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부패를 꿈꿔 본 적이 없습니다.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1999년 당시 정부 고위관리들이 대우 몰락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고 귀국 후 대우차를 경영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설득했기 때문에 한국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대우사태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부문에서 과욕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남들이 15년 만에 한 것을 5년 만에 이루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5년 내에 대우사태는 반드시 나 혼자 잘못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외환위기 당시는 금융위기였지, 산업의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과잉부채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대우의 탓으로 떠넘겼습니다>
金 宇 中
1936년 대구 출생. 경기高·연세大 경제학과 졸업. 1960~1967년 한성실업 부장. 이사. 1967년 대우실업 창업. 1976년 대우조선 사장. 1981년 대우그룹 회장. 1998~1999년 전경련 회장. 금탑산업훈장. 한국의 경영자상 수상. 저서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趙 一 勳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대기업팀 기자
[편집자注] 최근 月刊朝鮮은 전문경영인·교수·경제기자·정치인·관료 124명으로부터 한국 자본주의를 만들어 낸 기업인들을 추천받아 10명을 뽑아 이들의 傳記를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란 책으로 펴냈다. 10명의 기업인은 추천빈도 순서로 1위 李秉喆, 2위 鄭周永, 3위 柳一韓, 4위 朴泰俊, 5위 崔鍾賢, 6위 具仁會, 7위 李健熙, 8위 金宇中, 9위 辛格浩, 10위 具滋暻이었다. 1999년에 大宇그룹이 정리되기 직전에 해외에 나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패한 기업인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金宇中 대우그룹 창업자가 8위에 오른 점이 흥미롭다. 전문가들은 金宇中씨의 생애를 넓게 들여다보면서 功이 過보다 훨씬 크다고 평가한 듯하다.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 중 金宇中 편을 여기서 소개하는 것도 한국 현대사에 남을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한 작업일 것이다.
500만원 자본금으로 30년 만에 세계 500대 기업 만들다
『1974년 3월쯤이었어요. 수출부장을 맡아 타이어를 팔기 위해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출장을 갔죠. 물론 사전 약속 같은 것은 없었죠.
당시 산유국인 나이지리아는 오일쇼크 덕분에 연간 120억 달러나 벌어들일 정도로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중심도시 라고스는 全세계에서 몰려온 세일즈맨들로 북적댔습니다. 하지만 경황 없이 들어선데다 호텔 잡기도 어렵고 바이어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포기하려고 했어요. 치안도 엉망이었지요.
그러나 도중에 만난 대우실업의 젊은 과장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 건너왔다는 그 친구는 도착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무려 50만 달러의 의류 주문을 따내 버렸습니다. 당시 50만 달러는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영업이라면 어지간히 자신이 있던 나도 깜짝 놀랐죠. 거기에 오기가 생겨 필사적으로 매달린 끝에 6만 달러 상당의 주문을 받아 냈죠. 당시 金宇中 사장이 지휘하는 대우실업이 비약적으로 뻗어 나간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 정도의 역량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辛亨寅 금호산업 타이어사업부 사장)
지금 시점에서 金宇中(김우중·前 대우그룹 회장·1936~)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국 경제의 근대화 모델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경영자. 천부적인 商才(상재)와 명석한 두뇌로 창업 30여 년 만에 자본금 500만원짜리 기업을 세계 500위권 그룹으로 진입시킨 신화적인 인물. 그러나 예고 없는 외환위기에 한때 재계 2위 자리까지 차지했던 그룹이 풍비박산 나고 이제는 해외를 떠돌고 있는 불운의 기업인. 돌이켜 보면 샐러리맨의 신화로 일어서 속절없이 패망하기까지 모든 것이 전광석화와도 같이 지나갔다.
비록 그룹은 해체되고 金宇中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대표 기업인 중의 한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 그가 지녔던 불굴의 도전정신과 세계 경영의 기치 아래 유라시아를 질주하던 기업가적인 기상이 너무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글이나 사막에서 일하기를 좋아한다』
중동 사막의 텐트에 참모들을 모아 놓고 『나는 정글이나 사막에서 일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높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절반 정도만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얘기하던 金宇中의 「패기와 젊음」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당대에 이뤄 낸 성취와 실패, 도전과 절망을 지금의 잣대로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金宇中은 故 李秉喆(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故 鄭周永(정주영) 현대 회장처럼 상점이나 싸전 등 개인장사로 돈을 번 뒤에 기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근대적 의미의 기업 설립을 통해 경영에 투신한 인물이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수출전문형 기업을 일으켜 국가 기간산업을 키우고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가장 먼저 해외로 달려나갔다는 점에서 그의 기업가적 여정은 여느 창업주들과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도전, 창조, 희생」으로 대변되는 대우의 기업정신은 한국 경제의 시대정신 그 자체였으며 아프리카나 동남아 밀림의 오지, 불면의 열대야 속에서 독충들과 싸워야 했던 수많은 대우맨들의 신념이기도 했다.
金宇中의 해외 개척이 갖는 의의는 해외지향의 기업활동이 과거 국내 기업들의 대외무역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수동적인 수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개척이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여건이 갖춰진 상황에서 손쉬운 해외 진출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여건 아래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분야에 도전해 목표를 이룬 것이다.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종합상사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한 것과 1990년대 前人未踏(전인미답)의 동구권 시장에 눈길을 돌린 것은 모두 궤를 같이하는 金宇中의 해외지향적 사고와 경영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1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 머물며 비행기에서 새우잠을 자고 비서가 넣어 주는 안약에 화들짝 놀라 새벽잠을 깼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부실기업에 눈을 돌려 그곳의 근로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기어코 정상화를 일구었다.
