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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영은 아직 스스로를 믿는다. |
프로야구 구단의 선수 정원은 63명이다. 누구나 기회를 얻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해마다 신인선수가 들어오고 방출선수가 나가는 게 프로야구다.
LG는 올시즌 뒤 베테랑 1루수 마해영(37)을 방출했다. 마해영은 프로야구를 대표할 만한 오른손타자였다. 그러나 2004년 KIA로 이적한 뒤부터 부진했고 LG에서는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는 자신에게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기회를 찾으려 한다. 마해영에게 부족했던 건 기회가 아니라 전성기에 훨씬 못 미치는 기량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마해영은 아직 스스로를 믿는다. 마해영은 그래야 한다. 아직 자신의 도전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수와 겨루는 승부가 숙명인 타자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롯데에서 마해영은 젊은 4번 타자였고 1990년대 짧은 전성기를 이끌었다. 삼성에서는 숙원이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홈런 한 방으로 이뤘다. KIA에서는 굴곡졌고 LG에서는 ‘먹튀’가 됐다.
선수는 영원히 전성기를 누릴 수 없다. 13년 동안 프로야구와 함께하며 남들 못지않은 야구인생을 산 선수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마해영만큼 색깔 있는 선수생활을 한 이도 드물다.
근황을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군요.
아시다시피 10월 15일 LG에서 방출됐죠. 좀 웃기는 얘긴데 한 팀에서 두 번 방출되는 것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아요. 지난해 가을에 한 번 방출됐다가 다시 하자고 해서 들어갔잖아요.
그때(2006년 11월)는 예고만 됐지 실제 방출된 건 아니었죠.
언론에서 방출이라고 했잖아요. 뭐라고 해야 하나. 법적으론 아니지만 제 입장에선 방출 통보를 받았던 셈이죠. 지금은 개인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것 같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운동은 어디에서 하고 있습니까.
서울 신림동 근처에서요. 집은 대구에 있지만 신림동 처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헬스 클럽을 다니며 가끔 산에 갑니다. 지금은 기술적인 훈련을 하는 때가 아니니까요. 젊은 선수들은 따뜻한 외국 나가서 훈련하지만 주전급이나 나이가 있는 선수들은 대개 개인훈련을 하는 때입니다.
운동 자체는 예년과 크게 다를 것 같진 않군요.
그럼요. 프로야구를 13년 동안 했는데 몸 관리는 자신 있죠. 나이가 드니 “배트 스피드가 나오지 않는다, 파워가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시각의 문제인 것 같아요.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어요. 1999년에 타격왕을 했는데 그때도 슬럼프가 있었습니다. 5월 한 달 동안 타율 2할대(0.263)를 쳤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같은 현상이라도 “이제 저 선수는 안 된다”고 판단해 버리니 저로서는 좀 서운하죠. 한 시즌을 다 치른 뒤라면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겠지만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죠.
2007년
올해는 특히 기회가 없었죠.
지난해에도 후반기에 2군에 있었어요. 올핸 1군에서 딱 11경기에만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11경기 가운데 7경기에서 도중에 교체됐어요.
2군에서도 25경기만 뛰었습니다.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2군에서조차 기회를 주지 않더라고요. 구단의 방침이 섰던 것 같아요. 젊은 친구를 써야 하는데 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저를 1군에 올려서 쓸 생각이 없었으니 2군 경기에도 내보내지 않았겠죠. 그렇게 생각합니다.
6월 1일 김연중 단장과 만나 방출 요구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 뒤로 출전 기회가 더 줄어든 건가요.
그렇죠.
그 일로 미운 털이 박힌 걸까요.
전 제 입장을 당당하게 밝히는 편입니다.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인데 그런 점이 구단 관계자들에게 좋지 않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해를 하시는 분들은 그런 점이 좋다고 하시지만 ‘선수가 건방지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어요. 구단 입장과 반대에 서는 선수라는 거죠.
전 LG에 입단해 큰 선수가 아닙니다. 프랜차이즈선수였다면 제 거취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라도 했겠죠. 하지만 LG에선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냥 방치돼 있다 정리되는 모양새가 된 거죠.
내년에 뛰려면 1월 31일까지 계약을 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연락이 온 구단이 있습니까. “몸 상태가 어떠냐 ”는 문의는 가끔 옵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냉정하게 내년에 뛸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성은 줄어들겠죠. 기회를 얻을 만한 팀이 두세 개는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2,3개 팀에서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진 않아요. 저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팀 사정이….
제 거취는 거기에 따라가는 거니 기다릴 수밖에 없죠. 저뿐만 아니라 올해 방출된 선수들 모두 같은 심정일 겁니다.
해외 진출도 생각해 봤습니까.
대만과 일본프로야구를 알아봤습니다. 솔직히 불가능하더군요. 일본 쪽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대만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외국인선수 계약이 한 달이나 3개월, 이런 식이고 그 외에 준비해야 할 게 많더군요.
정말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최향남 선수처럼 마이너리그에 갈까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운동하면서 영어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영어는 잘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알려지긴 했는데 솔직히 많이 부족합니다.
여담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어야구교실을 구상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저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있습니다. 지금 프로구단이 1년에 뽑는 선수가 10명이 되지 않아요.
