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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7시30분 영남대 천마아트센터에서 흥미로운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작곡가 이흥렬 30주기를 기리는 추모 행사였다. 이 음악회는 대한민국 대표 자장가로 각인 된 '섬집아기'의 작곡가 이흥렬(1901~80)의 4남 이영수 영남대 음대 작곡과 교수가 주선한 것이다. 지난해는 이 교수의 형 이영조 국립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 주도로 선친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서울에서 개최한 바 있다. 30주기 음악회는 2남과 4남이 아버지를 위한 '3부자 음악회'였다. 거장급 음악가들은 대다수 기관단체나 제자들이 추모음악회를 꾸며주는데, 지금껏 자식들이 제자처럼 주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선친을 위한 추모행사를 꾸려왔다.
작곡가 이흥렬.
사실 일반인들은 그가 누군지 거의 모른다. 하지만 동요'섬집아기'를 지은 사람,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양주동의 시 '어머니의 마음'의 작곡가,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로 시작되는 가곡 '바위고개'를 지은 음악가라고 하면 다들 "그래요"라며 반색한다.
이흥렬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빼닮은 자식은 이영수 교수. 그는 '은혜롭고 쉬운 성가집'(시리즈)을 통해 교회음악의 한 지평을 열었다. 이흥렬의 집안은 기독교를 축으로 한 음악가 집안이다. 이영수를 포함, 무려 14명이 음악가다. 1남(영욱)·2남·4남이 작곡가, 딸 영희·영금은 피아니스트, 첫째 자부 이영실과 둘째 자부 김정희는 성악가, 손녀 박계선·이현주는 피아니스트, 이애란은 작곡가, 손자 이철주는 작곡가 겸 첼리스트, 손자 며느리 루스 웰스까지 첼로를 다루고 있다.
지난 22일 오후 2시 수성구 황금동 자택에서 이영수 교수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잘 공개되지 않은 이흥렬의 뒤안길을 더듬어봤다.
◇ 피아니스트에서 작곡가로 변신한 이흥렬
-아버지의 최후가 궁금하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5년전부터 당뇨병을 심하게 앓으셨다. 평소 엄청난 호주가였고 낙천적이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돌아가셨다. 현재 북아현동 집은 아는 교인에게 팔렸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대구로 내려와 살다 작고했다. 나는 84년 9월부터 영남대 음대의 전임강사가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얘기는 모두 50대의 것이고 성장기 얘기는 잡지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됐다."
-아버지와 대구와의 인연은.
"그렇게 많지 않다. 6·25전쟁 때 아버지는 대구에 잠시 피란 오셨는데 그때 박목월 시인이 지은 '포탄 아래의 자장가'를 작곡한 악보가 들어있는 악보묶음을 잃어버렸다는 게 대구와 관련된 유일한 얘기인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작고한 뒤 몇년 있다가 대구로 온다."
-들리는 얘기로는 선생님 집안은 17과 아주 인연이 깊다고 하던데….
"그렇다. 아버지가 태어난 날은 7월17일, 돌아가신 날은 11월17일 17시, 제 아내 생일도 8월17일, 제 생일은 12월17일이다. 돌아가신 지 17주기 때도 음악회를 하고 가족 얘기를 문집으로 엮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작곡가가 되었는가.
"지주였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 누나가 둘 있었지만 모두 돌아가고 만다. 할머니(김자선)는 두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에는 음악가의 피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뒤에 일본 도쿄 동양음악학교 예과로 유학을 간 아버지는 고국의 어머니에게 400원의 목돈과 매월 30원의 학비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400원은 피아노 구매용이었다. 3년뒤 400원이 건너왔다. 그래서 야마하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다. 22세 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으로 졸업연주를 한다."
◇ 400원 주고 산 야마하 피아노로 음악공부한 음악가족
-지금 야마하 피아노는 어디에 있는가.
"영조 형님이 갖고 계신다. 우리 식구 모두 그 피아노를 통해 음악을 익혔다. 워낙 많이 쳐서 상아 건반이 다 닳을 정도였다."
-졸업 후 아버지는 막바로 고향으로 오는가.
"다들 그 정도 실력이라면 독일로 유학을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고국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 때문에 고향 원산으로 돌아온다."
-피아노를 배워도 그걸 들어줄 사람이 일제 때는 거의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음악유치원을 만들려다 여의치 않자 모교인 광명보통학교 음악선생이 된다. 당시 아이들이 부를 마땅한 동요가 없어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작곡가로 변신을 하고 나중에 서울로 와서 홍난파 등과 음악적 교류를 한다."
◇ 섬집아기 노래비 건립 진통
-섬집아기는 언제 작곡했는가.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해 찾아봤는데 아버지의 작품집을 봐도 몇 년에 작곡했는 지 명기돼 있지 않더라. 섬집아기의 노랫말은 아버지의 고향 광명보통학교 후배였고 훗날 서울 은석초등학교 교장 겸 한국글짓기지도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동시 작사가인 한인현씨가 50년 4월에 '소학생'에 발표된 걸 후에 아버지가 작곡한 것으로 추론된다. 고향 후배의 괜찮은 동시라서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노래비는 몇 개 있는가.