아프리카 무역현장에서 수익성을 고려해 열대과일을 수입하자고 제안하던 직원에게 『소비재나 수입하자고 무역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할 수 있는 사람을 또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중이가 크게 되면 엄청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들어갈 놈이야』
앞서 辛亨寅(신형인) 사장이 기억한 1974년은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가 엉망인 시절이었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 발발로 원유가가 일거에 40%나 오른 데 이어 1974년 2월에는 국내 석유 가격이 무려 82%나 폭등했다. 경제는 대불황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金宇中 사장이 이끌던 대우실업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고속성장의 탄력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金宇中이 1967년 창업한 대우실업은 창업 5년 만인 1972년에 국내 기업 가운데 수출실적 2위를 기록하여 세간을 놀라게 했고 1973년에 대우기계, 1974년에 대우전자 등을 인수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金宇中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61년 한성실업에 입사해 무역 관련 업무를 배우게 된다. 당시 한성실업은 原絲(원사)를 비롯해 파나마 모자, 타이어, 설탕 등 온갖 상품들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金宇中이 싱가포르에 가서 오더를 받아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수출사업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金宇中은 수출과 중계무역의 성장 가능성에 눈을 떠 일찌감치 起業(기업)의 꿈을 키우게 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金宇中의 실무 능력은 탁월했다.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하는 솜씨는 능숙했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성실업의 회장을 지냈던 金容順(김용순)은 1986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부하직원이었던 金宇中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중이는 한성에 한 6년 정도 근무했었는데 두뇌가 비상했어요.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업무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완벽하게 마무리짓곤 했어요. 또 배짱이 얼마나 세고 통이 컸던지 큰 인물이 될 걸로 미리 알고 있었어요. 부하 직원들 도와준답시고 봉급을 타면 집에 1원도 갖다 주지 않은 적도 있어요. 하도 통이 크고 의협심이 강해 내가 우리 집사람에게 「큰일났어. 우중이가 크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들어갈 놈이야」라고 말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金宇中은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1967년 3월 31세의 나이에 500만원의 자본금과 5명의 직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한성실업에서 무역업무를 완벽하게 익히고 나온데다 해외영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노하우와 자신감을 갖고 있던 金宇中은 內需(내수)보다는 해외수출에 주력하기로 했다.
대우실업은 창업 한 달여가 지나 첫 오더를 받았다. 방콕의 시아후아트社로부터 2만 야드의 트리코트(일종의 메리야스 제품으로 고리를 엮어서 짜는 편직제품)를 공급해 달라는 주문을 받은 것이다. 가격은 5676달러였다. 金宇中은 이 오더를 받은 후 뚝섬에 있는 동업자 도재환씨의 대도섬유공업사에서 제작하고 영등포에 위치한 동아염직에서 가공을 했다. 그리고는 통관을 위해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첫 수출의 성공은 연이은 히트를 몰고 왔다. 대우실업은 창업 원년에 트리코트 한 품목만으로 58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트리코트는 그 후로도 대우실업 성장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저절로, 또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 법이다. 金宇中도 창업 초기 이런저런 위기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후반 트리코트는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 지역에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특히 싱가포르 중개상들은 트리코트를 인도네시아에 밀수출해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여름,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정부 간 관계가 악화되면서 인도네시아 측이 그동안 눈감아 주던 트리코트 밀수입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에 쌓여 있던 재고 값이 폭락한 것은 당연한 일. 동시에 적지 않은 물량을 싱가포르에 내보내고 있던 대우실업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金宇中과 트리코트를 거래하고 있던 사람은 「미스터 떼」라는 이름의 화교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金宇中이 한성실업 과장 시절이던 1961년. 월남 공장들이 트리코트를 만들어 싱가포르에 수출하는 것을 눈여겨봤던 「金宇中 과장」은 국내에서 공장을 물색해 1962년 첫 수출을 하게 됐고 그때 바이어들을 소개시켜 준 사람이 바로 미스터 떼였다.
창업 1년 만에 국내 수출기업 중 서열 141위를 차지
하지만 1968년의 미스터 떼는 인도네시아의 금수조치로 거의 부도 직전에 몰려 있었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그에게 金宇中이 물었다.
『얼마가 있으면 급한 불을 끌 수 있겠습니까?』
창업 초기 金宇中은 유난히 상거래의 의리를 중시했다. 부하 직원들에게도 틈만 나면 의리를 강조했다. 金宇中은 미스터 떼에게 2만 달러를 선뜻 빌려 줬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싱가포르 무역상들은 인도네시아 당국의 태도가 누그러지면서 다시 호황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떼의 사업도 다시 일어섰다. 그는 金宇中에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 시세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트리코트 제품을 사갔다. 거기에다 마침 수요가 폭발해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 10배의 이익을 남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金宇中이 마냥 인정이나 의리에만 의존해 경영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金宇中의 탁월한 경영 감각, 나중에 세계 경영으로까지 확대됐던 전략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金宇中은 해외 현지시장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취합과 능동적인 대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해외 지사 설립이었다.
1969년 8월 시드니 지사가 설치된 데 이어 9월에는 싱가포르 지사가 문을 열었다. 한국은행의 해외 지사 설립인증 자료에는 1969년 대우가 설치한 시드니와 싱가포르 지사가 한국 무역업체가 세운 최초의 해외 지사로 기록돼 있다.
당시 싱가포르 1인 지사장을 맡았던 이는 현 두산중공업 부회장인 尹永錫(윤영석)이었다. 싱가포르 지사는 초기에 트리코트 등 섬유제품만 취급했으나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계·비료·금속·전자·식품·중장비 등으로 품목을 넓혀 나갔다. 1969년 對동남아 한국 업체의 트리코트 수출액은 전년도보다 줄어들었지만 대우실업은 90만 달러나 늘어났다.