해마다 고교, 대학을 졸업하는 선수들 수가 엄청난데 그 친구들이 갈 데가 없어요. 결국 사회인야구팀에서 운동을 하거나 운동을 관두든지 하죠. 하지만 그만두기에는 젊음과 열정이 아깝습니다.
미국의 독립리그 같은 걸 구상해 봤어요. 뛸 수 있는 야구장과 약간의 경제적인 지원이 있으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들은 적은 돈을 받더라도 야구를 하고 싶어하니까요. 관중도 없고 여건도 나쁘지만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기 위해 열심히 할 선수들이 많습니다.
입단 뒤 2군에서도 제대로 출전 못하고 한두 시즌만 보낸 뒤 방출되는 선수도 많지 않습니까.
방출 기준도 선수로서는 공정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1차나 2차 1, 2순위로 계약금을 많이 받고 온 선수들은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오래 살아남죠. 돈을 많이 준 선수라면 스카우트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선수가 기대만큼 크지 못하면 코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프로야구단의 관행이죠. 계약금을 적게 받았거나 신고선수로 들어오면 실력은 둘째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합니다. 방출되거나 말거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요.
어차피 프로구단은 선수 숫자가 63명으로 제한돼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기준을 맞춰야 하니 정리되는 선수가 생깁니다. 2군은 한 시즌에 80경기를 하는데 모두 낮경기입니다. 낮경기는 선수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없어요.
1군 경기는 밤에 하잖습니까. 2군에서 아무리 잘해도 1군에 가면 야간경기에 적응을 해야 되죠. 가뜩이나 못하면 2군으로 내려간다는 부담을 갖고 있는 선수들입니다.
미국은 마이너리그 구장마다 조명시설이 돼 있잖아요. 환경 이전에 거기에선 벤치에 앉혀 놓는 선수가 없잖습니까. 경기에 내보내고 경기 결과로 선수를 평가하죠.
하지만 한국프로야구 2군에선 벤치에만 앉아 있다 잘리는 선수가 부지기수입니다. 아직 체계적인 프로야구가 아닌 것 같아요.
투수보다는 야수들에게 기회가 적죠. 젊은 야수들이 2군에서 크지 못하는 게 최근 투고타저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군요. 1980년대에 비해 지금 선수들의 실력은 많이 늘었다고 봅니다. 아마추어 유망주가 프로에서 바로 성적을 내기가 힘듭니다. 결국 2군에서 선수를 체계적으로 키워야 하는데 그러기엔 경기 수가 너무 적고 낮경기만 합니다.
여름에 낮경기하면 힘듭니다. 기량이 느는 효과도 별로 없어요. 사실 한창 무더울 때는 2군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위기도 있어요.
미국 마이너리그 선수들은 꿈을 갖고 뜁니다. 올시즌 성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 한 단계 올라간다는 꿈이죠. 우리 2군 선수들은 못하면 잘린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더 들게 하는 곳이죠.
야구규약 70조는 ‘고액 연봉 선수가 2군에 내려가면 연봉을 깎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해영 선수는 이 조항을 소급 적용 받아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소송을 제기할 생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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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영과 LG의 인연은 결국 악연으로 끝났다. |
준비는 다 해놨습니다. 민사소송은 사고 발생일로부터 3년 안에 제기할 수 있습니다. 3년 안에 제가 판단해서 처리하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대처할 생각입니다.
아마추어 시절
어떻게 야구를 시작하게 됐습니까.
부산 대연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졸업까지 했어요.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죠. 4학년 때 야구부 감독님이 반을 돌더니 야구하고 싶은 사람은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어요.
처음엔 100명 정도 모였죠. 하지만 며칠 지나면 열 명쯤 남고 그 가운데 소질 있는 선수가 뽑힙니다. 감독님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더니 “소질이 있다. 운동을 시켜보는 게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구부원이 됐죠. 엉덩이 맞는 게 무섭기도 했지만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6학년 때 프로야구가 생겼습니다. 그때 ‘야구를 직업으로 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포지션은 뭐였습니까.
유격수였습니다. 그땐 키가 아주 크진 않았고 중상 정도였어요. 180cm를 넘은 게 고교 때였습니다. 부산중까지 유격수를 봤는데 부산고에서 3루수로 바꿨습니다.
유격수에는 1년 선배인 박계원 선수가 있었죠. 고려대에 진학해선 2루수와 3루수를 함께 봤습니다.
고교 때는 어떤 선수였습니까.
성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때 부산고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3학년 때 타율 3할대를 친 것 외엔 내세울 게 없어요. 1, 2학년 때는 경기에 나가지도 못했죠.
특출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형편없진 않았어요. 초등학교 때는 부산 시내 전체 타율 1위였고 중학교 때는 경주에서 열린 화랑관창대회에서 우승했어요. 그 멤버가 그대로 부산고에 진학했죠.
고교 시절까진 어떤 스타일의 타자였습니까.
중학교 때는 라이벌이 동기인 이종범(KIA)이었습니다. 저와 종범이가 똑같이 1번 타자 유격수였거든요. 도루도 하고 기습번트도 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다 고교에 진학하자 키가 자라서 3학년 땐 4번 타자였죠.
