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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그곳은?
○ 조선(朝鮮)의 남북조(南北朝)시대, 『발해(渤海)와 신라(新羅)시대 』라고 말한다.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 백과>를 보면 ;
《『발해(渤海)』【존속 기간 : 698년 - 926년】 는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를 계승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건국할 당시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발해라는 국호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홀한 해(경박 호)에서 유래 되었다. 홀한 해는 사실 바다가 아닌 호수지만 그 둘레가 30km가량 되는 큰 호수라서 바다처럼 여겨져 홀한 해라고 불렸다. 홀한 해 유역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때 기반이 되었던 지역이었고, 홀한 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발해가 국호로 정해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고(구)려’라고 하였고, 일본도 발해를 고려 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 》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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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보면 <위키 백과니 기타 무슨, 무슨 백과사전>이란 것은 100% 현대의 고정관념 수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설명으로 되어 있을 뿐, 『역사적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 』이는 곧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 먼 이야기일 뿐”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이를 보면서 <위키 백과니 기타 무슨, 무슨 백과사전>의 설명을 인용(引用)하여 조선(朝鮮)의 역사를 해설(解說)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현실(現實)은 그렇지 않은데, 소위 위키-백과를 인용, 조선사(朝鮮史)를 해설(解說)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의문(疑問)을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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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渤海)국』은 『진(震)국』또는『대진(大震)국』이라고도 하며, 한편으로는『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호(別號)도 갖고 있다. 이는 백제(百濟)의 마지막 왕인 “의자(義慈)왕”을 가리켜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는 옛 기록과 함께 “해동(海東)”의 의미(意味)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발해(渤海)”의 영토는 어디에 있었으며, “발해(渤海)”란 어디를 호칭한 것인가? 에 대해 많은 의문점이 있으나, 강단에서는 이에 대한 단 한 푼의 설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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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에 기록된 “발해(渤海)”를 찾아 『조선(朝鮮)의 한 일원(一員)이었으며, 한 축이었던 발해(渤海)왕국의 위치를 찾아보자.』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한 것이나, 보완, 보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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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조선사연구회에 들어가 보니,
이 중에서【중국(中國)의 복건인민출판사(福建人民出版 社)에서 발행(發行)한 <중국고대민족관계사연구(中國 古 代 民 族 關 係 史 硏 究)>라는 책(册)에는 중국(中國) 사학자(史學者) 24명(名)이 논문(論文)을 발표(發表)하고 있는데, 그 본문(本文)의 364쪽을 보면, “卽 中 國 汗 說 明 他 也 承 認 是 中 原 王 朝 的 一 汗”이라는 문구(文句)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 문장(文章)은 현대(現代) 중국어(中國語)로 보이는데, 잘 아시는 분이 이를 번역(飜譯)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는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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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내용을 처음 소개한 분은 아마도 “이 중재” 선생일 것입니다. 번역(飜譯)해 보면, 그 뜻은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다만 현대의 문장이므로 다소 내용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염려스러운데, 이는 곧 『 卽 中 國 汗, 說 明 他 也, 承 認 是 中 原 王 朝 的 一 汗. : 곧 중국은 한(汗)이다. 설명은 다르나, 중원의 왕조는 하나의 한(汗)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옳다. 』고 번역(飜譯)할 수 있다.
이러한 현대 중국학자들의 <중국고대민족관계사연구(中國 古 代 民 族 關 係 史 硏 究)>라는 책속의 내용 중에서 달랑 이 한 줄만 가지고 논한다는 것은 좀 그렇고, 위, 아래 내용을 봐야 확실한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위 한 줄의 내용을 가지고 논한다면, 옛 중국(中國)의 왕조(王朝)는 “한(汗)”이라는 왕조가 계속 집권하여 이 “한(汗)”이 사방의 여러 제국(諸國)을 통치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한(汗)이란 무엇일까?
한(汗)은 『한(干)으로 한(翰)이며, 한(韓)이라 하는데, 고조선(古朝鮮) 시절의 군장(君 長)을 칭하던 말이라 하며, 또한 칸(Khan)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통상적 역사해설에서는 “한국(汗 國)”은 “한(汗;Khan)”이 다스리던 나라이며, 새외(塞外)에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우두머리(汗)가 통치한 나라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汗)”이 “한(韓)”이며, 고조선(古朝鮮)의 천자(天子)의 호칭(呼稱)이었을까?