1970년 9월에는 뉴욕 지사를 만들었다. 金宇中은 미국의 의류 잠재 시장수요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미국의 의류수입은 매년 30%씩 늘고 있었고 주요 수출국인 일본은 인건비 상승압력을 받으면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장조사를 마친 金宇中은 트리코트 원단을 새롭게 개발해 미국인의 기호에 맞는 의류를 생산하기로 했다. 회사조직도 보강해 봉제과를 신설하고 스웨터과를 보강했다. 부산공장에서는 나일론과 테트론으로 편직하던 소재를 다양화시켜 고급 의류에 적합한 트리코트 원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시장 개척은 대우실업이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金회장이 대우실업을 창업할 때 나는 금성방직이라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우실업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金회장과 나의 만남은 고교시절부터 숙명적 필연으로 느껴질 정도의 관계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습니다만, 대우가 문 열고부터 오늘날까지 당초 친구였던 金회장을 지금까지 한 번도 나는 친구라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金회장은 위대한 내 상관이요, 지도자요, 또 이 거대한 군단의 총수로서 비쳐졌을 뿐입니다.
초창기엔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심지어는 일주일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일한 적도 있었어요. 거의 매일 밤 11시45분 정도 되어서야 마지막 버스를 탔습니다.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 뜀박질로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곤 했는데 달그락거리던 빈 도시락 속의 젓가락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막차에는 한두 명의 승객이 고작이었고 취객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들이 그렇게 행복하고 여유 있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술 한잔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그것이 부러웠던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가 다르게 회사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환희와 자신감을 맛보았습니다. 맨주먹으로 옥답을 일구었다고나 할까요』
金宇中은 수출시장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또 언젠가는 좁은 내수시장의 한계 때문에 수출이 한국 경제 발전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대외 교역량은 1965년 1억7500만 달러에서 1966년 2억5000만 달러, 1967년 3억5000만 달러, 1968년 4억5500만 달러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 같은 흐름에 힘입어 창업 1년 만에 국내 수출기업 중 서열 141위를 차지했던 대우실업은 2년째에 36위로 뛰어올랐고 1972년에는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리고 1978년에는 1위 자리에 당당히 올라섰다.
1973년부터 건설업으로 해외시장 개척
거듭된 성공에 힘입은 金宇中이 무역 일색의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경영 다각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3년이다. 수출품목을 다양화하고 안정된 공급선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다각화는 필요했다.
金宇中이 처음 손을 댄 것은 금융업이었다. 일거에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금융자금의 원활한 공급이 절대적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金宇中은 다년간의 무역금융을 경험했으므로 금융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다. 금융업 조기 진출은 계속되는 기업인수를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리하여 1973년 단기금융사인 동양투자금융을 설립한 데 이어 동양증권을 인수했다. 동양증권은 나중에 삼보증권과 합병하여 1983년 대우증권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동양증권은 1978년 국내 증권사로는 처음으로 국제부를 신설, 대우그룹의 해외경영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건설업에 진출한 시기도 1973년이었다. 당시 중동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해외건설 붐이 대단했기 때문에 해외 지향적인 金宇中으로서는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600여 개 이상의 건설회사가 난립하여 정부는 건설업계에 대한 신규면허를 내주지 않고 있었다. 해외건설업체로 참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존 건설회사의 면허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金宇中은 결국 도급순위 604위였던 영세 건설업체를 인수한 뒤 상호를 대우건설로 전환했다. 대우건설은 1974년 11월 상호를 다시 대우개발로 바꾸고 대우기계·창원공장·고려피혁·영등포 공장 등 자체 공사와 국내 각종 기반시설 공사를 수행했으며 1975년에는 서울역 앞의 대우센터 빌딩 기공식도 가졌다.
대우의 해외건설사업은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이미 국내업체들이 많이 진출해 있던 지역을 피해 나가는 전략下에 이루어졌다. 첫 공사는 남미 에콰도르였고 두 번째는 아프리카 수단이었다. 당시 수단은 외국 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소련·중공 등 공산국가와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북한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연히 수단의 니메이리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金宇中은 수단의 장관급 인사들과 끈질기게 교섭을 벌인 결과 입국에 성공,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갖게 됐다. 급기야 1977년 5월에는 수단의 영빈관 공사를 2000만 달러에 수주해 최초로 아프리카 건설시장을 개척했다. 8000만 달러 상당의 타이어 공장 건설공사도 이어졌다. 1978년에는 역시 未수교국이자 좌경 회교국가였던 리비아에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리비아內 건설공사는 해마다 폭발적인 증가세를 기록해 1981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20억 달러가 넘는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최소한 1년에 절반 이상은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밤 2시가 넘어 잠이 든 金회장을 새벽 4시30분쯤에 눈에 안약을 넣어 깨우는 것이 저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金회장은 기본적으로 업무에 투입하는 절대시간이 많았습니다. 바이어들과의 만남이 밤 10시쯤 끝나면 그때부터 내부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비행기도 주로 밤 비행기를 이용했습니다. 한번은 왜 밤 비행기를 예약해야 하느냐고 여쭤봤더니 「무엇보다 시간을 아껴야 하고 호텔비도 절약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때부터 金회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장사꾼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계신 분으로 믿게 됐지요. 그 분과 오랫동안 있다 보면 삶을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눈이 부쩍 자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전환될 조짐을 보이자 대우는 중화학공업 분야에도 속속 진출했다.
