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당시 나는 삼류 신문사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분야에서 연줄을 뽐내던 편집장의 예술관이 내가 맡은 섹션을 좌지우지했다. 그는 내게 통속 극단 배우와의 인터뷰, 전직 사립 탐정들의 책에 대한 서평, 이웃집 자식 그 누구라도 쓸 수 있을 법한 유랑 서커스단에 관한 기사나 그 주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터무니없는 예찬 기사 따위를 강요했다.
작가가 되려던 나의 꿈은 그 축축한 편집국 사무실에서 매일 밤 사그라졌다. 새벽녘까지 남아 매번 소설을 새로 쓰기 시작했지만 스스로의 재능과 게으름에 실망하여 중도에서 그만두곤 하였다. 내 또래의 다른 작가들은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심지어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세익스바랄, 수다메리카나, 프리메라 플라나 등등의 유명한 외국 출판사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그때마다 질투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언젠가 나도 작품을 끝마쳐야지 하는 자극이 되기는커녕 차가운 물벼락을 뒤집어쓴 느낌만 들었다.
미지의 독자 여러분도 깨닫게 되겠지만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 시간적으로 이 이야기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그 무렵, 편집장은 보헤미안 생활을 영위하던 내가 위태로울 정도로 창백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게 바닷가 출장 기사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 일은 일주일 동안 태양과 바다 냄새 나는 바람과 싱싱한 해물을 누릴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내 미래를 위한 귀중한 만남도 가능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일은 이슬라 네그라에서 해안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기습 인터뷰하여 가십난의 저질 독자들을 위한 기사를 쓰는 것이었다. 편집장의 표현대로라면 '네루다의 에로스 지형도' 따위를 만들어 보자는 기획이었다. 이는 사실상 같이 잔 여인들에 대해 최대한 적나라하게 까발리자는 것이었다.
편집장은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여관방, 군주의 행차 부럽지 않은 출장비, 헤르츠사의 렌터카, 자신의 휴대용 올리베티 타자기 대여 등의 악마의 미끼를 내게 내밀며 이 천박한 일을 맡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그 일을 맡은 데는 청춘의 이상도 작용했고 또 다른 동기도 존재했다. 나는 28쪽에서 중단된 원고를 어루만지면서, 낮에는 네루다에 관한 기사를 쓰고 밤에는 바다의 속삭임을 들으며 소설을 끝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종의 집착이 되어 버린 일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일로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리오 히메네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마리오처럼 네루다 씨에게 내 작품 서문을 써달라고 하려 했던 것이다. 그 귀중한 트로피를 가지고 나시멘토 출판사 문을 두들겨, 고통스러울 정도로 미루어진 내 책의 출판을 사실상 결정지을 작정이었다.
이 서문이 한없이 늘어지거나 미지의 독자들이 헛된 기대를 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몇 가지 점을 밝히고 마치려 한다. 첫째, 독자들 손에 있는 이 소설은 내가 이슬라 네그라에서 쓰려던 것도, 그 시절에 썼을 법한 것도 아니다. 단지 실패로 끝난 네루다 취재 공세의 부산물일 뿐이다. 둘째, 칠레 작가 여러 명이 연이어 성공의 술잔을 들이켜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소설을 출판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다른 작가들이 일인칭 시적 산문, 액자 소설 형식, 메타언어, 시간과 공간의 변형 등의 거장이었던 반면, 나는 저널리즘에 기초한 비유법, 크리오요주의¹⁾ 작가들을 답습한 진부한 배경, 보르헤스의 생경한 형용사, 특히 어느 문학 교수가 혐오하던 '전지적 작가 시점'을 고수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음 페이지부터 귀찮게 할 이 소설 대신 틀림없이 독자들이 손에 쥐어 보길 원했을 네루다에 관한 짜릿한 기사, 어쩌면 나를 그 방면에서나마 유명하게 해 주었을지도 모를 그 기사는 쓰지 못했다. 내가 뻔뻔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시인의 원칙 때문이었다. 네루다는 내 천박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현 부인 마틸데 우루티아이고 '창백한 과거'를 뒤적일 만한 정열도 관심도 없다고 말이다. 뒤이어 나는 아직 쓰지도 않은 책의 서문을 부탁했다. 네루다는 그런 나의 뻔뻔스러움에 걸맞게 "소설을 끝내면 기꺼이 써 주겠네."라고 빈정거리면서 문밖으로 나를 내몰았다.
나는 소설을 끝내 보려고 이슬라 네그라에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텅 빈 종이를 마주하기만 하면 밤이고 낮이고 아침이고 할 것 없이 게을러졌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시인의 집을 기웃거리고, 그 집을 기웃거리는 사람들까지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분량은 얼마 안 되지만 나처럼 지독한 게으름뱅이가 어떻게 이 책을 끝냈을까 싶을 성마른 독자들도 있으리라. 이 책을 쓰는 데 십사 년이 걸렸다고 하면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성당’에서의 대화』,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판탈레온과 위안부들』, 『세상 종말 전쟁』을 출판했다는 걸 생각하면 십사 년은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기록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책이 늦어진 데에는 감상적인 성격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는 베아트리스 곤살레스가 산티아고 법정에 왔을 때 여러 번 점심을 같이 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얼마가 걸리든, 얼마나 많은 허구가 가미되든 간에) 마리오의 이야기를 써주기를 원했다. 나는 그녀의 양해 아래 이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¹⁾ 20세기 초에 유행한 문학의 한 경향으로 대개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과 풍습을 다루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Antonio Skármeta
1940년 칠레의 안토파가스타에서 태어났다. 칠레 대학교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칠레로 돌아와 칠레 대학교에서 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첫 번째 단편집 『열정』(1967)을 발표했다. 기존 라틴 아메리카 문학 작품들과는 달리 삶의 활력이 넘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독일로 망명해 1989년까지 베를린에 머물다. 1961년부터 영화, 문학, 라디오 극 등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유럽과 북미의 여러 대학 초빙 교수로 활동했다. 스카르메타의 작품에는 재치 넘치는 문장과 해학,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 등이 쿠바 혁명과 칠레 민중연합 정권이 야기한 역사적, 사회적 사명감과 함께 녹아들어 있다. 1985년에 발표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스카르메타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20여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탈리아 영화 「일포스티노」는 외국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카사 데 라 아메리카스 문학상을 수상한 『지붕 위의 누드』(1969), 『눈이 끓는 것을 꿈꾸었네』(1975), 『나 반칙 안했어』(1980), 『봉기』(1982), 『매치 포인트』(1989), 『시인의 결혼식』(1999), 『트롬본 소녀』(2001), 플라네타 상을 수상한 『빅토리아의 춤』(200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