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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2012. 3.
펴내면서
2011년의 각종 매체에 발표된 시작품들 중에서 ‘좋은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 이번에 수록된 작품은 100편인데, 지난해에 보지 못한 시인들도 꽤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시단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매우 많은 상황에 비추어보면 좋은 시의 대표성에 한계점이 있음도 시인한다. 이 선집에 함께하지 못한 시인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좋은 시를 모으는 작업은 시인들의 성과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독자들에게 현재 시단의 흐름과 지형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또한 시문학사를 정리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좋은 시 선집을 제공하는 일은 이와 같은 책임감으로 인해 부담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의 시작품들은 주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그에 따라 좋은 시의 기준을 정하기도 힘들다. 그리하여 이 선집에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의사소통이 어려운 작품들은 수용하지 않았다. 좋은 시의 기준은 당연히 창작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지만 수용자의 입장도 고려한 것이다. 앞으로 시인들이 독자들과 함께하는 좋은 시를 많이 발표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의도이기도 하다.
이번 선집에서도 독자들에게 책임성을 보여드리기 위해 해설자를 밝혀둔다. 그 표기는 다음과 같다. 맹문재=a. 이혜원=b. 이은봉=c. 김석환=d.
모쪼록 이 선집이 시인과 독자들에 즐거움을 제공해서 우리의 시가 더욱 풍성해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내년에는 더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1년 2월
다시 오이를 올리며-고형렬
뒤란에서 자라나는 오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조금씩 사랑이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금씩 조금씩 “엄마 뱃속에서 정해진 길을 가”는 아기처럼 오이 줄기는 제대로 자라나는 것이다. 자라나는 동안 힘든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고비를 넘기”고 “탈주하지 않”고 나아간다. 시인은 그 오이의 줄기를 응원한다. 어떤 이해관계나 이익 여부와 상관없이 오이가 잘 자라도록 끌어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뒤란에서 손장난을” 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도 “조금씩 다시 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가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연약한 오이 줄기가 시인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곳에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a)
하나-권서각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에 국한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장되는 데 있다. 그리하여 기대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든가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든가 하는 차원을 넘어 주체성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에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고 집회하는 행동은 사회적 배분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 박탈감은 개념 자체보다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성이 중요하다. “사람들 나보다 돋보”인다는 인식은 필요하지만, 그 사실에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진 것/손꼽아 헤어”보며 자신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 토대 위에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a)
유씨의 공작소-권성훈
20명의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유영철의 범죄 장면을 시 창작의 과정으로 상상하고 있다. 시를 쓰는 것은 자음과 모음을 합해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고 행과 연을 만드는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자음과 모음에 톱질”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결과 “몸시[肉詩]” 한 그루가 남기보다는 “몸시[肉詩] 한 그루 널브러져 있”다. 흔히 좋은 시를 쓰려면 언어를 갈고 닦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시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자음과 모음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상상해보라. 시인들이 절차탁마하는 행동은 자음과 모음을 살해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시인들은 그와 같은 면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음과 모음을 마구 토막 낸다. 시인은 왜 시를 쓰는 행동을 자음과 모음을 잘라내는 다소 극단적인 상황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들의 시 쓰기가 대상을 포옹하기보다는 배척하는 경향이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시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형식 만들기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도 살려내려고 하는 인간 정신이라는 것이다. (a)
인사-김규동
김규동(1925~2011) 시인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함북 종성 사람인데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의 신분으로 교복을 입은 채 월남했다. 1948년 『예술조선』을 통해 시인이 된 뒤 분단 현실에 대한 아픔과 통일의 열망을 노래했다. 또한 언론인으로서 출판인으로서 그리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해나간 시인이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 부른다 “의지로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슬퍼했다/의지로 친구들과 해방가를 불렀다/의지로 하숙집 쌀밥 앞에서 울었다/의지로 함북 종성에서 서울 을지로까지 걸어왔다/의지로 개미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의지로 하늘을 바라보며 동생의 이름을 속삭였다/의지로 조곤조곤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의지로 아버지의 마음을 나무에 새겼다/의지로 아내의 결혼반지를 시집에 끼웠다/의지로 느릅나무에 긴 편지를 썼다/의지로 아이들 편에 서서 데모를 했다//의지로 인연을 끌어안았다/의지로 이데올로기를 끌어안았다/의지로 운명을 끌어안았다”(「김규동 시인」 전문). (a)
