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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1a 울산강의-창세기16장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16장 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6장이 이 대목은 지난 시간의 내용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간추려 드리면, 하나님하고 아브라함 사이입니다. 하나님하고 아브라함 사이에 뭐가 형성되었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의 통로가 확정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모든 사람을 배제해 버리고, 축복과 저주의 통로가 확정이 되고 말았어요.
이것은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는 상대를 안 해요. 안하고 자기가 택한 자만 상대해서 몰래 축복을 이야기해 주고 저쪽은 완전히 배척해 배제시켜 버리죠. 인간들은 의미 없어요. 의미 없는 인간들이에요. 축복 저주의 통로가 이렇게 붙여지고 인간들은 별 볼 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서 축복과 저주. 축복과 저주에서 능력이 나오는데 이 능력이 둘로 나눠지죠. 하나는 축복의 능력이고, 하나는 저주의 능력입니다. 이 저주의 능력이라는 말을 저는 씁니다만 보통 사람들은 안 써요. 왜냐하면 너무 부정적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저주를 하시느냐 이러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저주 안 하시느냐 성경 읽어보라 하면 내 말 맞거든요. 저주 하거든요. "화 있을진저" 나오잖아요. 사람은 느낌이 화 있을진저를 그냥 잘 어물쩍 넘어가려고 해요. 화 있을 진저가 없으면 구원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화 있을진저가 쫙 먼저 깔아놔야 돼요. 회개하라. 심판 날이 가까이 왔다. 먼저 선도해서 선도차가 쫙 깔아놔야 됩니다.
그 다음에 축복이라는 게 용서라는 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능력을 축복의 능력과 세트로, 세트로만 반드시 주어집니다. 축복 받으세요. 이 말은 말을 바꿔서 이야기하면, 축복 없으면 저주입니다. 라는 그런 것이 뒤에 깔려 있지요.
오 목사님, 광주 오용익 목사 설교 강의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참 이번에 늘푸른 교회 강의하면서 이런 적절한 예를 들었는데 하나님의 일은 도배지, 도배지 있으면 보통 도배지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초배지가 있어요. 처음에 붙이는 이사 와 전에 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초배지 있고 그 위에 덧붙이는 도배지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도배지를 통해서 초배지가 튀어나오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라고 하면서 이 초배지가 뭐냐 하면, 이게 피죠. 도배지가 뭐냐? 이게 죄죠. 성도는 죄를 받으면서 죄라는 것을 용서라는 힘으로 뚫고 예수님의 용서의 피가 흥건하게 자기 가슴에 묻히지요. 그러니까 이 죄를 알게 하신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죄를 알게 하신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왜 그러냐? 그게 초배지가 덮쳐 있는 도배지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안다는 것은. 그런데 성령 안 받아 본 사람은 앞에 도배지만 달랑 보기 때문에,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만사가 왜 그래 부정적이야.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죄야. 라고 너 자꾸 시비 걸래. 만전을 기한단 말이야. 예수 믿고 난 뒤에 철저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격려는 못 할망정 왜 자꾸 죄를 지적해. 라고 꼭 시비 거는 것처럼 막 오사하고 화를 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저주의 능력과 더불어 배후에 축복의 능력이 뚫고 나오는 것처럼 죄라는 도배지 위에 피라는 초배지가 뚫고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오 목사님이 반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나 하여튼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죄라는 걸 통해서 뒤에 피의 용서 위력이 앞에 있는 걸 도배지를 능가한다 말이에요. 그걸 뚫고 나온다 말이에요.
제가 오늘 글 올렸던 [이단에 대해서 공부합시다]하는 내용에 1번, 2번이 나오는데, 안 본 사람을 위해서 설명하면, 1번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심 있는 사람은 도대체 예수님이 해결했다는 그 죄가 뭐냐? 그것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다가도록 주께서 해결했다는 그 죄가 뭐냐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이 없는 사람은 그걸 건성으로 듣지요. 그거 뭐, 고맙네. 하고 그만 그건 잊어버려요. 예수님이 해결했다는 죄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이 말이죠.
당신 집에 물건 그냥 줬습니다. 할 때 고맙네. 하고 무슨 물건 보냈는지 신경 안 쓰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러운 것처럼 뭔가 잘못된 것처럼, 잘못되었잖아요. 그죠? 그래요. 무슨 선물 줬습니까? 진짜 고마우면 고마운 띠를 내면서 우리 집에 무슨 선물 줬어요? 라고 말하는 게 당연지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해결했다면, 그렇다면 그 해결했다는 죄가 도대체 어떤 죄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의 정상적인 태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실은 용서받아본 적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저 고맙네 하고 끝났지, 용서받아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제일 웃기는 이야기가 상대방이 자기가 죄라는 것을 모르는데 일방적으로 내, 니 용서할게. 그건 웃기는 이야깁니다. 니 왜 카는데? 내, 니 용서할게. 뭘, 뭘 용서해, 뭘 용서한단 말이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니가 함부로 나한테 용서해. 건방지네, 니. 니가 날 용서해. 내가 어쨌다고 용서해.
