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1일 화요일]
『대동야승』 제13권 [權奸 김안로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 진산(晉山)에 강(姜)씨인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과거 보러 서울에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책을 짊어진 짐꾼 한 사람과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초재[草岾]를 넘다가 중도에 날이 저물었다. 산은 깊고 숲은 빽빽하였으며 호랑이 발자국이 길 여기저기 나 있어서 강씨는 무서워서 어리둥절하였으며, 사방을 돌아보아도 투숙할 만할 곳이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얼핏 보니, 한 동굴의 그윽한 바위 사이로 흡사 등불 그림자 같은 빛이 있는 것을 보고서 사람 사는 곳인 줄 알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 쪽으로 가 보았다. 동굴이 마치 집과 같는데 초목이 빽빽하고 그 앞은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둔 것이 황폐하여 사람의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늙은이가 굴안에 홀로 앉아 있는데 모습이 매우 작아보였으며 바위 쪽에 은은한 빛이 반사되어 머리카락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선비가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이러지저러지도 못하여 하는 수 없이 몸을 맡겨 쉬어 가기를 청하니, 그 늙은이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나그네의 하룻밤 잠자리를 아껴서 하는 말이겠습니까마는, 나에게는 장성한 아들 셋이 있어서 산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곧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혹시 그들을 거스릴까 염려되오니, 조심하여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비가 무서워하면서 그곳을 나왔으나, 밤은 깊고 하늘은 어두워 방향을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새벽을 기다렸다. 조금 후에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나무와 풀이 쓰러지며 무엇이 내려왔다. 선비가 숨을 죽이고 개미처럼 엎드리고 살펴보니, 수레의 굴대 만한 세 마리 큰 뱀이 굴속으로 들어가더니, 곧 세 사람의 장부(壯夫)로 변하고 늙은이 앞에 줄지어 앉았다.
늙은이가 일이 잘 되었는지를 일일이 물으니, 첫째와 둘째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는데, 셋째는, “잘 되었습니다.” 하고, 마치 사람을 물어뜯고 사람의 혈기를 빨아 먹은 공을 말하는 것 같았다. 늙은이가, “무엇이 잘 되었단 말이냐.” 하고 물으니, 셋째가 말하기를, “산길과 마을 길을 가로질러 갔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용궁현(龍宮縣)의 집들이 조밀한 곳으로 들어가 우물가 창포밭 속에 도사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 고을에서 우두머리쯤 되는 관리가 마침 밤에 술에 취하여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있는데 한 여자가 물항아리를 이고 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그 여자의 발꿈치를 물어서 그녀의 혈기를 실컷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하였다.
늙은이가 놀라서 말하기를, “너는 왜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다 죽을지도 모른다.” 하므로 “왜 그러십니까.” 하니, 늙은이가, “고을에서 우두머리 관리라면 그는 구해서 못 얻을 것이 없다. 약을 찾고 재액을 퇴치하기 위해 반드시 극도로 노력할 것이니, 만약 정월 첫 해일(亥日 돼지날)에 만든 참기름 세속에서는 콩기름이라고 한다. 을 얻어 끓여서 그 상처에 바르고, 또 그것을 낫자루 구멍에 발라서 울타리 어중간쯤에다 그것을 꽂아 두면 우리들은 다 죽고 마는 것이다.” 하고는, 오래도록 한탄하였다.
선비가 가만히 들어 두었다가 용궁현으로 곧장 달려가서 그 여자 집을 찾아서 물어보았다. 과연 여자가 밤에 물을 긷다가 뱀에 물려서 지금 앓고 있었으므로 선비가 산에서 들은 이야기를 낱낱이 알렸다. 그때는 2월이라 정월이 지난 지 오래되지 않았다. 마침 관리 집에 정월 해일(亥日)에 짠 기름이 아직도 병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을 선비의 말대로 바르고 또 재액을 퇴치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그 굴에 가 보았더니 네 마리의 큰 뱀이 서로 베고 엉켜서 죽어 있었다. 여자의 통증도 얼마 되지 않아 나았다.
천 년 묵은 정기가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바위에 비추는 것이 야광주(夜光珠)가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이웃에 재남(在南)이란 선비가 있어 그 일을 자세히 듣고서 그 방문(方文)을 전해주었는데, 꼭 정월 해일(亥日)에 기름을 짜서 약으로 간직해 두었다가 뱀에게 물린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더니 낫지 않는 이가 없었다. 뱀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판별할 수 없었으니, 뱀굴을 찾아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약이란 모두 상극성(相克性)을 지녔으니, 의원들의 말에 생선가시가 걸린 데는 어망(魚網) 태운 재를 쓰고 말에게 물린 데는 말채찍 태운 재를 쓴다는 것으로, 이런 종류는 매우 흔하다. 돼지가 뱀을 잡아먹기 때문에 뱀은 돼지를 가장 두려워한다. 뱀이 해일(亥日)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일까.
옛적 손오(孫吳 중국 삼국 시대의 오 나라) 시대에 영강(永康) 사람이 큰 거북 한 마리를 잡아 오왕(吳王)에게 진상하려고 커다란 고목에다 매어 두었다.
그런데 밤중에 그 나무가 거북을 불러 말하기를 “고달프겠구나. 거북아, 어쩐 일이냐.” 하니, 거북이 대답하기를, “내가 삶아 지려면 남산의 나무를 다 써도 안 될 걸.” 하였다.
나무가 말하기를, “제갈원손(諸葛元遜 원손은 제갈각(諸葛恪)의 자)은 박식한 사람이니, 반드시 그 일을 도와줄 걸. 만약 나 같은 것들을 구하게 한다면” 하니, 거북이,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마라. 화가 네게도 미치게 될 것이니.” 하자, 나무가 잠잠했다.
거북을 가져오니 손권(孫權)은 삶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나무를 때도 여전히 말을 지꺼려댔다. 제갈각(諸葛恪)이 말하기를, “그럴 게다. 묵은 뽕나무라야 삶기지.” 하니, 거북을 진상한 자가 거북과 고목끼리 주고 받은 얘기를 말했다. 손권은 즉시 그 나무를 베어와 거북을 삶게 했더니 즉시 익었다. 그 뒤로 거북을 삶을 때는 뽕나무를 쓴다고 하니 앞에서 말한 일과 매우 비슷하다.
거북과 고목이 제갈원손의 박식함을 헤아려 알고, 늙은 구렁이가 능히 우두머리 관리의 재액 퇴치 방법을 짐작하였으니, 어찌 지혜롭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비밀스러운 말도 몰래 엿듣는 이가 있다는 교훈을 지키지 않아서 모두 화를 당했으니, 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됨이 이와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