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대학교 안내 책자를 보면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과거 종합대학에서 볼 수 없었던 생소한 전공과목이 즐비하다. e비즈니스, 디지털콘텐츠비즈니스, 벤처비즈니스, 게임공학, 뉴미디어, 애니메이션, 디지털음악전공 등. 안내 책자에 「21세기는 디지털 문화의 세기입니다, 21세기는 호서의 시대가 됩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호서大는 「벤처전문대학」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호서大는 1999년부터 디지털비즈니스학부, 전기정보통신공학부, 환경안전공학부에 각각 벤처비즈니스 전공을 설치해 이 세 개 학부에서 벤처비즈니스 관련 수업을 다 이수하면 벤처산업공학부 복수전공을 인정해 주고 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은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는 벤처 관련 과목을 집중 개설해 인문학부를 포함한 전교생이 수강하도록 하고 있다.
벤처사업 관련 경진대회 입상자, 특허권 소지자, 벤처창업자가 응시할 경우 특별전형을 실시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교수와 학생들에게 연구비를 대여, 벤처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벤처교수를 특별히 채용해 34명의 벤처교수와 5명의 실험실 창업교수가 활동하고 있다. 벤처창업 육성자금 100억원을 출연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두뇌한국(BK)21 선정과정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벤처전문대학원 설립인가를 따냈다. 한마디로 학교가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호서大 벤처전문대학원 金鴻(김홍·47) 원장은 호서大가 벤처를 주창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외국 대학에서는 100년 안에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만 나오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노벨상은 산업시대의 산물입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는 지금, 우리 학교는 10∼20년 안에 빌 게이츠와 같은 모범 벤처인을 양성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아흔 살 설립자가 벤처 관장
1995년부터 「벤처」를 부르짖었다니, 설립자나 총장이 당연히 젊었으리라고 짐작하겠지만, 1913년생인 설립자 姜錫圭(강석규·90) 명예총장이 오늘의 호서大를 주도하고 있다. 2000년에 鄭根謨(정근모·64) 총장에게 자리를 넘기면서도 姜 명예총장은 『벤처는 내가 직접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姜명예총장과 함께 호서大를 첨단 벤처 대학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은 전자공학 전공 黃熙隆(황희융·69) 교수와 벤처전문대학원 金鴻 원장이다. 세 사람은 각각 스무 살 이상씩 터울이 나지만 만나기만 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호서대학교는 1979년 3월에 천원공업전문대학으로 출발하였다. 1981년에 4년제 호서대학으로 승격했고, 1989년에 종합대학이 되었다. 현재 충청남도 천안의 1캠퍼스와 아산의 2캠퍼스, 서울의 벤처전문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립 24년 만에 현재 13개 학부, 2개 학과에 학생 1만2420명으로 성장했다. 일반대학원과 2개의 전문대학원, 7개의 특수대학원에서도 3700여 명이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10만 평 규모의 천안캠퍼스에는 주로 인문학부가 자리하고 있고, 100만 평에 이르는 아산캠퍼스에서는 첨단 학과들이 벤처열기를 뿜어 내고 있다.
지방대학의 황폐화, 학생들의 연쇄이동이 연일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호서대학교는 입학 때 추가학생을 모집하지 않아도 되며, 재학 중에 빠져나가는 학생도 거의 없다고 한다. 호서大는 역사가 짧아 동문들이 기탁하는 기금이 거의 없는데도 흑자경영을 하고 있다. 지방대학 호서大의 도약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이다.
姜錫圭 명예총장에게 짧은 기간에 학교를 키운 비결을 묻자 『기적이 가능케 했다』며 정면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가르는 모습이 담긴 액자 아래 걸린 화이트 보드에는 「miracle」(기적)이라는 글자와 함께 영어 성경 구절 몇 개가 쓰여 있었다.
「아흔 살의 나이와 벤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도식을 만들어 낸 姜錫圭 명예총장은 66세에 이 학교를 설립해 3년 전에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은 아산캠퍼스에 출근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남 논산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姜명예총장은 소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교원자격증을 따서 20代에 소학교 교사, 30代에 중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광복이 되자 33세에 뒤늦게 서울大 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여 학생회장까지 했다. 충남大와 명지大 교수를 거쳐 1964년 영등포에 서울공과학원을 설립하였고, 1969년 서울 은평구에 대성중·고교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육영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대학 설립의 꿈을 가진 것은 6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는 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여러 방안을 찾던 중 초등학교 때 친구를 찾아가게 되었다.