오히려 화를 내는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했다면 진짜 그걸 고마워하는 사람은 그때부터 뭐냐 하면, 도대체 내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주께서 용서했는가? 그걸 알아가는 그 즐거움, 그 기쁨, 그 감사 그게 그 다음 나와야 돼요.
다시 말씀드리면 도배지가 죄라면 그 뒤에 뭐가 있다? 초배지가 있고 그 뒤에. 초배지가 뭐라 했습니까? 예수의 피고, 앞에 있는 그 도배지는 뭡니까? 우리의 한평생 죄고. 순간순간 이 도배지를 뚫고 뒤에 피가 뚫고 그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오지요. 그럴 때 그 사람 뭘 증거 하겠습니까? 내 속에 피 있다. 그걸 증거 하겠지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증거 한다 이 말이죠. 내 속에 피 있다. 주님의 피 있다. 용서가 있다 이 말이에요.
결국 이러한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능력이 나오지요. 하나는 무슨 능력이라 했습니까? 하나는 저주의 능력. 또 하나는 뭡니까? 축복의 능력. 이 두 능력이 무엇을 통로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란 맺어진 이 통로로만 나와요. 다른 데선 안 나옵니다.
여러분, 오아시스 알지요. 사막 오아시스. 물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막 아무데서나 나옵니까? 어디서 나와요? 오아시스에서 나오지요. 모든 저주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나와요. 모든 저주가. 모든 축복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이 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가 오고. 이것은 뭐냐 하면, 우주의 중심이에요. 우주의 중심이 확정됐다는 것이 우리를 안심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요. 우주의 중심이 확정돼버렸어요. 완전히 정답이 이미 정답은 내려졌습니다.
이제는 거기서 저주의 능력이 여기서도 나오고, 축복의 능력이 여기서도 나오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나온다고 했는데 구약적이고, 신약적으로 보면, 이게 딱 붙어 나오지요. 한 쪽은 뭐냐? 도배지고, 도배지에서 피가 축복의 용서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피가 없이 죄만 저주하는 그러한 능력을 십자가에서만 나오겠지요.
자, 지금 이렇게만 이야기했는데 오늘 강의를 어렵게 몰고 가겠습니다. 오늘 강의가 아마 여러분들이 상당히 이해하시기에 제가 쉽게 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이해하시기에 난해한 이야기가 이제부터 나옵니다. 우선 이걸 기본으로 하시고.
왜 제가 창세기 16장하면서 난해한 이야기를 겁을 주면서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이 하갈이라는 이 여자 있잖아요. 종. 이 종이 독립된 존재가 독자적인 인물이 아니에요. 이 하갈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사래의 부속품입니다. 왜? 옛날의 종이라 하는 것은 독자적인 인격이나 자기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종이라는 것은.
종은 누구를 비춰주느냐 하면, 주인의 수족입니다. 그렇지요? 종 따로 있고 주인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종에서 일어나는 것은 실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이다? 종이 책임지는 문제가 아니고 누가 일어난다? 주인에서 일어난 일을 종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래라는 여자 주인의 종이에요. 하갈 보고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다시 봅시다. 하나님하고 누구하고 맺어졌어요? 아브라함하고. 여기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 여러 번 묻습니다. 중간 중간에. 뭐가 나오지요? 축복의 능력이 나옵니다. 우린 축복 받을 자격이 없어요. 이런 능력이 와야 받습니다.
그런데 뭐도 나온다 했어요? 저주의 능력도 나와요. 그런데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축복만 자꾸 생각하지, 성경에 화 있을진저. 주님께서 화 있을진저 이야기했잖아요. 그럼 저주는 어디서 나옵니까? 모든 저주는 예수님께서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심판주라 해요.
성경이 그렇게 요한복음 5장에 내가 심판주로 왔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사람은 예수라 하면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인자한 분으로만 자꾸 인식의 전환이 안 돼. 아, 답답해요. 제가 오늘 글 쓸 때 이런 소리했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하면 저는 소름이 끼친다 합니다. 무섭다는 거예요. 저는 무섭다 표현했어요. 왜? 실제로 살아계시니까 주님이 살아계시니까. 왜? 증거가 그 사람이 예수 믿거든요.
자기 힘이 아니고 자기 예수 믿는 힘이 아니고, 십자가의 공로로만 나는 구원받기로 그게 이상하게 이해됩니다. 라는 어떤 사람이 고백한다면 소름이 끼친다니까. 소름이. 왜?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능력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아는 한. 제가 아는 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단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성과를 이루어다 누구 힘으로 이루어요? 자기 힘으로 이루어요.
이게 사래고 이게 하갈입니다. 하갈을 책임 묻지 마세요. 그게 사래입니다. 그 저 냉면 사리 말고. 사래. 사래는 그냥 사래가 오늘 본문에 보면, 여보, 아들이 필요하다 던데. 내 여종 있잖아. 여종하고 관계해서 애 낳으면 되겠네. 이게 사래가 먼저 권유한 거예요. 여종이 꼬신 게 아닙니다. 여종이 아브라함을 꼬신 게 아니에요. 우리 드라이브할 까요? 그건 밀양이 나오고. 전도연이 장로 꼬실 때 그래 이야기하고.
