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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제
김 종 성
1
“애비다. 아무래도 동제의 제관은 니가 맡아야 되겠어.”
임 노인의 가래끓는 목소리가 송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
임한덕은 송수화기를 귀에 바짝 갖다댔다.
“......나도 고비늙어, 건강도 이제 옛날 같지 않어. ”
임 노인이 한참만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두, 제관을 꼭 제가 해야됩니까?”
“제관을 타성바지들한테 맡길 순 없지야. 임씨 문중의 장손인 니가 맡아서 동제를 올려야혀. 동네에 화장터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고 있어. 이게 다 근년 들어 동제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 탓이야.” “........”
“오늘 집에 일찍 들어 와.”
임 노인이 으흠으흠 헛목을 가다듬었다.
임한덕은 창문가로 다가가 거리를 오가는 회사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용실에서 본 사내들처럼 한결같이 잘 다듬어진 강아지 같았다. 그가 염오균 사장의 권유로 원주민 부동산중개소를 고등학교 후배에게 물려주고, 경향부동산투자개발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지난 해 가을의 일이었다. 매일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새 넥타이를 골라 매고 회사로 출근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챙기는 게 몸에 배게 되었다.
“임 실장님, 딱 한 잔만 하고 가자고요”
출입문을 밀고 나가는 임한덕의 팔을 잡으며 손 차장이 말했다.
“손 차장, 집이 일산이라 했나....... 퇴근이 늦었는데 오늘은 그냥 들어가야지.”
임한덕이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빨리 들어가셔야죠. 사모님이 기다리실 텐데.”
이 대리가 말했다.
“...... 자, 나 먼저 가네.”
임한덕이 택시 승강장으로 미끄러져 오는 빈 택시를 향해 손을 번쩍들었다.
임한덕은 고속터미널역에서 택시를 버리고, 초림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버스는 차창에 매달리는 어둠을 밀쳐내며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동제의 제관은 니가 맡아야 되겠어. 임 노인의 말이 그의 귓전에서 맴돌았다. 기관지염을 시난고난 앓다가 회복한지 열흘이 안된 임 노인은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평택 임씨 세거지인 당골에서는 해마다 정월 14일에 동제를 행해왔다. 마을 주민들 중에 내외가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에 맞고, 오행(五行)이 맞는 사람을 제관으로 뽑아왔다. 예전에는 제관을 정월 초 하룻날에 미리 정했다. 그러나 제관을 너무 일찍 뽑게 되면서 제의 전에 부정(不淨)이 많이 생겼다. 그 후 초열흘 경에 제관을 선정해서 부정이 생길 여지를 줄이고 있었다. 이 날 마을회의를 하는데, 마을사람 중 깨끗한 남자들은 모두 마을회관에 모였다. 이장이 회의를 진행했다. 임 노인이 깨끗한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명해 주면, 동제의 진행 과정을 아는 사람이 새로 뽑힌 제관을 도와주었다. 제관이 되면 운이 좋아진다고 믿기 때문에 대개 기쁘게 받아들였다.
고속버스가 초림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임한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승강장을 빠져나왔다. 택시기사들이 ‘사곡, 용담’이라고 외쳐댔다. 그가 뒷좌석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중형택시 옆으로 다가갔다. 택시기사가 손가락 3개를 펴보였다.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빛으로 대양화장품 초림 대리점 쇼 윈도우 앞이 대낮처럼 훤했다. 뒷자리에 앉은 사내 둘이 킬킬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고년이 날 보고 자기 패트론이 될 생각이 없느냐는 거야.”
“그래? 미스 리가 그랬단 말야?”
“그랬다니깐, 자기가 이대로 이벤트 걸로 썩긴 아까워서 모델이 되고 싶다나. 그래서 학원비를 좀 보조해달라는 거야. ”
“모델이 인기가 있다니까 개나 걸이나 모델 지망이야. .......민 회장이 화장품 대리점을 새로 오픈 한다니까, 다른 이벤트 걸보다 덜 바라진 것처럼 어수룩해 보이던 미스 리가 동물적 감각으로 민 회장한테서 돈 냄새를 맡은 거야.”
“이번에 그 일만 계획대로 잘 진행되면 큰 거 몇 장은 생기니까...... 한 달에 4십만 원씩, 1년만. 까짓것.... 그 대가로 미스 리는 내 애완동물이 되는 거지 뭐.”
민한구가 오른 팔을 들어 김 이장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뇌까렸다.