●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편을 보면 ;
王制云:東方曰夷.夷者,柢也,言仁而好生,萬物地而出.(一) : 왕제가 이르기를 ; 동방은 이(夷)이다. 이(夷)는 근본이다. 말하기를 어질고, 낳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다. 故 天 性 柔 順, 易 以 道 御, 至 有 君 子﹑ 不 死 之 國 焉.(二) : 고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를 다스려, 이에 이르러 군자가 있고, 죽지 않는 나라이다. 夷 有 九 種,[三] 曰畎夷,於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四) 故 孔 子 欲 居 九 夷 也。이(夷)는 아홉 종류가 있는데, 이르기를 『 견이(畎 夷). 어이(於 夷). 방이(方 夷). 황이(黃 夷). 백이(白 夷). 적이(赤 夷). 현이(玄 夷). 풍이(風 夷). 양이(陽 夷)』이다. 고로 공자(公子)가 구이(九夷)에 거하고자 하였다.
東夷率皆土著,憙飲酒歌舞,或冠弁衣錦,器用俎豆. : 동이(東夷)는 모두 토착민들로 함께, 좋아하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언제나 갓 쓰고 비단옷 입으며, 그릇은 조두를 사용했다. 所謂中國失禮,求之四夷者也.凡蠻,夷,戎,狄總名四夷者,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雲. : 소위 중국이 예를 잃어, 이것을 사이에 구했다. 무릇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을 통틀어 사이(四夷)라 하는데, 마치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을 모두 제후(諸侯)라 부르는 것과 같다.
● 『조선(朝鮮)은 곧 동이(東夷)요, 구이(九夷)의 우두머리로 구이(九夷)를 다스렸으며, 이는 곧 조선(朝鮮)이며, 조선의 천자(天子)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위에 등장하는 구이(九夷)란 『곧 백인【백이(白 夷)】, 황인【황이(黃 夷)】, 흑인【적이(赤 夷)】, 북호【견이(畎夷)】등 많은 다 종족들임을 알 수 있다. 』
● 구이(九夷)는 사이(四夷)를 총칭(總稱)하는 말이며, 중국(中國)의 직할 통치지역을 제외한 『동서남북(東西南北)에 살고 있던 자들을 사이(四夷)라 하며, 그 속에 구이(九夷)의 종족들이 살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옛 고대 조선(朝鮮)의 민족구성을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 정의한 학설은 잘못된 것이다. 본론(本論)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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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전(通典) 변방(邊防)전 “조선(朝鮮)” 편
《 朝 鮮, 晉 張 華 曰 : 朝 鮮 有 泉 水 、 洌 水 、 汕 水 , 三 水 合 為 洌 水 , 疑 樂 浪 、 朝 鮮 取 名 於 此 也 。汕 , 所 晏 反 。 周 封 殷 之 太 師 之 國 。 太 師 教 以 禮 義 、田 蠶 , 作 八 條 之 教 , 無 門 戶 之 閉 , 而 人 不 為 盜 。 其 後 四十 餘 代 , 至 戰 國 時 , 朝 鮮 侯 亦 僭 稱 王 。 始 全 燕 時 嘗 略 屬 焉 , 為 置 吏 , 築 障 塞 。 秦 滅 燕 , 屬 遼 東 外 徼 。 秦 遼 東 郡 , 今 安 東 府 之 東 地 。 及 秦 亂 , 中 國 人 往 避 地 者 數 萬 口 。 漢 興 , 為 其 遠 難 守 , 復 修 遼 東 故 塞 , 至 浿 水 為 界 。 浿 音 滂 拜 反 。 屬 燕 王 盧 綰 反 , 入 匈 奴 。 燕 人 衛 滿 亡 命 , 聚 黨 千 餘 人 , 魋 結 魋, 杜 回 反 。 蠻 夷 服 而 東 走 出 塞 , 度 浿 水 , 擊 破 朝 鮮 王 準 , 居 秦 故 空 地 上 下 障 , 稍 役 屬 真 蕃 、 朝 鮮 諸 夷 , 及 故 燕 、 齊 亡 命 者 王 之 , 都 王 險 。 在 浿 水 之 東 。 