1973년에 대우기계, 1974년에 대우전자 인수로 시작된 신규 분야 사업은 1976년부터 본격화돼 같은 해 한국기계공업과 대한보일러공업, 1978년에는 옥포조선과 새한자동차 등 대규모 기업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대우기계 설립은 동국정밀기계 인수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金宇中은 대우기계를 설립한 뒤 月 1만 대의 재봉기를 생산, 1974년에 2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金宇中은 대우기계 발족을 계기로 우수한 엔지니어들을 뽑아 현장에 배치해 실무에 바탕을 둔 기술인력으로 양성해 나갔다. 이들은 결국 대우가 중화학공업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대들보 역할을 하게 되는데, 1976년 한국기계공업을 인수할 때 그 진가를 드러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계공장으로 출발했던 한국기계는 국영기업으로 있다가 1968년 신진자동차에 인수됐다. 신진자동차는 의욕적인 경영을 펼쳤으나 다품종 소량생산에 따른 원가부담 가중, 수주물량 부족, 디젤엔진 공장 건설에 따른 막대한 자금 부담으로 1975년 산업은행의 관리회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부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는 한국기계를 다시 인수할 수 있는 민간업체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金宇中의 대우실업이 적격업체로 떠올랐다. 중화학공업 본격 진출과 기계공업 개척이라는 과제에 골몰해 있던 金宇中은 1976년 2월 한국기계를 공식 인수했다.
인수 당시 한국기계의 부채 총액은 대우 총자본의 3배에 달하는 797억4000만 원으로 「어린아이가 어른을 업고 뛰는 격」이었다. 하지만 金宇中은 한국기계를 인수 1년 만에 흑자로 바꿔 놓았다. 자본금을 120억원에서 250억원으로 확충하고 매출은 두 배로 늘렸다. 또 디젤엔진의 제휴선인 독일의 만社로부터 500여 명의 기술인력을 지원받아 선진기술도 습득했다. 1976년 10월 한국기계는 대우기계를 흡수 합병한 뒤 상호를 대우중공업으로 바꾸었다. 金宇中은 이처럼 선단식으로 짜인 그룹 사업구조를, 1982년 대우실업과 대우건설을 합병하여 (주)대우를 중심으로 재편하게 된다.
金宇中의 사업 다각화는 한국의 산업 발전 방향과 동일한 궤도를 달렸다는 점이 특징이다. 동시에 그룹의 발전 방향을 창업 초기처럼 내수보다는 해외에서 찾음으로써 일관된 경영 전략을 견지했다.
대우 고도성장의 추진력이 된 부실기업 인수
1980년대는 金宇中이 그룹에 편입된 부실기업의 정상화를 서두르면서 제3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였다.
金宇中이 기본적으로 부실기업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경기순환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있었던데다 해외시장에서의 활발한 마케팅이 자신감을 지원해 줬기 때문이다. 또한 부실기업을 정상화시킬 경우 손쉽게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金宇中이 인수한 부실기업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대우의 의지에 의한 기업인수와 의지에 관계없이 권유에 의한 인수가 그것이다. 부실기업의 표본이었던 한국기계 인수는 인수 후 성장을 가속화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여기에는 물론 리스크가 따르지만 위험부담과 도전의식을 갖지 않고는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인수된 부실기업은 부실원인을 분석해 종합적인 검토보고서가 작성되고 경영 개선 방안을 수립한 뒤 부실원인을 제거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상화 작업을 통해 대우는 경영 경험을 축적해 나갈 수 있었고 우수한 경영자들을 확보함으로써 다른 기업인수에 이 인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부실기업 인수는 대우에게 시차의 이점을 갖게 함으로써 고도성장의 추진력을 제공했다.
당시 대우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출 오더를 자체 공장 생산량만으로 충당할 수 없어 대부분 하청을 했다. 그러나 하청업체들은 경영 능력이 부족한데다 해외시장에 변화가 생기면 자체 마케팅 능력이 없는 회사들의 경우 더 이상 공장을 가동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회사들도 대우에 인수될 수밖에 없었는데 분명히 대우의 시설투자 기간을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부실기업 인수는 회사의 재무상태를 양호하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됐다. 당시는 인플레 시대였는데 기업인수時에 추가투자를 하지 않아도 몇 년만 지나면 인플레에 의해 자산이 눈덩이처럼 증식되었다. 원림산업 인수의 예처럼 부실기업이 갖고 있던 쿼터까지 확보함으로써 영업의 힘도 키울 수 있었다. 다음은 (주)대우 사장을 지냈던 張炳珠(장병주)의 말이다.
『金회장은 앞을 보는 시각이 탁월했던 기업인입니다. 동시에 용기와 배짱을 갖고 있었습니다. 金회장은 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많은 직원들이 망설이고 주저할 때도 金회장은 직접 나서 일을 만들어 갔습니다. 金회장은 마치 정육점의 능숙한 칼잡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부실기업을 만지면서 꼭 살려야 할 「힘줄」과 버려야 할 「지방」을 기가 막히게 구별하고 판단해 냈습니다』
『학생 때 돈 없어도 아무도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도록 처신했지요』
그렇다면 金회장은 스스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1987년 2월 리비아 대우 캠프에서 부하들을 모아 놓고서 金회장은 속내를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서부터 남달리 강한 데가 있었던 것 같고 또한 직관력이 남달리 강했어요. 아마 장사 안 하고 검사가 됐더라면 명검사가 됐을지도 몰라요.
난 어려서도 무슨 일을 보면 그냥 예사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간판을 통해 한자를 익혔고,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를 가지고는 산수를 했고, 버스를 타고 가도 앞에 앉은 사람을 살펴보고는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겠구나」 하고 직업 성분 등에 대한 추리훈련을 했지요. 이런저런 경험 때문에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정확하다고 자신합니다. 지금까지 사람 볼 때 별로 실수한 적이 없어요. 또 내가 키워 준 사람 중에서 나를 배신하거나 손해를 끼친 사람이 없으니 내 직감이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할까요.