“민 회장, 자네가 미스 리의 애완동물이 되는 게 아니고........아무튼 민 회장은 복이 있는 사람이야. 십대 소녀를 꽃봉오리에 비한다면, 이십대는 피어난 꽃송이, 삼십대는 무르익은 과일과 같다는데 이십대와 삼십대는 있으니 이제 십대만 구하면 되겠네.”
김 이장이 능갈쳤다.
“.... 김 이장, 자네도 그 방면에는 도사가 다 되었군. 미스 리 고년이 망상스러운 데가 좀 있지. 내가 거기에 손만 대면 젖가슴이 갑자기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고 야단이거든.”
손만 대면 온몸이 짜릿짜릿해지는 미스 리 이야기를 늘어 놓는 민한구의 콧구멍에서 단내가 묻어나고 있었다.
드림랜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내린 민한구와 김 이장이 정문 경비실을 향해 곤대짓이라도 할 듯이 윗몸을 들썩거리며 걸어갔다.
“드림랜드 아파트 사람들은 요즘 경기가 좋은가 봐여. 매일 밤 여자 타령, 돈 타령이라니까요.”
택시기사가 백미러를 흘낏거리며 말했다.
어둠에 휘감겨 있던 4각 철탑이 전조등 불빛에 드러났다. 용담 저수지는 삼봉산 줄기 사이로 시커멓게 잠겨 있었다. 음지뜰로 이어지는 고샅은 어둠 속에 묻혀 휘휘했다. 구새먹은 느티나무 밑에 택시가 임한덕을 떨구어 놓고 되돌아갔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성인용품 판매’ 전단 위로 가로등 불빛이 불그스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코트 속으로 파고 들어와 몸을 싸늘하게 했다. 무덤실 쪽에서 워낭소리 같기도 하고 개구리울음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가만히 귀를 곤두세웠다. 찬송가 소리에 이어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돈대에 서 있는 사곡장로교회의 붉은 십자가 위에서 불꽃이 터졌다. 우우우우.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밤공기를 흔들었다. 불꽃 터지는 소리가 사이를 두고 울려왔다. 함성이 느티나무숲을 감돌았다. 공기가 새는 소리와 함께 빨간 불, 노란 불, 파란
불이 계속해서 비보숲 위에서 흩어졌다. 저러다 비보숲에다 불 낼라. 그가 비보 숲 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골은 삼봉산을 뒤로 하고, 어비천을 곁에 낀 형국을 하고 있었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마을을 선택함에 있어 “가장 먼저 수구(水口)를 보라”고 하면서 “수구의 형세는 빗장 잠겨야 한다” 고 강조했다. 수구란 국내(局內)의 명당수가 합쳐 밖으로 흘러나가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골은 풍수적으로 명당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터에 문제가 있었다. 뒤로 삼봉산이 버티고 있어 바람을 막고 있으나 앞으로는 탁 터져 있었다. 그 탁 터진 곳을 막아주는 비보(裨補)를 필요로 했다. 당골에 자리를 잡고 12칸짜리 기와집을 지은 입향조(入鄕祖)가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를 심어 비보숲을 조성했던 것이다.
처마에 달아놓은 백열등이 마당의 어둠을 한올한올 걷어내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 보며 클린싱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원을 그리듯 마사지를 하고 있던 안중댁이 가제로 크림을 닦아내며 가녈한 허리를 세웠다. 방문 틈으로 밭은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이 기다리시고 있어요.”
안중댁이 콤팩트를 열며 말했다.
임한덕이 방으로 들어서자, 시렁에서 꺼낸 축문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임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주산인 삼봉산에서부터 우리 평택 임씨 문중 종산에 이르는 맥의 잘록한 지점인 밤고개는 한양으로 이어지는 옛길로서 우리 평택 임씨 문중에서 고개의 맥을 건드리지 마라는 풍수 금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거 너도 알지. 밤고개의 맥을 건들면 동네가 망한다지 않니? 당골을 파헤치고 초고압 송전선로 철탑을 세우는 거도 모자라 화장터를 만들어. 그럴 순 없지. 우리 조상님네들이 묻혀 있는 종산을 화장터로 만들 수는 없지.”
“아버지 당골도 이젠 옛날의 당골이 아닙니다. 당집 코앞까지 공장이 들어서는 판에 풍수 타령 종산 타령만 하고 있을 순 없지요.”
임한덕이 짐짓 진저리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어허, 어정뜨기는 칠팔월 개구리라더니....... 종손이 저 모양이니..... 화장터가 들어서면 선대의 무덤을 면례하지 않을 수 읎게 되고..... 면례를 함부로 했다간 동티가 나도 크게 나지.사위스러워 어디 살겠나. 크음크음.”