"서울 수유리에 바위고개 노래비가 서 있다. 2002년쯤 제주도에서 섬집아기를 갖고 노래비를 제작하겠다고 예산까지 다 잡아놨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이 노래비 건립에는 영조 형님이 간여했다. 일각에서 아버지가 친일음악가라면서 건립반대 운동을 하는 바람에 제작이 무산됐다가 다시 추진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 과정에 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언설이 난무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않았다. 친일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얘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자식된 도리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음악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
"1933년 나온 '바위고개'는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등 반일적 메시지가 있다. 당시만 해도 나라 잃은 슬픔을 그렇게 애조적으로 작곡한 가곡은 손을 꼽을 정도였다. 상당수 우리 국민은 바위고개의 정서권에서 아직 못 벗어나고 있다고 본다. 광복 후 '승리의 노래'를 짓고, 이어 우리나라 자장가의 효시로 불리는 '자장가'와 '섬집아기', 훗날 아버지의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한 '꽃구름 속에'는 새로운 작곡 경향을 보인다. 이 노래는 장조로 시작해 중간에 암울한 단조로 변조됐다가 장조로 끝나는 '3부형식곡'의 물꼬를 터준 곡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가 1934년 발간한 첫 작곡집은 외국가곡 모방적이었던 한국가곡의 여명기를 벗어나 한국적 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그분은 어둑한 현실에 맞서 국민을 기분좋고 신나게 만들려고 밝고 따뜻하고 경쾌한 노래에 주력한 것 같다. '국민보건체조'는 물론 심지어 7편의 군가와 138편의 교가까지 작곡했다."
◇ 아버지 유명세 좋은것만 아니었다
-아버지는 음악인으로 일가를 이뤘고 유명했다. 음악하는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을 것 같다.
"맞다. 나는 처음 공학도가 되고 싶었다. 두 형님 때만해도 집안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음대로 가야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달랐다.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로부터 대위법, 화성악 등을 개인지도 받았다. 다른 아버지와 달리 제 아버지는 다른 데 레슨시키지 않고 직접 자상하게 잘 가르쳐주었다. 갑자기 작곡욕이 일면 '영수야 밥상 가져오라'고 했다. 밥상 위에 오선지를 놓고 소박하고 담담하게 작곡을 하셨다. 그런데 훗날 내가 음악가가 된 뒤 주위에서 '너는 누구의 아들이니', '아버지보다 더 좋은 작곡가가 돼라'는 식으로 내게 묘한 압력을 줄 때 참 맘이 불편했다. 한때 음악적 한계 등으로 인해 음악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와 음악 성향은 비슷한가.
"아버지는 보기와 달리 참 곱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많이 선호했다. 유전자 탓인지 나도 그렇다. 그로테스크한 현대음악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은 '어머니의 마음' 같은 곡이 전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리랑과 같은 전통적 5음계 음악이라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작곡한 노래 중에 어버이 날 관련 노래가 있는데 이게 요즘 많이 불려지는'높고 높은 하늘이라…'로 시작되는 '어머님 은혜'와 헷갈리는 분들이 많다.
"'낳실제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양주동 박사가 작시한 건데 그 곡은 일본 유학 시절 야마하 피아노를 살 수 있게 400원을 쾌척해준 할머니를 위해 작곡했고 한동안 어버이날 대표 노래로 국민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요즘은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 '어머님 은혜'가 더 많이 불려지는 것 같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유명세를 날렸지만 집에서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떼지 않는 성격이라 하더라.
"아버지는 참 소탈하고 약주를 너무 좋아해 나중에는 도수가 낮은 맥주로 주종을 바꿨다. 밖에서는 유명했지만 집에서는 그냥 평범한 가장이었다. 자신의 노래에 대해서도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았다. 지금에사 밝히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으로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군가인 '진짜사나이'도 군에 가서 그게 아버지가 작곡한 걸 알았고 영조 형님은 나보다 더 둔해서 그런지 제대한뒤 예비군 때 알았을 정도였다."
인터뷰 말미, 이 교수는 잠시 거실로 나가 선친의 유품 한 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바로 북아현동 대문에 수십년 달려 있었던 비바람 묻은 대리석 문패였다. '李興烈'이 해서체로 음각돼 있었다. 인터뷰 내내 작곡 연구실 겸 서재 벽에 걸린 아버지의 흑백 사진이 이 교수를 빙그레 내려보고 있었다.
#이영수 영남대 작곡과 교수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일본 도쿄 동양음악학교(현 도쿄음대 전신)를 졸업하고 1931년에 귀국하여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 작곡을 시작한다.
1933년경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와 함께 일하기도 했으며, 1934년에 이흥렬 작곡집, 1937년에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했다. '봄이 오면' '바위 고개' '섬집아기' '꽃구름 속에' '진짜 사나이' '어머니의 마음' 등 가곡·동요 등 400여 곡을 작곡했다.
서라벌예대 교수, 숙명여대 음대학장 등을 지냈으며,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문화상과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음악의 종합연구'(1958), '새로운 음악통론'(196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