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대감,
뭐라꼬요? 우는 애 젖주고 무는개 돌아보라꼬요?
옛날에도 양반댁 자제분들은 저런 말투가 아니었제? 그러고 보니 송연 대감도 출신성분은 양반이 아닌가베? 어디 정씨인지... 원래 정씨들은 양반 가문인데... 이상타... 하기사 돌연변이도 있지러 ㅋㅋㅋ.
내사 마 우는 애가 되었던지 무는개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보챈 보람은 있으니께 되었구마. 미리 고맙단말 전하고 속편을 계속 기다리고 있을테요. 나 혼자뿐 아니라 다른 대감들도 그럴거요. 물어 보시구려.
얼마전 우리 사랑방에 동곡형께서 오래된 사진을 올려 주었더군요.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점이 다를 것이고 또 그럴수 밖에 없지요.
나도 박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중의 한사람 이고 봄만되면 춘궁기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우리나라가 오늘의 경제발전이 있게한 장본인 임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 하는데 장기집권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고 혁명공약에서 밝힌바 참신한 정치인에게 정권이양을 않고 자신이 참신한 정치인(?)이 된것도 허물이고 특히나 유정회라는 어용정치인을 양산하고 유신헌법을 만들고... 失政도 많이 했었지요.
문제는 그양반이 공적이 얼마며 잘못이 얼마냐는게 아니라 그를 죽일놈으로 모는 자들과 狂信徒처럼 盲信하려는 그의 추종자들 이지요.
솔직히 우리 동네(?)마을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많은건 사실이지요.
출신 성분이, 지역이, 족벌, 학벌 따질때는 옛날 이었지요. 오로지 갈고 닦은 실력 말고는 믿을게 하나도 없는 세상 이지요. 앞으로도 이땅의 역사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남기 위해선 자식들 옳게 가르치고 실력을 기르는게 첩경인것을...
가람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도 創氏改名을 하지 않으신 분이란걸 읽고보니 얼마전 한국에서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저명한 문인들과 史家들이 어떤 기준에 얽혀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창씨개명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속단을 내리진 않았길 바랍니다. 예를 들면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모윤숙 여사등 많은 사람들이 명단에서 보이던데...
가람 선생이야 조선어학회 사건이후에 낙향 하셔서 생활하셨으니 그렇게 사실수도 있었겠지만 문사나 글쓰는 도회지 사람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서는 글을 쓸 기회마저 제약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언젠가 고국에서 화약폭발 사고로 이리역이 쑥대밭이 되었다던 기사를 본 가슴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데 이리역이 없어지고 익산역으로 병합되었다는것은 처음 듣습니다.
또 1964년 가을 논산 훈련소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특과 학교로 가는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디로 보낸다는 명을 알려 주지도 않고 제일먼저 호명을 하고 따로 모아놓고 특식(빵)을 주더니만 그날저녁 캄캄한 밤에 기차에 태워서 어디로 데려 가는데 누가 창밖을 내다보더니 어 기차가 이리역을 지나간다고 해서 기차가 서울행이 아니고 남행인걸 알고선 모두 큰 실망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우리무리들 절반은 서울출신들이고 절반은 대구출신들 이었는데... 그후 왜 우리들을 그렇게 뽑아서 데려갔는지 원인을 알기도 했지만...
가람일기,
내가 고국을 떠나오고도 얼마나 세월이 흘러 발간된 책이니 물론 읽을수도 없었지만 읽고싶은 책이 또 한권 생겼네요.
영양 군수님은 국도변에 지나는 길손들이 못보고 지나치지 않을 장소에 조지훈 생가 안내표식판을 세워야 겠다는걸 배울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영양군 문화계장(? 시골군에 그런 직책이 있을까 마는)에게 연락해서 상기 시키든가 더 좋은 방법은 영양군수나 이의근 경북지사님께 송연대감이 전화로 상의해 보심이 어떨지...
