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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고 영 옥
코스모스의 해맑은 미소가 살며시 가을의 문을 열어놓으니 슬그머니 문턱을 넘어서는 가을은 어느새 실내로 들어와 준비 중인 현 위에 내려앉는다.
맨 앞줄에는 바이올린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곤거리며 소리를 고르고 그다음 줄에는 비올라 첼로가 기지개하고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맨 뒤에는 콘트라베이스가 의젓하게 소리를 낮추어 헛기침으로 조율한다. 피아노의 맑고 영롱한 소리가 터치를 시작하니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아름다운 선율에 가을의 서정을 더하니 내 마음은 어느새 차분히 내려앉아 결 고운 비단처럼 부드러워진다. 음악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늘 음악 가까이 있고 싶은 것은 고운 가락, 조화로운 화음을 조용히 듣고 있으면 잔잔한 감동이 내 속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런 감정의 흐름을 진정으로 아끼고 좋아한다. 특히 현악이 좋아 주일마다 찬양대 현악반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기를 거듭하다 보니 세상에서 깨끗하고 고결한 가치를 대변하는 것 같은 음악은 현악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악 중에서도 잘 조율된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이 나를 사로잡았다. 달콤하게 속삭이는가 하면 애절하게 호소해오고 때로는 고음 특유의 화려한 선율을 담아내는 그 흐름을 가슴 설레며 따라다니다 보면 다른 악기 소리에는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많은 사람의 칭찬과 박수를 한몸에 받으며 자랑스러운 듯 수줍은 듯 현을 떨면서 애교스럽게 토해 내는 음률은 요염한 여인이 흘리는 웃음소리 같다고나 할까?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비올라와 첼로의 매력에 취하여 보는 또 다른 맛을 알아가게 되었다. 비올라의 깊이 있는 풍부한 울림을 듣고 있으면 우울한 듯하면서도 엄마 품속처럼 편안해 오는 것이 느껴진다. 비올론첼로 (violoncello=작은 더블베이스)라는 첼로의 깊고 그윽한 울림은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듯하면서 저음 반주와 고음 선율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풍성함이 여유롭다. 이에 매료되어 어느 날은 비올라의 선율을 따라보고 어느 날은 첼로의 선율을 따라다니며 그 소리의 이음에 집중해본다. 얕은 실력으로는 미로 찾기와 같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귀가 열리나 보다. 현악 4중주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더블베이스)의 개성 있는 하나하나의 소리가 합하여져서 혼자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절묘한 조화를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제 한 발 뒤로 물러서 본다. 어디 음악에서뿐이겠는가? 우리네 삶 속에서도 너와 내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
요즈음 들어서는 왠지 콘트라베이스에 자주 눈길이 가고 그 선율을 음미하게 된다. 늘 오케스트라 무대 뒷자리에 앉아서 커다란 몸통에서 우러나오는 넉넉하고 푸근한 저음으로 여러 개성 있는 소리를 감싸 안아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는 콘트라베이스! 앞자리에 앉아 매력적인 고음을 자랑하는 바이올린이나 아름답고 풍성한 소리를 담아내는 첼로만큼 사람들의 박수와 사랑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저음을 소중히 여기며 묵묵히 감당해 내는 그 모습이 참으로 미더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저음이 있어야 고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이 있어야 밝게 빛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러니 매력적인 고음을 칭찬하고 대낮의 밝음을 환호함이 무에 그리 대수이겠는가? 우리가 살다 보면 박수받을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등외로 밀려나기도 하고 심하게 곤두박질을 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슬픔 속에 기쁨이 함께 있고 절망 속에 희망이 숨 쉬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순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보니 그간 세월 속에 무쳐진 아픔과 좌절은 더 큰 고통의 파장까지도 말없이 흡수할 수 있는 저력으로 남지 않았나? 기대해본다
만물이 결실의 기쁨을 누리는 이 가을을 맞으면서는 무대의 뒷자리에서 넉넉하고 푸근한 저음으로 모두를 감싸 안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내는 콘트라베이스를 닮고 싶어진다. 비록 박수를 받지 못한다 하여도, 사랑해주는 이가 보이지 않아도, 내 인생에서마저도 내가 주연이 되는 것이 꺼리어지는 초라한 모습에서도, 담담할 수 있는 편안함을 소유하고 싶다. 그 편안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다가가기를 원한다. 주위를 편안하게 품어주는 넉넉한 품이 되어 모두를 조화롭게 어우르는 모습이 지금 나에게 걸맞은 아름다움이리라. 이러한 나의 간절한 소망이 한낱 소망에서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도 내 인생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콘트라베이스의 푸근한 저음이 깔린 아름다운 하모니에 귀를 기울여 본다.
마중
고영옥
가을을 마중 나온 서늘한 바람이 뒷산 밤나무를 짓궂게 흔들어 알밤을 툭 툭 떨어뜨리는 것을 보니 추석이 머지않았나 보다. 추석 하면 햅쌀에 해콩을 넣고 빚은 쫄깃하고 구수한 송편 맛과 잘 익은 제철 과일 맛이 군침을 삼키게 한다. 또한,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오르며 빙그레 웃어주는 정다운 보름달의 운치를 은근히 기다린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던 일은 버스길 까지 마중 나와 기다리는 정다운 얼굴을 대하는 일이었다.