아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종은 누구 시키는 대로 한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마엘이란 자식을 낳게 된 것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사래의 아이디어였어요. 하갈이란 여종은 시키는 대로 씨받이 노릇할 뿐이었어요. 왜 이걸 강조하느냐 하면, 참 이게 우리나라 기독교 교회 인식 때문에 인식을 제가 전환하려는 노력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먼저 해야 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저주 같은 저주는 이때까지 없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저주 같은 저주는 없어요.
뭐 남편 교통사고 나서 죽고, 아들 유괴 당해 죽고 그건 저주 아닙니다. 딴에 저주지요. 저주 맛을 못 봤어요. 진짜 저주 맛은 십자가에서 나온 저주가 저주 맛이에요. 그 저주는 나중에 지옥 불에서 유황불로 맞습니다. 맞고 이건 많이 맞아요. 유황불로. 지옥에서 많이 맞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한테 한국교회에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주가 아닌 걸 자꾸 저주라 하는 거예요. 저주도 아닌 걸.
사업 망했다. 부도 당했다. 아 죽었다. 지 교통사고로 다리 부러졌다. 그건 저주도 아니에요. 아직 저주 맛을 못 봤어. 저주 값도 안 되는 걸 저주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십자가를 모르면 그걸 저주도 아닌 걸 스스로 자기한데 하겠습니까? 티비에 이것이 인생이다 보세요. 지지리 더러운 인간들, 총 리스트가 다 나오잖아요. 그건 저주가 아닙니다.
지금 16장에서 하갈이 시킨 대로 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결과는? 밉상 받아서 아들하고 추방당하지요. 그게 저주입니까? 본격적인 저주로 한 걸음 내디딘 것뿐이에요. 왜 이스마엘을 보호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마엘과 그 모친 된 하갈을 보호해야 됩니까? 그것은 잘 들으세요. 그것은 진짜 저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경험할 저주만이 저주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짝을 이루기 위해서 진짜 축복을, 여러분 진짜 축복 몰라요. 진짜 저주도 몰라요.
진짜 축복과 진짜 저주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능력이 돼서 나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장사 잘되고, 아 공부 잘하고. 축복 아닙니다. 그거. 교회부흥도 축복 아니에요. 축복 맛을 못 봤어요. 스데반 집사님은 축복 맛을 봤어요.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그냥 죽잖아요. 그냥 죽는다고요. 사도 바울은 축복 맛을 삼층천에 올라가서 그냥 봤어요. 약한데서 내가 강함이라. 이 소리합니다. 이상한 소리합니다. 죽는 것이 나한테 유익함이라. 괴상한 소리 다해요. 축복 맛을 봤어요. 너희들이 본 것은 그거는 축복 값도 못 돼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건 뭐냐? 저주도 아닌 걸 저주라고 우기고 축복 값도 안 되는 걸 축복이라고 우기는 것 때문에 성경의 핵심을 놓친다는 거예요. 지금 먼저 이스마엘과 하갈이 추방 되면서 하나님께 보호받는 그 대목에 대해서 자유주의 진영에서 특히 보수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해석합니다. 봐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안 믿고 저주 받는 여자라도 이렇게 보호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지. 종교를 따지지 말고 이슬람 종교나 뭐 그런 거 따지지 말고.
여기 한번 보세요. 울었더니만 사래가 웁니다. 여기서. 16장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고통을 들으셨다 해서 이름이 뭡니까? 이스마엘. 여기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 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 라해로이라 불렀으며"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라 불렀으면 아들을 낳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특히 8절부터 보면, 6절에 보면,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더니 도망쳤더라. 여종 하갈이 죽으려고 할 때에 여종을 도와줘서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을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지요.
이 대목을 그냥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니까. 우리 이단적 안목을 가지고 보잔 말이죠. 하나님은 예수 믿고 하나님 안 믿어도 하나님이 이렇게 고통당하는 자를 도와주시는구나. 그러니까 우리 종교 따지지 말고 하나님 따지지 말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이 이게 신의 뜻이다. 라고 그걸 빙자해서 제이유 그룹한테 돈 얻어먹고. 사업한다고. 이렇게 해서 하는데.
