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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꽃을 몰고 오듯 옛적 어느 날 누님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미술을 전공하신 분이셨습니다. 누님은 문 안에서 사셨고 당시 저희 집은 문안 살림을 접고 아버님이 생각하신 대로 수유리 영단문화주택으로 옮겨 살 때였습니다. 주거환경이 도시에서 전원으로 바뀐 후 병풍처럼 우이 령을 기준으로 새의 날개와 같이 펼쳐진 京畿道에서 제일 높다 하여 붙여진 道峯山과 산봉우리 백운대 ,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三角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삼각산(三角山)은 사계절 다 절경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여기저기 진달래가 만발하고 산벚꽃이 흐트러지고 산개나리를 비롯하여 쪽동백 등으로 이어지다 녹음 짙어지면 산수가 어울려 장관을 이루다 가을 단풍이 들면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오색단풍이 절정을 이룹니다. 이 모습을 친구의 어머님께서 저만 보시면 애야 삼각산과 도봉산을 이어 붙여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하셨습니다. 서양화가셨습니다. 가을을 이어서 찾아온 삼각산 설경은 만년설 못지않은 귀한 품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이름 화개골, 가오리, 소곳 내, 소귀천, 소귀령, 용개울 등 참 그 마을의 빛과 지형처럼 이름에 뜻과 멋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도교 봉황각과 육당 최남선생님의 별서와 도선사, 화계사 보문사 만월암, 망월사, 천축사 등 명찰이 수두룩 하였습니다. 원래 산에 길을 낸 분들은 바로 스님과 사찰을 오고 가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우이동 일대는 서울의 외곽으로 양주군에서 서울시로 편입되어 신문화주택 단지로 탈바꿈하였지만 산에서 발원되어 지천을 이루는 곳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별서와 같은 전원주택이 남아 있어 산추녀와 함께 멋을 품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문인들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우애 양주동 그리고 가오리라는 지명인 마을 안쪽 溪川 옆에 산악인이시며 시인, 수필가, 국문학자이신 김장호(金章湖) 교수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章湖는 교수님의 필명입니다. 이쪽으로 이사와 도심 안에 있던 학교를 통학하면서 주말이면 아름다운 산에 도취되어 산에 오르는 제가 불안하게 느끼셨던지 제대로 산악관을 지니고 살아라 하는 뜻에서 저에게 연락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장미원 앞으로 갈 테니 그리로 나와라 하는 엽서를 보내신 것입니다. 만나 함께 은사님이 이 부근에 사시는데 인사드리러 가면서 너에게 소개를 시키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대를 갖고 찾아 간 집을 본 순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가집이었는데 참 정갈하고 마당과 화단, 집 등 주변 경치 등은 집주인 인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으신 옷 그리고 제자를 맞이 주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님의 소개로 인사드린 저를 보시고 이것저것 물으시고 산에 다닌다면서 왜 산에 가느냐? 물으셨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1924년 에베레스트를 앤드루 어빈과 함께 올랐던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말로리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을 드렸습니다. 산이 있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등반을 떠나려고 하는 영국 등반가 조지 멀러리에게 어느 신문 기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산을 오르려고 하는가? 지체 없이 질문에 답을 합니다. Because it is there( 그곳에 산이 있으니깐) 산악인 사상 가장 유명 명언인 이 말은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사람으로 알려진 뉴질랜드 산악인 힐러리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조지 멀러리가 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최초의 등반자도 어쩌면 조지 멀러리와 동행한 산악인 앤드로 어빈인지 모릅니다. 조지 멀러리는 1924년 앤드로 어빈과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나섰지만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 뜨거운 논란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이스켐프에서 정상으로 가는 세컨드 스탭에 오르는 것을 발견된 이후 그들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는 두 사람의 시신을 찾기 위하여 매년 등반대를 보냈지만 찾지 못하다 75년이 지난 1999년 영국 시몬스 등반대가 정상 북쪽 방향에 비탈에서 발견합니다. 발견당시 신발과 상의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조지 멀러리임을 알게 됩니다. 빙하 속에 숨어 있다. 빙하가 움직이면서 노출된 것입니다. 사진기를 소지했다고 알려진 조지 말로리 시신 발견 당시 카메라는 없었습니다. 정상정복 여부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카메라 소지자는 앤드루 어빈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 추정하게 됩니다. 언젠가 어빈의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최초의 등반가에 대한 결론은 유보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는 1953년 등정에 성공한 뉴질랜드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최초 등반가로 인정되고 있지만 1924년 등정한 조지 맬러리와 앤드루 어빈의 등반 사실이 카메라를 통하여 입증이 되면 최초 순위는 바뀔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9월 15일 고상돈이 등정에 성공하였고 당시 등반대를 이끈 사람은 나중에 대한산악연맹 회장을 지내신 김영도였습니다. 그리고 최초 등반자 고상돈은 알래스카 멕킨리를 정상에 오른 후 하산하다 빙폭으로 추락하여 사망합니다. 최초의 정상에 오른 등반가로 알려진 에드먼드 힐러리는 영국정부로부터 작위를 부여받고 뉴질랜드 화폐에도 얼굴이 각인됩니다. 그러나 정상에서 찍은 사진은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르파가 사진을 찍을 줄 몰라 그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추후 인터뷰 석상에서 동시에 정상에 올랐다고 밝히며 최초에 오른 사람은 두 사람이라는 사실로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힐러리 경은 이후 네팔에 세르파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 학교를 세워 주거나 의료등과 관련된 지원을 아까지 않고 지속적으로 네팔과 세르파와 관계를 맺습니다.)
