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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오전. 국회의원 박근혜(朴槿惠)는 국회 여성특위에서 정책질의를 했다. 치매노인 문제에 관한 실질적 제도개선을 위한 대안 제시였다. 얼마 전 그가 자원한 산업자원위에서 외국인 투자자를 위한 이름뿐인 「원스톱서비스 센터」를 민간 주도로 활성화하는 방안과, 특허 받기를 기다리다 시기를 다 놓쳐버리는 중소기업의 소발명품 실용신안에 대한 실질적 제도개선을 촉구한 이래 의사당 진출 이후 두 번째 행하는 공개 발언이었다. 10만명에 이른 치매노인 문제는 노인문제 못지않게 여성문제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노인 수발과 보호를 맡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생보자 등 경제사정이 어려운 경우는 치매센터가 수용하지만 중산층에 대해서는 마땅한 시설이 없다, 치매노인 보호 및 수발은 효성만 갖고 달려들기에는 전문적인 일이며 직장을 가진 여성의 경우는 더욱 힘들다, 대형 시설보다는 지역마다 10명 미만의 소수를 수용하는 가족적 분위기의 시설을 정부의 저리 융자로 만들어 개인이 운영케 하면 큰 재정부담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노인과 여성의 고통이 경감되는 한편 여성들의 고용창출 효과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그 일에 자원하는 여성들에 대한 지원책이 있는가 하는 요지의 질의였다. 때마침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는 한나라당 동료의원 40여명이 당직자 및 보좌관 300여명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의원 빼내기에 골몰하는 여당에 대한 투쟁 강도를 높이기로 결의한 거대 야당 의원들은 「김대중정권의 야당파괴 및 철새 정치인 규탄대회」라는 이름으로 검은 리본을 달고, 검은 띠를 두른 탈당의원 사진을 든 채 「장례식」을 치렀다. 『하루의 편안함을 위해 평생의 괴로움을 택한 자들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에 『의원을 빼앗기면서 정기국회에 응하며 굴종하는 야당이 될 수 없다』는 정기국회 보이콧 의지가 천명됐다. 이날까지 배를 갈아탄 22명의 사진은 의원회관 앞에서 불태워졌다. 비슷한 시각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과천 정부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수출 독려차 산업자원부를 방문, 『개혁과정에서 산업이 위축되고 소비 수요도 위축되고 있다. 경제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총력 비상수출체제를 갖추라』고 당부했다. 일본 여성기자단과 만난 대통령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10월의 대통령 일본방문과 관련,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의 평화를 함께 이뤄야 할 동반자로서 어두웠던 과거역사를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다음날로 창건 50주년을 맞는 북한이 띄웠다는 물체가 인공위성인지 미사일인지도 알 수 없어 미국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정부는 새삼 미사일 주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반추하고 있었다.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 절기는 가을인데 실제 날씨는 가을이 아닌 이상 열기가 전국을 뒤덮은 날이었다. 점차 가을다운 기운이 더해진다는 백로(白露)의 이름을 무색케 한 이날 서울의 기온은 30도를 넘어섰다. 폭염과 습기는 계속돼 이틀 뒤 서울은 올해 최고기온이자 9월 기온으로는 건국 50년 사상 최고치에 이르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가을 없이 곧 겨울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보가 나왔다.
8일 오후. 의사당에서 잠시 빠져나온 박의원은 오늘따라 유독 답답해보이는 의원회관 5층 복도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격앙된 분위기의 한나라당 의원총회장에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빠져나온 길이다. 비서실과 통하는 사잇문을 열어두고 그 자리에 선풍기를 하나 틀어 놓은 그의 방은 서쪽으로 기운 햇살에 후끈 달아 있다. 『국회 본회의장 옆자리에 계시던 분들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다른 데로 시집을 가버리고 없어요. 어제까지도 당의 일을 함께 걱정하고 그랬는데 얼마나 기가 막혀요? 바른 정치는 소신과 신념이 주춧돌인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겠어요. 나라 일을 맡아서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 우선 신념 없이 중심이 흔들린다면 유권자가 불안해서 어떻게 맡기겠어요. 유권자는 개인을 보고 찍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당을 선택하는 게 현실이잖아요. 국민이 당을 보고 선택했는데 집권당이나 정부에서 그 구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걸 임의로 바꾸려고 한다면, 굳이 선거 치를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몇 대 몇으로 정하면 되지 유권자 뜻은 왜 물어요. 그렇게 유권자를 무시하면서, 유권자의 뜻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국민을 위해 진정 바른 마음으로 일하리라 믿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유권자의 뜻을 묻지도 않고 당을 왔다갔다하며, 이렇게 소신 없이 흔들리는 정치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유권자의 표라는 무서운 심판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날 자민련 명예총재 김종필(金鍾泌)총리는 자신의 지역구인 충남 부여지구당 위원장직을 사퇴, 한나라당을 탈당해 수하로 입당한 김학원(金學元) 의원을 부여지구당위원장 직무대리에 임명했다. 96년 15대 총선에서 표를 몰아줘 국민회의 조세형(趙世衡)후보를 꺾는 이변을 낳은 서울 성동을의 유권자들은 이런 경우 「표로 심판」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이다. 그렇다고 부여의 유권자들에게 다음번에 「심판」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일. 『지난번 유세 때 저는 유권자에게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선거 때부터 부정이 없어야 된다, 부정한 선거를 치르고 국회에 들어가자마자 뭘 생각하겠느냐, 본전 찾을 생각부터 할 것 아니냐, 거기서부터 깨끗한 정치는 물 건너가는 거다, 정치인의 덕목 중 으뜸 가는 것은 소신과 신념이다』 그는 국회 입성 후 몇 달간, 특히 최근의 「의원 빼내기 작전」을 목도하며 구태 가득한 현실 정치의 본질을 새삼 깨달았고 대통령의 의지가 국회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의원 개개인이 대통령의 영향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박근혜 의원에게 있어 김대중 대통령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만 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각인돼 왔다. 『그분이 야당 시절에 직접 쓴 글에 이런 게 있다고 들었어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여소야대 정국에서 대통령을 겨냥해 말하기를 「여소야대 정국이란 건 국민이 만들어준 것 아니냐. 그럼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그걸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느냐. 그건 국민의 뜻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 미국도 그렇고 다른 나라에서 여소야대라도 다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잘 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소야대라고 정치 못한다는 법은 없지 않으냐」라고 말이죠. 대통령 되신 지금 실천 방법이 완전히 거꾸로 아니에요?』 이날 하루 4명의 추가 입당으로 여권은 숙원이던 국회 과반수 의석(150석)을 넘겼고 특히 독자적인 개헌저지선(100석)을 확보한 국민회의는 축제분위기에 빠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이래 100석 넘는 정당을 만든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 그 감격의 일단을 설명해 준다. 의원영입 작업에 기폭제가 된 그들 4명이 과거에 보여준 언동만으로 보면 파격적인 변신이라 할 만 하다. 『김대중 총재가 가족과 친인척 명의로 324개 계좌를 개설해 놓고 입금액 기준으로 378억원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1년 전 국정감사에서 폭로한 사람과 DJ의 「20억원+α」 비자금수수의혹 및 DJ와 JP의 한보관련 의혹에 대해 검찰 수사를 촉구한 사람은 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작년 지역정서 청산을 내세워 김종필 총리를 비난한 사람과 「DJP연합」을 가리켜 「이윤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덕 기업주」에 비유했던 사람은 자민련으로 각각 떠났다.