심청 누님-김명인
식구들의 입을 덜려고 또 동생들의 학비를 벌려고 도시로 나가 식모살이를 하고 가발공장이며 방직공장에 다닌 “사촌 누님”은 1960년대 이후 정부가 주도한 경제개발 정책에 동원된 한 여성 노동자이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온몸으로 기여한 그 누님 같은 노동자들은 멀리 있지 않다. “독거가 인당수처럼 입 벌린/저 구부정한 안방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촌 누님” 같은 여성들을, 마치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같은 딸들을, 외면하지 않고 품는다. 그 누님들은 “어느새 일흔”의 나이에 이르렀다! (a)
갈대밭 요새-김석환
인간과 마찬가지로 갈대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적을 공격하기 위해 창이나 활이나 칼을 온몸에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갈대는 자신의 생존이나 종족 보존을 위해 무기를 들었을 뿐 잉여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기를 쓰지만 다른 갈대를 넘어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칼부림을 해도 아무도/피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피 흘리지 않는 세상이기에 “새들”이 날아들어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 함께 살아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싸움으로 피를 흘리는 인간들이 배워야 할 갈대들의 무술법이다. (a)
능곡동 임석이뎐·1-문창길
육체노동자들이 마음대로 일하고 그 대가를 받는 세상이 올까? 그와 같은 세상을 만들어낼 지도자가 나타날까? 안타깝게도 기대하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육체노동을 철저하게 무너뜨린 컴퓨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컴퓨터는 노동의 효율성이나 이익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해주며 육체노동의 가치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따라서 선거 때만 되면 후보자들이 나서서 일자리 창출을 공약하지만 모두 믿을 수 없다. 컴퓨터의 진화로 인해 점점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늘린단 말인가? 그런데도 후보자들이 공약을 내거는 이유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기 위한 것이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본주의의 가치를 맹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를 추구하기에 결국 육체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니, “임석이 한 잔 더 마셔.” (a)
휘어진 목-박미산
아버지의 등을 이탈했기에 “혈통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태양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도 자라날 수 있었고, “그믐과 보름을 훔치며/바람과 맞”설 수 있었다. 춥고 외롭고 암담한 눈밭 속에서도 따뜻한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척박한 환경을 딛고 “꽃망울을 매단 꽃대가/목이 휘어진 채 올라오”는 것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 자식을 업고 세상을 건너가다가 떨어뜨리고 만 아버지의 등을 타고 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꽃들은 풍족한 운명을 타고 나지 않았지만 감쪽같다. 자신의 울음도 고통도 완전히 지운 얼굴이다. 아버지를 떠난 “형통들” 역시 상처를 지녔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다. (a)
번지점프-박승민
시인다운 “양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나 구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살아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미끼를 던지며 양심을 구해도” 모른 척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다. 그렇지만 시인은 “혁명을 꿈꾸었”던 한때를 가슴속에 넣고 있기에 자신의 양심을 폐기처분할 수 없다. 그 기억은 시인이 살아가는 동안 거울의 역할을 한다. 기억으로 인해 자신을 반성할 수도 성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을 도약대에 세우고 번지점프하”는 것처럼 갱신할 수도 있다. 기억이 무거워지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기억이 무거울수록 인간 가치도 무거운 것이다. (a)
발걸음-박형준
“촉촉한 푸른 피가 발걸음 속에 솟아나와 흐르”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들 “발걸음의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과 동참하려면 자신의 발걸음이 내는 심장 소리도 들어야 한다.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길을 낼 수 없는 것이다. 발걸음의 심장 소리는 운명에 맞서는 존재들의 호흡이다. 그것들에 의해 “봄초록 불꽃” 같은 길들이 생긴다. (a)
잃어버린 새-백무산
하나의 뿌리로 귀결시키는 환원론을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다. 배타성을 특성으로 삼고 있는 인간들의 세계인식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가령 인간과 새를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인간이 새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지극히 편견적인 세계인식에 불과하다. 인간과 새는 결코 다르지 않다. 서로는 뛰는 심장으로 체온을 지니고 있고, 빛나는 눈과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서로는 노래할 줄 알고, 뛰어난 비행술로 항해하고, “사랑에 아파하고 집을 찾아오는 기쁨을 알고 무리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안다. 인간과 새의 조상은 같은 것이다. (a)
키보드 공화국-변종태
“키보드 공화국”으로 비유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특성으로 존재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 조건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이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다품종 소량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비록 자본주의 사회가 “날마다 같은 모양, 같은 크기, 같은 생(生)을 찍어내”고 있지만 거대한 공룡의 지배로부터 막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a)