이게 우리 보통 성령을 안 받은 사람한테는 이게 전부다 설득력이 있어요. 납득이 있어요. 성경에 꼭 하나님한테 버림 받은 자도 하나님이 보호하는구나. 아하, 우리의 선입관이 잘못 되었구나. 그렇지. 우리가 교회 안 다녀도 사랑해야 되고. 왜? 그게 주님의 자비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자기가 알고 있는 자선이라든지 구제, 양심 그것에 호소해서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이제부터 어렵다 하는 것은 뭐가 어려운가 하면, 쉽게 풀어가겠습니다. 성경해석자가 누구냐 하면,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 성경해석자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성경해석자라는 이걸 4번으로 돌리고, 1번부터 2번, 3번의 경우를 제가 하겠습니다. 1번의 경우는 해석은 우리가 한다. 해석은 내가 해석해서 내가 구원받는다. 이 경우가 하나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해석은 우리가 해서 우리 해석한 것 중에서 제일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부분이 진리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가 해서 이거는 보편적인 다수의 해석이 참된 해석이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첫 번째는 내가 구원받는다. 두 번째는 우리의 보편적 다수가 우리 중에서 누구 고개 끄덕이면서 그게 맞겠다. 하는 그것이 진리에 가까운 해석이다. 세 번째는 특정 은사를 받는 사람, 어떤 기적을 받은 사람이 해석할 때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서 해석할 수 있다. 1번, 2번, 3번. 지금 4번을 빼놓고 1번, 2번, 3번을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서 쉽게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1번은 뭐냐 하면, 누가 뭐래도 내 해석 내가 해서 내 구원받는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 보는 사람. 2번하고 다릅니데이. 2번하고 달라요. 1번은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자 내가 성경해석해서 내 나름대로 은혜 되고 감동되면 그걸로 내 구원된다는 해석. 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열 이면 하나님 열 명 다 다르겠지요. 백이면 다 예수님 다 다르겠지요. 왜? 각자각자 느끼고 감동 받은 해석들이 따로 있으니까.
2번은 그걸 방지하자는 거예요. 어이, 새순교회 교인들 모여 봐라. 모여 봐라. 다 모여 봐라. 지난번에 목사님 성경해석 이렇게 했는데, 집사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동의하십니까? 나도 동의하는데. 그러면 손들어 봅시다. 그럼 열 명 중에 다섯 명. 아니 아홉 명. 그러면 그걸로 우리다 성령 받은 사람, 해석 맞는다고 합시다. 이러면 이것보다 진일보했지요. 어떤 점에서 진보한 겁니까? 자기 착각을 방지할 수 있지요. 자기 착각을.
우리교회도 있었고 또 교회마다 다 있어요. 뭐냐 하면, 목사님 성경해석 그리하면 안 됩니다. 예배시간에 막 옛날 박사교회 때 그런 게 있었어요. 안 됩니다. 막 예배시간에 고함지르고 특히 오용익 목사님 같은 화평교회 예배시간에 고함지르고 그랬는데. 그럴 때 제가 가만히 있어도 어디 아저씨. 가만있어요. 예배 끝나고 봅시다.
진짜 내가 옛날에 대덕교회에 있었으니까 요한복음 설교하면서 우리 뜻대로 기도한 것은 안 받아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만 주께서 기도하게 하셔서 그 기도한 것만 응답합니다. 라고 할 때에 장로 두 분 가운데 한 분이 그 즉시에서 예배시간에 반대했어요. 오용익 목사 경우와 똑같아요. 반대했어요.
그 사람이 왜 반대 했느냐 하면, 나는 내가 기도하니까 꼭꼭 응답이 되던데 목사 당신은 뭐라고 하느냐? 젊은 목사가 와서 우리의 기도 응답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자기의 지금까지 쌓아온 신앙 경험에 비춰 보면 당신이 틀렸다는 거예요. 왜? 나는 실제로 실력을 쌓았으니까. 실제로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본 내가 알지, 목사 니가 성경가지고 해봤자 그런 체험도 없는 인간이 니가 뭐 할 줄 아느냐 하는 식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목사 치고 기도 응답 없는 목사가 있겠습니까? 있어요? 없을 거예요. 없지요. 신학교 가보니 알지요. 전부다 한 응답 다하고 왔지요. 그죠. 적어도 목사 쯤 되면 이게 사이비든 뭐든 간에 목사 되면 딴 건 다 잊어버려도 과거에 자기기도 응답한 것 절대 안 잊어버립니다. 적어도 간증하려면 수십 개는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요. 천구백 몇 년도 응답 받은 것, 천구백 구십칠 년도 응답 받은 거 다 하고 있어요. 복음 알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있는데 다 갖고 있다고.
있는데 그 사람 평신도이기 때문에 응답,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으니까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다른 장로님과 다른 집사님들이 장로님, 우리 목사님 그런 뜻이 아니고, 응답 받는데 목사님 말씀 맞잖아요. 성경대로만 응답. 나도 해 보니까 내 욕심대로 되는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마귀가 응답한 거고, 실제로 응답되는 것은 성경대로만 응답되더라.
그런데 왜 장로님은 고집을 부립니까? 기분 나쁘잖아. 나 체험 많이 했는데 내 체험한 걸 왜 무시해. 아이, 체험한 걸 아는데 그럴 것 같으면 나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목사님 말 들어보니까 그 말이 좀 포괄적으로 두루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라고 했을 때 2번에 해당되는 거예요. 역시 공통점을 서로서로 예수 믿는 사람끼리 공통점이 많은 부분이 진리에 가깝다는 이게 2번이에요.