창 밖 88올림픽대로는 분주히 오가는 차량들로 가득하다. 박근혜 의원의 아버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숨진 지 7년 만에 개통된 도로다. 경인 경부 고속도로 건설 당시 「시기상조」라는 비난을 받던 아버지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곳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그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6년간 연인원 100만명이 투입된 대역사 끝에 75년 9월1일 완공됐었다. 박의원의 방은 여느 의원들의 방에 비해 유독 단출한 인상을 준다. 아무 장식물이 없다. 전임자가 쓰던 집기를 그대로 받아 쓰는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책꽂이는 텅 비어 있고 벽에는 그 흔한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비서진은 입주하면서 출입문 위에 그의 초상화 하나를 붙인 적이 있으나 그의 지시에 따라 철거했다. 전북 익산에 사는 30대 화가가 그려준 유화였다. 4월 보궐선거 때 대구의 선거 캠프를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는 바람에 알게 된 이 화가는 전북 번호가 선명한 자신의 승용차로 선거운동기간 내내 수송을 도맡았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지는 5개월이 지났지만 의정활동에 제대로 참여한 것은 1개월 남짓이다. 4월 자신의 선거를 끝낸 여독이 풀릴 만할 때 벌어진 6월 지방자치 선거, 그리고 7월의 재보궐선거 때마다 그는 당의 요청에 따라 빠지지 않고 지원유세에 나섰다. 작년 대선 전부터 치면 11월부터 7월까지 8개월간 무려 4차례의 선거에 연이어 참가한 셈이다. 겨우 한숨을 돌릴 만하자 국회는 공전됐고, 가까스로 열린 국회에서 이제 막 첫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뒤틀린 국회에 그는 뭐하러 왔을까. 『IMF 국가부도 위기를 맞고 나라가 어려워진 그때였어요. 물론 IMF 관리체제에 들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선을 앞두고 정치를 볼 때 정치권이 바른 정치를 하지 않는 한 참 힘들겠다, 경제도 바로 서질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한나라당 후보가 바른 정치, 깨끗한 정치를 기치로 들고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든 진영은 박근혜를 끌어가려고 노력했었다. 그의 정치적 상품성에 주목한 것이었다. 모든 후보가 정도와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박정희」를 최고의 히트품목으로 설정해 선거 세일을 기획하고 있던 터였다. 97년 초겨울 박근혜는 매우 울적한 심사에 빠져 있었다. 『과거 아버지께서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것을 지근에서 보아왔는데, 그때 어떤 희생을 치르고 만든 나라와 경제인데 이렇게 될 수가 있는가…』 10월26일 아침 일찍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았을 때만 해도 『아버지, 걱정스러워요』라는 마음을 전했던 그가 11월14일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다시 찾았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보름 뒤 어머니 생신을 맞아 다시 찾은 부모의 묘소 앞에서 그는 마음을 정리했다. 경제가 무너지는 굉음 사이로 대선은 다가왔고 그에게는 이런 저런 제의가 들어왔다.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치장한 백화점을 볼 때면 우리나라는 겉은 저렇게 화려해도 속은 다 무너져 내리는구나, 시골길을 가면 겉은 평화스럽지만 속은 다 무너져내리는 게 자꾸 느껴져 목이 멨어요. 큰 힘은 못 돼도 저 나름대로 뭔가 기여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대선 캠페인에 참가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지요』
12월10일 박근혜는 이회창(李會昌) 후보 지지를 공개선언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선대위 고문에 임명된 그는 바로 청주 유세에 나섰다. 세 후보가 경쟁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업적을 이어받겠다고 외치는 상황에 오랜 세월 줄곧 「박정희의 적자(嫡子)」로 자처해온 국민회의·자민련 연합의 대주주 김종필과 박태준(朴泰俊)은 『근혜가 대체 왜 저러나』 장탄식을 했다. 각 진영에서 「영입대상 1호」로 꼽힌 박근혜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14일 첫 방영된 그의 TV찬조연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틀 뒤 이례적으로 재방송됐다. 「나라가 어려울 때 근혜씨를 보니 박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생각이 난다」 「주부들이 모여서 TV를 보다가 감격해 울었다」 「TV연설만 하지 말고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직접 우리 지역을 방문해 달라」는 전화를 전국에서 받은 한나라당은 횡재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15일 울산에서 열린 한나라당 정당연설회에서 그는 『아버지가 경제개발을 위해 나선 30년 전에도 지금처럼 외환고가 바닥난 파탄지경이었다』고 찬조연설을 했다. 청중들은 열광했고 여성들은 눈물을 흘렸다. 17일 대전에서 열린 정당연설회에서 그는 『조국근대화 사업을 반대하고 안보관도 판이한 김대중후보를 김종필 명예총재가 밀고 있는 것은 박 전대통령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말했다. 『원래 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말해온 그로서는 이례적인 강성 발언이었다. 이인제 후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빗어올린 머리를 하고 키도 박대통령과 똑같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그를 보며 『닮으려면 뜻을 받들 일이지 왜 외모에 신경을 쓸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만 들었다.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당선되지 왜 김대중이 당선되느냐」고 말하던 그 사람은 지금 김대중 대통령 밑에 들어가 있다. 『배신하는 사람의 벌은 다른 것보다도 자기 마음 안에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정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점, 그래서 한번 배신을 함으로써 배신을 하지 않으려는 저항감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 배신이 수월해진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박근혜는 아버지 사후 이리저리 부유(浮遊)하는 정치인들의 행각을 지켜보면서 오래 전 일기에 그렇게 쓴 바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주변에서 권유가 많이 들어오자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사람이 일할 나이라는 게 사실 얼마 안 된다, 중년이 되니까 1년, 10년이 확확 넘어가고 인생이 마감될 것이 눈에 보이는데 여태까지 살아온 것을 모두 바쳐서 나라가 어려울 때 노력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나중에 훨씬 나이 들어 자책을 할 것 같다, 또 기회라는 게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지경이 아니었다면 안 나왔을 겁니다』