우주선의 환생-서상규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듯 시인은 죽음의 고통을 인간적으로 맞는다.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우주적인 운명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의 그와 같은 인식은 관념적이지 않고 실재적이고, 연역적이지 않고 귀납적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죽음의 세계가 드리우는 두려움이나 공포심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노래한다. 죽음을 비유의 대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비유 인식은 인간게놈프로젝트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못지않게 위대한 인간 행동이다. 화장장에 옮겨진 관을 “우주선”으로, 영원한 이별 앞에 서 있는 순간을 우주선이 발사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카운트다운”을 세는 시인의 자세는 담대하기 그지없다. (a)
버찌 먹물을 으깨어 난을 치다-손택수
“벚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도시인들. 도시는 차들이며 컴퓨터처럼 사람들을 불러들여 속도를 내도록 강요한다. 도시에서 쫓겨나는 일이란 삶의 근거를 상실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명령을 철저히 수행한다. 달려가며 통화를 하고 달려가며 주가를 살피고 달려가며 아파트를 사고팔고 달려가며 마트에서 양식을 마련하다. 따라서 “아파트 현관 앞의 벚꽃을/보지 않았을 리 없는데/어찌된 영문인지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나를 벚나무는 뭐라고 생각할까”라고 묻는 시인에게 하늘은 “먹물을 으깨어 난을 치”라고 권한다. “구두굽으로 묵화를 그리는” 일은 속도를 내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a)
그 노래들이 잊혀지지 않는다-송경동
시인에게 사랑 노래는 “이빨 네 대를 바친 적이 있”을 정도로 소중해서 어떠한 장애가 가로막고 있어도 그만둘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시인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건설 일용공이거나 기륭전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거나 대우조선에서 용접 불똥을 튀기는 노동자들이다. 시인은 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리하여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랑 노래”이기에 인정하지 않고 탄압까지 하지만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도 우리는 한 배의 운명”이라는 인식으로 크게 부른다. 노동자들과 함께 부르는 시인의 사랑 노래여, 행진곡처럼 밝고 힘차라. (a)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송유미
시인의 “살찐 슬픔”은 안타깝거나 보기 흉한 것이 아니다. “철거를 기다리는 주공아파트 놀이터의 낡은 의자”에서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습니다”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리는 비에 젖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젖은 자신을 배수진으로 치고 있다. 그리하여 젖은 사람들의 “육혼을 팔베개해”주는 것이다. 청계천의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젖은 자신의 몸으로 배수진을 치고 젖은 노동자들을 품었다. 그는 더 이상 젖을 게 없다고 자신했기에 완전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시인은 “살찐 슬픔”으로 세상을 돌아다닌다.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비를 맞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a)
쥐들의 블로그-신미균
연구원은 자신의 연구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쥐들의 생명력은 물론이고 고유성에 관심이 없다. 쥐들 나름대로 원칙이 있고 서열이 있고 관습이 있겠지만 연구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연구원은 어떤 쥐를 A그룹에 속하는 바구니에 넣을지 아니면 B그룹에 속하는 바구니에 넣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바구니에 들어갈 쥐들의 숫자만 맞추면 된다. 연구원의 그와 같은 태도에 우리가 몸서리치는 이유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상품의 가치로 매겨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은 참으로 씁쓸하고 슬프다. (a)
라이덴 병-신승우
사람들은 라이덴 병(Leyden jar)의 원리를 이용해 전기를 저장하는 것을 넘어 사랑까지 저장하기를 욕망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해 사랑을 모아 상품으로 사고팔고 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상품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랑의 장사꾼이 되었다. 시인은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지구를 보며 “더 이상 푸른 별이 아니다”라고 절망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랑을 사고팔면서도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a)
우화루(雨花樓)-양문규
비가 꽃처럼 내리든지, 꽃이 비처럼 내리든지 봄날의 우화루는 그지없이 아름답다. “걸릴 것도 없이 피었다 지는 꽃송이”들이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빗소리에 묻히는 꽃들에서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깨닫는다. 석가모니가 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할 때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고집(固集)을 버리고 멸도(滅道)에 이르기를 제시했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꽃잎들이 인간의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낸 봄날을 뭐라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소중하다. 인생을 허무하다고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함을 자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꽃처럼 내리는 빗속에서도, 비처럼 내리는 꽃 속에서도 인간의 봄날은 가고 있다. (a)
여행자-이선형