4번 타자 3루수라면 매력 있는 자리군요.
3루수라, 매력이 있는 포지션이죠.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1995년에 김용희 감독이 신인인 제게 롯데 4번을 맡겼습니다. 처음엔 아주 부진했어요.
개막 뒤 첫 12타수에서 안타 하나였을 겁니다. 너무 죄송해서 “2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릴까 생각도 했어요. 어쨌든 김감독께서 믿고 밀어주셔서 제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포지션은 3루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루수가 됐습니다. 그때 롯데에 내야수가 많았거든요. 박정태, 박계원, 공필성 선배에 박현승, 김민재까지 있었죠.
제가 3루수로 뛰면 그 가운데 한 명이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김감독이 교통정리를 하셨죠. 제가 1루를 맡고 김민호 선배가 지명타자를 하면 내야에 세 자리가 비니까요.
다른 내야수들이 저보다 수비가 좋았고 팀도 잘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부딪히다 보니 그때 3루수로 계속 뛰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선수생활을 더 오래 할 수 있었겠죠.
삼성 양준혁도 외야 수비를 하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하더군요.
준혁이 형도 1루수, 외야수, 지명타자로 왔다 갔다 했잖아요. 처음부터 수비를 잘하는 선수는 없습니다. 타격과 달리 수비는 노력에 따라 실력이 늡니다.
준혁이 형도 신인 때 실수하면서 배워가며 외야수를 맡았다면 자리를 잡았겠죠. 하지만 하다 말다 하니 확실한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한화 이범호도 실수가 무척 많은 선수였습니다. 기회를 보장받으니 큰 거죠.
고려대 시절은 어땠습니까.
2학년 때부터 경기에 나갔습니다. 4학년 때 성적이 가장 좋았어요.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려대 체육교육과 석사 과정에 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4학기째고 5학기까지 해야 합니다. 아내가 먼저 입학 제의를 했어요. 전 처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죠.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내 말을 듣기 잘했다 싶습니다. 좀 더 빨리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프로야구 선수가 은퇴하면 대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생소한 직업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쉽지만 어려움이 많습니다. 코치는 1년 계약에 연봉도 많지 않아요.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이 없어요. 또 설령 생각이나 지도방식이 달라도 윗사람의 뜻에 끌려 다녀야 합니다.
좋은 지도자, 좋은 선생이 되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가 실기 쪽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론적으로도 필요한 게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알차게 만들어놔야 은퇴 뒤 여러 일을 선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내의 선견지명이 고맙습니다.
선수로 뛰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는 게 가능합니까.
야간 과정이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좀 봐주시죠. 한 학기에 3,4과목 정도 듣는데 경기가 없는 월요일에 두 과목을 몰아서 들으면 어느 정도 공부할 수 있더라고요. 올핸 2군에 오래 있었으니 낮 경기 마친 뒤에 수업을 열심히 들었네요(웃음).
미국에 비해 야구이론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게 적은 게 우리 야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아 훌륭한 경험이 잘 전수되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제가 선수잖습니까. 선수 입장에서만 본다면 감독, 코치는 존경 받을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뛰어나다든지 아니면 인품이 훌륭하다든지.
어떤 분을 험담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선수들이 존경하는 지도자는 많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점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내가 감독을 하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고요. 실패하는 감독이 더 많습니다. 노력과 준비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나올 감독들은 형식적인 해외연수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사람을 관리하고 경기를 이끌어가야 하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SK 김성근 감독은 어떤가요.
존경하는 야구 선배 가운데 한 분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셨고. 대학 강의도 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한국프로야구 발전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야구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추어 이야기로 돌아가죠. 고려대 4학년이던 1992년 롯데에 2차 1순위 지명을 받고 상무에 입단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대학 때 신체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프로에서 뛰다 상무나 경찰청 팀에 갈 수 있지만 그땐 현역 판정을 받으면 프로야구선수도 일반 사병처럼 일선부대에 배치됐습니다.
방위병이 됐으면 아마 입단했을 겁니다. 홈경기는 뛸 수 있었거든요. 집에 돈이 없어서 편법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죠.
26개월 동안 야구를 못하는 건 큰 손실 같더군요. 그래서 아마추어 신분으로 상무에서 야구를 계속하며 제대 뒤에 승부를 걸자고 마음먹었어요.
상무 김정택 감독이 국가대표팀에 계속 추천하며 잘해주셨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편안하게 군생활을 했습니다.
상무 입단 2년째인 1994년 니카라과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 대회에는 쟁쟁한 선수가 많이 나왔는데요.
쿠바대표팀의 올란도 에르난데스, 리반 에르난데스, 롤란도 아로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했죠. 미국대표팀에는 매트 모리스가 있었고 일본대표팀에는 지난해까지 요미우리 2루수를 본 니시 도시히사가 있었습니다.
한신 타이거스 시절 이종범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진 가와지리 데쓰로도 일본대표였죠. 한국도 그때는 대학야구 전성기라 문동환, 조성민, 심재학 등 쟁쟁한 멤버였습니다.
쿠바, 미국, 한국의 수준이 높았던 것 같군요. 하지만 쿠바가 단연 최고였습니다. 한국선수들이 덜 다듬어진 미완성 제품이라면 그 친구들은 완성품이었어요.