16대 국회 입성을 생각했던 그와 당의 예상보다 기회는 빨리 와 4월의 재보선이 다가왔다. 당초 문경·예천에 나서기로 했던 그는 당지도부의 권유로 2월 말 대구 달성에 공천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화려한 팡파르를 울린 직후였다. 3월12일 대구달성 지구당 개편대회장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대형 초상화가 내걸리고 「새마을노래」가 울려퍼졌다. 「박정희냐 김대중이냐」 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동면에 들어갔던 이회창 명예총재는 대구 달성을 비롯한 재보선 지역구의 선거운동 참여를 계기로 자연스레 정치 전면에 재등장했다. 조직과 자금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와 3.6% 차이의 접전을 예상한 여론조사를 무색하게 만들며 박근혜는 24.4% 차로 싱겁게 압승했다. 상대 후보 엄삼탁(嚴三鐸) 국민회의 부총재는 박근혜가 여고생이던 시절 청와대를 수호하는 30경비단의 중대장이었다. 피하고 피하다 엄후보 지원에 나선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5·16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비서실장이었다. 선거전은 초장에 결판났다. 엄후보의 오랜 지역 조직관리와 여권의 전략지구에 대한 자금지원을 고려하면 박근혜 아니고는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에서 지역구를 교체한 당지도부는 특별배려로 지원금을 내려보내긴 했으나 그 모양새는 상대진영과 비교해 「거지 선거」라는 것이 당내의 자평이었다. 신승(辛勝)이면 다행이라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시작된 선거캠페인은 막상 뚜껑을 열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로 끝났다. 굳이 연설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박근혜가 가는 곳은 어디나 군중이 들끓었다. 아저씨고 아줌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그를 보러 몰려 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는 둘째 문제였다. 군중을 휘어잡는 연설 실력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는 그가 특유의 나직한 음성을 또박또박 들려줄 때마다 군중은 열광했다. 주민들이 도시락과 음료수를 싸들고 지구당사를 찾아들었다. 전국에서 지구당사 위치를 물어오는 전화가 쇄도했다. 초특급 결전장으로 특별 관리체제에 돌입했던 상대진영은 상상 외의 폭발력에 아연해하면서 초반부터 동요했다. 더 놀란 것은 한나라당 진영이었다. 말이 필요없는 유세. 홍보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찾아드는 청중. 한나라당이 탄생하고 처음 보는 광경이었음은 물론,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도 언제 이런 선거운동을 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그는 그렇게 국회의원이 됐다. 하루 평균 30회가 넘는 거리유세를 벌이는 강행군 끝에 당선이 확정됐을 때 지구당으로 그의 여동생이 찾아와 축하했다. 운동원들은 자매를 둘러싸고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 4월8일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그는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감회어린 표정으로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세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이 나름대로 정계진출을 꿈꾸었으나 모두 좌절된 상태에서 그는 전직 대통령의 자녀로는 처음 의정 단상에 서는 사람이 됐다. 호사가들은 박정희가(家)의 정치혈맥이 20년 만에 이어졌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를 대신해 5년여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감당한 뒤 20년의 공백을 두고 정치일선에 나섰다는 사실에서 인도의 인디라 간디와 공통점을 찾기까지 했다. 6공까지만 해도 정권 담당세력이라는 자부심에서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향수를 느끼게 할 뿐이었으나 현정권의 집권과 요직 석권에 대한 반작용이 정치적 에너지로 변화됐고 그 에너지를 가장 잘 흡수할 수 있는 그릇이 박근혜였다는 평가는 그에게 별로 중요치 않다. 『놀라움보다 감사함이 더 컸어요. 저를 성원해 주시는 분의 마음 속에는 제 부모님에 대한 깊은 추모의 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부모님에 대한 그간의 여론조사를 선거현장에서 확인하는 결과가 됐어요』
이어진 6월의 지자체선거와 7월의 재보선에서, 이제 국회의원이 된 박근혜는 더욱 인기 있고 무게 있는 찬조 연사가 됐다. 대구 경북 외에 부산 경남, 충청 및 서울과 수도권 전역에서 후보들은 앞다퉈 그를 초빙했다. 모든 광역·기초장 후보들은 『박근혜만 왔다 가면 이긴다』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다. 실제로 그가 참석한 유세장에는 많게는 1만명에 육박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혼전 기류를 보이는 시장 선거를 지원하러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한나라당 구청장 후보들의 읍소에 못 이겨 시간을 지체하다 부산시장 정당연설회에 지각을 했다. 깜깜한 밤중에 역광장을 메우고 기다리는 시민들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울산에는 밤 10시가 넘어 도착했는데 수천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항에서는 박태준 총재가 자존심을 걸고 표밭을 누빈 선거가 비오는 날 열린 박근혜의 연설 한번에 날아갔다. 한 번만 더 지원해 달라는 경기지사 후보의 요청에는 시간부족으로 응하지 못했다. 원고를 줄줄 읽어나가는 단조로운 그의 연설이 끝나면 청중들이 우르르 단상으로 몰려들고 그의 모습만 보고도 눈물을 흘리는, 이 종교집회를 방불케 하는 신드롬의 정체는 단순히 박정희 향수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실감이 창궐하는 마당에 2, 3명만 보여도 달려가 두손을 꼭 잡는 그의 꾸밈없어 보이는 모습에서 사람들이 묘한 성실감을 보았는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있었다. 국회 사무실을 채 정돈할 틈도 없이 어느새 한나라당을 대표하는 거리의 스타의원이 돼버린 그는 7월의 재보선 7개 지역 모두에서 찬조연설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선거직에 나선 사람으로서 돈으로 표를 사니 어쩌니 하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모독이지요. 거기서부터 정치가 흐려지는거구요. 제가 정치에 나온 건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자는 게 하니라 무언가 바른 정치가 되는 데 기여하자는 뜻이었기 때문이지 혼탁한 데 같이 어울리려 했다면 나올 이유가 없는 거지요. 어디까지나 깨끗하고 바른 선거를 하자, 그리고 유권자에게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자, 그래서 산골까지 안 간데 없이 열심히 뛰었죠. 자금도 조직도 거의 없었어요. 다 저쪽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시작하느라 여러 가지로 어려웠죠』 겨울부터 여름까지 증폭된 박근혜 열풍, 그리고 그 위에 드리우고 있는 박정희의 그늘은 여당과 야당, 그리고 여기에 유무형의 끈을 잇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 중 하나는 한나라당 대구시지부장 강재섭(姜在涉) 의원이었다. 