“모르는 친척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장거리 승차로 인해 차멀미를 하는 등의 육체적인 피로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 때문이다. “목 긴 천장이 흐릿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이나, “방문 밖 측백나무가 내 숨을 따라 내쉬”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기다랗게 꼭대기 감 따는 간짓대가 내려오”거나 “달팽이 자국처럼 밤길을 허옇게 걷는/눈뜬 달”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그 새로움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살아온 터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결단을 내린다. 설렘을 품고 또 다른 장거리 버스를 타는 것이다. (a)
새의 주검-이운룡
시인은 “죽은 시간을 물고 떠”나간 “산새” 한 마리의 운명을 노래하며 “살아생전 못 본 꿈을 만났으리라”고 긍정하고 있다. 죽음의 세계를 긍정하는 유형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 경우와 유한한 운명을 인정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에 저 세상으로 건너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존재의 행복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과 같은 죽음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유한한 존재를 인정하고 죽음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다르다. 새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준다. “죽어서 성자가 된 설법”이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a)
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이은봉
현대인들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란 사치에 가깝다. 전화 소리, 자동차 소리, 텔레비전 소리, 공사하는 소리, 물건 파는 소리 등등 우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는 도시화로 인해 공장이 들어서고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관계가 점점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익관계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떠올리고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은 소중하다. 소외된 자신을 품으면서 공동관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a)
시인-이주희
전자 매체의 등장이며 사회 문화의 변화 등으로 시인들이 독자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이 사실인데, 변화된 사회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시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시인들은 전문 지식이 높고 정보력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또 욕망이 크지만 지나치게 개인주의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 평등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믿지만, 이기주의적 발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 받은 고마움을, 지향해야 할 가치들을 고민해야 한다. 마치 “우리 막내메느리가 공부보다 어려운 시를 맹그는 사람이다요”라고 며느리를 높이는 시어머니처럼 독자를 위하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시인들의 자각이 필요하다. (a)
누가 용의 비늘을 보았는가-임솔내
시인이 “대야산 골짜기/너럭바위 등짝에 거친 용 비늘”을 유심히 보는 것은 용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용은 가장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지지만 시인은 하늘이 점지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욕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면서 “억 광년 돌 속에 물속에 들앉아 돌만 깨는/석수”며 “무당소(沼)까지 내려가/치성하던 여인”을 떠올린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 눈 팔지 않고 정진한 그들을 거울로 삼는 것이다. 너럭바위에 찍힌 용의 비늘 역시 그와 같은 증거로 인식한다. 시인은 “누가 용의 비늘을 보았는가”로 묻고 있다. 물음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용의 비늘을 보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a)
쌀자루-장옥관
현관에 놓인 “쌀자루”는 “논”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무겁다. 논이란 얼마나 무거운가. 논에는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 가정을 잘 이루고 나서 “치매를 앓다가 지난해에 돌아가”신 “고모”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십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보다 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들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중생대 백악기의 발가락 세 개인 공룡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간들이 축적되어 있기에 논은 무겁고, 그 무거운 논에서 생산되었기에 쌀도 무겁다. 그리고 그 쌀을 먹고 살아가는 “내”도 무겁다. 그러므로 무겁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무겁게 살아가는 일이란 “소년가장이 되어 봉지쌀 사먹으면서도” 논을 팔지 않았던 것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a)
하늘말나리-전 숙
“하늘말나리”를 “천국으로 돌아가는 중”인 할머니로 의인화했듯이 시인의 여성 의식은 견고하다. 같은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치매 요양원에 입원한 할머니가 흘리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가치가 점점 화폐로 계산되는 시대에 치매 환자가 “과거지사를 시시콜콜 풀어내는” 일은 결코 이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기꺼이 새겨듣는데, 그만큼 여성 의식이 깊고도 넓은 것이다. 시인은 치매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서도 “무능한 서방 미워서 시어머니에게 악담 부담 몇 번” 한 것이나 “데면데면한 며느리 섭섭하다고 뒤돌아서 눈물 찔끔”한 고백을 주의 깊게 듣는다. 그 일을 비난하기보다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이해하고 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분으로 높이는 것이다. 한 가문의 혈통마저 사라져가는 시대에 여성의 족보를 만들어가는 시인의 의식은 소중하기만 하다. (a)