쿠바는 한 경기에 투수 한두 명밖에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오든 완투 아니면 7회 콜드게임승이었죠.
인상에 남는 선수가 있었습니까.
쿠바 왼손투수인데 메이저리그에 간 선수는 아닙니다. 키가 175cm 정도였는데 시속 155km를 던지더군요. 키가 작은데도 타자 바로 앞에서 공을 던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독특한 경험이었죠.
한국 타자들이 그 투수에게 안타를 세 개 쳤는데 그게 경기에서 유일하게 외야로 뻗은 타구였습니다. 대단했습니다. 한 수 위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그런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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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은 한 방 후. |
롯데, 신인 4번 타자 1995년 롯데 입단 때 계약금이 많았습니다.
1억 8천만 원이었습니다. 4학년 때 제시 받은 계약금은 5천만 원 정도였습니다. 1994년 11월 현대 피닉스가 창단하며 전체적으로 계약금 인플레가 됐는데 그 덕을 본 거죠.
아마추어팀인 피닉스가 돈을 쓰니 프로에서도 ‘우리가 돈이 없냐’하면서 경쟁이 붙은 거죠.
롯데에 입단하니 어떻던가요.
제가 돈을 많이 받고 갔죠. 돌아가신 박동희 형이 1억 4천만 원으로 구단의 최고액 계약금 기록이던 때였어요.
동희 형이 최동원 선배 기록을 깼고 제가 동희 형 기록을 넘어선 거죠. 물론 그 다음에 차명주와 손민한이 5억 원씩 받으며 한참 앞질렀지만.
어쨌든 최동원, 박동희 선배는 투수지만 전 타자였어요. 그러니 입단 때 기자회견까지 했죠. 선배들을 보니 딱 느낌이 ‘뭐야, 쟤가 야구를 그렇게 잘해’ 이거더군요. 시선이 많이 꽂혔고 긴장이 됐죠.
하지만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거의 모두 중학, 고교 때 보던 선후배였으니까요. 저도 어릴 때부터 맞아가면서 어렵게 야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선후배 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웠죠.
아마 서울에서 운동한 친구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힘들 겁니다.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전 잘해야 한다는 부담 정도였죠.
그해 신인으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습니다.
복받은 거죠. 한국시리즈란 게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경험을 데뷔 첫해 할 수 있다는 건 행복입니다. 우승을 못해 아쉬웠지만 개인적으론 한국시리즈에서 홈런도 쳤고 시즌 뒤 열린 한일슈퍼게임대표선수로도 뽑혔죠.
신인으로 슈퍼게임에 출전한 건 저뿐이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 많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큰 무대에서 뛰었습니다. 성장하는 데 좋은 발판이 된 경험이었죠.
하지만 정작 한국시리즈 우승은 꽤 늦게 2002년 삼성에서 했군요.
1999년에는 우승할 줄 알았습니다. 삼성과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투수들이 지쳤어요. 그래서 한화에게 졌습니다.
플레이오프가 7차전까지 갔는데 마지막 세 경기가 모두 6-5 한 점 차 승부에 7차전은 연장 12회까지 갔습니다. 녹초가 됐죠. 하지만 그때가 좋았어요. 가족 같은 정도 있었고.
요즘도 그때 멤버들과 자주 얘기합니다. 다시 모여 운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요.
첫 시즌부터 1998년까지 타율과 홈런이 반비례 그래프였어요. 정교한 타격과 파워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했던 건가요.
기록으론 그렇게 보이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1999년 전까지는 운영의 묘가 없었어요. 투수가 승부를 피하면 걸어나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억지로 치려고 한 거죠. 그러니 3할을 못 쳤죠.
또 상대에 따라 다르게 공략해야 하는데 제 스타일대로만 치려다 보니 홈런도 많지 않았습니다.
1999년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을 일본 고지현에서 했습니다. 그때 만난 분이 모도이 미쓰오 인스트럭터였습니다. 그 분에게 운영의 묘란 걸 배웠습니다. 그 뒤로 홈런과 타율이 함께 올라갔습니다. 타격에 눈을 뜬 기분이었습니다.
‘운영의 묘’가 뭡니까.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너무 강하면 부러지잖아요. 그런 걸 배운 거죠. 몸쪽 공의 경우 팔꿈치를 조금 구부려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쳐도 타구가 뻗어나간다는 겁니다.
바깥쪽 공은 팔꿈치를 쭉 펴서 때려야 하죠. 전에는 어떤 공이든 똑같이 치려 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맞지 않으면 범타가 될 확률이 높았죠.
1999년 타격왕(0.372)을 할 때 몸쪽 공을 쳐 안타를 만드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격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힘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제가 보통 사람들보다 힘이 좋은 편입니다. 그러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장타를 칠 수 있었던 거죠.
선수협
혹시 〈한국야구사〉에 마해영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나오는지 보셨습니까.
책은 봤는데 그건 모르겠군요.
1990년 9월 2일 대학야구 가을철리그 고려대-영남대전에서 몰수게임이 선언됐는데 3루수 마해영이 영남대 3번 타자의 타구 때 태그플레이 여부를 두고 시비가 붙은 이야기에 처음 나옵니다. 그때 영남대 3번 타자가 지금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 나진균 씨입니다.