임 노인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거푸 내쉬며 가잠나룻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2
스피커에서 원더걸스의「노바디」가 여음을 길게 끌면서 끝나자, 미스 리의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거리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여성을 아름답게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신제품을 끊이지 않고 개발해온 대양화장품이 이번에 신제품 타임레스 포스 스킨 리뉴얼 파운데이션과 모이스쳐 바운드 리프레싱 크림을 출시한 기념으로 사곡 대리점을 새로 오픈하게 되었는데요. 오늘 이 순간부터 대양화장품 사곡대리점이 사곡의 여성분들을 아름답게 하고 사곡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여러분들에게 대양화장품의 모든 제품을 반값에 제공합니다. 뽀얀 젖가슴의 굴곡이 다 드러난 옷을 걸친 미스 리가 마이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사곡마을 주민 여러분........
가슴에 꽃을 단 금순을 비롯한 드림랜드 아파트 부녀회 임원들이 민한구의 안내로 화장품 대리점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회장님, 사곡의 돈 팍팍 긁어 모으세요.”
하얗게 화장한 얼굴이 강시의 그것 같은 금순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이건 저의 미의니 받아주십시오.”
민한구가 허리를 꺽으며 화장품 세트를 금순에게 건넸다.
드림랜드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난 마을버스가 버스 정류장으로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이벤트 걸들의 몸짓에 줄곧 눈길을 꽂고 있던 임한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을버스 안은 초림 5일장에 콩, 대추, 고춧가루 따위 잡살뱅이를 팔러 가는 무덤실 할머니들이 멱서리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운전석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임한덕은 라이터를 찾기 위해 주머니 깊숙이 손을 밀어 넣었다. 1만 원짜리 지폐 두 장과 함께 어제 신애가 건네준 메모지가 한 장 손가락 끝에 걸려들었다. 메모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흩어져 있었다.
‘임 실장님, 고등학교 동기라고 하면서 어떤 여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답니다.’
임한덕은 메모지를 도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올 만한 고등학교 동기생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초림농고 교문을 나선 지 20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 지금,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고등학교 동기생 가운데 여자는 없었다. 졸업을 하고 12, 3 년까지는 여자 동기생들이 이따금 전화를 걸어와 중앙로로 나가 커피를 사주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누굴까. 해연이 아닐까. 곧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국으로 떠나버린 그녀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올 리가 없었다.
임한덕이 고속버스로 서울에 도착해 늘 푸른 저축은행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총괄하는 강 이사를 만나 업무 협의를 하고, 늦은 점심식사를 마쳤을 때 손목시계는 3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부랴사랴 경향부동산투자개발 기획실로 들어서자, 마른 수건으로 전화기를 닦고 있던 신애가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신호음에 이어 여자 목소리가 송수화기에서 톡 튀어올랐다. 임한덕 실장, 나야. 해연. 하 해연. 나, 지금 사무실 앞에 와 있어. 어느 사무실? 경향부동산투자개발 앞이지 어디겠어. 왜 들어오지 않고. 여기서 기다릴게 빨리 나와.
은행나무 밑에서 손거울을 들여다 보며 루즈로 입술을 붉게 칠하고 서 있던 해연이 임한덕이 바투 다가가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 동안 어디에 가 있다가 나타난 거야.”
임한덕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얘기하자면 사연이 길어.”
매초롬한 고운 태가 여전한 해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긴 사연을 길거리에 서서 들을 순 없고, 조금 내려가면 로스트 타임 빌리지라는 카페가 있는데 그리로 가지.”
임한덕이 어깨높이만큼 오른손을 들어 사거리의 오른쪽 모퉁이를 가리켰다.
“로스트 타임 빌리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카페네.”
해연이 핸드백에 루즈와 손거울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지난 달 초림시청 복지위생과에 계약직으로 특채된 해연은 용경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 역삼동에 있는 성원 출판사에서 경영 서적을 편집했다. 성원 출판사가 파주 출판단지로 편집실을 옮겨 가자, 그녀는 사표를 던지고, 그 동안 모아둔 돈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캐나다, 미국, 브라질, 칠레를 거쳐 인디아, 터키, 그리스, 프랑스를 차례로 여행했다. 그녀가 에펠탑 앞에서 만난 일본인 사진작가를 따라 모리셔스로 간 것은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남태평양에 타히티가 있다면 인도양에 모리셔스가 있어.”
해연이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며 말했다.
“모리셔스가 어딘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며 임한덕이 물었다.
