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서 제자 훈련은 마치 교회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 것처럼 인식될 정도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은 소위 제자 훈련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교회에 수 만원 또는 수 십 만원의 등록비를 지불하고 제자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훈련을 받기도 한다. 마치 그대로만 하면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화될 것 같은 착각과 기대에 빠진 채 말이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교회를 향한 목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교인들을 이용해 보고자 하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물론 제자훈련의 명목은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제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 제자훈련의 목적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신자가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과연 훈련으로 되는 것인가?
훈련이란 ‘일정한 기능이나 행동 등을 획득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실천적 교육활동’을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이 이론적 내용을 습득하고 그 내용을 반복 실천하는 것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데 있어서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결국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제자훈련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인도하심을 부인하고 인위적인 노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제자 되어 보겠다는 발상에 불과할 뿐이다.
제자훈련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교회를 위해 충성 봉사하고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에 의미를 두고 인간의 열심과 행위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자 훈련이 무엇인가를 굳이 말하자면, 다만 말씀이 너무 좋아서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훈련시켜서 제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이끌어 가고 말씀에 사로잡힌 자로 살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좇는 것이 제자로 사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길을 좇게 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어떤 기대도 포기하게 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말씀은 철저하게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교회의 제자훈련의 문제점은 말씀 앞에서 자신의 무너짐의 기회를 박탈해 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소망임을 보게 하는 제자훈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무능을 무한한 가능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의 제자훈련만 난무할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일 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간 함께 하신 것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 훈련에 실패한 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겠노라’고 하면서 나서지 않고 모두 두려워 떨었을 뿐이고, 제자중 하나는 예수님을 돈과 바꾸었고,
또 하나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을 두고 제자 훈련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가?
3년간 데리고 다니시면서 기적을 보여주고 말씀을 가르치셨으면서도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것을 두고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결국 의에 대해서는 실패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제자 훈련은 인간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기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보려 했던 모든 소원과 열정을 그분을 아는 지식과 완전히 맞바꾸었다. 가장 좋은 것조차 그보다 더 좋은 아니 유일하게 좋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가장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 힘으로 그 소원과 열정을 충족시켜보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 줄 깨달았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바울의 바울 됨은 훈련의 결과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