아, 맞습니다.
1999년 시즌 뒤 이른바 ‘선수협 파동’이 빚어졌습니다. 그때 일도 많이 했고 마음 고생도 심했을 것 같습니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롯데에서 14명이 가입했다 저랑 박정태 선배 둘만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서운했지만, 뭐랄까 다 그런 것 같아요. 지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유도 있었어요. 부산 사람들이 서울에서 계속 생활해야 하는데 당장 잠잘 곳이 마땅찮았습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12월과 1월에는 연봉을 받지 못합니다. 그때 팀에 억대 연봉 선수도 없었습니다. 오래 버티긴 어려운 상황이었죠.
2000년 3월 문화관광부가 나서 중재하긴 했지만 연말에 다시 갈등이 커졌죠. 그때 구단들의 보복 조치로 방출 조치까지 당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방출된 게 여러 번입니다.
그러네요. 그땐 방출이란 게 가슴에 크게 와 닿지 않았어요. 나이도 젊었고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이번에 겪은 방출과는 좀 다릅니다.
방출 직후 ‘어용 선수협’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야구판 ‘노노(勞勞) 갈등’이었습니다.
비겁한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대단했습니다. 자기들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게. 하지만 그 분들도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었을 테죠.
선수 입장인 데다 후배들에게 뭔가를 말해야 하는 선배 입장이고. 저희 입장에서도 후배가 선배를 밟고 일어설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중에 후배들은 알 겁니다. 선수들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선수협의 발단은 이래요. 1999년 슈퍼게임 때 출전 선수들이 뭉쳤습니다. 나이 든 선배나 힘 없는 선수가 나서면 다친다. 해야 할 일이라면 힘 있는 선수들이 하자. 그랬는데 나중에 등을 돌린 사람도 나왔죠. 그렇더라고요.
그 뒤로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선수협회가 있다는 건 다행입니다.
선수협 1기 감사로서 지금 선수협회에 조언한다면.
좀 아쉬운 점은 소극적이라는 겁니다. 선수 대표들도 그렇고 사무총장도 그렇습니다. 누구를 상대로 이긴다, 진다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잘 준비하고 협상해서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끌어내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능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이 아쉽지만 솔직히 쉽지는 않은 일이라고 봅니다.
8개 구단과 KBO와 얘기를 해야 하는데 선수 입장에서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자금 관리를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하는 겁니다. 운영이 잘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하거든요. 법이나 제도가 개선되도록 노력도 해야 하고.
삼성, 그리고 전성기
2001년 1월 31일 삼성으로 트레이드됐습니다. 김주찬과 이계성이 트레이드 상대였죠.
최동원 선배의 뒤를 따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선배도 선수회 문제로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선수협에서 일을 했고 평소 연봉 협상 등에서 선수 입장을 대변하는 쪽이었습니다. 구단에선 달갑지 않았겠죠.
어쨌든 프로선수니까 가서 잘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서 못하면 비참해질 것 같았어요. 새 팀에서 적응을 잘해 일이 잘 풀렸던 것 같습니다.
롯데는 어떤 식으로 트레이드를 통보하던가요.
계약하자는 얘기를 하지 않더라고요. 계약을 해야 될 때인데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하질 않아요. 그래서 이상하다, 뭔가 움직임이 있구나 하는 감은 잡았어요. 각오를 했죠. 달리 방법이 없으니 트레이드를 수용했습니다.
이철화 단장은 애를 많이 썼습니다. 제 편에 서서 꼭 필요한 선수라고 윗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단장 힘으로는 안 됐던 거죠. 사정을 솔직하게 말해주셨습니다.
원래 해태에서도 절 데려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해태는 모기업 사정이 어려웠습니다. 후배가 어쩔 수 없이 트레이드된다면 이왕 가는 거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을 하라며 삼성으로 보내주신 거죠.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지금 LG 같진 않았습니다.
삼성과 롯데의 차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룹 이미지와 비슷한 것 같아요. 롯데는 가족적이고 선수들을 쉽게 내보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봉은 높지 않죠. 반면 삼성은 연봉은 높지만 가족적이진 않아요. 철저하게 성적과 능력을 따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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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영의 선수로서의 마지막 소원은 내년에 반드시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
프로야구에서 오른손타자로 3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친 선수가 몇 명일 것 같습니까.
승엽이가 많이 쳤고. 많진 않을 것 같습니다.
왼손타자는 이승엽 한 명이고 오른손타자는 마해영(2001~2003년)과 타이론 우즈(1998~2001년,4년 연속)뿐입니다. 삼성에 있을 때가 전성기인 것 같은데요.
가장 아쉬운 게 있습니다. 선수협 문제 때문에 2000년 전지훈련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도 모도이 씨가 롯데 인스트럭터를 맡았습니다. 좀 더 배웠다면 훨씬 많이 타격내용이 정리 되고 도움이 됐을 텐데.
삼성 시절에도 그게 아쉬웠어요. 해마다 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시즌을 마치고 타격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모도이 씨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댁에서 식사도 하고 마당에서 스윙도 했죠.