당초 문경 예천 쪽으로 내정된 박근혜를 대구 달성으로 출마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는 박근혜의 동의를 얻는 자리에서 선거대책본부장 자격으로 선거전략과 관련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자금은 얼마나 있습니까』 당에서 최소한의 지원은 하지만 후보 스스로가 동원하는 기본적인 자금력이 선거운동에 주요 기반이 되고 있는 현실 여건에서 당연한 물음이었다. 『없습니다』 강본부장은 적잖이 당황했다. 상대 후보는 안기부 재직 때부터 이 지역에 탄탄한 조직을 구축해둔 바 있고 새 정부하의 집권 여당으로부터 막강한 자금력과 인적자원을 공수받고 있는 처지. 『아니, 그래도 최소한의 비용은 있어야 운동원들 밥이라도 먹일 것 아닙니까』 대체 자비를 얼마나 염출할 수 있겠느냐는 재차 질문에 박근혜는 자신의 재산이래야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몇천만원 정도이고 현금을 동원하라면 법정 한도액 만큼은 모아보겠노라고 대답했다. 선거캠프는 출범 초기 또 한차례 박근혜 후보에게 놀란 적이 있다. 도무지 출마자 자신의 숙소와 연락처를 지구당에 알려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러느냐. 선거운동을 하느라면 부득이 심야에도 긴급히 연락해야 할 일이 생기는데, 선거를 어떻게 치르려고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느냐』고 설득해봤으나 별무소용. 지구당 사무국장에게조차 소재를 알려주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선거를 기획하고 움직이는 당의 요원들은 결국 그들이 봉사하는 후보의 집주소나 전화번호도 모르는 채 선거를 치를 판이었다. 초조해진 강재섭 본부장이 『이러는 게 아니다』며 간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선거운동은 열심히 하겠다. 그러나 사생활은 침해받고 싶지 않다』였다. 쉽지 않을 대사를 앞두고 처음부터 이상한 암초에 부닥치고 있다고 생각한 강본부장은 거듭 애원하다시피 했다. 박근혜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못한 듯 메모 한 장을 써주었다. 『그럼 본부장님만 알고 계세요』라는 다짐과 함께. 강본부장이 그 메모를 활용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이후 긴급히 전화연락하는 데 한번 이용했고 한번은 선거전략 숙의차 동료 한 사람을 대동하고 그의 숙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밤 늦은 시간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고 한 시간 뒤에 찾아간 숙소에 그는 혼자였다. 직접 차를 끓여 내온 그는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가다듬은 머리와 얼굴, 외출 때와 마찬가지로 갖춰입은 복장으로 그는 손님을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10대 소녀 때 목숨 걸고 혁명을 일으킨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가에서 성장했고 20대에는 비명에 간 슬픈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의 훈련을 받았으며 암살당한 아버지의 주검을 장사지내야 했던 그 비범한 경험의 수련은 그를 바늘 한뼘도 허락지 않는 단단함으로 탁마시켰을 것이다. 남동생처럼 마약의 힘까지 빌릴 만큼 방황하거나 여동생처럼 불행한 결혼의 늪에 빠져 헤매지 않으면서 견뎌오게 한 어떤 집념이 그에게서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돼버렸을지도 모른다』 9년 전 송정숙 서울신문 논설위원은 박근혜 내면세계의 한 실마리를 이렇게 해석하면서 「밀랍인형처럼 침착한 독신여성」으로 묘사한 바 있다.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부모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다』라고 말해 오며 「그 시대의 꿈」을 지키기 위해 전신을 곧추세우고 긴장을 풀지않는 생활을 그는 지금까지 20년간 해왔다. 어떤 때는 은둔처럼, 때로는 정치적인 기획처럼 그의 편린은 간간이 언론에 묘사돼왔다. 그 간접소묘를 감상하는 세인들 중 어떤 이는 「자의식과 피해의식의 혼합물인 공주의식과 자폐증」의 징후를 예단하기도 했었다. 그는 3년 뒤면 벌써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나이가 된다. 『뭐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겠죠. 제가 달리 특별해서라기보다 환경이 그랬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 처지에서는 삼가야 되는 그런 부분이 더러 있지요. 누구든지 겪어보면 그런 처지이 될 거예요. 그러나 그게 일을 하는 데 크게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에어컨은 멎었고 불유쾌한 서녘 햇살이 꽉 막힌 창틀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더운 사무실에서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물 한 잔 입에 대는 일 없이 두 시간을 자세 한번 고치지 않고 앉아 높낮이와 강약이 신기할 정도로 일정한 어조를 시종 유지했다. 발치 오른편 바닥에 자로 잰 듯 반듯이 핸드백을 놓은 품은 20여년 전 70년대 중후반기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미세한 차이로 음성이 두터워졌거나 역시 미세한 차이로 얼굴 표면에 있음직한 변화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46세의 박근혜를 대하는 사람은 일순 세월이 정지된 듯한 기묘한 환각을 느낄 수도 있다. 말하는 스타일이나 차분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속을 안 주는 듯한 성격에서 그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극히 정확하고, 작은 일에도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며, 일에 닥쳐서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묘사하는 그는 스스로에 대해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할 때 한번도 떨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필요한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그의 성격은 테니스 등 90년대 들어 다시 시작한 운동과 더불어 오랫동안 단련해온 단전호흡 때문인지 더욱 무게중심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청와대 시절 기자단과 함께 치기 시작했던 테니스는 아버지 사후 중단했었다. 명상을 즐기는 그는 20대, 30대 때보다 더 건강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밝은 색조의 옷을 좋아한다. 과거에는 밝은 색이라면 모두 좋아했으나 지금은 은은한 파스텔조를 즐겨 입는다. 『아버님 성격을 많이 닮으셨습니까?』 『어떤 것 같아요?』 『…』 『비슷하다고들 그래요. 나이가 들면서 더 닮아간다고들 해요』 그는 「김 안 나고 뜨거운」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성격과 행동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분과 함께 그가 일찍부터 겪어온 남달리 특별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청와대의 16년 생활과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그에게 찾아든 세 차례의 특별한 고통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89년 10월26일 국립묘지. 