나는 또 자존심이 무척 강했습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학생 때 아무도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도록 처신했지요. 한성실업 시절에도 그랬지요. 장사를 하다 보니까 사분사분하게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사업상 교제할 때도 돈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설득을 했어요. 인정도 많은 편이지요. 가령 인사 문제만 해도 너무 온정주의로 처리한다고 비판도 없지 않았고 더러는 단호하게 인사조치를 하라는 조언도 들었지만 세상 일을 그렇게 매정하게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金회장의 이 같은 自評(자평)은 부실기업을 정상화시킬 때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金회장은 기계적인 구조조정이나 생산성 향상을 주창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근로자들을 직접 설득하고 회사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金회장은 1980년대 후반 대우조선을 재생시키면서 경남 옥포에서 무려 1년8개월 동안 머물며 정상화를 지휘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근로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근로자 집에서 같이 아침 식사를 하며 현황을 설명하고 회사의 미래를 설파했다. 당시는 노사분규가 심하던 시절이어서 노조도 金회장이 직접 상대했다.
『지금 일본과 유럽 조선소들이 한국 조선소를 엄청나게 견제하고 있다. 수주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 죽는다. 수주를 하려면 납기에 대한 신뢰도를 보여줘야 하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회사가 일단 반석 위에 오르면 모든 과실을 근로자들에게 되돌려 줄 테니 조금만 참자』는 金회장의 설득은 주효했다.
그 몇 년 사이에 대우조선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했고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수익의 상당 부분을 계열사 지원에 사용하면서 나중에 채권단의 워크아웃을 받기도 했지만 대우조선의 영업력과 건조 능력은 여전히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金회장이 대우조선만큼 관심을 기울인 곳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이었다. 그는 1992년 GM과 결별하고 난 뒤 비상한 각오로 생산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국내 경쟁사들은 GM의 지원을 받지 않는 대우차의 생존 능력에 짙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정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96년에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독자 개발한 3개 모델을 동시에 출시하면서 사람들은 새삼 金회장의 저력에 놀랐다.
부평공장으로 숙소를 옮기면서 金회장은 부하들에게 年産(연산) 200만 대의 생산 능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아무도 이를 곧이듣지 않았지만 부평·창원공장을 정상 가동하고 폴란드·우즈베키스탄·인도 등에 잇따라 생산기지를 확보하면서 金회장은 거짓말처럼 200만 대 생산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대우차를 舊모델의 하청 생산기지쯤으로 여기고 있던 GM이나 국내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갖고 있던 현대차로서는 여간 놀랄 일이 아니었다. 金宇中도 이를 대단히 흡족하게 생각했다.
1997년 4월 군산공장 준공식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37년간 사업을 하면서 우리 제품에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는데 3개 모델에 대해서는 정말 만족한다. 평생 지금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일에 미쳐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안 되는 일이 없는」 사람
세계 경영은 金宇中의 어제와 오늘을 규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세계 경영을 위한 金宇中의 자산은 해외지향적 사고와 조직, 그리고 부실기업 재건과정에서 획득한 노하우였다. 중심 전략은 고도성장으로 확인된 산업 근대화 모델의 해외이식을 통해 대우 성장의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획득하겠다는 것이었다.
세계 경영이 옳았느냐 글렀느냐의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 세계 경영은 진취적이고 대담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대우그룹 해체를 촉발시킨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기업인들은 金宇中의 「실패」가 아니라 「이상」에 주목하고 있다. 안정적인 현금 흐름,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 보수적인 경영 전략을 토대로 한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이제 다시는 金宇中식 실험과 도전을 감행할 기업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金宇中식 세계 경영은 당대의 삼성그룹마저 벤치마킹을 시도할 정도로 기업의 국제화 마인드를 확산시키는 데 一助(일조)했다는 데는 전혀 이론이 없다.
(주)대우 유럽영업본부장-대우개발 사장-카자흐스탄 체신청 회장-쌍용자동차 사장을 거치면서 金宇中의 세계 경영에 참여했던 崔桂龍(최계룡)의 증언.
『세계 경영은 金회장의 놀라운 순발력과 사업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세계 경영은 수출기지 현지화와 이머징 마켓에 근대화 모델을 도입하는 두 가지 전략을 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본력이 취약한 수단, 미얀마 등에서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팔고 달러 대신 솜이나 목재, 원유 등을 받았습니다. 리비아 공사대금도 기름으로 받았지요. 그런데 대금수령 수단인 기름값이 떨어지자 金회장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벨기에 정유공장을 인수하는 방안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金회장은 「도대체 안 되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金회장은 또 호텔사업을 해외시장 개척에 적절하게 활용했습니다. 대우개발은 1990년대 초반에 중국, 알제리, 수단, 불가리아 등에 20개가 넘는 많은 호텔을 지었습니다.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오가는 호텔은 현지 경영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해냈고 개발도상국에 서비스 마인드를 고취시키는 데도 일조했습니다』
「트로이의 목마」 전략
金宇中이 「21세기 생존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경영을 그룹의 공식 경영 전략으로 채택한 것은 1993년. 외부적으로는 냉전종식과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 같은 흐름에 역행하는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아세안(ASEAN) 등의 블록경제가 강화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新보호주의의 등장으로 「高비용 低효율 구조」라는 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대다수 한국 기업들의 과제로 떠올랐고 대외개방 체제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金宇中이 세계 경영의 구체적인 전술로 채택한 것은 이른바 「트로이의 목마」였다. 지역별 경제블록 안에 생산기지를 구축함으로써 무역장벽을 극복하고 高비용 생산구조를 타파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본사는 무역장벽을 피할 수 있는 부품 공급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연구개발 및 관리업무에만 치중하는 글로벌 전략의 사령탑을 맡게 됐다. 생산·개발·마케팅·금융·인력 등 경영의 제반요소들은 철저하게 현지화를 추구했다.
대우의 내적 역량 또한 지난 20여 년 동안 다져 온 수출 노하우와 국가별 전문인력, 해외시장에 대한 심층적 네트워크를 통해 충분히 다져진 상태였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구축에 필수적인 건설·중공업·통신·자동차·전자 등을 주축으로 하는 대우그룹의 구조는 해외진출時 다양한 시너지를 발휘할 것으로 예상됐다. 세계 경영의 구현地는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던 舊소련 연방국가들과 동유럽이 중심이었다. 중국, 베트남, 미얀마, 수단, 나이지리아 등 인구가 많고 자원이 풍부한 체제 전환국들도 대상이었다.