“인도양의 숨은 보석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휴양지야. 모리셔스는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 마다가스카르 섬 동쪽 약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섬 나라야. 모리셔스는 특히 섬 주변 곳곳을 산호대보초가 둘러싸고 있어 다양한 빛깔의 잔잔한 바다는 휴양과 레저스포츠의 적지가 되고 있어. 내륙 또한 기암 괴석의 봉우리들이 광활한 사탕수수 밭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만들고 있지. 16세기까지 모리셔스는 선원들의 피항지에 가까운 무인도였어. 모리셔스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채 400년이 되지 않았어. 16세기에 네덜란드가 섬을 점령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나라 왕자의 이름을 따라 모리셔스라고 부르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어.”
해연이 말을 끝내고 분결같은 손으로 메뉴판을 잡아당겼다. 에나멜이 칠해져 있는 손톱들이 형광등 불빛에 반들반들 윤기를 냈다.
그들은 버드와이저 4병을 주문했다. 웨이터가 안주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갖다 놓았다.
“네덜란드인들이 살기 전까지 모리셔스의 주인은 원주민들이었겠군.”
임한덕이 웨이터가 건네준 버드와이저를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아니야. 도도새였어. 먹을 게 넘쳐나고 천적도 없는 무인도는 도도새에겐 별천지였어. 하지만 결국 그 파라다이스가 죽음을 불렀어. 편안한 서식 환경으로부터 몸집은 불어났고, 날개는 퇴화했어. 무방비 상태에서 뜻밖의 적인 인간을 만난 셈인 거지. 이후 도도새는 인간들에 의해 ‘어리석다’라는 뜻의 이름까지 얻은 채 인간에 의해 멸종된 최초의 동물, 생태계 최초의 희생자란 상징으로 남고 말았지.”
맥주를 잔에 따르는 해연의 입술이 붉은 빛으로 반질거렸다.
“도도새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까, 사곡마을 사람들 이야길 듣고 있는 거 같네.”
임한덕이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구시렁거리듯 말했다.
“초림은 하루가 다르게 도시화해 가고 있는데 닭이나 키우고, 개나 키우면서 술이나 퍼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사곡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쓰다가 못 쓸 양반들이야. 사곡 원주민들의 운명은 도도새의 운명과 다를 바 가 없지.”
“그럼 나도 도도새인가?”
“그거야 임 실장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어떻게 변화해 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임 실장, 언제까지 그 허울 좋은 기획실장 명함 들고, 다니면서 염오균 사장 거추꾼 노릇만 할 거야? 이번에 장례문화센터 프로젝트만 잘 성사되면 임 실장의 팔자가 확 바뀐다니까. ...... 복지위생과장님이 그러는데 임 실장이 너울가지가 좋아, 당골 원주민들을 설득시키는데 임 실장 당신이 제일 적격자라는 거야. 이번 일만 잘 성사시키면, 임 실장 당신, 손 끝에 물 한방울 튀기지 않고 평생을 편안하게 먹고살 수 있도록 장례용품 독점판매권과 수억 대 보상금을 시에서 챙겨준다니까.”
해연이 안경을 벗어 닦으며 임한덕을 연민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원주민들도 원주민이지만, 사곡 4리 드림랜드 아파트 입주민들이 가만있을까?”
임한덕이 어조를 낮추어 말했다.
“사곡4리 드림랜드 아파트 단지는 이미 손을 써 놨어. 거기 민한구 회장과 김 이장, 두 사람이 씹는 소리마다 껍질 씹는 소리로 먹으려 든다더군.”
해연이 닦은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3
GS 25 편의점 앞에 진수와 용철이 「이슬처럼」 상표를 허리에 두른 술병과 오징어를 찢어 담아놓은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거북바위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4각 철탑에 애자를 달기 위해 용접공들이 강철 빔에 매달려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었다.
누런 서류봉투를 든 임한덕이 GS 25 편의점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왔다.
“임 실장님, 마침 잘 왔어요. 임 실장님이 당골에 화장터를 유치해야 마을이 발전된다고 나팔을 불고 다닌다면서요?”
진수가 임한덕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초림시 전체가 빠르게 발전되어 가는데 우리 마을이 언제까지 닭이나 치고 개나 키우면서 살아갈 순 없지. 초림시청이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추진하는 장례문화센터를 우리 마을이 유치하면 마을 개발에 많은 인센티브도 주고, 주민들 고용도 해준다고 하니까..... 좋은 기회가 아닌가.”
임한덕이 진수를 바라보며 조금 웃어 보였다.
