化城喩品(화성유품) 第七
3. 대통지승불의 성도(成道)
그 부처님이 출가(出家)하기 전에 십육 명의 왕자가 있었느니라.
그 부처님이란 누구죠? 대통지승불.
맏아들의 이름은 지적(智積)이었으며,
여러 아들들이 각각 여러 가지 진기한 놀이기구를 가지고 있었느니라.
그 아버지가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진기한 놀이기구를 버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하였느니라.
이것도 얼핏 보면 이야기 주인공은 대통지승불 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를 해서 성도한 그런 이야기와 유사 하죠.
석가모니 부처님도 출가를 해서 성도를 했단 소리를 듣고
그 석가족들이 찾아와서 출가한 사람도 있고
또 성도하신지 2년 후 비로소 고향으로 가게 됩니다.
가서 부왕도 뵙게 되고 가족친지와 권속들을 모두 보게 되죠.
그럴 때 부처님을 따라서 출가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난타라든지 손타라난타 등등 아주 많은 분들이
부처님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렇게 출가를 많이 하죠.
그런데 보통 일반스님들은
부처님과 같은 그런 큰 도를 6년 만에 이루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고향에를 잘 가지 않습니다.
설사 사찰에서는 큰 스님 소리를 듣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존중을 받아도
고향에 가면 ‘쟤 왔어?’ 그러니까 ‘누구 집 둘째 아들이야’ ‘몇 째 아들이야’
연세도 좀 많고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달리 표현할 길이 없겠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죠.
그 옛날 말씀에 의하면 출가한 사문은 부모에게도 큰 절을 하지 않고
또 국왕에게도 큰 절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표현까지 있습니다.
그 말 때문에 되지도 않는 아만을 부려서가 아니라
어째든 자기 수행이 완숙하기 전에는 대개 고향에를 잘 가지를 않죠.
그런데 석가모니는 6년 고행하시고 깨달음을 이루시고도 2년 쯤 계시다가
이렇게 고향에 돌아 가셔서 많은 권속 들을 출가를 하게 만드는
그런 덕화를 베풀죠.
여기는 자기 부왕이 깨달음을 이루었다,
석가모니가 그렇게 했다 라는 말을 듣고
그 다음에 권속들이 여러 가지 생활에 좋은 조건들이 있었지만
그런 좋은 조건들을 다 포기한 채 출가를 해서 수행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표현을 조금 달리했다고 그렇게 볼 수가 있겠죠.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가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진기한 놀이기구를 버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하였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조부 전륜성왕이 일백 대신과 백 천 만 억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도량(道場)에 이르렀느니라.
모두 다 대통지승 여래를 가까이 모시고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였느니라.
그 곳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숙여 발아래에 예배하고
부처님을 여러 번 돌고는 일심으로 합장하여 세존을 우러러 바라보며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조부 전륜성왕까지 가서,
대통지승불의 아버지죠.
대통지승불의 아버지 되는 분까지 가서 교화를 받게 되고
머리를 조아려 예배를 올리고 부처님을 여러 번 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경전상의 용어로 '요불 요탑(繞佛 繞塔)' 그래요.
'돌 요'자 '부처 불'자.
바퀴를 '돌 요'자. 탑(塔)은 우리 탑돌이한다 그러죠.
부처님도 이제 돕니다.
옛날 사찰에 법당이 그렇게 크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법당의 중간쯤이나 아니면 3분의 1정도 간격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뒤로 2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어서 사람들이 서로 스치면서 걸어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마련해요. 법당이 다 그렇습니다.
옛날 법당은 중국에 가도 마찬가지죠.
왜 그렇게 지었는가?
불상을 중간까지 이렇게 끌어다 내 놓으면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줄잖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앞으로 당겨서 모시고
부처님 뒤로 약 2미터의 폭을 공간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서로 빗겨 가면서 돌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놓은 거죠.
그런데 요즘은 사람 많이 수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서
그런 형식을 다 생략해버리고 부처님을 바짝 당겨서 벽 쪽에다 바짝 붙이고
앞에 신도들이 앉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많이 확보하는 형식의 법당을 짓는데
글쎄요. 시대에 따라서 우리가 필요한 대로 하긴 하고 있습니다만
옛날의 그런 요불(繞佛).