會 孝 惠 、 高 后 時 , 天 下 初 定 , 遼 東 太 守 即 約 滿 為 外 臣 , 保 塞 外 , 以 故 滿 得 兵 威 財 物 , 侵 降 其 旁 小 邑, 真 蕃 、 臨 屯 皆 來 服 屬 , 地 方 數 千 里 。 傳 子 至 孫 右 渠 ,所 誘 漢 亡 人 滋 多 。 武 帝 元 封 三 年 , 遣 樓 船 將 軍 楊 僕 從 齊 浮 ➡➡➡渤 海 , 兵 五 萬 , 左 將 軍 荀 彘 出 遼 東 , 討 之 。 朝 鮮 人 相 與 殺 王 右 渠 來 降 。 遂 以 朝 鮮 為 真 蕃 、 臨 屯 、 樂 浪 、 音 郎 。 玄 菟 四 郡 。 今 悉 為 東 夷 之 地。 昭 帝 時 罷 臨 屯 、 真 蕃 以 并 樂 浪 、 玄 菟 。 自 內 屬 以後 , 風 俗 稍 薄 , 法 禁 亦 寖 多 , 至 於 六 十 餘 條. 》
※ 위의 원문 내용은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곳저곳의 카페에서 수없이 보아온 내용과 별 차이 없는 그런 내용이다. 번역(飜譯)을 해도 똑같은 내용이기 때문에 오늘은 이곳에서 가장 핵심적(核心的)인 단어라 할 수 있는 “발 해 (渤 海)”라는 곳이 옛 역사서 원전(原典)에는 어디에 있었다고 하였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 《武 帝 元 封 三 年 ,遣 樓 船 將 軍 楊 僕 從 齊 浮 渤 海 , 兵 五 萬 , 左 將 軍 荀 彘 出 遼 東 , 討 之. : 한 무제 원봉 3년에, 파견된 루선 장군 “양복”이 모두 갖추어 “발해(渤海)”를 따라 병사 5만 명과 좌 장군 “순체(荀 彘)”가 요동(遼東)으로 나아가 쳤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사기(史記)”에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내용이 있다. 여기서 식민사관(植民史觀)이나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미안(未安)하고, 죄 송(罪悚)하나, ➡➡➡ 『발해(渤海)』는 현재 지도(地圖)에 그려져 있는 “발해(渤海)”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대륙(大陸)측의 여러 사서(史書) 원문(原文)의 기록이다. 위의 기록대로라면 “발해(渤海)”는 바다 또는 큰 호수 또는 큰 하천임을 알 수 있다.
『조선(朝鮮)의 발해(渤海)가 존재하고, 대륙의 발해(渤海)가 존재한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식 역사해설은 사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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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전(通典) 174 / 州 郡 4 / 古 雍 州 下편의 풍속(風俗)편을 보면 ;
《 議 曰 : 按 水 經 云 「崑 崙 墟 在 西 北, 去 嵩 高 五 萬 里, 地 之 中 也. 其 高 萬 一 千 里, 河 水 出 其 東 北 陬, 屈 從 其 東 南 流, 入 於 渤 海. : 의론에서 말하기를, 수경(水經)을 살펴보면, “곤륜(崑崙)”의 옛 터(또는 언덕)는 서북(西北)에 있다. 높이가 5만 리에 우뚝 솟아 있는데, 땅의 가운데이다. 그 높이가 일천리이며, 하수(河水)가 그 동북(東北)쪽에서 나와, 동남(東南)쪽을 따라 굽어 따라 흘러가서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 위 통전(通典) 내용은 “옹주(雍 州)” 지방에 대한 설명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옹주(雍 州)”의 관할지역은 섬서(陝西)로부터 서역(西域)까지로,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는 반도(半島)로부터 <오 천리에서 일만 리쯤> 떨어진 있는 곳의 설명(說明)이다. 이곳 지방을 설명하는 곳에 “발해(渤海)”가 서역(西域)지방을 흐른다는 이야기는 왜 등장하는 것일까! 를 생각하면서 아래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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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해 경(山海經) ; 《 河 水 出 東 北 隅 , 以 行 其 北 , 西 南 又 入 渤 海 , 又 出 海 外, 即 西 而 北 ,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하수(황하)가 동북(東北) 모퉁이(隅)에서 나와 그 북쪽으로 가다가 서남으로 흐르다가 다시 발해(渤海)에 들어간다. 또 해외(海外 : 사해(四海)의 밖)에서 나와 즉 서쪽, 북쪽으로 흐르다가 우(禹)임금이 통하게 한 적석(積石)산으로 들어간다. 》
