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 하동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하동 쌍계 사를 간 기억만도 셀 수 없는데 왜 여태 쌍계 사 근처에 온천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지난 주말 회사 연수로 지리산을 다녀 온 아이 아빠가 남원에 자리잡은 지리산 근처의 유명 온천보다 시설은 조금 못하지만 조용하고 물이 좋다고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입동(立冬)이라 그런지 괜스레 다친 발목이 시큰거리는 느낌도 듭니다.
하동 광양간 국도에서 내려다 본 하동은 어제의 엷은 안개비와 오늘 간간이 내린 소낙비로 인해 짙은 운무(雲霧)속에 숨바꼭질하듯 평화로워 보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건물은 안개에 휩싸이고 지리산 줄기의 산등성이 역시 길게 내려온 구름 자락이 목도리처럼 휘감겨 있습니다. 마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한겨울 하얀 눈이 내려 산등성이 곳곳에 승무의 하얗고 긴 모시 자락이 넘실거리듯 하늘과 땅도 운무(雲霧)와 함께 하늘거립니다.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혀 잠시 할말을 잊고 맙니다. 자연은 살짝 들어내 보이기만 해도 훌륭한 화가입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 할 수 있을까요? 곳곳에 보물을 숨겨 놓은 듯 은은하게 펼쳐지는 경관은 감탄마저도 부끄러워 결국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습니다. 침묵 속에 찾아 온 하동 십 리 길은 화려한 벚꽃의 봄에서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 청취에 흠뻑 취해 차로 북적거리고 그나마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 쪽에 나란히 달리는 도로는 한적합니다. 이 도로는 이곳 지리에 익숙한 사람들만 아는 숨은 도로라고나 할까요? 하동 솔밭에서부터 화개 장터가 열리는 쌍계 사 길목까지 어머니의 강인 섬진강을 나란히 마주보고 달리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해후하는 남도 대교로 이어진 평행선 도로이기도 합니다.
지난 7월29일 개통한 남도 대교는 이미 이 지역의 풍물로 자리잡은 듯 합니다. 간간이 그쳤던 비가 또다시 이어지는 오후지만 만추(晩秋)를 보기 위해 삼삼오오, 형형색색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섬진강과 지리산 등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대칭 시켜 동서 화합을 표현한 남도 대교는 길이 395m, 폭 13.5m의 왕복 2차도로 전체 사업비 217억 원 가운데 국비 132억 원을 제외한 85억 원을 전 남도와 경 남도가 분담을 했답니다. 그전에는 광양 사시는 분이 하동의 화개 장터를 가려면 30킬로를 돌아 버스로 한 시간 가량 걸리던 거리가 지금은 단 5분 거리로 바뀐 후 더 많은 지역 분들의 왕래로 화개 장터가 더 활개가 넘친다는 지역 뉴스를 본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늦은 주말 고즈넉한 풍광(風光)을 뚫고 드디어 온천에 도착했습니다. 온천은 쌍계 사를 목전에 두고 우뚝 서 있었는데 왜 미처 보지 못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이곳에서는 꽤 큰 건물에 속했습니다. 들기에 앞서 잠시, 안내 판을 읽어보니 이곳의 게르마늄 함량이 근방의 유명 온천보다 월등하게 높답니다. 그리고 여탕으로 향했지요. 당연히 우리 집의 세 남자들은 남탕으로 직행 하구요. 하지만 주말이라는 염려와는 달리 온천 안은 의외로 한산했습니다.