웃으시며 가만히 듣고 게시더니 삼각산과 도봉산은 명산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당시 해 주셨던 이야기 속에 명산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에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명산의 조건은 놓임 새(位置), 앉음새(山容), 품새(容量)라는 것을 배우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산과 관련된 귀한 이야기를 누이의 스승님에게 듣고 산악에 대한 관념이 쌓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몇 차례 함께 더 찾아뵙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면서 산악에 대한 관심과 행위에 대하여 멀어지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결혼 후 부모님 곁을 떠나 강남으로 주거를 옮긴 영향으로 누님과 함께 찾는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해 등반대장으로 참가하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간혹 누님을 통해 안부를 전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1999년 부음을 듣게 됩니다. 그리운 봄편지라는 제목으로 쓰인 교수님의 아드님 글을 읽을 기회도 찾아옵니다. 앙상한 사지에 퀭한 눈초리와 긴 하품울 날리시며 먼 길 떠나신 아버지, 그리고 가신지 여덟 해입니다 비쩍 마른 아버지 손 주무르시며 꽃피고 봄바람 불거든 가시라 당부하신 어머니 말씀 그리도 잘 따르신 아버지라는 글을 띄운 글도 마음으로 읽게 됩니다. 이외로 학문적으로 교수님의 고견을 뒤 따르는 여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제자들로서 학문의 맥을 잇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하고는 특별한 사제지간의 기회는 없으셨지만 제가 알고 있던 고등학교 제자 누님을 비롯하여 대학으로 직을 옮기신 후 교수님의 뒤를 이어 산을 찾고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제게는 산과 여행과 연극 등을 매개로 문학을 하는 제자들과 친교가 있어 교수님을 추억하는 시간을 종종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참 우연이었습니다. 어느 봄날 길고 긴 소통의 시간이 있던 여류시인을 통해 장호 교수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문장가이며 등산가이신 고 김장호 교수님이 생전에 펴냈던 산악 에세이 66편을 선정하여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제호로 제자들과 그 모임인 장기모 회원들께서 추모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더불어 시인의 시집도 함께 보내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4월 초순에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산을 찾으면 누구나 시상을 가까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자연 안에서 머무는 이들을 통하여 주옥같은 시를 엿보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산을 중심으로 두고 수필을 쓰신 분은 又山 孫慶錫 선생님을 빼고는 김장호 교수님이 유일하신 것 같습니다. 어느 시기인가 신동아 잡지 후반부에 문학, 음악, 스포츠, 그림, 등반에 대한 글을 전문가들의 필력을 이용하여 발표하는 여백이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동아일보 열렬하신 구독자로서 월간 신동아를 꾸준히 구독하셨습니다. 읽으신 후 서가에 꽂아 놓으시면 승낙을 받고 읽다 1페이지 양면에 적힌 등산과 관련된 정보를 읽기 시작함으로써 심층적으로 등산에 관련된 정보를 차근차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등산과 관련된 집필가는 한국산악회 회장을 역임하신 홍종인 선생님과 등산에 대한 이론과 실기에 대해 해박하셨던 손경석 선생님도 쓰셨던 것 같습니다. 산서회를 이끄셨던 우산 손경석 선생님은 산악 관련 저술에서 1000편 이상의 논설, 수필을 비롯하여 등반기록을 남기셨으며 32권의 단행본도 남기셨습니다. 그중에 회상의 산들이라는 수필은 높은 평가를 받는 글입니다. 2015년 산악계 후진들이 모여 평전을 만들어 헌정하여 선생님의 산악의 뜻을 보존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제자들은 책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김장호(筆名 章湖) 선생께서는 가신지 어언 10년을 바라본다. 고인은 살아생전 교수이자 시인이었고, 산악인이자 에세이스트였다. 그의 에세이는 대부분 등산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학문과 예술에 조에가 깊었던 만큼 그 품위와 격조가 단연 여러 마리 닭 가운데 한 마리 학이었다. 그러나 옛글에 드러난 것처럼 날개 꽁지만 검은 한 마리 백학이 하늘 가운데 소슬하니 떠서 날아가니 그 문장의 향기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고 말았다. 머리 들어 북망산천 우러르며 선생의 향기를 생각하매 한없는 그리움이 밀려와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아아, 산에 관련한 학문적 접근이며 품격 높은 예술적 도취, 혹은 철두철미 냉엄한 자기 기율 등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게 이제 어느 누구에 의해서 또다시 가능할 것인가 중략 우리는 잠 아니 오는 깊은 밤에 스스로를 경계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읊조리게 된다. 병들지 말고 건강한 채로 오래 사는 것을 바라지 마라, 그것은 영원불멸을 향해 가는 육신 생명의 덤일 뿐이다.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는 일이야말로 정녕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정해년 봄날에 장호 선생을 기리는 모임 일동
그리고 책 사이사이 자리 잡은 삽화는 그림을 그리시는 장호선생님의 아내 艸史 김정자 여사님의 작품입니다. 맹목적으로 산에 오를까 봐 그것이 염려되어 이끌어주셨던 누님의 깊은 성찰이 장호선생님의 귀품 그늘에서 서서 지금껏 산 길을 걸어온 단초의 정념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산만큼 좋은 스승도 없습니다 만 산 선배님 만큼 좋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책을 정리하다 재발견한 책을 통해 산경표 중앙에 서서 산너울을 타고 오는 봄바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앞서 가신 귀한 산객님을 기리면서 말입니다.