“가는 기둥에 서까래 굵은 소리 하고 있네요. 닭 치고, 개 키우는 게 어때서요. 21세기에는 생명산업이 각광을 받는다는 걸 모르십니까?”
용철이 불퉁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임 실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화장터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님비주의자들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늦기 전에 부동산 컨설팅 그만두고, 화장터 홍보실장으로 전직하시지요.”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진수가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홍보실장은....”
초라떼여 머쓱해진 임한덕이 말끝을 흐리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임 실장님, 조심하더라고요, 임 실장님을 움도 싹도 읎는 사람이라고 손좀 봐주겠다고 벼르는 청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용철이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부릅뜬 채 임한덕을 노려보았다.
“이 사람 대낮부터 취했나.”
용철의 날선 목소리에 당황한 임한덕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개갈 안나는 소리 웬만치 하세요. 취한 건 내가 아니라 임 실장이 아닌가요?”
용철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임한덕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통근버스를 기다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낙네들이 고개를 돌렸다. 늘어지게 하품을 뽑던 양지댁이 머릿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임한덕을 바라보았다.
“골프장에 일하러 가는 겁니까?”
임한덕이 말끝을 높였다.
“날쎄가 따뜻할 때는 밖으로 나댕기며 뜬벌이라도 했는디......날쎄는 점점 추워 오지 으떻게 해유. ...... 골프장 구내식당에 허드렛일 하러 가능 거유. ”
양지댁이 엉덩이를 달싹하며 말했다.
“그게 어딥니까. 한푼이라도 벌어야지요.”
임한덕이 초림시 마크가 선명한 서류봉투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참..... 장례문화센타라 하는 기 당골에 들어서면유 우리들한테도 보상금이 나오는 거쥬?”
“아, 보상금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일자리도 하나씩 돌아갈 겁니다. 이제 지긋지긋한 농삿일 안 하고 편하게 살게 되었어요.”
“그려유, 꼭 그래야만 돼유. ...... 시청의 높은 사람들과 짬짜미 하여 임 실장만 재미보는 거는 아니겠쥬?”
“우리가 남입니까. 더불어 살아야지요. 나 혼자만 재미 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양쪽 옆구리에 ‘샹그릴라 컨트리 클럽’이라고 쓴 통근버스가 연기를 뿜어내며 승강장으로 미끄러져 왔다. 아낙네들이 가방을 메고 통근버스에 올라탔다.
공청회가 열리는 면사무소로 가는 길은 끝없이 멀게 느껴졌다. 양계농가들이 실어 낸 두엄더미에 섞여 있는 닭 시체를 노리고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무논 위를 빙빙돌고 있었다. 초림사회복지관 담장에 ‘마을이 화장터로 불타는데 나 몰라라 하는 초림시의회 의장은 사퇴하라. 그린 빌라 입주민 일동’이라고 쓰인 펼침막을 내걸던 승재엄마와 종희엄마가 임한덕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들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면사무소의 삼각형 지붕 위로 잉어의 비늘 같은 햇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2층 창에 사람들의 모습이 어슴프레 비쳤다. 면장실로 연결되는 긴 복도에 들어차 있는 음산한 어둠을 형광등 불빛이 걷어내고 있었다. 면장실에서 임한덕을 기다리고 있던 오 면장이 큰손을 내밀었다. 아이구 어서오세요. 이번에 동제의 제관을 맡게 되셨다고요. 그걸 어떻게? 산업계장한테 들었습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겠기에 맡았습니다. 하하, 그래요. 펑퍼짐한 얼굴의 오 면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백으로 접어든 산업계장이 회의실로 임한덕을 안내했다. 회의실에는 파출소장과 농협조합장 그리고 용담면 관내 이장들이 미리 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정만이 해연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서자 공청회가 시작되었다. 오 면장이 연단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연단 위에 두 손을 디딘 채 고개를 숙이고 행사 진행표를 들여다 보던 오 면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 여러분 바쁘신데도 초림시립 장례문화센터 건립 공청회에 이렇게 참석해주셔셔 감사합니다. 우리 용담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장례문화센터 건립에 관심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장례문화센터 건립을 관장하고 있는 시청 이정만 복지위생과장님께서 나오셔서 장례문화센터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다.”
오 면장이 이정만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깡마른 얼굴에 눈빛이 날카로운 이정만이 연단 앞으로 나갔다.
“초림시청 복지위생과장 이정만입니다.”
이정만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공청회장 안은 조용해졌다.