세계 경영은 (주)대우와 대우자동차가 선봉을 맡았다. 金회장이 대우실업과 대우건설을 합병해 설립한 (주)대우는 金宇中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기업조직이었다. 대우의 핵심 엘리트들과 주요 자산들은 모두 (주)대우로 집결했고 세계 경영의 헤드쿼터 역할을 했다. 한때 대우의 비밀계좌로 주목받으며 全세계 해외법인들의 자금을 관리한 BFC도 (주)대우 런던법인이 만든 것이었다. 나중에 대우가 26조원의 돈을 해외에 빼돌린 곳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사실 BFC는 국내 외환관리법을 넘나드는 탈법을 저질렀을 뿐, 회사의 거대자금을 조직적으로 유용한 조직은 아니었다.
(주)대우가 맡은 사업은 너무도 다양해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중국 지역에서는 20여 개의 사업을 관리하기 위해 지주회사 설립도 검토할 정도였다. 일관된 흐름은 이머징 마켓의 개발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것. 페루의 육상유전, 칠레의 동제련, 알제리의 육상광구, 리비아의 해상광구, 우즈베키스탄의 면화, 우크라이나 및 체코의 지하자원 개발 등이 (주)대우의 사업 리스트에 올라 있던 것들이었다.
세계 경영의 또 다른 추진체인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 중반에 동유럽의 자동차 생산기지를 싹쓸이하며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 폴란드-루마니아-체코가 차례로 함락된 데 이어 1996년 7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공장이 준공됨으로써 동유럽에 4각 생산기지가 구축됐다. 이 가운데 全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은 대우가 GM을 제치고 폴란드에 입성한 것이었다.
金宇中은 GM이 폴란드 정부가 인수조건으로 내건 고용유지 조항에 불만을 표시하며 김을 빼고 있는 사이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전광석화처럼 폴란드 자동차 공장 인수계약을 체결했다. 金宇中은 「인력의 30%만 흡수하겠다」는 GM과 달리 「생산량을 네 배로 끌어올려 2만 명의 근로자 모두에 대한 고용보장을 약속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으로 게임은 끝이었다. 석 달 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대우가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인 GM의 유럽 전략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또 하나의 도요타가 탄생했다」고 썼다.
金宇中과 존 스미스 GM 회장은 2년 뒤 우크라이나의 자동차회사 인수를 위해 또다시 붙지만 여기서도 金宇中은 완승했다. 대우가 파죽지세로 동유럽 진격을 계속하던 어느 날 金宇中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이제는 강대국이 약소국 시장에 들어가 이익을 챙겨 나오는 식민주의적인 투자 패턴이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에야 통신수단과 정보가 미흡했기 때문에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는 현지에서 곧바로 자금을 조달하고 기술 개발을 추진하면서 기업의 현지화를 꾀해야 합니다. 돈 버는 게 우선이 아니라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먼저라는 인식을 현지인들에게 심어 주고 실질적으로도 그 나라 국민들에게 이득이 돼야 기업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지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재투자를 통해 기업을 키우고 기업공개를 통해 상장도 추진한다는 계획입니다. 국제證市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킴기즈칸」이라 불린 사람
1996년 7월19일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우즈베키스탄 공장 준공식 때는 대우 임직원들뿐만 아니라 국내 정·관계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이때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은 金宇中을 칭기즈칸에 비유해 「킴기즈칸」으로 불렀다. 당시 金宇中을 동행 취재했던 한국경제신문 정종태 기자의 증언.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1991년 독립한 이후 최대의 축제라며 金회장을 비롯한 한국 측 인사들을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이날을 「한·우즈베키스탄 친선의 날」로 지정해 축하행사를 직접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또 동유럽 언론들은 「칭기즈칸이 다시 온다」라는 헤드라인으로 대우의 세계 경영 활약상을 집중 보도했습니다.
대우 입장에서 이날 행사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동유럽 일대에 연산 100만 대의 생산거점을 확보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유라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점에서 서방 자동차 메이커들의 집중 견제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대우차의 경우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한 국내 시장을 벗어나 조기에 연간 250만 대 이상의 규모를 확보해야만 생존을 기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성장속도가 빠른 동유럽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많은 서방 언론과 국내 일부 기업들은 대우의 자금동원 능력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11억 달러에 이르는 폴란드 FSO社 인수 사업을 비롯해 수억 내지 수십억 달러짜리 해외투자를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대우의 자금력은 미스터리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대우 측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언론에 발표되는 투자액은 해당 프로젝트에 들어갈 총투자액이고 실제 사업 초기에 들어가는 자금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공장 사례를 들어보지요. 이 공장의 프로젝트 코스트는 6억5000만 달러였습니다. 프로젝트 코스트란 해외투자에 들어가는 총자금을 말하며 공장의 땅값과 기계값은 물론이고 공장 건설에 들어가는 차입금 이자와 운영자금 등이 포함됩니다.
대우는 프로젝트 코스트 2억 달러만을 자본금으로 하고 나머지 4억5000만 달러는 차입금으로 구성했습니다. 부채비율이 225%인 셈입니다. 자본금 2억 달러도 전액을 대우가 출자하지 않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공장의 대우차 지분은 50%였기에 대우가 납입해야 할 자본금은 1억 달러뿐이었습니다. 이 1억 달러도 대우가 회사금고를 열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해외법인의 자본금에 대해서는 수출입은행에서 80%까지를 「해외투자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빌려 줬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본 계정에 순수 투입한 돈은 2000만 달러뿐이었고 그것도 단계적으로 이뤄질 예정이었습니다.