하지만 일회성이다 보니 얻을 수 있는 게 많진 않았습니다. 좀 더 배웠다면 타격에 기복도 덜했을 텐데요.
롯데 때는 꽤 기복이 심했습니다. 삼성 때는 어땠습니까.
기복이 있었는데 롯데 시절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모도이 씨에게 배우고 난 뒤 타격이 한 단계 올라섰기 때문에 덜했던 것 같아요. 워낙 팀 성적도 좋았고 동료들도 뛰어났어요. 전체적으로 삼성 시절은 순탄했습니다.
삼성 시절 하이라이트라면 역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끝내기 홈런이겠죠.
2001년에 정규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갔는데 두산에게 졌어요. 그때 ‘아, 삼성이 우승을 못한다는 게 진짜 징크스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밤비노의 저주’처럼요.
이걸 반드시 깨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다른 선수들도 그랬을 겁니다. 2002년 시리즈 6차전에서 앞서던 경기가 뒤집혔어요. 그러니 막판에는 7차전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9회말에 (이)승엽이가 동점 홈런을 친 뒤 제가 타석에 들어섰어요. 연장전은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투수(최원호)가 승부하길 바랐습니다. 제 뒤의 준혁이 형이 잘 맞고 있어 그냥 보내려 하진 않더군요. 큰 거 한 방을 조심해야 하니 몸쪽은 아닐 것이다, 바깥쪽을 노리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상이 맞아 떨어졌죠.
스윙을 한 뒤 한동안 전광판을 쳐다봤어요. 지금이 9회가 맞나, 8회면 안 되는데라고 한 번 더 확인한 거죠. 9회말이 맞더군요. 드디어 우승하는구나라는 느낌이 밀려왔습니다.
제가 훗날에도 야구팬들 입에 오르내릴 일을 하나 했다면 그 타석일 겁니다. 제게는 큰 재산입니다.
홈런 방향은 우익수 쪽이었죠.
그렇습니다.
시즌 홈런 30개를 친다면 그 가운데 밀어친 타구는 몇 개쯤인가요.
다섯 개 정도. 그 이상은 치기 어렵습니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에서 밀어쳐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는 김동주 정도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슬러거들이 줄어드는 투고타저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투수들의 능력이 좋아졌어요. 질적, 양적으로 다 좋습니다. 예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던질 투수가 없다고 하는 감독들이 있지만 감독이기 때문에 하는 푸념이죠.
두 번째 이유는 지나친 작전 야구입니다. 희생번트, 히트 앤드 런으로 점수를 짜내는 야구가 대세입니다. 이런 야구에선 점수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타자로서는 과감하게 칠 수 있는 타석수가 줄어듭니다.
늘 사인을 봐야 하고 사인에 따라 움직이면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결과가 적습니다. 그럼 타격에 발전이 더딥니다. 경기 수가 줄어든 것, 외국인선수 두 명을 투수로 뽑는 흐름도 이유입니다.
12회 연장 이닝 제한도 이유로 들 수 있겠군요. 이닝 제한이 있으니 감독들이 마무리투수를 끝까지 던지게 합니다. 타자에게 불리한 점도 있지만 특정 투수를 혹사하는 가운데 나머지 투수들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무승부 경기는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닝 제한이 없으면 선수로서는 다음날 경기나 이동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프로 아닙니까.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럴수록 몸 관리가 중요해지는 거죠. 왜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새벽까지 하면 안 됩니까. 간혹 그런 경기가 있으면 화젯거리도 될 텐데요.
어린이들의 귀가 시간이 이유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야간경기를 혼자 보러 오는 어린이가 몇이나 있나요. 기사 마감시간을 맞추려고 이닝 제한을 한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스테로이드 등 성적향상을 위한 약물이 만연하다 최근에는 줄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점도 투고타저에 영향을 미친 겁니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 몸에 변화가 일어나겠죠. 승엽이와 제가 홈런 한창 칠 때보다 요즘 선수들 몸이 더 좋습니다. 다른 이유가 더 큽니다.
선수생활하면서 약물의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유혹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에는 그런 생각까지 듭니다. 나는 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 팬들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약이라도 먹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나.
금지 약물을 복용한 선수가 있다면 왜 먹었는지 이해가 가긴 합니다. 저보다 일찍 야구를 그만둔 선수들도 그런 걸 느꼈겠죠. 이젠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2003년 시즌 뒤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었습니다. 삼성과 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확할 겁니다. 원래 삼성이 원한 시나리오는 승엽이를 잡고 정수근과 박종호를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수근은 나중에 롯데에 빼앗기긴 했죠.
하지만 정수근이 입단하면 준혁이 형이 외야에서 지명타자로 옮겨야 했습니다. 저와 포지션이 겹치죠. 삼성이 둘 가운데 한 명을 잡는다면 물론 준혁이 형이죠.
그래서 면전에서 나가라고는 할 수 없으니 약간 섭섭한 정도의 요구를 한 겁니다. 그럼 제가 알아서 나가거나 만일 계약해도 싸게 데리고 있는 거죠. 절 싸게 잡으면 나중에 다른 선수와 계약할 때 기준이 되죠.
삼성의 조건은 어땠습니까.