“자! 여러분 누가 용담면의 산업체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정만이 공청회장을 휘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좀처럼 입을 떼지 않으려 했다. 공청회장 안은 날카로운 송곳으로도 꿰뚫을 수 없는 단단한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곡 1리 이장님께서 한번 대답해볼까요?”
이정만이 침묵을 밀어내며, 방 이장을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오토바이 헬멧을 만드는 회사인 학일산업과 소파를 만드는 회사인 아시아산업이 있지요.”
방 이장이 시르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잘했습니다. 자, 두 공장 이외의 산업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정만이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치며 말했다.
“개 사육장과 양계장이 있습니다.”
그냥 앉았기도 민둥하여 김 이장이 어기뚱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개 사육장과 양계장도 있겠군요........ 여기 사곡4리 드림랜드 아파트에서 오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
이정만이 지휘봉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민한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을 들었다.
“닭똥 냄새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사시는데 불편이 없어요?”
이정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도 말아요. 지난 여름엔 닭똥 냄새와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요.”
민한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 사곡마을도 촌티를 싹 벗겨내야 합니다. 닭이나 키우고 개나 키우는 1차산업은 이제 우리 초림시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몇 차 산업이 알맞을 까요? 3차 산업 다시 말해 서비스 산업이 알맞은 거예요. 그래서 사곡마을의 뜻있는 분들이 초림시에서 추진하는 장례문화센터를 당골에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 초림시에서는 장례문화센터를 유치하는 마을에 엄청난 인센티브를 주니까, 장례문화센터를 유치하면 사곡마을이 촌티를 확 벗겨낼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끝낸 이정만의 입가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그때였다. 성준기가 드림랜드 아파트 입주민들을 이끌고 공청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전에 연락도 안 하고 주민 공청회를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성준기가 마른 침을 삼켰다.
“사전에 연락을 했을 텐데요.”
오 면장이 긴 눈썹을 꿈틀거리며 양미간을 좁혔다.
“오늘 아침 10시에 초림경찰서 정보과 유 형사한테서 전화를 받고 알았다니까요.”
성준기가 뼛성섞인 말로 발끈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사곡4리 김 이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오 면장이 화를 삭이며 김 이장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 그게.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님께 부탁드렸었는데 미처 방송을 못한가 봅니다.”
김 이장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면에서 이장님들더러 연락을 해라 했는데 아마 착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둥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산업계장이 자신을 곧추세우고 말했다.
공청회가 속개되었다. 이정만에 이어 연단 앞으로 나간 해연은 초림시 장례문화 전반에 대한 실상을 이야기한 뒤, 초림시가 계획하고 있는 장례문화센터 건립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초림시립 장례문화센터는 용담면 사곡리 삼봉산과 당골 일대 총 면적 48만 4천9백7제곱미터 규모로 1만 4천 제곱미터 규모의 수변공원과 산책로, 소나무길, 연꽃 군락으로 구성된 5천 제곱미터 규모의 생태공원과 조각공원 및 3천 제곱미터 넓이의 잔디광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15기의 화장로를 갖춘 화장장과 3만기 규모의 봉안장, 장례예식장, 수목장 등이 들어설 계획입니다.”
해연이 드레지게 설명을 끝내고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질문있습니다.”
성준기가 상반신을 앞으로 굽히며 손을 번쩍 들었다.
“간단하게 말씀하세요.”
해연이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상수원 보호구역이고 집단 주거지와 직선 거리 5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인 용담저수지 상단부에 초림시청 당국은 장례문화센터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위장전입을 자행하여 서류를 꾸미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 예닐 곱 명을 모아 놓고 식사했던 자리를, 장례문화센터 유치 신청 주민모임이라 우기고........ 마을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화장터 유치 신청서를 제 맘대로 제출하고...... 이렇게 해서 제출한 서류를 접수해 놓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성준기가 잠시하던 말을 멈추었다. 활시위처럼 팽팽한 공기가 공청회장 안을 맴돌았다. 그가 메모를 들여다 본 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파출소장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면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장을 장례문화센터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이름붙이면 주민들이 미용법이라도 배우러 갈 것 같습니까? 어장이 안 되려면 해파리만 들끓는다더니.... 골프장에, 초고압 송전선로 철탑에.... 이제 그것도 모자라 화장장까지 사곡마을로 끌어들일려고 하고 있습니다. ...... 초림시가 추진 중인 초림시립 장례문화센터는 수원연화장의 10배 규모로 수도권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 규모입니다. 초림시 자체 조사 결과 향후 인구 증가에 따른 화장 수요를 최대한 감안해도 일일 평균 7.1명 수준으로 이는 화장로 2기만 있어도 충분한 규모입니다. 부천, 안양 등도 평균 2기, 최대 4기의 화장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초림시는 원래 계획했던 화장로 10개로는 수익을 낼 수 없다며 5기를 추가하여 15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초림시가 근거로 삼고 있는 장사법은 자치단체의 화장시설 건립을 권장할 뿐이지 굳이 전국 최대 규모의 광역 화장터를 건립하여 시체를 태워서 수익사업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곡마을 주민들은 화장하는 냄새를 맡지 않고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성준기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언제 마을 개발 인센티브 달라 했나, 우리를 조용히 살게 내버려두라. 진수를 비롯한 걸때 센 청년들과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공청회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금방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갈길 듯한 태세였다. 마을을 화장터로 팔아먹으려는 인간들을 처단하자, 처단하자. 뒤이어 승재엄마를 앞세우고 그린 빌라 입주민들과 골드 빌라 입주민들이 울멍줄멍 목청을 돋워 외치며 들어왔다. 그들은 일제히 공청회장을 향해 날계란을 투척했다. 우두망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사복 경찰들이 파출소장의 지시에 따라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출소장이 무전기로 초림경찰서에 긴급지원 요청을 했다.