. 산방정 담은 계속 이어집니다.
흰구름 모자를 늘 쓰고 있는 반석이라 하여 백운대(白雲臺) 이름이 작명됩니다. 그리고 동쪽 방향 조금 아래 화강암 미끈한 바위 덩어리가 있습니다. 인수봉(仁壽峰)이라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부아악(負兒岳)입니다. 인수봉을 동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전면을 보는 것입니다. 전면부에 좌에서 우측으로 수많은 암벽코스가 있습니다. 제가 암벽을 시작할 무렵에는 옛 산악인들이 개척해 놓은 동쪽 전면에 기존 B, 기존 A와 서쪽 후면 크랙과 슬랩으로 구성된 가장 짧은 암벽 코스가 유일하였으나 이후에 우정길, 취나드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남쪽 훼이스에 기존 십자로 길을 비롯하여 비둘기 길 등등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암벽장비의 발달로 인공등반도 시작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서 인수봉 전면 우측 상단 귀바위 오버행 인공등반 길도 생깁니다. 이 귀바위가 꼭 아기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負兒岳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리고 용암문에서 백운대까지 암릉으로 연결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 서면 온갖 경치가 보인다 하여 만경대(萬景臺)라 불렀습니다. 백운대를 정점으로 인수봉 만경대가 삼각을 이뤄 붙여진 이름 삼각산, 조선후기 충신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삼각산과 한강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상징합니다. 김상헌은 고국을 떠나면서 조선을 상징하는 두 지명을 부르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도 조국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당시 청나라에 패한 국가적 입장에서 혼란스러운 정세를 들어내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 시입니다. 북한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식민지 시절부터입니다. 행정개편을 하면서 시작되어 삼각산과 북한산을 함께 사용하다 북한산을 국립공원 지역으로 포함하여 북한산국립공원이라는 명칭 사용에 따라 삼각산 이름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원래 한강 즉 漢水이북을 뜻하는 북한(北漢)이란 뜻은 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넘어 북쪽지역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던 것을 산으로 고정시켜 북한산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북한산을 대칭하는 산이 바로 남한산입니다. 그곳에 산성이 있어 남한 산성이라 부르고 북한산 안에도 산성이 있어 북한산성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오악이라 부르는 산이 있습니다. 국토 중앙에 있는 삼각산을 중악(中岳) 백두산을 북악(北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금강산을 동악(東岳) 구월산을 서악(西岳)이라 부르며 국토 중앙 삼각산은 명산의 대접을 받아 온 산입니다.
삼각산(三角山)이란 이름을 작명한 3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백운대로서 해발 837m, 다음 인수봉이 811m이고 만경대는 800m입니다. 산을 말할 때 함께 따라 다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곡입니다. 산과 계곡은 산이라는 표현 하나로 통일성을 갖습니다. 삼각봉의 히나인 만경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두 줄기가 있습니다. 만경대와 백운대 사이에 산성 위문이라는 암문이 있습니다. 암문 아래 백운산장 있던 맞은편 계곡의 물 발원지가 바로 만경대입니다. 이곳에 발원된 물은 깔닥고개 밑으로 돌아 육모정으로 빠져나가는 창릉천이고 도선산에서 용암문으로 오르다 보면 Y자 계곡이 나오는데 우측계곡의 발원지가 역시 만경대입니다 이물은 도선사 뒤에서 합수된 후 다시 선운각 옆에서 소귀천 물과 합수되고 우이동에서 우이령 물과 합수되어 우이천이 된 후 중랑천으로 흘러가 한강에 합수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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