박정희 대통령 내외 묘역에서 박대통령 사후 처음으로 열린 박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서 37세의 박근혜는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회장 자격으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아버지께서 가신 후 10년 세월 동안, 1년에도 몇 차례 이곳 묘소를 참배할 때마다 저는 아버지 생전의 나라 사랑하신 뜻과 업적이 바르게 알려지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세월이 무심치 않아 이 날을 맞기까지 지난 수개월 동안 비록 부족하오나 그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성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음을 감사히 생각합니다.…아버지께서 당대에 박수 받는 방법을 모르셨겠습니까. 또 그때 그때를 속 편하게 모면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방법을 모르셨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아버지께서 비난받기를 거부하시고 그러한 반대에 모두 양보하시고 말았더라면 어찌 오늘과 같은 조국의 번영이 있을 수 있었겠으며 어찌 짧은 기간 안에 이와 같은 엄청난 국력의 신장이 가능했겠습니까. 흔히 열매가 달콤하면 그것이 맛있는 줄 알고 즐길 줄은 알아도 그러한 열매를 만들어낸 뿌리의 존재는 잊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매가 기막혀도 그것은 뿌리의 노고의 소산이며 훌륭한 열매는 훌륭한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 역시 땅을 파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집념과 결단,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던 소신은 바로 그 뿌리였습니다』 박대통령 사후 10년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몇 가지 일에만 파묻혀 은인자중하던 그는 88년 선친의 9주기를 맞아 대규모 기념사업회를 시작했다. 5공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정권 자체에서 박대통령에 대한 어떤 추모도 원치 않았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박정희 매도 일색이었던 때였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충격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마음의 아픔을 겪으면서 내가 무엇을 못 겪겠느냐, 이렇게 바닥까지 간 고통을 겪고 살면서 내게 더 큰 고통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5년 뒤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지요. 그런데 80년대로 접어드니 그때에 못지않은 고통이 또 있었어요』 「어떤 계기가 있으면 언젠가는 이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보고 있다가 6공으로 정권이 이양된 초기 각종 대중매체에 모습을 드러내며 전격적으로 기념사업회 일을 벌여나갔다. 회보 격인 근화보를 펴내고 자료를 모아 아버지에 대한 3시간 분량의 기록영화도 만들었다. 이 뜻 깊은 10주기 추모식에서 박근혜는 검은색 상복의 정장 슈트 안에 셔츠칼라를 겉옷 깃 위로 내놓은 인상적인 차림을 했다. 80년대 내내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따라다닌 그 스타일은 그의 선친이 3공화국 시절 공식석상에서 즐겨 입었던 「새마을 신사복」 차림을 상기시켰다. 넥타이를 생략하고 셔츠깃을 신사복 상의 위로 내놓았던 박대통령의 그 독창적 차림새는 국민복과 신사복의 중간 형태 비슷한 것으로 70년대 모든 공무원들이 거의 의무적으로 따라 입었었다. 6공화국 들어서는 과소비에 대한 우려가 잠시 나타나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한번 입고 나타나자 총리 장관을 위시해 각급 기관장들이 또 따라 입어 아주 낯익은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는 경찰이 질서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넘치는 군중 앞에서 또박또박 추도사를 읽어내려갔다. 『지금까지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이며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데도, 하물며 국력이 지금보다 훨씬 미약했던 당시의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하게 대처해야 했던 필요성을 굳이 외면하는 모순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의 나라에 의존해서 간신히 나라를 지키는 약소국의 처량한 신세로, 자기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지키고 있는 나라 식으로 제도를 갖추지 않는다고 욕하고 강요하는 모순에 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보릿고개에 배를 쫄쫄 굶을 때 그 누가 어떤 기막힌 연설을 한들 어찌 우리 민족이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자신감과 자주의식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민주주의도 말로만 되는 것이겠습니까. 북한의 정식 명칭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 마당에, 너나 없이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참된 역량을 키우시고 자주의식을 심화시킴으로써 백마디의 번지르르한 말보다도 수백배 빨리 참된 민주주의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기초를 닦으셨으며 그 지름길을 달려오신 것입니다』 박근혜는 그보다 두 달 전 8월15일 같은 장소에서 어머니의 15주기 추도식을 갖고 『엄마는 그저 모든 것을 자제해』라는 고인의 말을 되새기며 추도사를 읽은 바 있다. 그때도 그는 똑같은 느낌을 주는 셔츠칼라 원피스 차림을 했었다. 계절따라 옷감만 달라져 여름에는 반팔, 봄 가을에는 긴팔, 겨울이면 원피스 위에 재킷을 제복처럼 걸치는 것이 80년대 그의 공식복장 변화의 전부였다. 신발은 언제나 미들굽의 펌프스로 일관, 목걸이 반지 귀고리 브로치 따위 장신구를 모두 배제한 심플한 차림을 그는 줄곧 유지해오고 있었다. 박씨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마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강한 신념 같은 것이 배어나오는 듯한 그 차림새는 「변화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여인들의 옷차림」이라는 말을 새삼 되새기게 하기에 족했다. 박근혜는 74년 어머니 작고 이후 퍼스트레이디의 역할과 헤어스타일을 동시에 물려받고 93년경까지 20년을 일관했다. 복식 평론가 김유경의 말처럼 박대통령의 집권 후반, 젊음의 한복판에서 희생으로 느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인 「애늙은이」 생활은 결국 그의 머리모양을 그렇게 확정짓게 만든 듯 했다. 그 사이, 한 시대 가장 화려해보였던 아가씨로부터 중년으로 옮겨가는 한 여인으로 자연스러운 젊음의 모습도 자신의 생도 다 휘발성 물질처럼 날아갔을 것이다.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청와대에서 어머니의 분신으로 살아야 했을 때 입었던 한복은 청와대를 나오며 작별했다. 더 이상 그 옷은 필요없었다. 국립극장 8·15 경축식장에서 마지막 모습을 나타냈던 어머니가 들려나가며 보여주었던 흰 버선발, 그리고 아버지가 주워든 흰 고무신은 청와대 담장을 넘어서는 그날부터 그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머니의 머리스타일과 아버지의 옷스타일. 그는 이 두 가지를 투구와 갑옷으로 삼아 소리 없는 투쟁에 일찌감치 나섰다. 그의 그런 차림은 자신의 나이를 초월하는 세련된 그림 같은 인상을 주는 한편으로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려진 듯한 형식적 분위기를 주기도 했다. 93년 늦가을 도하 여성지에 일제히 공개됐을 때 그는 퍼머 머리를 약간 긴 단발스타일로 커트하고 이마를 자연스레 덮은 자신의 20년 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예전 머리 모양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이 그렇듯 그의 머리는 이미 자신의 단독소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머리 스타일은 그대로다. 