차입금 4억5000만 달러를 끌어들이는 것도 생각처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해외투자법인의 차입금은 출자자인 대우 이름으로 빌리는 것이 아니고 해당법인이 借主(차주)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 법인의 차입금에 대해서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보증을 섰습니다. 대우는 대출해 줄 은행을 소개만 해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완벽한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세계 경영에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됐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우는 완벽한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것처럼 보였다. 1996년에 지역본사제가 도입되고 20여 개의 「또 다른 대우그룹」을 지구촌에 건설하는 계획도 속속 발표됐다.
세계 경영의 결실인 해외 네트워크는 1993년 말 185개소에서 1998년 말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총 589개로 늘어났고 해외고용 인력도 2만2000명에서 15만2000명으로 증가했다. 金宇中의 해외 출장은 더욱 잦아졌고 대우는 세계 경제의 심장부로 진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이 金宇中을 「킴기즈칸」에 비유한 것은 결과적으로 「선견지명」이 있던 표현이었다.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 민족은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전면을 질풍처럼 내달리다가 종말에 대한 예고도 없이 너무도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유라시아를 거침없이 내달렸던 金宇中과 그의 군단 또한 유목민족의 운명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장이 났다.
그것은 전대미문의 경제위기에서 시작됐다. 1997년 11월 국민들에게 청천벽력처럼 다가온 IMF 관리체제 도입은 기업과 경제활동에 대한 기존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흙같이 어두운 기업환경에서 기업들은 숨을 죽였고 개발연대의 주역들인 50대 직장인들은 한꺼번에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로 무장한 IMF 사단은 퇴출 금융기관과 기업의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불행하게도 대우가 여기에 포함됐다. 대우그룹은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1997년까지 나름대로 탄탄한 기업구조를 갖고 있었다. 해외사업 확대로 유동성이 다소 빠듯하긴 했지만 자금조달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고 매출이나 순익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현대, 대우, 삼성, LG 등 4대 그룹의 수익성 및 재무자료를 분석한 결과 대우의 유형고정자산 증가율은 연평균 30%대, 매출증가율은 35%대로 평균 20∼25% 선이던 他 그룹을 압도하고 있었다.
매출액 영업이익률의 경우 6.24%로 삼성(7.32%), LG(6.96%)보다 낮았지만 현대(5.45%)보다는 높았고 총자본 경상이익률은 0.52%로 가장 우수했다. 부채비율은 473.8%로 삼성의 371.2%보다는 높았지만 현대(579.1%), LG(510.8%)보다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IMF로 경제위기가 닥치자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 환란으로 국가신용등급이 갑자기 여섯 단계나 떨어지자 全세계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압력을 받게 됐다. 국내에서는 부채비율 200% 기준이 설정되면서 사실상 신규 차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까지 폭등해 외화자산이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8조5000억원의 환차손을 입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金宇中의 세계 경영은 더 이상 자체 에너지를 확보하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1998년 2월 새로 구성될 金大中 정부는 IMF 사태의 원인을 「재벌의 과잉투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재벌의 과잉투자 때문인가, 아니면 무분별한 금융정책 때문인가」
이제는 생존을 위한 金宇中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金宇中은 1998년 1월 당시 金大中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환란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주장했다. 당시 정부의 공식적인 흑자목표액은 20억 달러 남짓이었다. 『불요불급한 정부 예산을 삭감하고 무기도입을 일시 중단해야 합니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공사를 연기하고 수입을 줄이면서 수출총력 체제로 가야 합니다』라는 金宇中의 비전 설명에 金당선자는 상당한 공감을 표시했다. 金宇中의 구상은 강력한 힘을 얻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金大中 정부의 신흥관료들은 金회장과 대우의 약점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金宇中이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과천 청사를 방문했을 때 관료들의 표정은 싸늘했다. 金회장은 『재계가 앞장설 테니 정부는 무역금융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부채비율 축소 등 재벌개혁이 지상과제인 관료들에겐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관료들은 『재벌들이 부채비율을 낮출 생각은 않고 외상수출로 장난을 치려 한다』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무역흑자 500억 달러 달성은 대우의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金宇中과 신흥관료들은 외환위기의 원인을 놓고 설전도 벌였다. 그해 2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환란의 1차적 책임이 「재벌의 과잉투자 때문인가, 아니면 무분별한 금융정책 때문인가」를 놓고 의견 충돌을 빚은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대기업 잘못으로 몰아붙이는데 도대체 기업이 잘못한 게 뭡니까. 기업이 아니라 금융이 부실해 외환위기가 생긴 것 아닙니까. 빅딜도 어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인지 말씀 좀 해보세요』
金宇中은 이렇게 다그치면서, 1997년 초까지 국책은행에서 관리되던 외환을 일반은행은 물론 증권, 短資社, 금고, 우체국 등 100여 개의 금융기관들에게 개방한 데서 문제가 야기됐다고 지적했다. 관료들의 금융정책 실패에서 외환위기가 초래됐다는 반격이었다.
1998년 3월 全經聯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도 金宇中의 공세는 계속됐다.
『경제장관들이 아직 수출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수출대책회의를 백 번 열면 뭐 합니까. 정부의 수출대책이 현장에는 안 먹히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데』(7월10일 무역투자진흥대책회의)
『(공정거래위원회가 5대 그룹 부당내부거래에 1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데 대해)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100억원이 어디 푼돈입니까. 국내의 취약한 자본시장에서 선진국 수준의 부채비율을 강요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돼요』(7월31일 관훈클럽 조찬간담회)
이런 金宇中은 경제관료들에게 그야말로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金宇中과 대우를 그대로 두었다간 구조조정이고 뭐고 다 날아간다」는 강한 경계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차에 金宇中이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추진하던 대우차-GM 간 합작 추진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金宇中은 GM에 대우차 지분을 팔아 50억 달러 이상의 현금을 확보한 뒤 해외사업장 차입금을 상환하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청와대에도 보고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1998년 6월 GM노조가 인수를 반대하고 나선데다 GM 측 경영진도 좀더 헐값에 사들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본격적인 협상을 미루고 있었다.
