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려낼 수 있는지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사진을 보지 않고도 그 순간 그 표정 모두를 떠올리게 해주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비오는 수요일 저녁, 비오는 수요일에는 별 추억이 없었는데도 장미 다발에 눈 여겨지게 하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 멀쩡한데도 잘 못 살게 하고 있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신이 잠을 자라고 만드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보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강아지도 아닌데 그 냄새 그리워 먼 산 바라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우연히 들려오는 노래가사 한 구절 때문에 중요한 약속 망쳐버리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껌 종이에 쓰여진 혈액형 이성 관계까지 눈 여겨지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스포츠 신문 오늘의 운세에 애정 운이 좋다 하면 하루종일 호출기에 신경 쓰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썩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던 내 이름을 참 따뜻하게 불러주었던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날 그 순간의 징크스로 사람 반병신 만들어 놓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담배연기는 먹어버리는 순간 소화가 돼 아무리 태워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걸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목선이 아름다우면 아무리 싸구려 목걸이를 걸어주어도 눈이 부시게 보인다는 걸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는 그저 모든 이유를 떠나
내 이름 참으로 따뜻하게 불러주었던 한 여자만 사랑하다 가겠습니다.
빈은 놀랬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여전히 꼼짝도 안 하는 여자를 내려다 보았다.
빈은 움직이지 않는 여자를 보고 경찰에 연락할까 집으로 데려갈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힘이 쭉 빠진 몸으로 미동도 않는 여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
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리와 팔에 힘을 주고 여자를 들어올렸다.
순간 너무 가볍게 올려지는 여자로 인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후..오늘은 놀랄 일 뿐이네…무슨 여자가 이렇게 가볍지…많이 먹여서 살 찌워야겠어..’
너무 많이 놀라 정신이 없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는 빈이었다.
빈은 여자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보은은 아니었다.
단, 일주일 사이에 자신과 자신이 믿었던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몰랐다.
본능처럼 그 곳에서 멀어져야 겠다는 생각하나로 무작정 걸었었다.
얼만큼 걸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걷고 또 걷기만 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 까지 무조건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다리를 보며 서서히 주저 앉았다.
보은은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일도 벅차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앞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도 들리지도 않았다.
빈은 자신의 침대에 여자를 눕히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여자는 여전히 감길 것 같지 않은 멍한 눈으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빈은 자신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여자를 한번 돌아본 후 동생 찬의 방으
로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침 일찍 보내면 되겠지…? 그대로 두고 나와도 되나??… 설마 밤새 먼 일이 있겠어’
자꾸 돌아보며 찬의 방으로 들어갔다.
빈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 노곤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옆방에 있는
여자가 생각이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리 저리 뒤척이던 빈은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 하였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찬은 빈이 옆에 누워있는 것을 의아한 듯 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형..왜 여기 있어?? 나한테 할말 있어?”
“아니”
“그런데??”
“후-우 내방에..아니다..”
빈이 일어나 나가자 찬은 그런 형의 행동에 머리를 극적이며 일어났다.
“하 – 암 형이 왜 그러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한쪽 손으로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방을 나온 찬은 형이 방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고 눈을 찡그리며 형을 툭 쳤다.
“..헉....”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 있어?...이상해 형!”
“이..이상하긴..뭐가?? 지..지금 들어 갈려고 했어..들..들어..간다.”
당황하며 문을 꽝 닫고 들어가는 형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찬이었다.
빈은 방으로 들어와 문에 기댄 체 머리를 감쌌다.
‘자식이 인기척이라도 내지..놀래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부모님 아시기
전에 내 보내야 되는데…어떻게 하지……아- 그냥 무시하는 건데..왜 데리고 와서 이 고생
인지 몰겠네…아—아-악!…일어났나?? ’
빈이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보았다.
아기마냥 잔뜩 웅크리고 잠들어있는 여자가 보였다.
살며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뒤로 넘기니 새까만 눈썹과 피멍이 들어 옅은 보라
색으로 칠한 듯 울긋불긋 물들어 있는 눈, 조금 밑으로 내려가니 약간 돼지코인 앙증맞은
코와 꽉 깨물어 주고 싶은 붉은 입술은 누가 물어 뜯었는지 심하게 뜯겨져 있었다.