❈ 위의 산해 경(山海經) 기록으로 “발해(渤海)”의 위치를 그려보면 ; 『발해(渤海)』는 『포창해(蒲昌海 : 염 택)로부터 청해(靑海) 사이의 북쪽과 남쪽지방에 있었다. 곧 포창해로부터 옥문관으로 돈 황(燉煌), 주천(酒泉), 장액(張掖)으로 연결되는 지역의 남북(南北)지대였다. 이곳의 남쪽지방 청해(靑海)호 서쪽지방은 지금도 수많은 호수와 하천으로 늪지대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적석(積石)산은 청해(靑海) 남쪽에 있는데, 열전 “토번”편을 보면 <자산>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산해 경(山海經)을 해설한 <필원>의 말에 따르면 “書우공”에 기록되어진 “道 河 積 石도하적석”은 청해(靑海)남쪽 지경에 있는 대적석산이 아니고, 감 숙성 임하 현 서북(西北)에 있는 “소적석산 즉 당술 산”이라 했다. 토 곡 혼(吐谷渾)과 경계지역에 있으며, 감 숙성 포한縣 서북에 있다.
그러나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를 다스리던 ”적 석 산“이 청해(靑海)성의 청해(靑海)호 남쪽에 있는 대적석산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 이유(理由)는 『감 숙성의 림 하 현에 있는 산은 본래 이름이 <당술 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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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또 산해 경(山海經)을 보면 ;
《 河 水 出 東 北 隅, 以 行 其 北, 西 南 又 入 渤 海, 又 出 海 外, 即 西 而 北, 入 禹 所 導 積 石 山 1. : 하수(황하)가 동북 모퉁이에서 나와 북쪽으로 가다가, 서남쪽으로 다시 발해로 들어간다. 또 나와 해외로, 즉 서쪽, 북쪽으로 흘러 우(禹)의 적(積)석산을 통한다. 》
● 위의 “통전(通典)과 산해 경(山海經)”기록을 보면 충격적이다. 물론 필자(본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고, 해설하였다. 곧 『발 해 (渤 海)』는 옛 하수(河水)가 발원지에서 나와 흘러오다가 『신강의 모래사막을 흐르다가 염 택(포창해)로 나와 흐르면서 그 동쪽지방에 수많은 호수(湖水)를 만들기에 이르고, 이곳을 “발해(渤海)”라 했다.』 이곳에서 커다란 호수(湖水)를 만들고 잠시 체류(滯留)하다가 다시 흘러 우(禹)임금이 홍수를 막기 위해 적 석 산(積 石 山)에 뚫어놓은 물길로 흘러간다는 설명이다.
위의 본문과 여러 사서의 설명篇을 보면 ; 우리의 관심을 끄는 『발해(渤海)』의 위치는 어떠한 경우를 가정한다 하더라도 “하수(河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발해【渤海 : 하 북 성 남쪽바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주장(主張)하는 <망국사관론자>들은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말살(抹殺)하려는 음모(陰謀)에 의해 지명(地名)이 전혀 관계없는 다른 곳으로 이동(移動)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이들에게는 반도(半島)이외의 땅에는 전혀 관심(關心)이 없다. 이는 곧 자신들을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신 선대(先代)들이 살았던 땅! 전혀 관심이 없다. 1945년! 일제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반도 땅, 그것 말고는 말이다.