『노랭이라고 소문난 친구인데, 대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잘 길러보고 싶다고 했더니 선뜻 땅을 내놓는 겁니다. 그때부터 기적이 시작된 거지요. 그 땅을 팔아서 천안에 땅 사고 건물을 지었어요. 나중에 다 갚았지만, 초기에 친구가 땅을 안 줬더라면 시작을 못했을 겁니다』
친구가 내놓은 땅이 모두 300만 평이었다고 한다. 姜명예총장은 자신을 부동산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충남大와 명지大에서 교수로 생활하면서 오전에 강의를 하고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하여 되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목수 한 사람과 열심히 일해서 집을 쓸만하게 만들면 서너 배에서 많게는 열 배가 남았어요. 그걸 10년을 넘게 했어요. 대학을 시작한 뒤에도 한동안 그 일을 했으니까요. 그렇게 번 돈을 다 대학에 넣었지요』
나중에 부동산 업자들이 상담을 해올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광명에 산 논밭 몇천 평이 1년 만에 택지로 개발되면서 10배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서울공과학원과 1993년에 설립한 호서전산직업전문학교에서 얻은 수익도 모두 호서대학교에 쏟아 부었다. 이 학원들과 대성중·고교, 호서大를 모두 법인으로 등록했다. 2001년에 큰아들 집으로 옮기면서 살던 아파트 한 채와 저축을 합친 全 재산 8억원 가운데 4억원은 교회에 헌금하고 4억원은 학교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지금까지 학교에 쏟아 부은 돈을 다 합치면 몇천억원은 될 거라고 한다. 재산이 하나도 없는 姜명예총장의 얘기이다.
『어려서 너무 어렵게 자라서 節用節食(절용절식)이 습관화되었어요. 비싼 요리를 먹으면 기분이 나빠져요. 진실되게 살면 결과가 좋지요. 내가 참 잘한 일은 정치권에 들어오라는 두 번의 요청을 물리치고 학교에 전념한 겁니다』
鄭根謨 총장은 姜명예총장을 「깨끗하고 훌륭한 분」이라며 학교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기독교 정신이라고 소개했다. 호서大는 교수와 교직원을 채용할 때 첫째 조건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창기에 들어온 몇몇 교수를 제외하고는 교수와 교직원이 모두 기독교인이다. 나머지 채용조건은 실력이 있을 것과 40세 이하여야 한다는 점. 鄭총장은 교수 채용 때 고위층 로비가 통하지 않고, 돈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생들의 입학에는 종교 제한이 없는데 신입생들의 평균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다. 1, 2학년 때 기독교 개론과 채플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것 외에 다른 제약은 없는데, 졸업할 때쯤 되면 46% 정도가 크리스천이 된다고 한다.
호서大는 새로운 시대를 읽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가운데, 1995년부터 지금까지 지역 컨소시엄 우수대학, RRC(반도체 제조장비 국산화 연구센터) 최우수 등급 대학, 창업보육센터 최우수 운영 대학, 정보통신 관련 학과 시설 장비 지원사업 최우수대학, 문화컨텐츠 인력양성 우수대학 등의 실적을 올렸다. 2000년과 2002년에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선정하는 교육개혁 우수대학이 되었으며 정보통신부 지원 IT 우수대학에 선정되어 재학생 76명을 인도와 미국에 파견했다. 2002 韓日 FIFA 월드컵 개막식 행사에 선보인 「디지털 광대」가 바로 호서大의 작품이다.
호서대학교가 벤처전문대학이 된 것은 姜錫圭 명예총장이 서울大 工大 전기공학과 출신인데다, 공장을 운영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 공장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벤처전문대학원 金鴻 원장은 호서大가 벤처전문대학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립대는 공과대 투자에 인색합니다. 인문대는 칠판과 교실만 있으면 되지만, 공과대는 기자재 마련과 건물 짓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설립자가 工大를 알기 때문에 특성화를 일찍 시작했고, 産學협동을 지역에서 선도적으로 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理工系 중심의 실용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해 전기·전자 관련 학과는 모두 갖추었습니다』
호서大가 벤처전문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전자공학 전공 黃熙隆 교수는 1992년에 30여 년간 재직한 서울大에서 호서大로 자리를 옮겨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姜명예총장이 黃교수에게 서울大 후배들을 호서大 교수로 좀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제자들이 신설 지방대로 가는 일을 꺼리자 黃교수가 직접 온 것이다. 黃교수는 서울大에서 컴퓨터학과를 창설했고 컴퓨터 관련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냈다.
