모의 생각과 믿음』, 다석사상전집 1, 문화일보사, 1995; 『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 (전2권), 두레, 2001. 박재순, 『다석 유영모. 동서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현암사, 2008.)
유영모는 어려서는 서당과 소학교에 다녔고, 17세에는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간 수학하였다. 이렇게 그는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아울러 배운 신지식인이었다.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교사로 2년간 봉직한다. 그 후 일본에 유학 가서 동경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고 귀국한다. 1921년 31세에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년 간 재직한다. 이때 함석헌과 운명적으로 만나 평생 그의 스승이 된다.
1928년부터 약 35년간 YMCA에서 성서를 포함한 동서양의 경전을 연구하는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한다. 1939년 51세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고 일일일식(一日一食)과 금욕생활을 실천한다. 1955년에 일 년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한다. 일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한다. 1959년 노자 도덕경을 우리말로 완역하고 그 밖에도 다른 경전의 중요 부분들을 우리말로 옮긴다. 1981년 2월 3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890년 3월 13일 세상의 빛을 봤던 그의 하루살이의 삶이 3만 3천2백 일을 채운 날이다.
2006년에 출간된 책 『다석강의』(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975쪽)는 다석 선생이 1956년 10월 17일부터 1957년 9월 13일까지 약 일 년간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에서 한 강의를 속기록에 바탕해서 복원한 강의록이다. 다석 강의의 속기록 전문이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강의록을 보고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먼저 일 년이 채 안 되는 강의의 기록이 천 쪽 가량의 방대한 분량이라는 사실이다. 서양의 저명한 사상가의 두 학기 강의록에서도 이만한 분량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한국의 무명 양봉가(養蜂家)가 해낸 것이다. 그 다음 그 내용이 그야말로 깊은 사색과 명상, 그리고 엄격한 자기수련에서 갈고 닦아낸 삶의 지혜라는 것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의 대화록, 공자의 가르침, 간디의 어록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주옥같은 말씀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이 타오른다. 35년의 연경반 강의에서 일 년 치 강의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철학자 다석 유영모
다석 선생이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잡지에 실린 글은 몇 편 되지도 않고 그나마 그것도 학술지가 아닌 일반 교양지 수준의 잡지에 실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그의 어록이나 명상록 등은 그가 종로 YMCA 연경반에서 행한 강의들과 그가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들을 기록하고 해설한 것들이다. 그의 일기인 『다석일지』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시 형식으로 쓰여 있다. 대략 한시(漢詩)가 1300편, 우리말 시가 1700편정도 실려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짧고 함축적이어서 해설이 없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든 형편이다.
유영모 생각의 큰 얼개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은 그의 강의록이다. 여기서의 강의도 대학이나 학술단체에서 한 강의가 아니라 성경연구모임에서 몇몇 사람들을 앞에 놓고 행한 강의일 뿐이다. 이 강의록마저도 그가 준비한 강의원고가 아니고 제자들이 속기사를 시켜 기록하게 한 강의 기록본이다. 이 강의록이 <다석어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지만 학술적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이 다석 유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넓은 의미의 사상가는 될지 몰라도 철학자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일기와 강의록에 심오한 사상의 단편은 있을지 몰라도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영모 철학’이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동안 『다석일지』와 그의 강의록들을 공부하고, 다석의 제자들이 해설해서 펴낸 명상록들과 일지공부들을 연구하면서 다석의 생각들이 단순히 사상의 편린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의 큰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다석 자신은 신, 우주[세계],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들을 좀 더 넓고 깊게 그 함축한 의미를 따라가며 이해하여 해석할 때 다석의 독특한 신론, 우주[세계]론, 인간론을 구축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나는 이런 작업을 하여 몇 편의 글과 책으로 출간하였다.(참조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인문학 연구』 제4집(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4; <존재에서 성스러움에로!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모색 ― 하이데거의 철학과 유영모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 『인문학과 해석학』(해석학 연구 제8집) (한국해석학회 편) (2001. 