그제서야 느긋하게 게르마늄 물에 발목을 담그고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사람 구경을 했답니다. 이웃사촌으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분들도 있지만 서로 아는 체 가벼운 묵례를 건네는 걸 봐선 거의가 지역 분들로 잠시 후 두 분의 할머니께서 천천히 들어오셨습니다. 한눈에 봐도 고부간이신 60대 중반 정도의 아주머니라고 부르기엔 조금 연세가 있으신 할머님과 저승 꽃으로 고운 얼굴은 다 덮였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80대 할머니십니다. 빈자리가 많음에도 한참 자리를 찾아 서성이는 모습에 괜히 애가 탄 저는 노파심에 두 분의 할머니를 불러 세웠습니다. 바로 내 옆의 세 좌석은 처음부터 비어있었거든요. 두 분은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바로 제 곁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을 나누시며 목욕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익숙하지 않은 샤워 물줄기가 내 얼굴로 연거푸 쏟아질 때마다 “아이고 미안해서 우야꼬” 라는 듣기에도 익숙한 대답이 흘러나옵니다. 참 신기합니다. 섬진강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나뉘었건만 두 곳의 말씨는 한번만 들어도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그 억양에 넋을 빼고 구경하던 저를 며느님 되어 보이시는 분이 물어봅니다. “새댁 요 등 밀어 줄까 예?” 그 말씀에 머쓱해진 저는 못 볼 걸 훔쳐본 마냥 얼굴이 붉어집니다. 괜찮다고 서둘러 도리질을 하고는 괜히 차가운 물줄기만 연신 뿌려댑니다.
한참을 지켜봐도 이곳은 내가 사는 광양과도 많이 다릅니다. 꼭 온천이라는 수질뿐만 아니라 이곳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광양 사람들과 억양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 쓸데없이 물을 낭비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광양은 신도시처럼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곳곳에서 물줄기가 분수대처럼 난무합니다. 지불한 대가만큼 본전을 뽑겠다는 당연한 권리처럼 무엇이든 소비가 미덕인 곳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덜 알려진 탓에 대부분이 지역의 촌로(村老)분들이라 그런지 물 사용하시는데도 절수(節水)가 생활로 보입니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작은 암자를 지키며 여승 같은 생활을 하셨던 큰 이모님께서는 이승에서 낭비한 물은 저승 문을 들어서기 전에 전부 마셔야만 저승길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함부로 물을 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귀하게 여기던 시절, 물에도 검뢰(黔雷)라는 수신(水神)이 살았다고 믿을 만큼 사람에게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하는 말씀을 달리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나마 여기는 사우나의 텃새들이 없습니다. 사우나의 텃새란 하루 종일 몇 분이 어울려서 사우나를 제집처럼 생활하시는 분들을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큰 소리로 떠들기도 예사고 몸에 좋다는 사우나 실은 그분들만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처럼 초면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텃세(―勢)를 부리기에 텃새(유조 留鳥)라고 불린답니다. 그래서인지 온천탕 안은 샤워 물줄기 소리와 간간이 소근거리며 나누는 절제된 음성만이 들립니다.
하지만 뭐니 해도 이곳은 가만히 있어도 등을 밀어주시겠다는 인정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어 가장 마음을 끕니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서로 등을 밀어주자는 말만 건네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라 언제부턴가 목욕 도우미에 익숙한 내게 연세가 훨씬 많으심에도 불구하고 딸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는 따스한 배려가 온천 물보다 더 뜨겁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곳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가본 몇 군데 온천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뜻 보기에도 큰 도시의 시설 좋은 동네 목욕탕 보다 못해 보이지만 앳띤 아가씨도 혼자 오신 할머니 등을 내 어머니의 등처럼 정성 들여 밀어주는 아직도 가슴 따뜻한 아름다운 정경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속까지 정으로 후끈하게 달아올라 마음의 묵은 때까지 물줄기에 흘러내립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동은 아름다운 경치는 말할 것도 없고 물만 깨끗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보다 더 맑고 정결할 수 있다는 사람 냄새 폴폴 풍기는 옛 온정이 한겨울의 잔설 (殘雪)마냥 여기저기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곳을 찾고 싶으시다면 아이들을 동행할 때는 조심하십시오. 어르신들이 많이 오셔서 그런지 아이들에게는 최대한의 친절을 깜빡 잊은 듯이 보입니다.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탕은 1.5층의 계단을 이용해야 하고 걸음걸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바닥이 조금 미끄러운 듯이 보였거든요. 그 점만 주의하신다면 하동에서 늦은 단풍을 감상하며 나들이를 겸할 수 있는 아늑한 온천의 노천 탕도 함께 즐기십시오. 단, 노천 탕은 일요일만 가능하다네 요. 불행히도 저는 눈요기만 잔뜩 하고 왔지만 보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며 설레어 행복했답니다. 참, 인정 온천은 상호명이 아니랍니다. 제가 그냥 붙여 본 이름이지요.
**** 예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