3번은 뭐냐 하면, 누가 봐도 진짜 예수 믿는다고 우러러 볼 수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사도 바울, 스데반 집사 그렇지요. 특정 인간,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유명한 히스기야 기도의 히스기야 왕, 그런 특정 인간의 은사, 기적을 우리가 빨리 그 수준대로 따라 붙여야 그게 올바른 기도다. 라고 할 때 1번, 2번, 3번 이게 현재 인간이 나올 수 있는 관점입니다.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관점이에요.
제가 아까 했지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뭐라고요? 이단이다. 이단은 1번, 2번, 3번 요래 나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하는 해석은 그게 바로 이단이며 이게 바로 저주 받을 것이다. 1번, 2번, 3번 다 저주거리며 진짜 성경해석은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님뿐이라는 이야기는 1번, 2번, 3번에 해당되지 않고 4번에 해당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그러면 4번을 정답으로 삼으려면 자동적으로 뭘 부정해야 됩니까? 1번, 2번, 3번을 부정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성경해서 십자가 졌습니다. 세상 전체를 해석해서 십자가 지셨잖아요. 그럼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죄를 회개해서 졌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뭣에 관심 있다?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기에 십자가의 피로만 해결되는가? 주께서 해결했다는 그 죄가 궁금하다. 이래 될 것 아닙니까? 그 궁금한 것 이야기해 줄게. 1번, 2번, 3번이에요.
십자가를 예수님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해 놓고 1번, 2번, 3번 공격하면 화를 내요. 아주 수상해요. 내가 보면. 정말 수상해요. 그거는 앞뒤가 안 맞아. 말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죄를 해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건 고마운데 그 죄에 대해서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해결했다는데 왜 또 관심 가져? 이래 나오면 안 되고, 그래 그게 무슨 죈데 해결했습니까? 그게 1번, 2번, 3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거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자연스럽게 1번, 2번, 3번으로 가거든요.
이 세 가지 이게 바로 뭐냐? 종교라는 겁니다. 이게 종교라는 겁니다. 우린 종교에서 벗어날 줄 몰라요. 기독교나 불교라는 종교라는 겁니다. 제가 어렵다는 말은 이런 대목이 어려운 거예요. 그럼 더 어렵게 해 봅시다. 이왕 꺼낸 거 할 수 없다. 나도 책임 못 진다.
뭐냐 하면, 1번, 2번, 3번에서 어떻게 4번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 지금 이걸 설명하려고 합니다. 1번, 2번, 3번은 타고 난 거예요. 없다 하면 거짓말입니다. 저도 있고 다 있어요. 없을 리가 있습니까? 다 있어요. 매일같이 튀어나와요. 매일같이 튀어나옵니다.
1번, 2번, 3번인데 어떻게 수시로 4번으로 넘어오느냐, 주께서 넘어오느냐? 이걸 저는 관점의 전환이라 보는데, 성경의 해석은 예수님께서만 할 수 있고 그래서 예수님만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받지, 1번, 2번, 3번식으로 해석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여러 번 이야기해요. 절대 1번, 2번, 3번식으로 해석해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 붙일 모델도 없어요. 표준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은 혼자 다 했어요.
나, 이거 믿는 사람은 소름 끼친다니까. 세상에 이게 하나님의 기적이지 어떻게 인간은 1번, 2번, 3번 안에 굳어져 잇는데 이게 전분데. 어떻게 4번 짜리가 나옵니까?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1번, 2번, 3번을 갖고 있으면서도 저, 이걸로 구원 안 받고 목사님. 저는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은 것을 인정합니다. 어떻게 1번, 2번, 3번에서 4번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 말이에요. 이게. 이거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그 사람 손대면 내 저주받아요. 이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지금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에요.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4번이에요.
이 넘어가는 관점을 위해서 창세기 16장이 있습니다. 창세기 16장을 가지고 들이대는 거예요. 1번, 2번, 3번에서 어떻게 4번으로 넘어오느냐? 1번, 2번, 3번 이것을 갈라디아서 4에서 뭐로 보느냐? 이걸 육에 속했다 하는데. 4장 22절요.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307페이지. 4장 23절입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됐습니다. 거기까지.
두 여자가 뭐라고요? 두 여자가 두 언약입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하나님이 언약을 누구하고 맺었느냐 하면, 아브라함하고 맺었어요. 아브라함은 두 사람 아닙니다. 한 사람이죠. 아브라함은 언약은 하난데 언약에서 나온 게 뭐로 나왔어요? 두 여자가 나왔어요. 이것은 천국, 지옥 모두가 감추어졌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뭘 이야기합니까? 극락 이야기하고 또 지옥 이야기하죠. 그거 다 가짭니다. 왜 가짜냐 하면, 인간이 지어낸 극락이고 지어낸 지옥입니다. 그거 겁먹지 맙시다.