연세가 높아지시면서 명절이 돌아오면 우리 아버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식들을 마중하시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비어 있던 방에 군불을 넉넉히 때서 아랫목 윗목 없이 방바닥을 미리 후끈하게 달구어놓으시고 저녁때나 되어야 돌아올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오정이 지나면서부터 차부 근처에서 서성이셨다. 긴 기다림 끝에 자식들이 차에서 내리면, 달려가 안기는 손자 손녀들에게 함박웃음을 날리시며 “배고프지?” “가방 이리 내라! 뭐가 이렇게 무거우냐?” 이렇게 푸근한 말씀으로 사람을 껴안듯 맞아 주셨다. 아버님의 마중을 받으면서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모두 돌아오면, 우리들의 고향집인 아버님의 집은 금세 시끌시끌해졌었다. 댓돌에는 즐비하게 벗어놓은 신발이 엎칠락 뒤칠락 하고, “하하하, 호호호, 까르르” 아들, 손자, 며느리의 웃음소리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어 담을 넘었다. 어머님의 손맛이 배어 있는 구수한 밥상이 들어오면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가 더없이 정겨웠다. 밤새 명절 음식을 장만하면서 그간 하지 못했던 속말을 풀어놓는 자식들을 보기만 해도 절로 신이 나시던 아버님! 주고받는 고단한 사연을 덮어주듯 어둠은 조용히 그 밤을 덮어 주었었다.
나를 반겨주시던 시부모님은 다 떠나고 안 계시지만 그 고향집에 가보고 싶다. 복숭아나무, 자두나무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던 고향집! 뒤란에 있던 우물에서 달고 시원한 생수를 한 두레박 퍼 올려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다. 혹시 마루 밑에 누워 있던 누렁이가 달려와 꼬리 치며 반겨주지는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고향집은 성남 군용비행장 활주로의 한 귀퉁이가 되어 나름대로 나라에 충성하고 있다는데 생각이 이른다. 고향을 잃었다는 커다란 상실감은 외로움으로 몸을 떨게 하고 그리움이 사무쳐 뼛속까지 시려 온다.
또한 ‘마중’하면 기억에 밑바닥에 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작은 마을이라지만 우리 동네에서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나와 옆집 친구, 둘뿐이었다. 우리는 10리도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어느 겨울날 청소당번이 되어 청소를 마치고 나니 늦어졌다. 평소에는 들판으로 난 마차 길로 다녔는데 그날따라 조금이라도 빨리 갈 요량으로 질러가는 숲길을 택했었다. 사방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리고 바스락, 바스락 우리들의 가랑잎 밟는 소리만 들려왔다. 작은 풀벌레 소리에도 놀라 손에는 땀이 흥건히 고였다. 하나 둘 빛을 드러내는 별들도 무서워서 떠는 것 같았다. 그때 저쪽에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극도로 긴장하여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서 있는데 “거기 오는 게 누구냐?” 어머니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그만 “엄마”하며 주저앉아버렸다. 어머니는 달려오셨다. 어머니의 커다란 품이 참으로 포근하다고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었다.
그 후론 밥상 둘레에 앉는 식구가 한둘 빈 저녁이면, 어머니는 설거지를 미루시고 우리 중 누군가를 데리고 멀리까지 마중을 나가셨다. 어느 날은 내가 동생을 기다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동생이 나를 마중 나왔다. "뭐 하러 나왔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들짝 반가웠던 그때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망태기에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담는 말이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마중을 나갔고, 흰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가운데 마중을 나갔고, 작은 어깨너머로 별똥 떨어지는 것을 보며 마중을 나갔다. 사람을 마중 나가는 일은 챙겨주는 마음이요, 너의 애씀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또한, 마중은 사랑의 우러나옴이요 끈을 수 없는 끈끈한 정이리라.
훗날 나 홀로 세상을 떠나 먼 하늘나라를 찾아갈 때 무섭고 외로워서 떨고 있으면 우리 어머니는 잊지 않고 마중을 나오시리라는 생각이다.
언제나처럼 올 추석에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도 추석 채비를 하면서 자식들을 맞을 생각을 하니 여느 해와 같이 올해도 잠을 설칠 것 같다. 이번 추석엔 나도 마중을 나가보고 싶다. 넉넉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2009. 추석에 즈음하여)
당선 소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성탄절 날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무척이나 갖고 싶어 하던 동화책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항상 옆에 두고 읽고 또 읽어서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때 그 사랑의 선물이 꿈의 씨앗이 되어 꿈 많은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처럼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날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선의 기쁜 소식을 듣는 순간 왜 50년도 더 넘은 그때 그 선물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마도 어릴 때 받은 선물처럼 오늘 받은 선물도 내 속에 꿈을 심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하얀 눈이 내리는 날 받게된 두 선물에서 막연하지만 공통된 메시지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오늘에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동안 걸음마를 시작하는 나이 먹은 학생을 성심껏 이끌어 주신 지도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작은 가능성을 보고도 칭찬해주시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신 여러 문우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해 주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또한,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10년이 기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처음인 양 새날로 맞겠습니다.
그 어느 날도, 전에 있었을 리 없는 옹근 새날임은 틀림없습니다.
그 가슴 벅찬 새날에 남보다 잘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전보다 잘하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키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뼘씩 자라나는 기쁨, 조금씩 채워가는 충만함을 맛보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맞다 보면 성큼 성숙한 수필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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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떻하죠. 발간이 늦었어서 서둘렀으니 ??? 이해 바랍니다.
네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중이란 수필이 감동스럽네요. 부모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고영옥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