계약 기간 3년에 20억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이너스 옵션 3억 원이 붙어 있었습니다. 보장된 금액은 17억 원이었죠. 삼성에서 3년 동안 낸 성적에 비하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KIA와 4년 28억 원에 계약했습니다. 1년 연봉으로만 따지면 큰 차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제 기준은 이랬습니다. 준혁이 형이 2001년 시즌 뒤에 4년 27억 원에 계약했습니다. 계약 전 성적으로는 제가 크게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준혁이 형은 LG에서 이적했기 때문에 보상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제 영입 비용은 40억 원 가까이였습니다. 제 입장에선 비교가 되죠.
결과적으로 삼성은 이승엽과 마해영을 모두 떠나 보냈고 1년 뒤에 심정수를 60억 원에 영입했군요.
돈이 많이 남았잖아요. 그래서 양껏 쓴 거죠. 정수와 (박)진만이는 승엽이와 제가 떠나서 더 대우를 받은 셈입니다. 프로야구 선수들 계약에는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신인 때부터 오픈스탠스로 유명했습니다. 폼을 수정했던 적이 있습니까.
전 타격폼은 바꾸지 않습니다. 오픈스탠스는 최홍석 선배(전 MBC, 삼성)에게 배웠습니다. 고려대 선배인데 은퇴한 뒤 미국에서 야구 연수를 했습니다. 미국 타자들이 오픈스탠스를 많이 하잖습니까.
오픈스탠스는 바깥쪽 공에 약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키가 크고 배트를 길게 쓰는 타자들은 바깥쪽을 칠 수 있어요.
신인 때 그 폼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계약금도 많은 친구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식으로 야구를 하니 ‘저게 과연 좋은 거 맞냐’는 시각도 있었죠. 지적은 많이 받았지만 폼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KIA, 그리고 LG
FA로 KIA와 계약했습니다. 그 뒤로 부진했습니다.
KIA와 계약한 뒤 광주로 갔어요. 광주구장을 지나는데 전광판에 제 계약 소식이 나오더군요.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홈런 40개로 잡았습니다. 그 정도는 해야 몸값을 하겠다 싶었죠.
그게 실수였습니다. 원래대로 꾸준하게 했어야 하는데 더 잘하려고 하다 보니 오버워크가 됐습니다.
삼성 시절에는 구단에서 제 운동하는 습관이나 스타일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 팀에선 제 세세한 면까진 모르니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부진하니 모도이 씨 생각이 더 나더군요. 결국 성적이 나빠졌고 올해로 4년째 한 게 없네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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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직 LG 2군 감독. |
2004년 KIA는 김성한 감독이 맡고 있었습니다. 현역 시절 3, 4번을 친 홈런 타자 출신이라 절 아껴주셨습니다. 중심 타자의 고민을 알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전반기가 끝나고 김감독이 해임됐습니다.
그리고 유남호 감독 대행이 임명된 뒤 ‘팀을 추스른다’는 이유로 제가 2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던 거죠.
2005년 전반기엔 성적이 좋았습니다. 타점(54개)이 5위 안에 들었고 홈런(11개)도 꽤 쳤습니다. 그런데 후반기에 감독이 다시 서정환 대행으로 교체됐습니다. 또 2군행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적이 좋을 리가 없죠.
그렇게 2군에 있다 2005년 11월 LG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이순철 감독과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감독이 전반기도 아닌 5월에 해임됐습니다. 또 2군행이었죠.
올해는 11경기에만 뛰었습니다. 성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선 기회가 없었습니다. FA로 많은 돈을 받고 온 팀에서 풀 타임을 뛰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죠.
삼성 김응용 사장이 “네가 삼성에 있었으면 20경기 동안 안타를 못 쳐도 계속 내보냈을 거다”라며 위로했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은 “가만 놔 두면 자기 할 일은 하는 선수”라고 합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지 못한 게 불운이겠죠.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쫓겼습니다. ‘이 타석에서 치지 못하면 또 2군이다’. 그런 생각 없이 운동을 하다 그런 일을 겪으니 힘이 들었습니다.
고액 연봉 선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성적만의 문제는 아닐 듯한데요.
2005년에 KIA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꼴찌를 했습니다. 그러니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전 세대교체 대상이었죠.
경기에 뛰지 못하고 2군에 있으니 팬들이 제 홈페이지에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물었습니다. 언론에는 제가 부상 중이라고 나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부상이 아니라 세대교체 문제로 출전 기회가 없어 2군에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꽤 장문의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인격적으로 존경 받고 능력이 뛰어난 분이 와서 팀이 강해지고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대행 체제였으니 사심 없이 쓴 글입니다. 그런데 한 기자 분이 그 구절만 따서 기사를 썼습니다. 보도가 된 뒤 서정환 대행이 전화를 걸어서 “네가 나를 비난했다면서”라고 하시더군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KIA에서 LG로 트레이드된 거죠.
올해 첫 경기를 봤습니다. 그 경기에서 몸에 붙는 공을 피한 뒤 힛 바이 피치로 출루하지 못한 장면과 기습번트를 대고 1루에서 아웃된 장면을 봤습니다.
그게 벤치에서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김재박 감독의 야구죠. 제 입장에선 야구가 바뀐 거죠. 노력해서 바꾸려 한 겁니다. 맞춰가야 하니까요.