저가 이 책인가 어느 책에 보면 이랬어요. [오멘]이란 영화에 보면 귀신 들린 소녀가 목이 돌아가요. 가만 잇는데 모가지가 뱅뱅 돌아가서 귀신들려서 하는 대목 있죠. 오멘이란 영화에 나옵니다. 무섭잖아요. 그런데 그 두 여자에서 하나는 천국 얼굴이 나오고, 하나는 지옥 얼굴이 나와 보세요. 이건 아이고, 무서워라. 정말 무서운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이 무서워요. 생소한 거예요. 이거는 구경도 못한 거예요. 세상 사람들 머리에서 나오려야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어떻게 한 언약에서 똑같은 언약에서 아브라함 언약에서 지옥 얼굴이 나오고, 다시 180도 돌아보면 천국 얼굴이 나오느냐 말이죠.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착하면 천당 가자. 천당 좋은데 골프장 있고 천당 잔디밭 깔려 있고 수영장 있고. 그렇게 지어내잔 말이죠. 그거 치우고. 그런 천국 치우고. 지옥은 막 코 꿰뚫고 이렇게 해서 무섭게 하고. 뭐 막 이렇게 지지고. 우리가 만든 천국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다 우리가 만든 상상의 산물이고.
두 여자에서 두 언약 나왔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운명은 어디에 달려 있다? 한 아브라함 언약에 달려 있다 이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무리 변화되고 역사적으로 오래 끌어도 이미 속성상 이미 결정 나버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저는 서울서 강의할 때, 이랬어요. 한 몸에서 가랑이 두 개. 몸통은 하난데 끝에 가니까 가랑이가 두 개 되지요. 이 세상은 하나의 몸통이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는 지옥, 하나는 천국으로 갈라지게 된 운명으로 땅땅땅 확정 나버렸다는 겁니다. 확정 났는데 나는 어데 갈까요? 말 하지를 말라는 거예요.
왜냐? 반배치하잖아요. 반배치하는 거 학생들이 물어봅니까? 안 물어보잖아요. 선생들이 모여서 뭘 성적순으로 하든지 하여튼 출석부 보고 하던지 하잖아요. 결정 나잖아요. 이 세상은 처음부터 어떤 이런, 이런 자는 저주 받아야 돼.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놨고,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천국 가야 돼. 라고 확정지어 놓고 그 사람은 따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의 아브라함 안에 뭐가 다 들어있다? 천국도 들어있고 지옥이 양면이 다 들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것을 이제 보따릴 푸는 거예요. 보따리 풀면 결국 뭐로 이어집니까? 하나는 지옥으로 냅다 달려가야 되고, 한쪽은 천국으로 냅다 달려가야 돼요. 그게 뭐냐? 그 갈라지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두 여자가 해야 돼요.
그런데 제가 아까 강의할 때 하갈은 독자적인 인물이 아니라 했지요. 그럼 뭡니까? 하갈은 독자적인 인물이 아니니까 두 여자가 아니면 결국 누구에요? 한 여자, 아내죠. 아브라함과 사래라는 부부 안에 이미 천국과 지옥이 다같이 잠재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두 여자가 두 언약이니까 두 언약 외에 제 삼의 언약, 제 사의 언약 없으니까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이미 다 확정된 겁니다.
그 증거를 제가 보여드리겠어요. 오늘 본문 봅시다. 창세기 15장. 오늘 창세기 16장 멀었어요. 이건 시초에 불과하고 더 깊은 게 들어있습니다. 15장 16절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되어 있지요.
여러분 이 말씀 한번 보세요. 사대 만에 나올 때 그냥 나오는 때가 있는데 어떤 상황이 되었느냐 하면, 지금 아브라함 자손이 정복해야 될 그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숙성되어야 돼요. 죄도 없는데 저주를 퍼붓질 못해요. 그렇다면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자손을 번성케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스마엘이 하는 고유의 역할이 있어야 돼요.
뭔가 탤런트 같으면 탤런트 맞은 배역이 있어요. 그 배역이 뭐냐? 저주로 달려가는 배역에 충실해야 됩니다. 지옥 받을 만한 짓들을 하는 그러한 탤런트나 배역자를 하나님이 양성해야 돼요. 하나님이 쫙쫙 양성해 줘야 밑에 저주를 깔아줘야 비로소 뭡니까? 밑에 초배지가 있고 초배지는 도배지를 깔아줘야 초배지가 뚫고 나오는 그 의미와 그 효과가 있는 법이에요.
저주로 이 땅에 쫙 깔아줘야 그것마저 극복하는 축복, 용서의 위력이 얼마나 고마우냐를 그걸 바탕 위에 터져 나오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그게 뭐냐? 두 여자 중에서 두 언약으로 굳혀 버린 거예요. 세상 역사를 두 언약으로, 언약이 뭡니까? 약속이잖아요. 두 약속으로 완전히 굳혀버린 겁니다. 확정지어 버린 겁니다. 가랑이가 두 개에요. 쫙 갈라져 둘이 만나질 않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4장에 의해서 그 언약이 어떤 차이점을 나느냐를 가지고 창세기 16장에 하갈과 사래가 어떤 차이점을 그전부터 미리 갖고 있었느냐를 지금부터 내가 서로 연결시켜 보려고 합니다. 구조상.
