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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1. 10.1) 말씀/ 누가복음 15:3-10
생명보다 더한 것은 없다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점점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천년의 인생을 살았어도 남는 것은 사랑한 것뿐 이고, 혹 후회 되는 일이 있다면 이 역시 사랑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인생을 가치 있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과 더불어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는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함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생명을 가치 있게 하는 고귀한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 이 두 가지는 세상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양의 비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거듭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의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공통 점은 잃은 하나를 찾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냥 한 마리 양이나 한 드라크마가 아니라 아흔 아홉 중에 한 마리,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드라크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백 마리 중에 한 마리, 열 개 중에 한 드라크마, 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생각과 다르십니다. 아흔 아홉을 놔두고 한 마리를 찾도록 찾는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를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쓸고 찾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다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한 드라크마보다 더 큰 비용이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 가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이와 같이 죄인 하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수적으로 양적으로 계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양적이데 관심이 많습니다. 돈도 많아야 좋고, 땅도 많아야 좋고, 집고 많아야 좋고 문제는 교회도 교인수가 많아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귀중한 생명 가치를 물질적인 가치로 떨어트리는 행위입니다. 이는 엄청난 손실입니다. 주님이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것은 생명은 물질적 가치 이상의 가치임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하고, 모든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찾아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일본 엄마의 모정이란 글을 읽었습니다. 얼마 전 중앙일보 국제면에 게제 된 기사입니다. 기사제목은 "이렇게라도 돌아와줘 고맙다"입니다. 딸 찾은 엄마의 굴삭기"란 부제가 붙었습니다. 내용은 지난 3월11일 동 일본 대지진 당시 행방불명됐던 히라쓰가 고하루(平塚小睛.12)양의 어머니, 나오미(37)씨의 얘기인데...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딸이 다니던 미야기(宮城)현 이시노마키(石券)시 오카와(大川)초등학교는 쓰나미에 휩쓸려 전교생 108명중 70명이 숨졌습니다. 아직도 4명이 행방불명상태입니다. 나오미씨는 대지진 이튼날부터 딸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허사였고, 사고후 100여일이 지나자 나오미씨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고하루, 엄마가 너의 시신 일부라도 꼭 찾아줄게,가다려" 나오미씨는 바로 운전학원에 다니며 중장비 운전 자격증을 취득하고 굴착기를 사비로 빌려 초등교 주변 땅을 파헤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제발 내 딸아 돌아와 다오"를 마음속으로 새기며~~~~어머니의 애틋한 모정이 하늘에 닿았을까? 초등교에서 5km 정도 떨어진 바다연안에서 어부에 의해 신원미상의 시신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손상이 심해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내의를 겹으로 입은 상태를 본 부부는 고하루 임을 확신했습니다. 나오미 부부는 시신일부를 그날 집으로 옮겨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습니다. 그후 병원측으로 부터 DNA 감식결과 고하루것이 맞다는 최종결과를 통보 받았습니다. 나오미씨는 이후에도 매일 굴삭기에 올랐다고 합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4명의 오카와 초등교 어린이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보통 엄마가 굴삭기를 배워서까지 땅을 파헤치며 죽은 딸을 찾았다는 것이 큰 감동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생명의 가치 때문입니다. 돈이라면 그렇게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잃었던 생명 죽었던 생명을 찾았다면 얼마나 더 행복했겠습니까? 천국에서 기뻐 잔치가 베풀어질 정도록 클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물질적 가치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돈과 생명을 바꿉니다. 인면 수심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돈 자체는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이기적이고 악하고 거짓되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손에 잡아도 명예와 권력을 손에 잡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알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남을 힘들게 하는 삶을 산다면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당시에 세계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나폴레옹에게 어떤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았느냐고 붇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에서 행복했던 날은 6일을 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반면 마음이 겸손하고 사랑으로 가득차고 섬김의 마음이라면 빈부 귀천 상관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김종수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많은 이익만을 남기려는 것보다도 배려를 합니다. 겸손하고 친절합니다. 목사님이라고 더 생각을 해줍니다. 이 번에 딸이 자동차 접촉사고로 정비를 맡겼습니다. 차가 없어서 저를 청계까지 모셔다 주시고 잠시 들어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장로님 돈만이 자산이 아닙니다. 착하고 진실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는 이런 모든 것이 내 삶의 귀중한 자산입니다. 나를 보람 있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더 부요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장로님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 분에 양파 파는 인디언 노인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시장에 나가서 양파를 사려했습니다. 인디언에게 물었습니다. 한 줄에 얼마 입니까? “10센트입니다.” 두 줄에는 얼마입니까? “20센트” “스무 줄을 사면 얼마 입니까?” “스무 줄은 다 안 팔아요” "아니 장사하러 온 것이 아닙니까?” “아니요 인생을 살려고 여기 나와 있소. 나는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다가와서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오. 친구를 보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 것이 내 삶이요 . 그것을 위해서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줄을 나는 거요. 그런데 한 사람에게 몽땅 팔며 내 하루는 그 것으로 끝이요. 내 사랑하는 삶을 잃어버릴 수는 없소.” 노인의 이야기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 내용으로 저는 자주 이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돈으로 바꾸려 하는데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평생을 돈을 위해 일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쉬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고, 여행도 안 하고 열심히 돈만 모읍니다. 억척같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짠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땅을 사고 집도 삽니다. 꽤나 돈이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로님에게 말했습니다. “돈 조금 덜 버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친절하게 대하고, 칭찬과 종경을 받는 삶을 사세요.” 이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정신적 자산이며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행복 소스들입니다. 