일체의 장신구를 달지 않는 모습도 그대로다. 그런데 옷은 더 이상 그때의 옷이 아니다. 『2년 남짓 기념사업회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전력 투구했습니다. 나중 생각해보니 그때 무슨 영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안 하면 못 한다, 그런 게 있었는지 무리를 해가며 지칠 때까지 매달렸죠』 90년 말로 기념사업회 활동은 중단됐다. 아버지의 정치적 직계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정계 요인들이, 당시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해 아버지의 업적을 평가하는 문제에 이견을 달아 강압적으로 사업을 중단시킨 데 따른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이어 박근혜의 고통은 90년대라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사람들, 남들이 보면 저와 둘도 없이 가깝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아 더욱 고통스러웠지요. 도저히 지속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자신들에게 뭔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겠죠. 큰 차원에서 보면 다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도울 수 있는데 작게 생각하면 방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죠. 그래도 아버지에 대해 80% 정도는 왜곡이 벗겨졌다고 남들이 평가할 정도가 되는 마당에 중단됐기 때문에 그나마 위로가 돼서 이후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죠. 그걸 마무리 못하고 중단했더라면 그걸 언제 하느냐, 해서 제가 살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국회의장 자유투표가 벌어진 지난 8월 3일 그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종필 총리서리와 맞닥뜨렸다. 투표를 마치고 한나라당 의석을 돌며 악수를 청하는 사촌형부를 못본 채 외면하던 그는 두 번씩이나 『박의원』 하고 부르는 JP에게 마지못한 듯 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이 서먹서먹한 친척은 지금 히로뽕 상습 복용으로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남동생을 위해 과거 수차례 구명운동을 벌여준 바 있다. 한편으로는 측근을 통해 동생에게 정치입문을 권유해왔다고는 하지만. 박근혜는 91년을 마지막으로 10·26 추도식에는 6년째 가지 않았다. 주로 사람들이 북적대기 전 이른 아침에 홀로 다녀왔다. 올해는 추도식에 참석할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한다. 내년은 20주기라 느낌이 각별하다. 그가 참석하지 않는 사이 추도식은 그동안 더욱 활기를 띠어 매년 참석인원이 늘었다. 94년 전직 대통령 3명과 구여권 야권 인사를 망라한 10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과 추도위원회의 고문직을 수락한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이 조화를 보내온 15주기를 기점으로 추도식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추도식에서는 야권단일화를 앞두고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인사말을 통해 『박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김대중 총재가 며칠 전 박대통령의 저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후보 양보를 강하게 시사하면서 『이것이 어른(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이고 보답』이라고 말했고, 박태준 의원은 추도사에서 『지금 우리나라는 모든 면, 특히 경제면에서 어려움이 두드러져 각하에 대한 저희들의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고 했다. 『거기 참석하는 많은 분들은 진정으로 추모하는 분들도 많지만 겉으로는 대단히 위해주는 척 아버지 묘소 앞에 추모하면서 실제로는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건 위선이죠. 그런 곳에 자리를 함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묘소에 혼자 가서 내 도리대로 부모님을 추모하면 되는 거지요. 속과 겉이 일치해서 추모를 해야 되는데 국민이 보는 앞에서는 추모하는 척하고, 위해주는 척하고 실제로는 안 그렇고, 그런 위선 같은 게 저로서는 싫고 거북했어요. 그런 거짓된 추모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92년 이후부터 그는 마음에 안정을 찾았다. 오랜만에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게 돼 사람들과 어울려 테니스도 치고 고궁을 산책하고 지방의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며 옛 정취에도 젖어보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집에서 책 보고 일기 쓰고 명상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정치에 참여하기 전 최근 2년은 특히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제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계속 글을 썼어요. 그러면서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했고 그것이 확고히 마음 속에 뿌리내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동안 주변에서 제가 보고 느낀 것, 아주 나쁜 사람들에 대해 느낌이 많았어요. 마음 속에 당한 여러 가지 고통 같은 것을 제 나름의 공부로 생각해서 가치관을 마음에 간직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차가 언덕을 오를 때 기어를 낮추듯 마음을 굳게 다져먹고」 80년대 이후를 지내온 그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아버지의 생신을 앞둔 92년 11월11일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올해는 지난 세월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또 다른 면을 느껴본 해다. 소박한 생활 속에서 나는 생을 부여받은 것이 참으로 큰 축복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 생명을 받은 것이 감사하게 생각됐던 해이기도 하다. 정말로 내가 이런 느낌을 일기에 적을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의 글들은 한결같이 일상의 잡사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일체 생략된 채 무슨 잠언록이나 명상록 같은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그날 그날 느낀 생각의 편린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는 말로 채워져 있다. 공자나 부처나 예수 말씀을 방불케하는 그 글들은 사고무친의 그가 20대와 30대를 넘겨 40대로 접어드는 과정에 빚어진 내부의 격랑과 슬픔을 정제된 형태로 걸러내는 나름의 방식이었던 듯 하다. 