나무들의 투자법-정원도
“나무들도 투자를 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들리는데, 그 투자법이 “착한 자본의 순환이”이기에 더욱 관심이 간다. 나무들의 투자법이 착하다는 것은 마음이 곱고 어질다기보다는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나무야말로 “최소한의 생계에 필요한 나뭇잎이 100개라면/그는 몇 배를 더 달기 위해 잠을 줄이고/동분서주 사방으로 가지를 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온몸을 다하는 것이다. 더욱이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보다 먼 안녕과 종족의 번성을” 위해 힘쓴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 온몸을 바치는 나무를 착하다고 본다. 나무는 자신의 길을 부단하게 개척해 나가기에 다른 나무를 해치거나 이용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의 조건을 긍정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시인은 나무의 그 성실성을 배우고자 시를 쓰고 있다. (a)
나비 곁에서-정정례
“나비”는 김규동 시인의 자화상인데, “광장 한복판에 앉아” 날개를 팔락이고 있다. 나비에게 광장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아무 조건도 제약도 없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곳이다. 그렇지만 나비는 “사방이 하얗”게 보이듯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에 놓인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날개에 손을 내”밀고 “가만히”라는 말을 속삭인다. 나비에게 “북녘 하늘”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쪽을 향해 “날개를 펴고 있다”. 시인은 그 나비 곁에서 응원한다. 선생님, 힘내세요! (a)
꿈 -정진규
“꿈속에서 누구로부터 꽃돼지 다섯 마리를 선물로 받”고 하루 종일 발설하지 않은 시인의 심정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꿈은 반대적인 것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기에 나타난다. 따라서 똑같은 돼지꿈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로 해석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태몽으로 해석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일거리로 해석된다. 심지어 좋지 않은 일로 해몽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목표를 얼마나 절실하게 지향하는가에 따라 꿈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꿈은 현실 세계에서 노력한 결과물이다. 꽃돼지의 꿈을 꾼 뒤 “진종일 발설을 참았”던 시인은 평소에 매우 절실하게 소망한 것이 있었다. 그 소망한 바가 양성(陽聲) 즉 율(律)이고, 꿈에 나타난 꽃돼지가 음성(陰聲) 즉 려(呂)이다. 현실과 꿈은 철저히 율려관계이다. (a)
표절 시비-채 선
“너나없이 우리는/어제 그제 십년 전, 보다 훨씬 이전의 것들을/새로운 듯 써 갈기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모방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방이 비판받아야 할 근거는 또 무엇인가? 오히려 창조적인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방을 게을리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모방할 대상들이 이 세상에는 즐비한데도 시인들은 나서지 않고 있다. 자신의 이익 창출에 기여하는 바가 적다고, 위험한 일이라고, 힘들다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 대신 자신에게 이익 되고 주목받고 편리하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대상들만 모방한다. 그리하여 타락하고 모순되고 큰 해를 끼치는 대상들이 이 세상에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인들이 시인다운 양심을 가지고 이 세계를 적극적으로 모방할 때, 표절 시비란 없는 것이다. (a)
판전 글씨-최동호
추사의 판전 글씨가 위대한 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전기적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처님께 사죄하듯 백지를 대면”한 추사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 병든 노인에게 강권”할 정도로 추사의 권위는 높았지만, 그것이 작품의 생명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추사는 “뉘우침 많은” 정신을 바탕으로 삼고 “쇠잔한 기력”이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다. 뉘우침을 갖는 정신이란 깨끗한 마음을 지향한 것으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고(측은지심),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고(수오지심),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알고(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시비지심) 데서 볼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착한 존재이다. 추사는 글씨를 쓰는 순간 그 본연을 최대한 인식하고 담아내려고 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기력이 쇠하는 순간까지 밀고 갔기에 “높은 세상”을 연 것이다 (a)
맷집-홍사성
사람에게 “맷집”은 중요하다. “맷집 좋은 놈이라야 어떤 일이락두/겁 안 내고/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맷집은 매를 맞아 견디어내는 힘이라는 말뜻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적인 면이 보장되어야 하겠지만, 정신적인 면도 필요하다. 점점 육체적인 힘이 노동시장에서 밀려나기에 맷집의 조건에는 정신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적인 힘은 곧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연륜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이 세계에 기여하는 이념을 밀고 나갈 때 맷집은 강해질 수 있다. 점점 맷집이 테크닉에 밀려가는 시대이다. 그렇지만 고수는 “잔재주”로 될 수 없다. 처음에는 정도를 걷는 기사(棋士)가 내기 바둑을 두는 사람을 이기기 어렵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기 바둑을 두는 사람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맷집은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a)
첫댓글 모두가 이은봉=a.뿐이네요. 맹교수님 시평을 보고싶었는데...
겨울나그네님! 제가 주제넘게 한 말씀드려도 될련지요? 맹교수님이 a인데요? 이은봉선생님은 c인데요.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 용서하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