다시 이야기하면, 사래하고 하갈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이 본문에서는 안 나타나요. 왜 안 나타나느냐? 항상 나중 계시가 보다 더 깊은 해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계시가 신약이 구약의 해답이기 때문에 신약부터 먼저 가서 거기서 정답을 가지고 여기 구약에다가 집어넣는 방식으로 구약을 해석해야 한단 말이죠.
어떤 이가 물어보기를 니가 뭔데 니 함부로 그렇게 해석하느냐 하면, 그게 뭐냐? 제 4번째 해석이에요. 예수님 언제 왔습니까? 신약시대 때 왔잖아요. 만약에 4번 해석을 가지고 1, 2, 3번을 안 보게 되면, 아까 같이 뭐냐? 아하, 하나님이 하갈도 이렇게 사랑해 주는구나. 우리가 종교 같은 것 따지지 말고 잘해주자. 예수 안 믿는 시어머니 잘해주면 그것도 하나님 뜻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행함을 가지고, 예수 믿고 난 뒤에 바르게 살아야지. 이게 뭐냐 하면, 1번, 2번, 3번 해석이에요. 그렇게 했더니만 응답도 받고. 뭐 자기 해석이 있다 말이에요.
그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통해서 구원 하십니다. 여러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통해서 구원한다는 이야기 처음 듣지요. 누가 없으면? 예수님이 안 오신다면 주께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통해서 구원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그중에서 의가 하나님 의에 제일 가까운 사람입니다. 너희들 중에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한 것은 뭐냐? 사다리 제일 꼭대기에 누가 차지했다? 이미 바리새인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엄홍길이 에베레스트 정복했는데 등산에 대해서 엄홍길보다 더 나은 사람 없잖아요. 우리가 옆에 가야산 올라간다고 될 문제가. 엄홍길이가 있는데 주님께서 니가 엄홍길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하면 그건 뭔 뜻입니까? 뭘 인정한다? 바리새인들이 기어 올라가는 그런 육적인 방식을 올라가는데 그런데 주께서 누가 저주 받아요? 화 있을진저 누구보고 한 겁니까? 바리새인 밑에 우리 보고 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 보고 화 있을진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도미노 현상, 사다리 제일 위에 간 놈 이마를 밀어버리면 바리새인 말할 것도 없이 나머지는 저주 받는 거예요. 줄줄이 사탕으로 쫘악 내려가는 거죠. 이게 어디서 쳐들어 올라가. 4번 해석도 모르고 밀어버리면, 밀 때 바리새인은 니가 뭔데? 내가 내 해석 내가 한다. 해석은 예수님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구약 해석 어떻게 했습니까? 1번, 2번, 3번식으로 한 거예요. 인간의 양심을 총동원하고 인간의 종교적인 것 총동원하고 그것도 하자 있을까 싶어서 서로 모의해서 의논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옛날부터 내려온 수천 년 역사의 전통의 해석을 다 했는데 그게 뭐냐? 구약의 유대교의 주석이라는 겁니다. 해석법은 거기서 나와요.
함부로 니가 촐랑대지 마라. 구약의 유명한 해석자가 있는데 그 사람을 참고로 해서 누적된 더 누적된 신학에 누적된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거는 뭐 누가 봐도 이 해석에서 하자가 없다 하는 해석으로 완전무장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인데 그 바리새인보고 저리 안 가나. 라고 에이 밀어버리니까 나머지는 줄줄이 사탕 쫙 하는 거죠.
구약에 맹세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은 맹세 안 했어요. 모세의 증서를 써주고 하라. 증거 써주고 이혼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옛사람은 이렇게 했으나 나는 이렇게 한다. 예수님이 이야기했을 때 그거는 네 번째 해석입니다. 네 번째 해석 가지고 갈라디아서, 그건 사도 바울의 해석이잖아요. 천만에 말씀. 사도 바울의 해석이 아니고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그 갈라디아서 해석을 가지고 지금 창세기 16장을 소급해서 우린 지금 여기다 해석을 가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사래와 하갈의 차이는 뭐냐? 그걸 알려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차이가 뭐냐를 아셔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부터 먼저 한번 보겠습니다. 잠시 참고로 그거 하지 전에 참고로 먼저 언급한다면 예레미야를 예레미야서 7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런 소리 했어요.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세 번 이야기하면서 왜 성전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니까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곳은 성전이 아니다. 이래 나왔습니다.
자, 1번, 2번, 3번 해석 가지고 봅시다. 그럼 뭘 하면 돼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 되잖아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이 성전이 아니라면,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 뭐 된다? 성전이 성전답게 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면서 구제하고 한 거예요.
뭐가 문젠데? 성경대로 했어요. 그들은. 뭐가 문젭니까? 아무 문제없잖아요. 눈 있겠다. 글자 있겠다. 시킨 대로 했는데 뭐가 문제냐 말이죠. 그래 주님이 그게 이단이야 그게. 그럼 우리는 이단 안 되는 방법 없습니까? 없지. 왜? 날 때부터 이단이니까.