7월에는 금감委가 기업어음(CP) 발행한도제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단기자금 조달마저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됐다. 설상가상으로 10월에는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차입을 통한 유동성 확보는 사실상 봉쇄됐다.
마침내 시장은 대우의 자금사정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金宇中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10월29일 일본 최대 증권사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의 보고서 한 장이 金宇中과 대우에 다시 일격을 날렸다.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is ringing for the Daewoo Group)」는 제목의 보고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대우는 주가마저 낮아 유상증자 등 證市를 통한 자금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대안은 자산매각뿐이지만 팔릴 만한 회사가 없다. 따라서 대우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해외채권이 회수되기 시작하면 워크아웃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 즉각 대우중공업의 회사채 발행계획이 취소됐고 금융권의 본격적인 자금회수가 시작됐다. 이 충격으로 머리에 실핏줄이 터져 쓰러진 金宇中은 「뇌경막하혈종」 수술을 받아야 했다.
IMF 사태가 3년만 늦게 터졌다면
수술을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임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한 金宇中은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이는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한 번 약세를 본 시장 참가자들은 대우 관련 리스크를 차단하는 데만 열중할 뿐, 장단을 맞춰 주지는 않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여전히 호의를 갖고 있었지만 그를 둘러싼 관료들은 이미 대우 해체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지낸 孫炳斗(손병두)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만약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3년 정도 늦게 터졌거나 대우의 세계 경영이 3년만 일찍 시작됐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金宇中 회장과 대우는 참으로 불운했습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金宇中은 처연할 정도로 고군분투했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1999년 8월, 대우는 결국 워크아웃이라는 「死藥(사약)」을 받았다. 채권 금융기관들이 매일 부도처리 위협을 가하는 동안 매일 밤 전화통을 붙들고 채권회수를 유예시키던 날들이 6개월 이상 흐르고 난 뒤였다.
金宇中은 그해 11월 해외로 나간 뒤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의 귀국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처벌이 두렵다고 생각한다면 金宇中은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평생을 기업 전쟁터에서 살아온 金宇中은 아마도 일정 수준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金宇中은 외화도피범의 혐의를 받고 있다. 그것도 26조원에 달하는…. 사실 이것은 그의 본질이 아니다. 외화도피는 세계 경영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런던의 계좌 BFC가 그룹 자금을 종합 관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었다. 법의 테두리가 정한 모양새는 「도피」였는지 모르지만 실상은 국내·해외 법인 간에 자금을 돌려 쓴 일이다. 물론 金宇中도 이것의 불법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일정 부분 회계조작이 있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나아가 결과적으로 대우사태로 인해 많은 금융기관들이 부실을 떠안았고 공적 자금을 받은 데 대해서는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는 심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사기꾼이나 파렴치범으로 매도되는 데 대해서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생각이다. 金宇中은 얼마 전 미국 포천誌와의 인터뷰에서 심경을 피력했다.
<나는 결코 부패를 꿈꿔 본 적이 없습니다.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1999년 당시 정부 고위관리들이 대우 몰락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고 귀국 후 대우차를 경영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설득했기 때문에 한국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대우사태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부문에서 과욕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남들이 15년 만에 한 것을 5년 만에 이루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5년 내에 대우사태는 반드시 나 혼자 잘못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외환위기 당시는 금융위기였지, 산업의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과잉부채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대우의 탓으로 떠넘겼습니다>
원대한 기상과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
金宇中은 1999년 11월 해외로 떠나며 임직원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경영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 소홀, 용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관리」를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대우 해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金宇中의 소회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으며 정확하기도 하다. 하지만 반성의 방향은 편향적이다.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지만 정부 관료들의 잘못된 현실인식과 사사건건 불리하게 돌아갔던 시장환경도 발목을 잡았다는 생각이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이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 정확하게 가치판단을 내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의 진실이라는 것도 사실 흐릿한 이미지의 잔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처럼 金宇中의 몰락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제 색깔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金宇中이 일군 기업들이 아직도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가 여전히 대우 계열사들의 발전과 한국 경제의 번영을 바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金宇中은 그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했고 기업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을 동일시하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장막 뒤에 몸을 가린 채 측근들을 통해 의중을 전달하는 여느 그룹 총수들과 달리 실무자와의 토론이나 현장 확인을 중시했으며 상대가 웬만큼 공부하거나 탐구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속셈 빠른 체하며 야박하게 그의 공과를 따지기 이전에 참으로 원대했던 그의 기상과 뜨거웠던 열정, 검소하고 부지런했던 그의 생활을 모든 기업인들이 현재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사실 金宇中이 한국 경제에 남겨 놓은 가장 소중한 자산은 기업가로서 가져야 할 참된 용기와 신념일 것이다.●
첫댓글70년대까지만 해도 대우라는 기업은 별것도 아니었는데, 썩어빠진 살인마 전두환과 결탁하여 1980년도부터 가장 승승장구했던 놈이 김우중이거늘..또한 IMF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외에서 호화사치생활을 누리며 도망다니는 놈인 주제에..도대체 뭘 잘 했다는건지.. 이 글을 쓴 놈 혹시 김우중의 자서전 써 준 놈 아닌가요?
첫댓글 70년대까지만 해도 대우라는 기업은 별것도 아니었는데, 썩어빠진 살인마 전두환과 결탁하여 1980년도부터 가장 승승장구했던 놈이 김우중이거늘..또한 IMF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외에서 호화사치생활을 누리며 도망다니는 놈인 주제에..도대체 뭘 잘 했다는건지.. 이 글을 쓴 놈 혹시 김우중의 자서전 써 준 놈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