「꿈이 없는 자는 오지도 말라」
1992년 당시 姜錫圭 총장은 천안 일대 17개 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이었다. 黃熙隆 교수가 姜총장에게 권유해 대학총·학장 産學협의회가 설립되었고, 자신은 실무진들로 구성된 産學협동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때부터 姜명예총장과 黃교수, 金鴻 교수가 산자부, 충남도청, 천안시 등을 돌아다니며 천안 인근에 테크노밸리를 구성하자고 권유하였고, 그 과정에서 호서大는 매년 3억원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국 최초로 창업보육센터를 열게 되었다. 과기처 장관을 찾아가서 천안지역 특성화연구 과목으로 반도체 제조장비 국산화 연구센터(RRC)로도 지정받아 매년 5억원씩 지원받고 있다.
黃熙隆 교수는 호서大 産學협동에 대해 『지방에서 바람을 일으켰다는 게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중소기업청의 지원으로 각 대학이 창업보육센터를 운영하게 된 것은 1998∼1999년경의 일이다. 호서大는 이미 1995년부터 그 일을 시작한 것이다.
호서신기술창업보육센터는 체계적으로 지원이 잘 되고 있으며, 사립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입주 업체도 많아 여기저기서 견학을 많이 오고 있다. 지난 3월18일에는 새 정부의 중소기업청장이 호서신기술창업보육센터를 둘러보기도 했다.
현재 호서신기술창업보육센터에 4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인터넷 창업보육센터에는 13개 업체가 가입되어 있다. 이와함께 산업안전기술연구센터, 산학협동연구소, 지역협력연구센터 등이 개설되어 있다. 호서大는 앞으로 캠퍼스內에 20여만 평의 창업공장 설립 혜택을 부여해 벤처창업집적단지를 만들 계획이다.
호서大는 한국 최초로 중국 山東省(산동성) 威海(위해·웨이하이)市에 창업보육센터를 개설했으며 앞으로 9개 지역에 창업보육센터를 더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호서大는 중소기업청이 지정하는 벤처해외지원기관이다.
호서大는 1999년부터 학생창업보육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아산 캠퍼스 가장 깊숙한 데 자리한 학생벤처회관 외벽에 姜錫圭 명예총장의 글귀를 담은 큰 간판이 걸려 있었다.
「꿈이 없는 자는 오지도 말라. 끝내 해보겠다는 의욕이 없는 자는 오지 말라.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를 믿는 자만 오라」
현재 학생벤처회관에는 30개의 동아리가 입주해 있다. 동아리마다 6∼10명의 회원이 소속되어 있는데, 학생들은 학기마다 동아리에 들어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고 한다.
실적이 없으면 퇴출당하기 때문에 선배 회원들이 엄선하여 후배를 받아들인다. 이 가운데 화이어로봇 동아리는 화재감시 및 소화용 로봇을 개발하였고, 미국 경진대회에 나가 5위에 입상한 바 있다. 버텍스 동아리는 장애인 발 마우스를 개발해 특허출원 중이다. 그 외 여러 동아리들이 다양한 실적을 내고 있다. 30개 가운데 6개가 게임 동아리인데, 졸업한 게임학과 선배들이 방학 때 게임학과 후배들을 모두 모아 놓고 강의할 정도로 열성이 높다고 한다.
세미콜론 동아리방에서 만난 컴퓨터 공학과 3학년 경계현 학생과 4학년 김기연 학생은 『주말에도 집에 가지 않고 보육센터에서 연구할 때가 많다』고 했다. 평소 새벽 2~3시까지 연구를 한다며, 수업 외의 시간을 거의 보육센터에서 보낸다고 했다. 『대학생들이 술을 많이 먹는다던데 어떠냐』고 묻자 경계현 학생은 『술 먹을 시간이 없다. 학교에서 이런 시설을 마련해 주었는데, 열심히 해서 꼭 결실을 거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수원이 집이라는 두 학생은 『호서大에 자부심 갖고 다니고 있다』고 했다. 세미콜론 동아리에서는 인터넷 방송 시청 프로그램 「나오네」를 개발해 학교와 중소기업청으로부터 8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한다.
