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원 침대에서 죽고 싶지 않아. 집에서 죽고 싶어.
왜 죽을 생각부터 해.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살 수 있다는 생각만 하다가 죽고 싶진 않다 말이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야. (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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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니까. 미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눈앞에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나타났으므로 어느 여름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청개구리는 사라지고,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울어버릴지도.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 한 송이.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完. 38쪽)
우주적 위로의 달콤함
안서현 / 문학평론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거기에 진짜 천국이 있는 것이다.
또한 나의 천국은 다음과 같은 것.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 최진영, 「스위트 홈 스위트」, 37쪽
겨울날 밤하늘과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이 천국에서 ‘나’는 사라지지도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픔도 병도 삶과 이 세계의 일부로서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다시 최진영 작가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우주적 시간의 위로, 구체적 슬픔의 위로, 바라보는 일의 위로 들을 찾아냈을까. 이 위로를 찾기 위해 또 얼마나 긴 격정과 조심의 시간이 있었을까. 어떻게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위로한다는 것을 알아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