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숨을 내쉬었다.
‘여자를 이렇게 험악하게 다루다니’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분노가 일었다.
화를 삭히듯 꽉 쥔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반복을 하며 속에서 울컥 치솟는 것을 막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친 입술을 쓰다듬자 손 끝에 뜨거운 기운이 확 일었다.
다급하게 이마에 손을 대자 마자 막 구운 고구마를 쥔 것처럼 손이 뜨거워졌다.
“이런..열이 심하네….해열제를..먹여야 될까..아니면..병원에 연락해야 되나..” 빈은 마음이
다급해 졌다.
욕실로 들어간 빈은 대야에 찬물을 가득 담고 수건 2개를 꺼내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수건을 물에 담갔다 꾹 짠 후 여자의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고 수건 하나는 손에 들어 그녀
의 얼굴이며 손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말라 비틀어 질 것 같은 몸에 비해 미끌어질 것 같은
부드러운 피부에 자꾸 손이 가는 것을 느끼며 이마의 수건을 갈아주고 벌떡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화분에 물을 뿌리는 엄마와 골프 연습을 하고 있는 아빠 탁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찬을 보며 내려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찍 일어났구나”
“네….의논 들릴 일이 있는데…잠시 앉으시겠어요?”
“의논??”
“엄마도 이쪽으로 오세요”
“무슨 일인데 그러니?
“흠..흠..어제..집에 들어오는데..문 앞에 여자가 쓰러져있어서 집에 데려왔어요.
강도를 만났는지..얼굴은 심하게 멍들어있고 지갑이나..뭐 연락할게 하나도 없고 아침에 일
어 나면 보내려고 했는데 열이 심해서 몇일 치료를 해야 될 거 같은데…어떻게 할까요?”
“어머! 마니 다쳤니?”
“조금 다친 것 같은데 열이 심해서 … 우선 최박사님 오시라고 해야 될 거 같은데..”
“그렇게 해라”
“네….엄마! 올라가서 한번 봐주시겠어요”
“어..어..그래..아줌마….저랑 2층에 좀 올라가요”
조용했던 집안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여자의 상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처참했다. 그 모습에 빈의 가족들은 놀랐다.
온몸이 멍들었고 어떤 곳은 담뱃불로 지진 듯 심하게 붉어져있었다.
외상도 심각했지만 뱃속에 있는 태아의 기가 약해 고열이 계속 되거나, 조그만 충격에도 유산 될 수 있을 만큼 태아, 산모 모두 위태롭다고 하였다.
약을 투여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찬물로 몸을 닦아주고 진땀에 옷이 젖지 않게 자주 갈아줘야 됐다.
또한 영양상태로 좋지않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을 입 속에 넣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빈의 가족은 정성스레 그녀를 보살폈다.
처음에는 불쌍한 마음에 그녀를 돌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녀의 상처가 빨리 나아서 깨어나길 바랬고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특히 빈의 엄마 서영은 병들고 지친 그녀를 자신의 딸처럼 온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보은은 무겁게 닫혀있던 눈꺼풀을 억지로 떴다.
무의식 중에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나려던 보은은 온 몸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숨을 멈추었다. 보은은 아픔 몸을 이리 저리 움직여 겨우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보은은 의아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이보리색으로 단장된 천정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양쪽 모서리에 스피커가 안쪽을 향해 비스듬이 놓여있고, 한 가운데 큰 대형TV가 있고 그 양 옆에 오디오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문 옆 벽에는 체리빛깔의 붙박이 장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배란다 안쪽에는 조그만 탁자와 2개의 의자가 놓여있고 크고 작은 화분들이 늘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보은은 익숙하지 않는 방을 보면서 분명 자신의 방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방안의 따뜻한 분위기는 계속 누워있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가…왜 여기 있는 걸까??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음…음…윽..’ 머리를 감싸며 앞으로 몸을 숙인 보은은 자신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의 통증이 커진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머리의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다.
보은은 잠시 생각을 보류하기로 정하고 이 곳이 어딘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보은은 잠시 밖으로 나갈지..아니면 누군가 들어오길 기다릴지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