● <참고> 위의 “적 석 산(積 石 山)”에 대해 ;
➊ 대적석산(大 積 石 山)은 청해(靑海) 남쪽에 있는 자산【唐書 토번傳에 자산이라 했다.】을 말함이요,
➋ 소적석산(小 積 石 山)은 감 숙성 臨(임)하현 서북에 있는 唐 述(당술)산을 말한다. 토 곡 혼(吐谷渾)과 경계지역에 있으며, 감 숙성 포한縣 서북에 있다. 산해 경(山海經)을 해설한 <필원>의 말에 따르면 “書우공”에 기록되어진 “道 河 積 石(도하적석)”은 청해(靑海)남쪽 지경에 있는 대적석산이 아니고, 감 숙성 임하 현 서북(西北)에 있는 소적석산 즉 당술 산이라 했다.
➌ 산해 경(山海經)이나 통전(通典), 더하여 회남자(淮南子)전등의 기록에 따르면 발해(渤海)는 , 『당시의 하(河)와 직접적 관련이 있고, 하(河)의 물이 모여 잠시 체류(滯留)하던 곳, 즉 커다란 내륙(內陸)의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며, 역사서(歷史書) 본문이나, 필원의 주석에 따르면, 『발해(渤海)는 현 신강성의 <포창해(蒲昌海) / 옥문관 / 돈 황 / 주천 / 장액 / 난주>를 잇는 동서(東西)지방의 남북(南北)지대를 칭했던 말이며, 당시 이곳은 수많은 호수와 물줄기가 연이어져 있어 이곳을 흐르던 “하(河)”가 체류(滯留)하다가 동쪽으로 흘러가던 곳이었다.』
➍ 이 글을 읽는 누리 꾼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대체 역사학자라는 분들은 옛 역사서를 해설할 때 원전(原典)의 내용(內容)을 충실(充實)히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속된 말로 꼴리는 대로 고쳐 소설(小說)을 쓰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➎ <발해(渤海)지역>이, 반도(半島) 북방에 있었다는 식의 허황된 주장에 속지말자. 조선(朝鮮)국의 일원이었던 대조영의 “발해(渤海)국 = 대 진국”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땅은 서역(西域)과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남쪽과 북쪽지방에 있었으며, 하(河)의 북쪽지방인 “하 북(河北)”지방을 제패(制覇)했던 조선(朝鮮)국이었으며, 동서남북(東西南北) 6,000리의 영토(領土)를 통치(統治)했다는 역사적 사실(事實)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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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해 경(山海經)”기록을 보자.
< 開 明 南 有 樹 鳥 , 六 首 1 ; 蛟 2 、 蝮 3 、 蛇 、 蜼 、 豹 、鳥 秩 樹 4 , 于 表 池 樹 木 5 , 誦 鳥 6 、 (隼 鳥)7 、 視 肉 。>
7 郭 璞 云 : 「 鵰 也 。 穆 天 子 傳 ( 卷 二 ) 曰 : 『 爰 有 白 (隼 鳥)、 青 鵰 。 』 音 竹 筍 之 筍 。 」 郝 懿 行 云 : 「 今 穆 天 子 傳 作 白 鳥 、 青 鵰 , 已 見 西 次 三 經 『 鍾 山 』 注 。 」 珂 案 : 西 次 三 經 「 鍾 山 」 郭 注 引 穆 天 子 傳 亦 作「 白 鳥 、 青 鵰 」 , 可 證 今 本 穆 天 子 傳 不 誤 , 郭 此 處 所 引 自 誤 。 關 於 昆 侖 山 之 神 話 , 其 較 完 整 而 又 較 古 者 , 除 此 經 所 記 而 外 , 尚 見 於 淮 南 子 墬 形 篇 。墬 形 篇 云 : 「 禹 乃 以 息 土 填 洪 水 , 以 為 名 山 , 掘 昆 侖 虛 以 ( 水 經 注 河 水 引 此 以 下 有 為 字 — — 珂 ) 下 地 。 中 有 增 城 九 重 , 其 高 萬 一 千 里 百 一 十 四 步 二 尺 六 寸 。 上 有 木 禾, 其 修 五 尋 。 珠 樹 、 玉 樹 、 旋 樹 、 不 死 樹 在 其 西 ; 沙 棠、 琅 玕 在 其 東 ; 絳 樹 在 其 南 ; 碧 樹 、 瑤 樹 在 其 北 。 旁 有 四 百 四 十 門 , 門 閒 四 里 , 里 閒 九 純 , 純 丈 五 尺 。 旁 有 九井 , 玉 橫 維 其 西 北 之 隅 。 北 門 開 以 內 不 周 之 風 。 傾 宮 、旋 室 、 縣 圃 、 涼 風 在 昆 侖 閶 闔 之 中 , 是 其 疏 圃 。 疏 圃 之 池 , 浸 之 黃 水 。 黃 水 三 周 復 其 原 , 是 謂 白 水 ( 白 原 作 丹, 從 王 念 孫 讀 書 雜 志 校 改 — — 珂 ), 飲 之 不 死 。 河 水 出 昆 侖 東 北 陬 ,貫 渤 海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赤 水 出 其 東 南 陬, 西 南 注 南 海 , 丹 澤 之 東 , 赤 水 之 東 。 