가람선생 生家에는 한국 문인협회 문학 표징물이 보인다는데 조동탁(지훈) 선생생가에는 안내 표지판 조차도 안보인다니 독일에 있는 나도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데 여러대감님들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난초시인,
선비의 멋과 향기를 오늘날 까지 아니 영원히 풍겨주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난초를 좋아 하셔서 난초에 대한 시조도 많이 쓰신게 우연이 아닐터 이지요. 꿋꿋한 지조와 절개의 표상이던 소나무 조차 끼이지도 못했던 사군자에 끼인 난초 이고보면...
또한가지 가람이 다니셨던 한성사범학교(경성사범학교)와 박통이 다녔던 대구사범학교가 당시 교육계에 큰 역할을 했던걸 알수가 있지요.
물론 당시엔 사범학교가 차지했던 위상이 오늘과는 전연 달랐고...
내가 어릴때 시조집 때문에 한글을 일찍 깨친적이 있다는 얘기는 대감들께 한적이 있었지요? 내가 태어나서 자란 그 골목안에 대구에서 甲富이던 어떤분(姜氏, 우리나라 제일갑부가된 李氏도 이분 도움을 받은걸로 압니다)이 살고 계셨는데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 어른이 새벽에 달성공원에 산보를 가시면 나를 데리고 다니신적도 있었답니다.
그때 달성공원에 가면 새벽부터 詩唱(시조를 노래로 부르는것)읊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던 기억이 있답니다. 어렸던 그 시절엔 뱃속에서 울려 나오는 그 목소리로 부르던 그 시창이 약간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했지만...<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라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들은....
갑부이던 이 어른을 따라 다닐때 있었던 일이 또 하나가 떠 오릅니다.
이 어른의 본가는 진골목(긴골목)에 있었는데 그집에도 대궐같던 집에 가본 기억도 있지요. 이분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사업을 했고 작은 아들은 경북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학자의 길을 간걸로 알고 있지요.
동산파출소 뒤 오인조창고터(백승기 동문은 알지도 모르겟네)도 옛날에 이 분의 창고와 사무실로 쓰던 곳이었답니다.
하루는 어른을 따라 달성공원엘 갔다 오는데 바로 공원 앞에서 쌀튀밥 장수가 쌀튀밥을 팔고 있었답니다. 쌀을 튀긴것을 엿을발라 뭉쳐서 테니스 공처럼 둥그렇게 뭉쳐서 팔았지요.
떡장수나 채소장수들이 당시에 사용했던 반퉁이에 수북히 담아와서 아직 마수도 하지않은 참이었는데 내 시선이 자꾸 그리로 쏠리는걸 이 어른께서 느끼시고는... 두개를 나에게 주라고 말씀을 하시고선...
나는 두개를 받아서 한손에 하나씩 쥐고 벌써 먹기를 시작하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요.
문제는 무었인고 하니 영감님이 멋으로 차고 다니는 주머니에는 곱게접은 새돈이 몇장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당시 가장 고액의 조선은행권 이었고 주머니엔 소절수(수표)만 있으니 이 쌀튀밥 장수 아지매는 바꿀돈도 어림도 없고... 그래서 그날 아침나절에 운전수를 시켜서 그 아주머니에게 돈을 갖다준 모양인데 돌아 오면서 운전수가 큰 봉지에 한 열개쯤 그 살튀밥을 사다가 나에게 가져다 준적이 있었답니다.
그 어른이 죽고 옥포 깊은 살골에 장사를 지냈는데 나도 물론 따라 갔었지요. 지금은 그 골짜기도 집들이 들어 섰을테지요.
가람 이병기 선생의 <가람문집> 에서 선생의 4편 7수의 난초 연작시조를 전재하며 선생님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선생은 현대시조를 주창 하신 선구자 이시지만 나는 아직도 古詩調의 형식을 벗어나면 거부감을 약간 느낀답니다. 어릴때 고시조만 접했기 때문 이겠지요.
난초 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언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초 2
새로난 난초잎은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뜻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난초 3
오늘은 온 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내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은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난초 4
빼어난 가는 잎새 궂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