김재박 감독은 선수에게 지시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더 무섭습니다. 이순철 감독은 심한 말도 하지만 뒤끝이 없습니다. 반면 김재박 감독은 말이 별로 없어요. 다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뉘앙스를 남기죠. 그랬는데 선수가 바뀌지 않으면 조용히 (2군으로)내려가는 거죠.
예를 들어 “어, 글러브가 좀 큰 것 같다”고 한마디를 합니다. 재치 있는 선수라면 글러브를 바꿉니다. 그 분 스타일이 원래 그렇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진 않지만 에둘러 하는 지시에 선수들이 따라야 합니다. 저도 따르려고 했습니다.
선수 입장에선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희생양이 됐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감독이 해임되면서 저도 2군으로 내려갔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방출 통보를 받았죠. 이감독이 데려온 선수, 코치들은 다 정리가 됐습니다. 저는 계약기간이 남아 있어서 정리가 1년 늦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구단에서 이순철 감독의 잔재를 지우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해 방출 통보 뒤 LG에서는 트레이드를 추진했습니다.
SK, 현대와 트레이드 협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LG에서 선수를 요구했기 때문에 일이 틀어졌습니다. 현대에는 정성훈을 달라고 했고 SK에도 젊은 유망주를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 와중에 ‘트레이드 때 연봉 일부를 손해볼 수도 있다’는 언질은 없었습니까.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트레이드도 실현되지 않았고요. 제 거취에 관한 결정이 단장 윗선에서 이뤄졌다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게 있다면 “상황이 이러저러하니 방출을 예고한 것”이라는 설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한 번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올해 6월에 “쓰지 않을 선수라면 방출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무조건 안 된다는 말뿐이었습니다.
부진이 시작된 2004년 나이가 34살이었습니다.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오른손 슬러거인 김성한과 장종훈은 34살부터 내리막길을 걸었고 이만수도 35살부터 하향세였습니다. 나이가 기량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가장 억울한 게 그겁니다. 선배들이 뛰던 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그때는 웨이트트레이닝이 없었어요. 김성한, 이만수 선배는 그 나이에 몸이 눈에 띄게 불었습니다. 장종훈 선배는 나이가 들어 근육이 딱딱해진 경우였죠.
지금 선수들은 체계적으로 몸을 관리합니다. 저도 항상 몸 상태를 점검합니다. 올해도 LG에서 제가 가장 멀리 타구를 날렸습니다. 스피드가 떨어지면 타구가 멀리 뻗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그래도 출전 기회가 있었지만 전 없었습니다. 100경기 이상 뛰어 안 되면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반기에 11홈런치고 후반기에 출전을 못했는데 홈런수가 적다고 하니, 이건 말이 맞지 않습니다.
내년 시즌에 대비해 변화를 시도하는 내용이 있습니까.
타격폼을 바꾸진 않을 겁니다. 13년 동안 해온 걸 바꾼다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야구인생에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대신 배트 스피드를 올리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더 열심히 할 겁니다. 배트 무게와 길이도 줄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마무리를 잘하고 싶어요. 다시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수생활을 영원히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은퇴를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억지로 밀려난 느낌입니다.
저도 한국프로야구해서 뭔가를 했다면 한 선수입니다. 제가 이렇게 물러나면 후배들도 나이 들어서 같은 상황을 겪지 않겠습니까.
저도 정말 안 되는데 억지로 하겠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아직 자신이 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열정이 남아 있는 겁니다. 몸이 따르지 않고 배트 스피드도 안 된다면 저 자신이 부끄러워서라도 그만둘 겁니다.
노장선수에 대해선 한국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안 된다는 편견이죠. 하지만 세대교체란 게 과연 무 자르듯이 되는 겁니까. 한화 류현진이 세대교체를 해서 큰 게 아닙니다. 삼성 오승환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는 실력으로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후배가 더 잘하면 밀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이 든 선수의 기회 자체를 박탈해서 과연 세대교체가 잘 될까요.내년에 반드시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게 선수로서 마지막 소원입니다
김영직│LG 2군 감독 인터뷰
마해영이 부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마해영은 오픈스탠스로 힘에 의존해 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오픈스탠스를 바꾸기를 바랐다. 노력은 했지만 변화가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마해영은 기량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선수 자신은 잘 모른다. 특히 배트 스피드의 변화는 선수가 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마해영뿐만 아니라 많은 선수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마해영은 2군에서도 기회가 적었다고 말한다.
우선 2군에서도 성적이 나빴다. 2군 투수들이 마해영에게 공을 던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반기가 끝났을 때는 사실상 1군에 복귀할 전망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2군 지도자 입장에선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나.
훈련 태도는 어땠나.
열심히 했다. 동료들과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기량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다. 마해영과 LG의 인연이 좋지 않게 끝났는데.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다. LG는 1, 2위를 달리는 팀이 아니다. 여유가 없는 팀이었다. 다른 팀에 마해영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선수들의 은퇴에 대한 생각은.
나는 스타일수록 멋있게 은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스타는 명예롭게 물러나야 한다. 나는 대타로 현역시절을 마감했다. 하지만 내 역할은 처음부터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