「허무」와 「바른생활」이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단어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정조는 그 이전 시기를 지배한 고통과 증오와 집념의 격한 어조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너무나 많은 고통이 있었다. 특히 돌아가신 직후부터 수년간 보고 겪은 것들. 갑자기 피가 거꾸로 콱 솟는 것 같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인간으로서 고통의 바닥 끝까지 갔다온 기분. 살고 싶지 않았다.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가까웠던 주위사람들이 고통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들이 보면 상상이 안 갈 일이겠지만. 그 배신감에서 오는 고통은…』 산업 근대화의 새 희망이 전자산업에 있다는 아버지의 얘기에 따라 입학한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마치고 떠난 프랑스 유학에서 어머니의 비보를 듣고 귀국한 74년, 삽교천에 다녀온다는 전갈과 청와대에 내리는 헬기 소리를 끝으로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깨어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79년. 그 고통들은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음덕을 입고 자라난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고 비난받고 심지어 추도식까지 방해받은 80년 이후 지금까지의 기억은 조금도 희석되지 않은 앙금으로 그에게 남아 있다. 「너무도 지긋지긋한」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이끄는 정권에서 봉사하고 영화를 누린 그 사람들이 시대가 바뀌면 이전 시대를 부정하는데, 바로 그들이 3공화국 특히 유신체제를 왜곡시킨 장본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분들이 자기는 이러저러한 소신을 가지고 유신에 참여했다고 정론을 폈더라면 오늘날 유신이 이렇게까지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발뺌하고 용기를 못 내는 바람에 지금 와서는 유신이 무슨 커다란 범죄처럼 돼버렸어요. 소신 없는 정치인, 시대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을 사람들은 규탄하지만, 실제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하신 일이 모두 잘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비판과 반대에 무원칙하게 양보하지 않고 집념과 결단력으로 실행한 부분조차 싸그리 깎아내리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이유가 많겠지만 그것을 한가지로 압축하자면 그동안의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간 세대가 모두 잘못 됐다는데 후배가 어떻게 선배를 존경할 수 있겠어요』
『산에 올라가 보면 험한 길도 있고 뱀도 있지요. 때로 독사에 물리는 일도 있구요. 물론 가까운 곳에서는 산의 전체가 보이지 않잖아요. 큰 산의 모습은 멀리서만 제대로 조망할 수 있어요. 여러 공화국들도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이해 관계를 벗어나 보면 본모습이 제대로 보일거라는 생각입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나 빼놓지 않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 예외없이 나왔다. 『60~7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아버지가 우리나라 역사를 국민과 같이 만드신 것도 되지만 그 역사적인 환경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만들어 간 시기도 되거든요』 박정희 3주기에 어느 재미작가는 『박정희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한반도가 박정희를 만들어간 방법과 박정희가 한반도를 만들어간 방법,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만 바른 평가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정치를 펴겠다 하고 나섰을 때 그걸 자기의 이상대로만 할 수는 없어요. 국제여건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때는 소련도 완전히 공산주의였고 우리가 북괴라고 표현한 북한은 남한을 제2의 월남으로 만든다고 그러고, 미국은 핵우산을 거두고 미사일 빼간다고 하던 시절이었지요. 우리의 경제력은 약했고, 경제력 없이 국방을 제대로 할 수 있었나요. 또 국방이 약한 불안한 나라에 누가 투자할 리도 없고…. 그 어려운 시기에 경제를 일으켜야 하고 국방도 북한을 능가해야 하고, 그런 상황하에서 어떤 정치를 펴야 되느냐.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측면들이 자꾸 생각나게 될 거예요. 무조건 이상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아요』 한때 박정희를 욕하는 게 유행이었다면 지금은 그에 대한 복고주의 향수가 고개를 들고 있다. 과거 「유신 폭압 독재」시기에도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듯 지금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박정희 신드롬을 두고 질타를 퍼붓는 사람들이 있다. 공통점은 그들이 소수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통치를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독재」가 되겠으나 그 당시 시대상황 전체를 보면서 유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시대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자식 된 입장에서 그 피해자들께 깊이 사과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나라 전반의 인식 풍조에 관한 것입니다. 속된 비유이긴 합니다만, 실컷 잘 먹고 나서 그릇 한두 개 깬 것만 가지고 욕을 하는 풍토라면 그 나라는 많은 애국자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매도당하는 세상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얻더라도 저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해온 것은 저의 가족사를 떠난 문제입니다』 그는 80년 2월 청와대를 떠나 16년 만에 다시 돌아간 신당동 집에서 『소신을 펴나가는 과정에 욕을 안 먹을 수 없으니 그 비난은 가슴에 다는 훈장 이상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설거지하는 것만큼이나 욕 먹지 않고 일하기는 힘들다. 어떤 일, 어떤 시대를 평가하고 바르게 알아보려고 할 때 그 시대의 단편만 보면 눈 감고 코끼리 만지는 듯한 엉뚱한 결과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일기를 쓴 바 있다. 소소한 일에 대해서는 명석한 평가를 곧잘 하는 사람들도 대상 인물의 행적이 너무 크면 일방적 평가는 애당초 힘든 일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거기서 다양한 스펙트럼은 불가피해진다. 박정희의 부분만 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고 그의 전체를 보고자 하면 부분이 덮인다. 박정희처럼 오랜 기간 많은 일을 벌이고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 그에 대해 벌어지는 모든 찬반 양론이 결국 부분적 평가에 그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띠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박정희시대는 지금까지 숨쉬고 살아 있는 오늘의 얘기다. 그러면서도 박정희의 시대는 이미 평가에 앞서 역사가 돼버린 감마저 있다.