부처님을 돌면서 염불하고 하는 그런 형식이
여러 가지로 좋은 점도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는 예불하고 나서 의례히 부처님을 여러 바퀴 이렇게 돕니다.
염불을 하면서 목탁을 치면서 대중들이 죽~ 이렇게 돌아요.
그렇게 돌아도 어지간히 시간이 흐르면
그때 다시 자기 자리를 죽~ 찾아서 서게 되죠.
그러면 제 자리를 찾아서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그때사 예불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요.
저도 어릴 때 그런 예불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 가니까 중국에 광화사 라는 그 절에 스님들이 약 200여명 사시는데
한국의 수행자들이 서로 교류로 한 일주일씩 그렇게 연수하는 그런 의미로
광화사에 가서 일주일간 살았어요.
그때 보니까 우리가 어린 때 하던 예불 그대로 하더라구요.
예불시간이 두 시간이나 걸리는데 부처님 뒤로 여러 바퀴를 돌아요.
우리에게는 참 지루하죠.
또 그 사람들은 법당이라는 곳이 앉도록 안 되어 있습니다.
그냥 신발 신고 들어가서 무릎만 꿇을 수 있도록 둥근 방석이 앞에 있죠.
그래서 장궤합장(長跪合掌) 이라고 해서,
길게 꿇어 앉아 가지고 무릎만 대고 고개를 숙임으로써 절을 삼습니다.
우리 절하고는 영 다르니까요.
그 두 시간 동안 계속 서있는 거예요.
기껏해야 절 몇 번 할 때 무릎 반쯤 꿇고 하는데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두 시간 동안 서있으니까 서서 돌고 천천히 염불하면서 돌고
또 서서 염불하고 돌고 이것을 두 시간 하니까 새벽 4시 무렵에 법당에 들어가서
두 시간동안 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예배하고 염불하고 또 돌고
이렇게 끝나고 바깥을 보니까 그때사 동이 터오는 거죠.
뿌옇게 동이 터오는 그런 모습을 거기 있는 일주일 동안 늘 그것을 겪으면서
그때 느꼈던 감회가 생각할수록 아주 특별 했습니다.
200여명이 아주 신심내서 함께 모여 가지고 염불하면서,
염불은 우리하고 크게 다를 바 없어서 다 알아듣고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염불이죠.
그래서 한마음 한 동작이 되어서 두 시간 여 그렇게 열심히 하고
아주 힘들고 땀나고 피곤한 몸으로 고개를 돌려서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쳐다보면
그때사 부옇게 동녘이 터서 사물의 윤각이 드러나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느낌을 받았든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렇게 여기서 말한대로 부처님을 여러 번 돌고 하는 요불,
또 밖에 나오면 요탑, 탑도 그렇게 돌고 하는 그런 의식 이것도
하나의 수행입니다.
수행의 한 방법으로써 상당히 중요시 여겨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법당을 나와서 바로 추녀 밑을 돌지요.
스님들은 그렇게 많이 합니다.
또 예불하러 미리 가서 시간이 되기까지 추녀 밑을 몇 바퀴 돌면서
염불을 하든지 화두를 들든지 자기 수행하는 것을 그대로 하면서 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 해보면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고 참 좋아요.
부처님을 돌든지 법당을 돌든지 탑을 돌든지
그렇게 빙글빙글 빨리 돌지도 않고 아주 천천히 발을 옮기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도는 거죠.
이건 옛날부터 중요한 수행으로 그렇게 쳐왔는데
아깝게도 근래 와서 우리나라에서는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경우를 보기가 힘들죠.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그렇습니다.
좀 이상적인 수행도량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법당을 지어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옛날 법당 까지도 보면
막아 버리고 부처님 뒤에 공간은 창고로 쓰게 하거나 그러고만 있다구요.
참 그런 것들이 아쉬워요.
2 미터 정도의 넓은 공간은 부처님을 돌도록 일부러 만든 어떤 건축 형식인데
그것을 막아서 뒤에는 못 들어가게 해놓고
다른 어떤 불구 같은 것들을 쌓아 놓거나 하는 그런 용도로 쓰고 있으니
크게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이런 기회에 그런 것들도 참고로 들어두시면 좋죠.
여러 번 돌고는 일심으로 합장하여 세존을 우러러 바라보며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