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팬터지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최근 유럽에서 열린 북페어를 참관했던 한 출판기획자의 경험을 들어보자. 그 기획자는 북페어에서 영국의 에이전시로부터 추천도서를 소개받았는데 모두 팬터지소설이었다고 한다. 왜 팬터지소설만 추천하느냐고 물었더니 에이전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제 종이책으로는 본전만 할 생각을 해라. 책은 이제 컨텐츠일 뿐이다.” 에이전시의 설명은 이미 한국시장에도 불어닥치고 있는 E북 출판경향과 맞물려 최첨단 출판기획의 흐름을 요약한다. 그 에이전시의 말에 따르면 이제 종이출판으로는 본전만 맞출 생각을 해야 되며 그 컨텐츠를 바탕으로 다른 사업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컨텐츠로서 가장 매력적인 분야가 팬터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구를 훌쩍 떠나고 싶습니까
책장 펼치면 'SF팬터지의 블랙홀'로..
그런 점에서 최근 저작권 계약을 끝내고 정식 출간된 ‘일본의 전설적인 팬터지 SF소설’ 다나카 요시키(田中芳樹.48)의 ‘은하영웅전설’(서울문화사)이 가진 함의는 눈여겨볼 만하다. 왜 이 소설이 일본에서 거의 1000만부 가까이 팔렸으며,90년대 초반 저작권 계약을 하지 않고 출간된 번역본이 한국에서도 100만부 넘게 팔렸는지,또 최근 압도적인 위세를 자랑하고 있는 팬터지소설이 어떻게 독자를 끌어들이는지,책은 많은 부분에서 암시한다.
만화로,영상물로 다양한 방법으로 콘텐츠를 활용해가는 이 책의 상품성은, 지금 급변하고 있는 출판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책은 우선 세권이 먼저 나왔으며 7월에 총14권으로 완간된다.
저자 다나카 요시키는 ‘아루스란 전기’‘창룡전’등의 작품으로 한국에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일본의 인기작가다. 알려지기로는 일본 작가 중에서 소득세 랭킹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한국의 유명대학 도서관 대출순위 1위가 10년 전에 해적판으로 출간된 바 있는 ‘은하영웅전설’이란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각 PC통신에는 다나카 요시키 팬클럽이 조직되어 있을 정도다.
책은 대중적으로 잘 읽힐 수 있는 치밀한 구도를 자랑한다. 이 구도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교양이 맞물려 한번 잡으면 손을 놓지 못할 정도로 재미와 지적 흥미를 동시에 준다. 전체적으로 책은 ‘은하 삼국지’다. 독재권력 골덴바움왕조에 의해 다스려지는 은하제국과 이에 반발한 자유행성동맹, 그 가운데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페잔…. 영락없이 조조와 유비,손권으로 상징되는 ‘삼국지’의 재현이다.
한편으로는 영웅전이기도 하다. 은하제국의 패권을 거머쥔 라인하르트와 자유행성동맹의 지도자로 부상한 양웬리, 그밖에 루빈스키, 키르히아이스, 제시카, 로이엔탈, 율리안 등 한번 읽어본 사람은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는 개성적인 영웅들이 산재해 있다.
‘삼국지’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인간탐구기라고 한다면,‘은하영웅전설’은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민주주의탐구기라 할 만하다. 책은 패권주의와 민주주의,그 사이에 끼여있는 중상주의를 대변하는 세 제국의 각축전을 담고 있다.
은하제국의 지배자 라인하르트는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부패한 독재권력인 골덴바움 왕조를 무너뜨린 그는 도덕적으로 무결하고 순수한 정신을 가진 패권주의자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작가가 라인하르트란 인물에 대해 도덕적인 무결성을 부여함으로써 패권주의가 통치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인 점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자유행성동맹의 지도자 양웬리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 그는 반전 평화주의자이며,노장의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세계관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전쟁사 공부를 하기 위해 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군인의 길을 걷는다. 양웬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전쟁을 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할 정도로 그는 역사 속에 던져진 개인의 운명을 고민하는 인물이다.
세번째 축은 페잔제국의 루빈스키. 기회주의적 중상주의자다. 그는 은하제국 자유행성동맹 양측과 등거리외교를 하면서 세력균형을 잡고 그 틈바구니에서 상업적 이익을 꾀한다. 또 루빈스키는 이젠 잊어진 행성인 지구를 중심으로 한 우주 패권을 복원하려는 사이비 교수의 하수인으로 역사의 퇴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런 세개의 중심적인 갈등구조를 놓고 저자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입장은 일견 시니컬하기도 하다. 작가는 대단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단순한 숫자에 의존하는 시스템인 민주주의의 약점을 들춰내고, 또 패권주의자 라인하르트가 아닌 민주주의자인 양웬리의 죽음을 먼저 설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삼국지’와 같이 다수의 영웅을 등장시키면서 각 인물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를 부여하는 방식은 고전의 현대적 재현이랄 수 있지만,그 소재를 미래세계의 은하로 넓혀갔다는 점에서는 책은 SF팬터지로의 성공적인 변주라 할 수 있다.
특히 책이 가진 세가지 전략은 한국에서 팬터지소설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첫째는 일본의 만화산업과 게임산업의 제작방식인 아이돌화한 매력적인 주인공을 등장시켜 독자의 눈길을 모으는 방식이고 두번째는 각 인물들의 영웅적인 전투기를 중심으로 극적인 재미를 부가하는 점, 세번째는 각 에피소드를 이끌어 가는 거대한 축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란 거대주제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전략이다.
첫댓글 보기 드물게 잘 쓰여진 평론입니다. 이상한 쪽만 확대해석해서 작품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망상을 늘어놓는 잘나신분들의 글들과는 차원이 틀리군요..
다만 사업성을 좀 강조한 나머지 은하영웅전설이라는 대작의 감동에서 자칫 벗어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아무튼 은하영웅전설은 이미 전설을 넘어선 신화입니다..^^b..
다양한 관점의 비평들을 통해 편향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요 하다고 생각 합니다... 일본에서는 '은하영웅신화' 로 부르고 있죠 (신격화까지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만..)
이론..다시 읽어보니 오자가 많군요..졸릴때 글써서 그런지.ㅡㅡ;..일단 수정했습니다. 아무튼 은영전은 지금까지의 제 인생중에서 최고로 기억될 작품입니다..더불어..다나카 선생..제발 빨리 글좀써줘요~^^;;..
은하영웅전설.. 제가 어떻게 은하영웅전설에 관심을 가졌는지.. 생각이 안나내여.. 하지만 ^^ 역시 은하영웅전설의 구조와 짜임은 정말 걸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