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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 한방은 민족의학이 아니라 중국의술일뿐입니다.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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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한방을 민족의학이라고 믿고 허준의 동의보감을 위대하다고 믿어 막연히 동경하는 여러분께 진실을 알리고자 합니다.
[과학] 경혈 경락의 신비, 해부학으로 푼다 (2004-07-09,A16 - 유료) |
논문 /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사이에서 : 북한 ' 봉한학설 ' 의 부침한국과학사학회지, 21권, 2호, 시작쪽수 194p, 전체쪽수 27p
[기타] 한국과학사학회 | 김근배 | 2004 | 3360원 (구매/조회:2/52)
경혈 경락의 신비, 해부학으로 푼다 | 2004-07-08 22:49 |
물리학이 경락 의 실체를 밝힌다 | 2003-11-01 |
갑자기 사라진 김봉한과 봉한학설 | 2003-11-01 |
“봉한 학설은 노벨상 받을 만한 업적” 2005.12.16 | 블로그명 : 죽음은.. 마지막 도피처이다.
그 이름 공동철! 한겨레21 | 2005.11.08 (화) 오전 9:09
경혈 경락의 신비, 해부학으로 푼다 | 2004-07-08 22:49 |
물리학이 경락 의 실체를 밝힌다 | 2003-11-01 |
한번 읽어봅시다.(펌) | ||
김용환 등록:06-03-29 09:41 조회:30 추천:2 | ||
한방은 중국 것입니다. 민족의학 아닙니다(다음 "아고라"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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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daum 토론방에서는 한.양방으로 한창 시끄럽네요
다음은 양의사가쓴 한의에 대한 비판중 하나입니다...
드래곤 : 한방은 중국 것입니다. 민족의학 아닙니다. [0]
112015 | 2006-04-05
추천 : 3 / 신고 : 1 | 조회 : 27 | 스크랩 : 0
한방은 중국것이지 우리민족의 것이 아닙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즈음에 한방의 한(漢)자를 韓자로를 바꾸더니 느닷없이 민족의학이라고 포장하면 민족의학이 되는 겁니까?
민족이라면 유달리 껌벅죽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그동안 잘도 속여왓죠?
한방에서 주장하기를 오랜기간 우리 민족이 써왔고 중국과 약간 다르다는 어거지를 부리면서(중의사들은 이대목에서 코웃음 칩니다.) 민족의학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논리로 한방이 민족의학이면 한자도 민족글자가 되어야합니다. 오랜기간 써왔고 현재 중국의 한자 사용법과 조금 다르니까요.
허준의 동의보감 역시 중국의학서적 모아놓은 것일뿐이며 여러분이 알고 계신 허준의 일화들은 다 소설가 이은성 씨가 만들어 낸 얘기일 뿐입니다.
허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는 게 정답입니다. 그저 조선시대 어의의 한명이라는 정도..유의태를 시체 해부를 했다는 둥, 모두가 다 허구입니다.
한방은 민족의학이 아니라 중국의술이며 일본만 해도 한방이 없습니다.
명치 유신때 미신타파의 목적으로 한방을 없앴죠.
한방은 민족의학 아닙니다. 중국 것일뿐입니다. 민족은 무슨 ...지나가던 개가 웃습니다.
1. 동의보감 집례에서 허준선생은 중국의학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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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은 중국 것입니다.
............................
그런데 중국에 가면 한의학이 없어 졌습니다
중국의 차 문화가 일본에서 꽃을 피웠듯이....즉 차도는 중국에는 없고 일본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중국에는한의학이 중의학, 제3의학으로,혹은 대체의학으로 탈 바꿈 되었지요
그래서 몇십년전 다시 한의학을 꽃피우기위해 각 지방의 최고 한의사를 모집하여....내경 번역 작업을 시도 했지만....아직도 아무런 결과가 없답니다....하루 아침에 공산문화권에서...철저한 자유를 요구하는(단,수직적 자유임,그래야 자유로운사고 즉철학을 할수가 있으니까요)동양철학을 해결이 불가능하죠....자업자득이죠
그러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 한국이랍니다
즉 뿌리가 아직도 ,줄기가 아직도, 꽃이 아직도,
남아 있고 살아있는 곳이 한국 것도 남한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현 시점으로 본다면......민족의학이 아닐수 있을가요???
과거로 본다면.....중국이지만.......
현재로 본다면.....한국입니다......
우리도 지키지 못한다면......영원히 한의학은 사라 질 것입니다
● 백성들이 사랑한 醫師 李景華 (1629~1706) ●
李景華 1629(인조 7)∼1706(숙종 32)
조선시대 유행한 참요중에 <李景華謠>라는 것이 있다.
성천의 이경화야 네 날 살려라’는 노랫말인데,
억울하게 죽은 名醫 이경화가 살아 있었으면 요절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병이 나았을 것이라는 백성들의 비통한 마음을 담고
있다.
백성들의 참요속에 등장하는 인물인 이경화란 인물은 누구일까 ?
그는 평남 성천(成川) 출생으로 자(字)는 여하(汝夏) 호(號)는
풍계(楓溪)이다.
김포이씨 족보인 병진보(丙辰普)에 따르면 원래 선대는 김포에 살
았는데 임진왜란 때 김포에서 평안남도 성천(成川)군 현봉(玄峰)
으로 피난, 정착하여 살면서 김포이씨로 하였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의술로 침구(鍼灸)에 능하였고, 경사백가(經史百家)
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1660년(顯宗 1) 生員이
되었으나 벼슬살이는 하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열중했다.
1682년(肅宗 8) 公洪道의 儒生들과 함께 金長生·宋浚吉의 文廟
從祀를 疏請했으며 李珥·宋時烈의 被誣에 대한 抗疏를 올렸다.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에 휘말려 처형을 당한 것 같다.
명의 이경화가 처형당하지 않고 아주 오래 오래 살았다면
효명세자가 과연 살았을까 ?
숙종 때의 인물이 순조때까지 살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백성들이 보기엔
그의 죽음이 억울했고 조선왕조의 마직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의 요절도 안타까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저서로는 《광제비급 廣濟비급》과 《풍계집》이 있으며
묘소는 평안도 성천군 성천면 각후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