弱 水 出 自 窮 石 ,至 于 合 黎 , 餘 波 入 于 流 沙 , 絕 流 沙 南 至 南 海 。 洋 水 出 其 西 北 陬 , 入 于 南 海 , 羽 民 之 南 。 凡 四 水 者 , 帝 之 神 泉 ,以 和 百 藥 , 以 潤 萬 物 。 昆 侖 之 邱 , 或 上 倍 之 , 是 謂 涼 風 之 山 , 登 之 而 不 死 ; 或 上 倍 之 , 是 謂 懸 圃 之 山 ( 原 無 之 山 二 字 , 從 王 念 孫 讀 書 雜 志 校 增 — — 珂 ), 登 之 乃 靈 ,能 使 風 雨 ; 或 上 倍 之 , 乃 維 上 天 , 登 之 乃 神 , 是 謂 太 帝 之 居 。 」 高 誘 注 : 「 太 帝 , 天 帝 。 」 此 天 帝 蓋 即 黃 帝 也。 餘 十 洲 記 拾 遺 記 等 亦 均 記 之 , 然 卑 瑣 不 足 道 矣 。 下 卷 卷 首 「 蛇 巫 之 山 」 及 「 西 王 母 」 二 節 , 均 當 移 於 此 節 之 後 , 說 已 見 海 內 南 經 「 匈 奴 」 節 注 。
● 주석(註釋)편에 ; 【河 水 出 昆 侖 東 北 陬 ,貫 渤 海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황하(河水)가 “곤륜”의 동북 모퉁이에서 나와 <渤海발해>를 꿰뚫고 (貫: 꿰뚫다. 통과하다) 우공(禹 貢)의 적석(積石)산을 통하게 한다. 】
한, 두 글자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누가 무엇을 근거로, 누가 어떤 근거로, 누가 어떤 고증으로 발해(渤海)지방이 현 동북삼성(東北三省) 지대라 했는가?
내 나라, 내 영토, 내 역사를 지키지 못한 자들은 또 누구인가. 이 모두는 남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다. 미래(未來)를 설계(設計)하지 못했고, 부정부패(不正腐敗)와 매관매직(賣官賣職), 권력암투(權力暗鬪), 사대부(士大夫)들의 안일한 선비주의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 없는 주학(朱學)이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 돌아가는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위 신학문(新學問)을 추구한다는 머리에 쪼끔 무엇이 들어가 있는 자(者)들이 자신(自身)들의 가문(家門)의 영광(榮光)과 재물(財物)과 명예욕(名譽慾)때문에 모두를 배신(背信)한 것이다. 자신의 선대(先代)들을 지구(地球)상에서 가장 비겁(卑怯)하고, 비굴(卑屈)하고, 분별(分別)력 없는 무지(無知)한 사회(社會)로, 능력(能力)없는 비열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선대(先代)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悲慘)한 아귀다툼이나 벌이는 자들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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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한(前漢)의 회 남 왕 “유 안”이 저술했다는 “淮 南 子 傳(회 남 자 전)”속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 河 水 出 崑 崙 東 北 陬, 貫 渤 海 入 禹 所 導 積 石 山. (中略) : “하수(河水)는 곤륜산의 동북 모퉁이에서 발원하여 발해를 관통하여 우(禹)가 통하게 한 적석 산으로 들어간다. 》
●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이 기록은 전한(前漢)시절이니 최소한 2,000 년 전(前)에 기록된 것이다. 누가 이러한 기록(記錄)을 뒤집고, 반도(半島) 북방에 발해(渤海)가 있다고 하나? 바로 반도(半島)의 백성(百姓)들이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그 근거(根據)는 무엇이며, 그 고증(考證)은 무엇이며, 그것을 증거(證據)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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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통전(通典) 서융(西戎)편