10월), 247〜300; <다석 유영모에게서의 텅빔과 성스러움>, 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발표원고,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16집 (2001년 6월), 353〜392; <다석 유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씨알의 소리』통권 제174호(2003년 9/10월호), 71〜99;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다석 유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오산창립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집) (2005년 11월 28일), 53〜85;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 2003;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따라서 체계적인 이론이 없기 때문에 유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 근거가 없는 셈이다. (물론 나는 유영모의 인간론, 신론, 생명론 등을 전개하면서 유영모 자신의 말이나 글에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말이나 글이 함축하고 있는 차원과 그 지시하고 있는 방향을 고려에 넣어 이론적인 얼개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철학이론들이 그런 생산적인 대결에서 생겨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하나도 없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석의 철학사적 의미
나는 논문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1999년)에서 다석의 ‘철학사적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첫째, 신이 떠나버린 칠흑 같은 어둠의 현 시대에 신이 도래할 수 있는 <성스러움>의 영역을 예비할 수 있는 여지를 다석 사상이 마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스러움과 어떻게 교통할 것인지를 스스로 실천하여 새로운 영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그로 인해 인간이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내몰았던 <신적인 것>을 되찾아 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철두철미 세속화된 삶에 신적 차원이 들어설 수 있는 활동공간을 열어 놓았다. 신에 대한 인간의 실존적 관계맺음을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새로운 종교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셋째, 최고의 척도, 흔들릴 수 없는 지반으로 통용되어 오던 <이성>의 독재와 횡포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이성이, 아니 인간이 지닐 수밖에 없는 시간적·공간적 제한이 부각되며 <인간중심적> 시각이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사이-존재>임을 강조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신성과 맺는 관계의 사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넷째, 이성에 의한 진리발견, 언어에 의한 진리표명에만 관심을 두어 왔던 <서양의 정신사>가 일면적임을 지적하고 다른 문화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 ‘진리사건’에도 주목하도록 촉구하였다. 한국적인 사상적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이성의 빛 안에 들어오는 것만을 ‘존재’ 내지 ‘존재자’라고 규정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을 무(無)의 심연으로 던져버린 <존재중심의 사유>를 비판하며 존재의 유래로서의 없음[無, 空, 虛]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철학사에 획기적인 사유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여섯째, 물질과 쾌락에서 <자기 동일성>을 찾는 현대인의 잘못된 인생관을 철저히 비판하며 새로운 자아론에 입각하여 <참나>를 찾아가는 길을 마련하였다. ‘몸나’에 사로잡히지 말고 ‘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뜻나’와 ‘얼나’로 솟나 하늘과 땅 사이에서의 ‘제 긋’을 다해야 하는 ‘인간의 사명’이 강조되고 있다. 오로지 육체만이 자신의 전부인 줄 알고 육체에 탐닉해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
일곱째, 환경문제, 생태문제, 기후변화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우주론>을 제시해 줌으로써 우주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더불어 <한아>를 이루면서 <한얼>과 ‘하나-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문법’, 논리를 찾아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여덟째,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철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었으며 <우리말로 철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가며 다시 한 번 주변인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한국인에게 세계철학 속에 떳떳하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아홉째, 전통 가치관은 붕괴되어버렸고 새로운 가치관은 아직 정립되지 못한 가치관 부재의 우리에게 서양에서 수입한 가치가 아닌 우리의 고유한 <근본가치를 정립>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가치로써 현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기본가치의 모색에 일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빛깔에 홀리지 말라는 다석의 경종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는 소경입니다. 볼 줄 모릅니다. 우주가 있는 뜻을 모릅니다. 단지 태양광선만을 빛으로 알고, 그 빛을 좇는 데 정신이 없습니다. 말끔히 영광을 좇아 단지 거짓된 허영에 살 따름입니다. 해와 달, 저것이 있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나’, 그 중에도 생각 이것뿐입니다. 항상 없는 것인데 문제는 ‘속알’입니다. 참을 이야기하는 것은 속알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824.
참고: 이기상의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다석 유영모. 공식적인 제자는 한 사람, 박영호이다. 다석은 함석헌의 스승이다.
함석헌과 간디. 모두 유영모와 같이 실존사상가이자 주체 사상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