학생벤처센터 개원 이후 2년6개월 동안 대학원생과 학부학생들에게 모두 3억9450만원이 연구비로 지원됐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특허와 실용신안을 출원 중이거나 획득한 것이 40여 건에 이르며, 각종 벤처관련 경진대회에서 아홉 차례 수상했다. 창업박람회에 34팀이 참여했다. 학생벤처센터 출신이 창업한 벤처업체가 18개에 이르며, 현재 입주하고 있는 동아리 가운데 6개가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교수와 학생 창업 적극 지원
호서大는 교수들의 창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교수에게 벤처창업연구비를 최고 3억원까지 지원하고 있는데, 책임 연구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대여연구비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3억원을 빌려 주되 성공하든 실패하든 갚아야 한다. 성공하더라도 다른 조건은 없고 원금만 반납하면 된다.
현재 48명의 교수가 생산업체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학교에서 대여한 액수는 모두 100억원에 이른다. 아이디어와 타당성이 인정되었을 때 교수는 최고 1억원, 대학원생은 1250만원, 학부생은 520만원까지 무상으로 지원받는다. 기술개발을 하여 상품화해도 되겠다는 판정을 받으면 대학원생은 최고 3억원, 학부생은 최고 1억원까지 대여받을 수 있다.
최종적인 창업단계에선 ㈜호서벤처투자에서 자금을 투자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창업하여 성공할 경우 교수와 대학원생 최고 10억원, 학부생은 최고 3억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호서기술컨설팅㈜은 창업 과정에서의 특허출원, 회사설립, 경영 및 판매 등을 지원하고 있다.
호서大 학생들은 학교에서 확실한 교육을 받고 실습을 많이 해서 자기 전공분야에 제대로 취업이 된다고 한다.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집계한 호서大 취업률은 71.7%로 전국 대학 가운데 21위로 나타났다. 2001년 전국 평균 취업률은 56%였다. 학교에서 집계한 2002년도 순수 취업률은 79%이다.
鄭根謨 총장이 외교를 담당한다면 姜錫圭 명예총장의 큰아들인 姜一求(강일구·59) 부총장은 학교 살림을 맡고 있다. 학교 재정 상황을 묻자 姜부총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개교한 지 20여 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동문들이 아직 젊어서 발전기금 모금이 어렵습니다. 産學협동으로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 실적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좀더 기다려야지요. 우리 학교는 등록금 의존율이 80%를 넘습니다. 모두가 알뜰하게 절약하며 꾸려 가고 있지요』
호서대학교를 졸업한 휴대전화기 제조업체 팬택의 朴炳燁(박병엽·43) 부회장이 올해 6000만원의 장학금을 기탁해 와 20명에게 300만원씩 지급했다고 한다.
등록금 의존율이 높은 만큼 학생들이 빠져나가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지방대가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3학년이 되면 편입가는 학생들로 학교가 텅빈다고 하는데 호서大는 그런 걱정은 덜었다고 한다.
『서울과 경기도에 증원·증과가 안 되다보니 지방대학이 천안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천안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통학이 가능해 학생 확보가 그만큼 수월하기 때문이지요』
천안이 대학촌이 되고 있는 것은 수도권과 가장 인접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대전 以南 지방에서 천안으로 대학을 옮기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姜一求 부총장은 10년 전부터 학생 정원이 줄어들 것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姜一求 부총장은 교수 연봉과 연구비가 다른 학교에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민주당 薛勳(설훈) 의원이 2001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호서大는 전국 21개 국립대와 61개 사립대 가운데 교수 연봉이 6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호서大 노동조합위원장을 두 번 역임한 對外협력실 이한식 팀장은 교수나 교직원들이 재단과 갈등하거나 대립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요구 사항이 있으면 대화로 해결해 왔습니다. 연봉을 많이 받는 만큼 직원 한 명이 두세 사람 몫을 합니다. 모두들 설립자를 본받아 엄청나게 알뜰합니다. 우리 학교 시설을 보세요. 허례가 없어요. 아마 총장실이 이렇게 작고 검소한 학교는 별로 없을걸요』
이한식 팀장이 안내한 명예총장실, 총장실, 부총장실을 방문했는데 모두 작고 아담했다. 대개의 대학은 교수와 교직원 수 비율이 1대 1이라는데 호서大는 교수가 300여 명인 데 비해 교직원은 100명이 채 안 된다고 한다. 촉탁을 합쳐서 130명 선이다. 전자공학 전공 黃熙隆 교수의 얘기다.