《 乙 弗 敵 , 後 魏 聞 焉 , 在 吐 谷 渾 北 。 國 有 屈 海 , 其 海 周 迴 千 餘 里 。 眾 有 萬 落 , 風 俗 與 吐 谷 渾 同 。 然 不 識 五 穀, 唯 食 魚 與 蘇 子 。 蘇 子 狀 若 中 國 枸 杞 子 , 或 赤 或 黑 。 西 有 契 翰 一 部 , 風 俗 亦 同 , 土 特 多 狼 。: 을 불 적(乙 弗 敵) : 후위(後魏=北魏)때 견문하였는데, 토 곡 혼(吐谷渾)의 북쪽에 있다. 나라에 한쪽으로 휘어진 바다(海)가 있어, 그 바다는 둘레를 도는데 천 여리이다. 백성은 만 락(萬 落)이 있으며, 풍속은 토 곡 혼과 같다. 오곡(五穀)은 알지 못하며, 유일하게 먹는 것은 물고기와 소자(蘇子)이다. 소자(蘇子)의 모양은 중국(中國)의 구기자와 같은데, 혹 붉고 혹은 검다. 서쪽에 글한(契翰)1부가 있는데, 풍속은 역시 같고, 땅에는 특히 이리(狼)가 많다.》
● 토 곡 혼(吐谷渾)의 북쪽이라면, 청해(靑海)의 북쪽지방이며, 기련 산맥(祁連山脈)의 북쪽으로 무위(武威)로부터, 장액(張 掖), 주천(酒泉), 돈 황(燉煌), 선선(鄯善)지방 등을 말하는데, 이곳 지방에 일천여리에 달하는 바다(海)가 있었다는 위의 기록은 이것이 발해(渤海)였지 않았을까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이 모두 사막(沙漠)지대로 옛 흔적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해(海)”는 현대의 바다만을 위한 글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며, 아주 큰 호수도 “해(海)”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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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통전(通典) 변방(邊防) 전 서융(西戎) 5 / 大 秦 <대진>
《 大 秦, 一 名 犁 靬(리간), 後 漢 時 始 通 焉. 其 國 在 西 海 之 西, 亦 云 海 西 國. (중략). 其 色 又 鮮 於 海 東 諸 國 所 作 也. : 대진(大秦), 일명 리간 (犁 靬)이라 한다. 후한(後漢)때 처음 통하였다. 그 나라는 서해(西海)의 서쪽에 있다. 또 이르길 해서(海西)국이라 한다. 그 빛깔이 또 고와서 <해동제국(海東諸國)>이라 이름 하였다. 몇 안 되는 안식(安息)등 여러 호(胡)와 해중(海中)에서 거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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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북사(北史)열전(列傳) 85 편 / 서역(西域)
《大秦國,一名黎軒,都安都城,從條支西渡海曲一萬裡,去代三萬九千四百裡.其海滂出,猶渤海也,而東西與渤海相望,蓋自然之理,地方六千里,居兩海之間. : 대진(大震)국, 일명 리간(犁 靬)이다. 도읍지는 안도 성(安都城)이며, 조지(條枝)의 서쪽을 따라 바다 건너 굽이 저 일만(一萬)리이며, 대도(大都)로부터 39,400 리 떨어져 있다. 그 바다에 물이 질퍽하게 흘러나오는데, 마치 발해(渤海)와 같다. 동쪽과 서쪽 함께 발해(渤海)를 서로 바라볼 수 있는데,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지방은 육(六)천리며, 양 바다 사이에서 산다. 》
❈ 구당서(舊唐書) 열전148 서융(西戎) 편의 “拂 菻 國(불 름 국)”을 보면,
《拂菻國,一名大秦,在西海之上,東南與波斯接,地方萬余裡,列城四百,邑居連屬. : 불 름 국, 일명 대진(大秦)이며, 서해의 위(북쪽)에 있으며, 동남(東南)족에는 파사(波斯)와 접하였고, 지방은 만(萬)여리이다. 4백 성(城)이 줄지어 있으며, 고을에 사는데, 서로 다르게 매여 있다.》
● 대진(大秦)은 『대진국(大震國)이며, 리간(犁靬)이며, 불 름(拂菻)국이다.』이곳에도 『“발해(渤海)”가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발해(渤海)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위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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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8)과 (9)의 내용으로 보면, “해동제국【海東諸國 : 바다 동쪽의 여러 나라】” 과 “발해(渤海)”는 중앙아시아의 서쪽지방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다.