그럼 해석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해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는다니까 그게. 이게 믿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처음 배우면 믿을지 모르지만 십 년, 이십 년 되면 안 믿어져요. 목사가 되면 잘 안 믿어져요. 그냥 공로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그게. 우린 1번, 2번, 3번에서 오늘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주여, 이 정도 해석하면 완벽하죠. 맨 날 이런 소리 하거든요. 니가 완벽해서 해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해석한 것을 어떤 의미를 쥐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한다고 거기서 또 벗어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평생가도 안 벗어납니다. 안 벗어나면 벗어날 생각 마세요. 벗어난다고 괜히 착각하지 말고, 그냥 가만있으세요. 있으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 바라보면 됐지 왜 자꾸 벗어나려 합니까? 이건 말이 안 돼요. 벗어나려고 하는 건 그건 잘못 된 거예요. 신앙생활 잘못됐다 말이죠.
그 관점의 전환이 관점이 저쪽에서 구원했는데 관점을 자꾸 내가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관점 그거 버려야 됩니다. 우리 힘으로 버리지 못하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갈라디아 4장에 두 언약이 나오는데 4장 27절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요 해석 누구 해석입니까? 사도 바울 해석이면서 누구 해석입니까? 예수님 해석이죠. 요것을 지금 오늘 본문에 하갈과 사래에다 제가 거기다 적용시킵니다.
단절이에요. 단절이 뭘 이기느냐? 이어짐을 이긴다 이 말이에요. 이어짐은 저주고, 단절은 축복이다 이 말이에요. 잉태치 못한 자가 이어지고, 이어진다고 계속 자식 낳고 자식 낳고 이어지는 그것은 저주로 가고. 이 땅에 어떤 이어짐도 없는 그 자만이 어디 가고?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지라. 갈라디아서 4장 25절, 26절.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지라. 어디 가고? 천국에 가고, 이 땅의 이어짐은 그것은 지옥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이 땅에 이어짐이 계속 되는 거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어디로 갑니까? 지옥으로 앞으로 가요. 그러면 이 땅은 계속 무슨 역할 하는가? 사래의 해야 될 것은 계속 이어짐, 이어짐, 이어짐이 계속 되어야 돼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진짜 사라는 계속 불임 여성, 불임 여성, 불임 여성이 돼야 돼요. 단절되고, 단절되고, 단절되어야 돼요. 이삭도 그랬지, 리브가도 애 못났지요. 야곱도 요셉도 마찬가지. 요셉도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애굽 여자 아닙니까? 없지요. 그리고 사무엘도 한나도 없지요. 무자식이 상팔자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나중에 한나 애 많이 나요. 한나 나중에 보나스 받아서 애 많이 난다고.
그리고 제 생각에 이번 여름수련회는 욥기, 욥길 해봤으면. 욥기할까 요한복음할까 지금 저울질하고 있는데 여러분 의견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욥도 단절이에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단절이죠. 최고의 단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 없이 태어나요. 단절. 죽을 때도 십자가로 단절되죠. 죽음이죠. 부활은 십자가에서 죽음에서 부활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삶에 단절 됐어요. 이걸 없는데서 있게 한다는 거예요.
그 전체를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단절을 아브라함과 사라는 세트로 해서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없는 자를 있게 하고, 그 다음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로마서 4장에 보면 사라하고 아브라함이 세트로 믿어요. 믿는다고.
결국은 뭔 뜻이냐 하면, 이겁니다. 내가 하나님이 직접 뛰어들게. 그래서 사람이 못한 일을 내가 해서 자만 내가 천당 보내 줄게. 그 기적이 저와 여러분 있길 바래요. 하여튼 내가 뛰어들게. 니 좀 가만있거라 니 똑똑한 거 아는데 니 목산 거 아는데 니 성경 읽는 거 아는데 가만있어라.
하나님이 직접 뛰어 들어서 우리를 무슨 자로? 마치 없는 자로 만들고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하나님이 뛰어든 값을 하지요. 내가 다 해 버리면 하나님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그런 증거가 있는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것은 1번, 2번, 3번 그딴 거 백날 해석해도 그건 지옥 갈 해석이고, 내가 구원받는 건 4번, 예수님이 알아서 공로로 구원했다는 이 해석. 모든 성경은 무조건 예수님이 알아서 했다는 그것이 뒤에서 튀어나와 줘야 그게 성경해석입니다.
바리새인, 천 명 모아도 못합니다. 도저히 그게 안 나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 받는다는 말이 목사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거 교회 말아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승부를 거는 거죠. 에라이 씨, 성령 안 받으면 어차피 안 받으면 가라지 밖에 없는 교횐데 교회도 아니니까 에이, 모르겠다. 성령 받은 사람 누구고? 주님 살아계신다 증거가 개입한 사람 누구야?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외쳐보자. 아무것도 구원받습니다. 하는 말을 용감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정답이기 때문에 그래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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