『교직원 200명의 임금을 절약하면 연간 60억원이 됩니다. 그 돈을 모두 학교 발전에 사용합니다. 우리 학교는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일이 없고 어음을 주는 법도 없어요. 그러니 좋은 물건을 사게 되지요. 처음부터 소수정예로 움직였기 때문에 IMF 때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호서大는 다른 대학보다 빠른 것이 많다. 7년 전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게임학과를 개설했고, 전국에서 두 번째로 애니메이션 학과를 만들었다.
2002년에 네 개의 학교가 처음으로 건축학과의 설계 전공을 5년제로 개편했다. 외국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호서大는 이미 6년 전에 이에 대한 예측을 하고 준비해 왔다고 한다. 건축학부 洪鍵浩(홍건호) 교수는 『나이 든 설립자가 젊은 사람보다 생각이 앞서가니 우리도 부지런히 앞길을 개척하기 위해 힘쓴다. 현실에 안주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호서大는 결정도 빠르고 실행도 빠르다고 한다. 이 대학의 교수 평균 연령은 42세이다.
투명한 재단이 교수 헌신 불러와
羅成南 교수는 교수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호서大가 짧은 시간에 좋은 실적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설립자가 온 재산을 학교에 넣은 걸 알기 때문에 교수들이 헌신하는 거죠. 설립자가 사리사욕이 없고 검소합니다. 학교 밖으로 단 한 푼도 새나가지 않아요. 우리 학교는 99% 깨끗하다고 보장합니다. 학교 지명도에 비해 근무 조건이 좋은 것도 교수들을 고무시키는 일이지요』
姜一求 부총장은 한양大 공대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 15년 만인 1992년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지 않아 미국에서 고학하느라 신학 박사학위 따는 일이 늦었다고 한다. 黃熙隆 교수는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다.
『구두쇠 아버지 때문에 강일구 부총장이 미국에서 채소 배달을 비롯해 궂은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금이 없어졌어요.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목회에 성공했는데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며 가족들이 불러들였어요. 둘째 아들이 동우건축 강철구 회장인데 회사가 10여 개, 직원이 300명입니다. 아버지가 처음에 좀 보태 줬는지 알아봤더니 결혼할 때 전셋집 하나 얻어 준 게 전부라고 합니다. 형님에게 아버지 모시라고 과천에 집을 지어 줬는데 그것도 이번에 서울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설립할 때 내놓았다고 하더군요』
호서大 교수들의 1999년 9월부터 2002년 8월까지 3년간 연구실적을 보면 국제전문학술지 논문 제출 61건, 국제적 수준의 전국 규모 학술지 논문 제출 220건, 국제특허 등록건수 44건, 국내특허와 등록건수 98건에 이르며 산업체 수주 연구건수가 151건, 국제작품전 입상이 4건이다.
黃熙隆 교수는 교수들이 열심히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학에서 교련 과목이 없어졌을 때 대부분의 대학이 교련 관련 교원을 내보냈지만, 우리 학교는 그분들을 내보내지 않고 다른 데다 배치했습니다. 우리 학교 철학과가 3년 동안 학생 2명이 지원하자 폐과되었는데, 7명의 철학과 교수를 유학을 보내거나 국내에서 다른 공부를 하게 하여 다른 학과에 재배치했습니다. 설립자가 흙탕물과 냇물이 모여서 바다가 된다는 말을 종종 하십니다. 절대로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아요. 그런 점을 보고 교수들이 감동을 받지요』
기본을 중시하는 학교
姜錫圭 명예총장은 벤처를 주장하지만 기본을 꼼꼼하게 지키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姜명예총장은 가난하게 학교 다녔던 기억을 살려 매년 호서大 신입생 가운데 극빈자 20∼30여 명을 선발한다. 그런 다음 극빈자 학생 집을 직접 방문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며 기도해 준다. 개교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총장의 가정방문 전통이다. 지난해에도 변함없이 그는 鄭根謨 총장과 함께 27명의 극빈자 가정을 방문하여 23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호서大는 매학기 다른 학교보다 1週 많은 17週 강의를 한다. 계산을 해보니 대학교가 고등학교에 비해 수업을 30.5%밖에 안 시킨다면서 姜명예총장이 수업일수를 1주일 늘리라고 명령해 다른 학교보다 한 週(주) 먼저 개강하는 것이다. 처음에 교수협의회에서 반발했지만, 姜명예총장이 굴하지 않아 지금은 호서大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黃熙隆 교수는 호서大가 학생들에게 공부를 엄청나게 시킨다고 말한다.