소유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돈은 절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한 사람이 되면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 해도 행복할 수 있고, 힘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셔날 회장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것, 못 배운 것, 허약한 것 모두가 다 행복을 가져다 주는 하늘의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디가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까? 생각의 가치를 조금 더 높이면 우리의 삶도 자연 업그레이 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세상에는 가끔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학식도 꽤나 있고, 유명세도 타는 사람인데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가난합니다. 명성을 날릴 수 있는데도 이름도 빛도 없이 오지에서 살아갑니다. 몇 일 전 신문에 장기려 박사 기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고 한경직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사후를 보면 아무런 재산이 없습니다. 다 나눠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고 화려한 한국 교회에서 부를 누리는 목회자들의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이 분도 세상 관점에서 보면 바보입니다. 바보들은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나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삽니다. 나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죽입니다. 어찌하던지 기회를 포착하여 자리를 잡으려하지 않고 양보합니다. 섬김 받는 것보다도 섬기려 합니다.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합니다. 가르치기보다 배우려합니다. 영원한 부활을 위해서 죽음을 기꺼이 택합니다. 이런 분들은 세상이 이기지 못합니다. 하늘의 가치관을 갖고 하늘 방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 10:39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누가 6:35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 23: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 바보라는 칭호를 받지만 하나님께는 칭찬을 받는 사람, 선망의 대상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 못하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의 방식과 거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고 대신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기까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르헨티나 최고의 골프 선수 ‘로버트 드 빈센조’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로버트는 대회에서 우승하여 큰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다음, 주차장을 행해 걸어가는데, 한 젊은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우승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늘 받으신 상금을 저희 아이를 위해 쓰실 수는 없으신지요? 아이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죽어간답니다.” 젊은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 로버트는 기꺼이 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 서명한 뒤 그녀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날, 로버트가 그 근처 식당에서 점식식사를 하고 있는데 식당 종업원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지난 주 선생님께서 우승하신 뒤 한 젊은 여성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선생님은 속으신 거예요. 그 여자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병든 아이도 없습니다. 그 여자는 상습적인 사기꾼이라고요.” 종업원의 말을 들은 로버트가 말했습니다. “그럼 죽어가는 아이가 없다는 거군요! 맙소사! 그건 내가 이번 주에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이네요.” 로버트는 자신이 속아 넘어가 거금을 날린 것에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죽어가는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좋은 소식’이라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안에는 돈보다 더 생명의 가치를 아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님 편에서 보면 바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수많은 골프 선수 중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사람으로 비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닌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정리하자면 가치입니다. 생명의 가치! 이는 아홉의 양은 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잃은 양도 아흔 아홉 양과 똑같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의 가치를 많이 따집니다. 교회도 수가 몇 명인가 따집니다. 한국에 1만 명이 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일만 명을 넘고자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많은 수에 관심을 갖게 될 대 한 영혼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를 계산 할 때 사람의 영광이 들어나게 되고 믿음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수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수를 셌다가 하나님께 혼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의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노아 한 사람, 아브라함 한 사람, 모세 한 사람, 잃었다 찾은 한 영혼... 주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고 말씀하시면서 늘 언제나 생명 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시는 말씀을 사셨습니다. 수를 계산하는 것은 가치는 물질적인 것으로 떨어트리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천 명, 1만 명의 교회와 시골의 작은 교회 어느 교회가 더 귀합니까? 생명은 수로 계산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천이나 만이나 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잃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수와 양을 생각 할 때 우리는 더 귀한 생명의 가치관을 잃버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수를 위해서 생명의 가치를 잃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래 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전쟁터에 독자롤 입대한 아들을 찾는 내용입니다. 그 일병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8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수로 계산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한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영화 속에서 한 병사가 소대장 밀러 대위에게 질문했던 그 말이 있습니다. 일등병 한 명의 생명이 우리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가? 현재 자신과 함께 운명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는 소대원들이 생면부지인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생명보다 비중이 있는가? 만일 있다 하더라도 그를 구하러 가다가 더 많이 죽게 된다면 명령은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를 생각 할 때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것은 때로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생명을 잃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내 생명을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적인 유혹이나 물량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우리의 삶은 정신적 영적 가치를 잃고 껍데기 같은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가치 있게 하려면 생명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 생명 , 평생에 이 두 가지를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습니다. 어느새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 역시 저절로 소중하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 김해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