○ 이러한 옛 기록은 현재 “아시아/조선”을 주장(主張)하는 카페에서 인용하는 몇 개 되지 않는 고증(考證) 문구(文句)중의 하나이다.
본인(本人)이 몇 년 전(前)에 이러한 기록을 찾아 “발해(渤海)”에 대한 의문(疑問)을 게재했었다.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 대륙사서(大陸史書)의 대부분 기록에서 “발해(渤海)의 위치”는 『현 신강(新疆)성으로부터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남북(南北)지방으로 연결된다.』
● 다만 서융(西戎)편의 대진(大秦)국 기록에서만 “발해(渤海)”가 등장하는데, 무엇이 옳고, 그릇 것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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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러나 “북해(北海)”의 위치와 상관(相關)되는 “발해(渤海)”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발해(渤海)”는 『북해(北海)의 서남쪽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서융(西戎)편의 奄 蔡(암채)국 설명을 보면,
《 奄 蔡 ,漢 時 通 焉 。西 與 大 秦 接 ,東 南 二 千 里 與 康 居 接 ,去 陽 關 八 千 餘 里 。控 弦 十 餘 萬 。與 康 居 同 俗 ,而 屬 康 居 。土 氣 溫 和 ,臨 大 澤 ,無 涯 岸 。多 楨 松 、白 草 及 貂。畜 牧 逐 水 草 ,▶蓋 近 北 海 。: 암채는 한나라 때 통하였다. 서쪽으로 대진과 접하였으며, 동남2천리에 강거와 접하고, 양관(옥문관 남쪽)에서 8천리 떨어져 있다. 강한 군사 십여만이 있었으며, 풍습은 강거와 같고, 강거에 속했다. 땅의 기운은 온화하고, 대 택(큰 호수)에 임해있으며, 물가에 언덕은 없다. 정송(나무이름)이 많고, 백초(누런 풀)와 오소리가 있다. 가축을 기르며 수초를 따라 다녔다. ▶ 대부분 가까이 “북해(北海)”가 있다. 》
이러한 곳에 “북해(北海)”가 있었다는 것은 대륙사서(大陸史書)의 공통된 기록 내용이다. 이에 위 (8)과 (9)의 대진 국(大震國) 기록으로 그 주위에 “발해(渤海)”가 있었다고 보면, 결국 “북해(北海)의 서남(西南)쪽에 발해(渤海)가 있게 되는데, 이는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배치【背馳 : 서로 반대되어 어긋나는 것】된다.
『발해(渤海)』는 『북해(北海)』의 『동남(東南)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기 때문이다.
○ 여러분들에 의해 “발해(渤海)”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한 분분입니다.
2011년 09월 06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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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님.. 정말 가슴이 뻥 뚫리는 속시원한 글입니다.
특히 “도대체 역사학자라는 분들은 옛 역사서를 해설할 때 원전(原典)의 내용(內容)을 충실(充實)히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속된 말로 꼴리는 대로 고쳐 소설(小說)을 쓰는 것인가?” 는 부분은 신문기사에라도 올리고 싶네요.
조선의역사는 우리의역사는 오로지 한반도와 그주위에 비정하려는 다른부분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님의 글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발해!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왕성을 다섯군데나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예는 극히 드문예입니다. 그만큼 영토가 컷다는 것이고, 백성들 역시 많았다는 증거지요. 현재의 만주지방은 19세기 말경부터 개척되었다는 백과사전의 설명도 있습니다. 반도의 백성님들이나 많은 학자님들은 이러한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현 만주 땅은 19세 이전엔 무인지경과 같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반도에서 이러한 설명은 전혀 통하지 않지요. 죽으나 사나 고구려, 발해는 만주 땅이라고 노래합니다. 국민들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