해연이 재빨리 마이크를 잡고 공청회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선언했다.
4
어느 때쯤일까. 목 언저리가 선뜻했다. ‘처단하자’가 날아가 벽에 탁, 탁, 탁, 탁, 탁 붙었다. ‘마을 발전’이 쇳소리를 내지르며 지나갔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화장터로 팔아먹으려 하다니 당신은 조상도 없나. 성준기의 말이 시퍼런 면돗날로 변하여 임한덕의 목덜미를 향하여 날아왔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혀가 구르지 않았다. 면돗날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임한덕이 마을 주민들에게 쏟아놓았던 말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뜨거운 영금을 보건 눈썹 한 가닥 까닥 안 할 것 같던 임한덕은 소스라쳐 눈을 떴다. 창문에 동살이 비치고 있었다.
“여보, 얼른 일어나 아침 식사해요.”
안중댁이 임한덕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아침식사를 끝낸 임한덕은 방 이장과 함께 동제에 쓸 제물을 사러 초림시장으로 나갔다. 소머리, 소고기 3근, 북어포 20장, 밤 5되, 대추 5되, 두부 1판, 곶감 1접, 다시마, 무, 소지 200장, 참기름, 떡 2말을 구입했다. 여자는 장을 보지 않고 장은 제관과 이장이 보는 불문율 때문에 안중댁은 장을 보러가지 않았다.
“소머리는 크고 좋은 것을 고르는데 약 40년 전부터 불편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소를 잡지 않고 머리만 사용해 왔어. 소를 잡았던 때에는 제사 하루 전에 초림장에서 잘 생긴 수소를 사와 마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직접 잡았지만 나중에는 도살장을 이용하게 되었어.”
임 노인의 목쉰 듯한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머리는 익히고, 고기는 살코기로 적만 만들며 나머지 부위는 그대로 놔뒀다가 예전에는그 다음날 제관부인이 산제를 지낸 제물이 좋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에게 제물을 똑같이 나눠주었다면서요.”
임 노인의 말에 안중댁이 동을 달았다.
망월이여.
마앙월이여
붉은 불기둥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달빛을 밟고 임한덕은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의 두루마기 자락을 관목 가지들이 긁어댔다. 눈자위가 매워 오고 턱이 굳어졌다. 한기가 그의 하복부 속으로 줄기차게 스며들었다. 흰옷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제수 꾸러미를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그를 뒤따랐다. 달빛을 받아 용담 저수지의 얼음이 은박지같이 하얗게 빛났다. 그들은 자드락길을 따라 당집을 향해 올라갔다. 용담 저수지 저편까지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위의 벌어진 틈새기에 있는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굴참나무 위로 달빛이 뚝뚝 떨어졌다.
억새숲을 핥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임한덕은 길다란 목을 움추렸다. 달빛이 내려앉아 있는 굴참나무 숲 뒤로 당집이 보였다. 당집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당벽을 황토로 마무리한 한 칸짜리 집이었다. 기왓골로 달빛이 흘러내렸다. 당집은 문은 없고 마을을 향해 입구가 뚫려 있었다. 당집의 정면에는 1미터 정도의 높이에 폭 10센티미터의 작은 선반이 있었다. 그 위에 30센티 미터 길이의 나무로 만든 신주가 세워져 있었고, 천장 대들보 상량문에는 ‘대한민국 46년 갑진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중댁이 떡시루 안에 놓인 종지에 참기름을 부었다. 그 안에 불심지를 틀고 불을 켜 놓았다.