『전자공학과에는 장말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요. 책의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치르는 시험이지요. 개강한 지 2週 만에 벌써 시험을 한 번 치렀어요. 이러니 학생들이 모두 도서관에서 살지요. 열심히 하니까 우리 전자공학 전공 학생들이 국제 마이크로 마우스대회, 로봇 축구대회, 벤처동아리 경진대회에서 맡아 놓고 1등 합니다』
성적을 낼 때 출석을 20% 반영해야 하는데, 출석 부르는 교수가 거의 없자 姜명예총장은 교수들에게 매시간 컴퓨터로 출석을 체크하라고 지시했다. 교수협의회에서 교수를 못 믿느냐며 반발했지만 그것도 밀고 나갔다. 姜명예총장은 출석 체크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학생들에게 정직하라고 하면서 교수가 출석을 부르지 않고 점수를 내면 안 되지요. 德은 외롭지 않다는 말대로 옳은 일은 밀고 나가야 합니다』
姜명예총장이 20년 동안 매주 화요일 오전 7시면 기숙사생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는 일을 거르지 않고 있다. 호서大는 1600명을 수용하는 호텔 수준의 기숙사를 갖추고 있다. 하루 두 끼 식사를 제공하는 1년 기숙 비용이 88만원에 불과하다. 기숙사에 들어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는 학기 초에 동네 모범 하숙집 명단을 배포한다.
姜錫圭 명예총장은 요즘도 아산캠퍼스 內 공관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는데, 요즘도 밤에 불 켜진 교수연구실에 들러 우유와 빵을 놓고 간다고 한다. 그는 많이 걸어야 한다며 모든 건물을 5층 이하로 짓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았다. 천안캠퍼스의 10층짜리 건물 외에 호서大 수십 동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하나도 설치되지 않았다.
정보화에 대비하는 것이 우리의 살 길
호서대학교를 취재할 때 교수나 교직원들은 『일부러 알리지 않아도 이제 호서大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며 자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鄭根謨 총장은 천안 新시가지가 조성되고 고속전철이 연결되면 호서大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鄭총장은 호서大의 취약점으로는 슈퍼스타 교수가 적다는 점을 들었다. 鄭총장은 시각디자인부, 신학부의 몇몇 교수들이 슈퍼스타 대열에 끼일 만하다고 평가했다.
『하버드大가 유명한 것은 유명 교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에 더 많은 슈퍼스타 교수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하위그룹 학교였다는 이미지를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와 보라」고 얘기합니다. 학교에 와 보면 세 번 놀랍니다. 학생이 1만2000명이나 되는 큰 학교라는 것과 아름답고 광활한 캠퍼스, 국제적인 활동에 놀라지요』
호서大에는 「청국장 교수」로 유명한 생명과학 전공 김한복 교수, 폐수처리 분야 논문 20여 편을 외국 유명 잡지에 발표하여 세계 인명사전에 오른 환경공학 전공 장인성 교수 등 유명 교수들이 많다.
임기가 1년 남은 鄭根謨 총장은 대학이 발전하려면 설립자가 初心을 갖고 있어야 하며, 「공공성, 합리성, 수월성, 투명성, 국제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鄭根謨 총장은 호서大의 현주소를 전국대학 가운데 10% 이내에 드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의 의견을 조사하고, 교수들의 협의를 거쳐서 2002년에 세운 호서대학교의 5개년 발전계획의 핵심은 「세계적 벤처 디지털 문화 인재를 양성하는 예수 중심 대학」이다. 현재 중국의 빠른 성장은 과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鄭根謨 총장. 그는 호서대학교가 과학기술의 실용화와 벤처로 정보화에 대비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인터뷰] 鄭根謨 총장
국제화와 봉사하는 삶 가르치는 데 힘쓴다
鄭 根 謨
1939년 서울 출생. 美 뉴욕大 공대 핵공학과 교수, 한국과학재단이사장, 국제원자력기구 의장, 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現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 이사장, 호서大 총장.