『국민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또 먹고 살아야 한다. 이 두 가지만 생각한 아버지는 자원 없는 나라에서 중공업을 일으켰습니다. 세계역사를 통해 중공업이라는게 대개 전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해요. 전쟁을 안 치르면서 중공업을 일으킨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소총 하나 생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출발해 79년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병기를 생산하게 된 국력의 신장을 사람들은 너무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산업화와 민주화의 큰 갈래에서 보면 얘기는 또 복잡해진다. 「찬란한 한강의 기적」과 「감방에 유폐된 양심수」라는 두 심벌을 떠올리거나 「검소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인간적 개인」과 「비판이나 저항을 허용치 않는 냉혹한 독재자의 고독과 독기」라는 양면성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면 그것은 대하소설이 된다. 실제 그러한 서사구조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원용한 30대 문인의 손에서 거대 영웅사관의 색채를 띠며 진행중에 있다. 석유화학 중화학 고속도로 포항제철 등에 대한 애착과는 달리 컬러TV 등 가전제품 생산에 대해서는 사치품 취급을 해 못마땅해 하던 박정희는 이제 얼굴도 모르는 후세에 의해 인터넷에 자신의 전용 사이트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내가 대통령이 됐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딸 이전에 퍼스트레이디의 자격으로 아버지와 집권후반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누차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실 무렵 헌법도 바꾸고 후계도 생각하시는 등 구상이 많으셨거든요. 「한시적인 법」으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쭉 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 해요』 97년과 98년을 배회하고 있는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의 직접적 토양은 역설적으로 70년대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이래 대통령의 꿈을 이룬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이 5년간 지휘한 「문민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공됐다. 오래 전 어느 외국인은 한국이 『박정희에 의해 근대화를,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그러나 박정희를 추종하던 2세대 군인집단이 「5·16」을 모조해 두 차례의 공화국을 석권하면서 박정희를 딛고 재산을 축적하는 10년여의 블랙홀을 미처 예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80년 1월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우리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자 하는 한국 사회의 여러 구성인자들로부터 결국 「개입해도 비난받고 개입하지 않아도 비난받는」 입장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보고하면서 「인내심과 협상력 없는 고집불통의 야당과 반체제그룹의 어리석은 행위」를 거론하며 『한국의 정치적 변화과정에 얼마나 많은 난제들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일부 야당 지도자들은 정치적 자유화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온건 입장을 내팽개치려는 것 같다』고 쓴 바 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여론」을 받들어 70년대의 「최대 정적(政敵)」 박정희를 「근대화의 공로자」로, 70~80년대의 「경쟁적 동업자」이자 집권 초기 역대 대통령 중 최고 인기도를 누렸던 김영삼을 「나라 망친 주역」으로 지목했다. 많은 사람들은 여론조사에서 「닮고 싶은 사람」을 박정희로,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김영삼으로 지목한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들은 최근 「동교동 사람들」이라는 책자를 발간하면서 『조국과 민주주의를 위해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 현실과 당당히 싸운 사람들, 대통령 김대중은 이 동교동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자 그 핵이었다』는 광고를 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모토로 7개월째로 접어든 김대중-김종필 공동정부의 현실은 여느 정치가 그러하듯 이상을 따라가기에 힘이 부친 모습이다. 「민주적 개혁」을 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수단과 리더십이 동원되고, 시장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더욱 강력한 정부개입과 통제에 의존한다. 정치인이 도덕적으로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강 식수원을 맑게 하자고 돈벌이 기회를 박탈당할 수 없다며 수질환경개선 공청회를 무력으로 막았고 지방 폐수방출업체를 단속하는 국가공무원은 업주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되돌아간다. 돈벌이가 되는 장터개설을 못하게 한다고 법을 집행하려는 시청공무원들을 상대로 집단 난투극을 벌여 시청에 공무원이 텅 비게 하는 일도 있다. 누구를 탓하든 관행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 의문 없이 일상 속에 반복되고 있다. 박정희를 찬양하건 증오하건 사람들은 박정희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구로부터 지지를 받건 거부당하건 간에 박정희 이후 지금까지 5명의 대통령은 농도에 차이만 있을 뿐 근원적으로 박정희의 그림자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시 박정희를 찬양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 혹은 「박정희시대」를 넘어서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만약 아버지 같은 분이 지금 다시 정치를 한다면 그 방법이나 양상은 크게 다를 거예요. 경제만 보아도 규모가 엄청 커졌잖아요. 옛날이야 관 주도로 어느 정도 끌고 가야 되고, 축적된 자본이 없으니까 어느 정도 쌓도록 도와주면서 견인차 역할을 해야 했지만, 지금의 여건으로는 많은 규제를 풀어서 잘 되도록 지원이나 보호만 해주는 시책으로 바뀐다든지… 하여튼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국민들이 그리워하는 분이라면 그것은 그 시대의 그런 정책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갖고 계셨던 정직한 신념, 즉 그 시대에 맞춰서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게 하겠다, 이 나라를 어떻게든 지키겠다, 세계와 어깨를 겨루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사심없이 노력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시대에 맞게 국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게 제가 아는 아버지의 정치관이었기 때문이죠.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대에 안 맞으면 국민을 괴롭히는 게 되잖아요』 박근혜 의원의 흰 목에 가무스름한 점 하나가 선명하다. 그의 아버지가 그린 어머니 초상화에는 같은 위치에 똑같은 점이 새겨져 있다. 의원총회에 정족수가 모자라면 안 된다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지 않은 몸을 찬찬하면서도 거침없이 움직이는 그는 얼핏 보면 이름 모를 산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다시 유심히 바라보면 아버지의 분신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어떤 정권에도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청와대에서 많은 사람을 보다가 바깥으로 나와 무사분주히 지내고 다시 국회로 들어온 저만큼 격변기의 풍랑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드물 거라고 봐요. 남을 치거나 깎거나 해서 스스로가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국민의 평가는 국민을 위해 사심없이 봉사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뒤에 알게 됩니다. 매도는 필요없습니다. 노력의 성과가 스스로를 높일 것입니다』 박근혜는 옛날 펴낸 책에다 이후 최근까지의 일기를 추가해 곧 새 책을 한권 낼 계획이다. 「한 줌, 결국은 한 점」으로 제목을 정할까 생각중이다. 『인생은 허무 그 자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낌으로써 오히려 적극적인 인생,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며 비로소 나무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고 81년 10월7일 쓴 일기에서 떠올린 구절이다. 잠시 살며 진실한 점 하나 바르게 찍고 가면 더 바랄 게 무엇일까. 담담하면서도 강인한 마음에 심지를 꽂는 의미를 그는 지금 그 제목에 두고 있다. 그러나 29세 때 아버지 2주기를 알리는 가을 바람 속에서 썼던 그날의 일기는 가위 사활을 건 몸부림의 흔적이었다. 박근혜는 이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고 싶다. 내년 1999년 가을 20주기에는 그리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박정희의 그늘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시 10월이 다가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