큰놋제기에 제물을 담아 진설하기 시작했다. 밤, 건시, 대추, 소머리, 떡시루, 무나물, 포, 탕을 놓았다. 북어는 시루 손잡이에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해서 양쪽으로 꽂아두었다. 안중댁이 채로 맑은 술을 걸러 놓았다. 임한덕과 안중댁이 세 번 절을 했다. 임한덕이 축문을 읽어내려 갔다. 갑자기 돌개바람이 당집 안으로 들이쳤다. 바람소리가 임한덕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종지 속의 불이 깜박거리더니 푹 사그라들었다. 안중댁이 다시 불심지를 틀고 불을 밝혔다.
임한덕은 음복을 한 뒤, 마을 주민들의 소원을 빌며 소지에 불을 붙였다. 소지가 잘 올라가지 않고 데굴데굴 굴렀다.
“몸이 무거운가?”
임한덕이 중얼거리며 소지 종이에 다시 불을 붙였다.
또다시 소지가 잘 올라가지 않고 데굴데굴 굴렀다.
임한덕 내외의 소지가 끝났다. 당집까지 따라온 주민들이 각자의 소원을 실어 개인적인 소지를 했다.
소지가 모두 끝났다. 북어와 떡을 같이 소지 종이에 싸서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선반에 소지 세 장을 가로로 나란히 놓고 떡을 조금 떼어 곶감 하나, 밤 두 개, 대추 서너 개를 놓고 촛불을 하나씩 켜두었다.
삼봉산 동쪽 하늘에 희미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새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아아, 부락민 여러분 동제 잘 지냈으니 하기 닦으러 오세요. 아아, 부락민 여러분 제관 임한덕 씨 집으로 9시까지 오세요.”
방 이장의 달뜬 목소리가 당골을 지나 음지뜰로 번져갔다.
임한덕의 집으로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 하기 닦기를 해 볼까.”
내내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던 방 이장이 말했다.
“제비를 안내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 놔서......”
임한덕이 말끝을 흐리며 금전출납부를 펼쳤다.
뱀사골 중턱에 골프장이 들어서고, 당골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타성바지들과 이주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동제를 폐지하자는 이야기가 사곡 장로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허영환이 일요일 대예배 때 동제를 지내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통열히 비판하면서부터 마을 사람들 가운데 동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재작년부터 동제에 참례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만 돈을 거두어 동제를 올려 왔던 것이다. 올해에는 한가구당 1만원씩 걷어, 40만원의 제비가 마련되었다. 제비로 총 37만원이 들어갔다. 하기 닦기를 한 결과 3만원이 남았다.
“남은 돈은 방 이장이 보관해 두었다가 내년에 쓰도록 하지 .”
임한덕이 금전출납부를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상에 둘러앉아 마악 수저를 드는 순간이었다.
“불났다.”
“산불이다!”
사람들이 고샅으로 몰려나왔다.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바람소리에 섞여 음지뜰과 뱀사골로 몰려갔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은 불씨를 부채질했다. 불길은 꿈틀거리며 삼봉산 허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바람을 받은 불은 밤고개를 넘어 굴참나무 숲 쪽으로 번져갔다.
“저 불길 좀 봐라!”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구르며 소리쳤다.
불길은 기세를 올리며 굴참나무 숲을 뚫고 내려가 당집을 향해 시뻘건 혀를 날름거렸다. 당벽을 뚫은 불길은 천정을 핥았다. 불똥이 튀었다. 지붕이 빠지직빠지직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똬리를 틀고 있던 불길이 기왓골에 닿았다. 기와 조각이 튀었다. 당집이 뿌연 흙먼지를 토해내며 폭삭 무너져 내렸다.
“당집이 무너졌다! 당집이 무너졌다!”
“아이고 저 일을 으떡하나. 아이고 아이고.”
임 노인이 땅바닥에 털석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가잠나룻이 사납게 떨렸다.
불길은 억새밭을 휘감고 마을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연기가 새까맣게 마을을 뒤덮었다. 바람이 검붉은 불너울을 마을 쪽으로 줄기차게 쓸어냈다.
비보숲을 삼킨 불너울은 임 노인집의 기왓골로 스르르륵 미끄러졌다.
-김종성 환경생태소설 2 동제(『계간문예』, 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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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 전 5권’ 『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강사,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및 동 인문정보대학원 강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