호서大 87개국에 알려져
호서대학교의 4代 총장은 과기처 장관을 지낸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鄭根謨 박사이다. 2000년 3월에 부임할 때 설립자이자 전임 총장인 姜錫圭 명예총장이 두 가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학교를 널리 알려 달라는 것과 국제화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내실을 다져 오던 호서大가 위의 두 가지에 취약했던 셈이다. 鄭根謨 총장의 부임으로 두 가지가 다 해결되었다. 鄭총장은 호서大 국제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제 해비타트 운동에 가입한 나라가 87개국입니다. 87개국은 모두 호서大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大를 아는 나라가 몇 나라나 될까요. 외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나라가 바로 호서大입니다』
2001년 미국의 카터 前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벌이면서 호서大 외국인교수 사택에 머물렀다. 104개국에서 온 1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도 호서大 기숙사에서 묵었다. 필리핀 아키노 前 대통령을 비롯한 국제적인 유명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호서大의 규모와 아름다운 캠퍼스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2001년 호서大는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에게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鄭총장이 부임한 뒤 호서大는 미국에서 IT 분야의 선두인 조지 메이슨 대학, 유서깊은 하버드 신학부, 뉴욕工大와 공동학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미국과학재단이 호서大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독일 도르트문트大, 러시아 극동기술大와 벤처기술을 협력하고 있다. 현재 호서大는 현재 미국·독일·일본·중국 등 15개국 34개교와 교류협정을 맺고 국제학술교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鄭총장은 호서大에 부임하면서 시설확충과 돈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鄭총장은 한국 대학이 형식화 되어 있고, 돈 얘기만 한다고 꼬집었다.
과기처 장관을 지낸 鄭根謨 총장은 호서大에 오기 전까지 다른 대학교에서 열두 번이나 총장 초빙 요청을 받았다. 모두 고사했던 그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호서大에 2000년에 부임한 이유는 『예수 중심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설립자의 의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鄭총장이 예수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봉사하는 삶을 닮자는 의미라고 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 고아, 과부를 사랑했습니다. 학생들이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겠다는 정신을 갖게 해야지요. 성경에서는 가진 것의 10분의 1을 바치는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 지식, 재능 등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의 10분의 1을 사회에 바치면 사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대학도 수입의 10%를 장학금으로 내놓고, 사회봉사도 10% 해야지요』
화제의 학과 - 광고대상 휩쓰는 시각디자인 전공
교수와 학생이 하나 되어 이룬 결실
美大 입시학원에 호서大반도 있어
검색사이트에서 호서大를 클릭하면 『호서大는 광고홍보학과가 없는데, 어떻게 매년 광고대회에서 상을 휩쓰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다. 美大 입시학원에 호서大반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호서大 시각디자인 전공은 1987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각종 광고대회에서 수상하고 있는데 대상이 27회이고 입선까지 합치면 315회, 수상인원은 959명에 이른다. 2002년 한 해만도 조선일보 광고대상전 신인대상을 비롯하여 대상만 5회, 우수상 7회 등 모두 27회의 상을 받았다.
1984년에 이 대학에 시각디자인부가 신설되었는데, 당시 명지大에 있던 羅成南(나성남) 교수를 영입했다. 羅교수는 후배인 이원구 교수를 스카우트했고, 두 교수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시각디자인학과 살리기에 나섰다. 1987년에 4학년까지 생기자 두 교수는 아예 교수연구실에 침대를 갖다 놓고 주말에만 집에 갔다. 이에 고무된 학생들도 강의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방학 때면 아예 교수와 학생들이 학교에서 합숙훈련을 한다고 한다. 羅成南 교수는 뜨거웠던 열기를 이렇게 말했다.
『지방 신설대가 금방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국 규모 대회에서 상 받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지요. 당시 천안 인구가 11만 명에 불과할 때였죠. 학생들에게 「이 길로 가면 너희들의 진로를 100% 보장받을 수 있다. 열심히 하자」며 자신감을 심어 주었지요. 새벽 2시에 전원 집합시켜서 작품 점검하는 일은 보통이었죠』
호서大 시각디자인과가 알려지면서 자연적으로 입학성적도 올라갔다. 羅成南 교수는 입학성적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점수 낮은 것에 별로 괘념치 않아요. 4년간 가르치면 되니까요. 4년 세월이 사람을 바꿔 놓습니다.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출석률이 좋아요. 4학년은 출석률이 100%이고 지각도 안 합니다』
호서大 수능성적 평균은 인문계열 270점, 자연계열은250점 정도이며 야간학부는 20점 정도 낮다. 호서大 시각디자인 전공은 매년 60명이 졸업하는데 취업률 100%이다. 남녀비율은 4대 6으로 1급 대행사, 대기업 홍보실에 취업이 순조롭게 된다. 3학년 겨울에 인턴사원으로 보내 학점에 반영하는 것도 취업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한다.
10년 동안 학교에서 잠 잔 교수들
羅成南 교수는 10년 동안 학교에서 잠을 잤는데, 3∼4년 전부터는 인터넷으로 학생들 작품을 점검하면서 학교에서 자는 일은 줄어들었다고 한다. 요즘도 방학 때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합숙을 한다.
호서大가 광고공모전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학교에서 재량권을 많이 주기 때문이다. 강사 위촉은 전적으로 교수들이 알아서 한다. 강의 평가를 하여 학생들이 부실하다고 판정하면 강사를 냉철하게 바꾼다.
『악명 높아요. 그러다 보니 강사들도 모두 열심히 하죠. 호서大에서 2년 이상 강의했다고 하면 강사들도 어디 가서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로비에 학생들이 지금까지 받은 수많은 트로피가 진열되어 있었다. 광고공모전은 상 자체가 명예이기 때문에 상금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 수상자들이 모은 상금 1억2000만원인데, 후배들에게 장학금으로 쓰이고 있다.
羅成南 교수는 문화콘텐츠대학원장을 맡고 있는데,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시각디자인, 문화기획, 패션, 콘텐츠, 마케팅, 디지털음악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벤처정신으로 5∼10년을 내다보고 앞으로 유망할 분야를 미리 찾고 자료를 축적하여 개원했다. 2001년에 문화콘텐츠대학원이 CT 분야의 유망학교로 지정되어 문화관광부와 교육부로부터 7억700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고 한다.
화제의 대학원
서울의 일류大 출신이 몰려오는 지방의 벤처전문대학원
호서大 벤처전문대학원 金鴻 원장은 두뇌한국(BK)21 사업단 본부에 「호서大에 특화분야 자금 0.005%만 투자해 주면 10년 안에 세계적인 사업가를 만들어 나라 이름을 떨치겠다」는 요지의 계획서를 써서 낸 것이 벤처전문대학원을 설립하게 된 배경이라고 말한다. 특화분야에 12개 대학이 선정되었는데, 지방대학은 호서大와 원광大 한의대만 포함됐다.
1999년 9월에 벤처전문대학원을 개설했을 때 姜錫圭 명예총장은 우수인력이 와야 우수기업가를 만들 수 있다며 서울大 출신을 유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모두들 열심히 뛴 결과 첫 해에 석·박사과정 85명 모집에 서울大 출신이 7명이나 들어왔다.
『서울大 출신이 이름 없는 지방대 대학원에 입학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서울大에 가서 설명회도 했지만, 이제는 서울大 출신이 그냥 들어옵니다. 벤처 하면 호서大로 각인되어 있을 정도죠』
현재 벤처전문대학원생의 33%가 서울의 일류大 출신이며 다른 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사람, 외국 박사, 과기원 출신도 지원한다고 전한다. 벤처전문대학원은 기술과 경영을 함께 가르치고 있는데 호서大 학부에서 벤처를 공부하여 석·박사 과정까지 공부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애초에 벤처전문대학원을 천안캠퍼스에서 시작했다가 2001년에 서울 예술의전당 앞으로 옮겼다. 金鴻 원장은 서울에서 지방에 내려오는 경우는 있어도 지방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벤처전문대학원 학생들에게 창업자금으로 투자한 금액은 모두 31억원이다. 1차년도에 창업한 회사는 모두 14개이며, 2차년도에도 10명이 창업했다. 벤처전문대학원에서는 기술과 경영을 함께 가르친다는 목표 아래 정보통신 응용 기술사업, 컴퓨터 응용 기술사업, 첨단산업기술사업, 벤처기술경영사업 등 네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