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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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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원성왕릉)/ 문화재청 |
신라 38대 원성왕(785~798). 독서삼품과 설치. 김제 벽골제 준공, 불교 육성등 숱한 업적을 남겼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은 의문이 남는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원성왕(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복04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승리자의 기록 같지 않은가? 12.12 별들의 전쟁 때 정승화를 연행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김경신은 군부 지원을 업은 원성왕 지지세력에게 감금 당하지는 않았을까?
승리자들의 해몽을 보자.
"꿈의 해몽에서도 처음에는 실직하고 칼을 쓰고 옥에 갇힐 것이라 하여 두문불출했는데, 다시 아찬 여삼이 와서 해몽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할 사람이 없음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금은 12손이 대를 이를 징조요, 천관정에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상서“라고 했다.
여기서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평탄치 않았음이 드러난다.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은 원성왕의 지지세력들의 상징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삼은 아찬이니 6두품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천관사 우물과 12현금(가야금)은 김유신가계와 가야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영남 불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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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갈항사지 동탑 기단명문/문화재청 |
그럭저럭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괘릉에 위치했다는 곡사 창건주 파진찬 김원량이 원성왕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 이라는 것을 알면 또 머리가 복잡해진다. 외척이 창건한 사찰을 옮기면서 까지 왕릉을 조성한 까닭이 무엇일까?
자료를 찾아 보아도 풍수의 종조 도선국사 생몰년대와 원성왕 사망이 한세기 차이가 있어 풍수지리 음택 비보론도 타탕지 않다. 세종대왕이 광주 이씨 조상묘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혹 조선 태종이 세종대왕의 왕권강화, 외척세력 약화를 위해 외척을 죽음으로 몰고간 경우로 보고 싶지만 갈항사지 동탑 명문으로 판단해보면 전혀 합당하지 않다.
[갈항사지 동탑명문은 “두 탑은 천보17년 무술년에 세웠다. 남매매 3인이 업으로써 이루었는데 남자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매자는 조문황태후이고 매자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천보17년은 경덕왕 17년(758)으로 원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되던 무렵으로 통일신라의 문화가 난숙미를 더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인데 계조부인 혹은 지조부인이라 한다. 언적법사는 원성왕의 외삼촌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탑은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일가들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글씨는 탑이 건립되고 30~40년이 흐른 뒤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쓰여진 것이다. 이로 보면 갈항사는 승전이 창건할 당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고,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세력이 탑을 건립하면서 크게 중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영남불교 연구원
이인자에서 왕권을 잡았으니 전대왕조와 다른 문화적 특색과, 외가의 묵인하에 강한 경고성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외가에서 창건한 곡사 자리에 화려하고 유례가 없는 왕릉을 축조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합리화를 위한 기록이 전해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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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군왕릉(김주원)/문화재청 |
졸지에 왕으로 등극은 고사하고 이인자에게 밀려난 김주원은 명주(강릉)로 쫒겨가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명주군왕 ’으로 봉해졌으며,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관음리 오층탑 입구에 있는 김주원의 묘와 승리자 원성왕릉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 있다. 정승화 장군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가 훗날 명예회복 되었듯이 원성왕도 왕권확립 후 김주원에게 다양한 혜택을 내렸다고 한다.
원성왕의 원찰이었던 숭복사. 그 절터는 화려했던 영화를 누렸던 금당 앞 두기의 탑, 소맷돌을 비롯 석조 부재들만 뒹군다. 원성왕 옹립세력인 6두품인 최치원 아버지도 창건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런 사유로 훗날 최고은이 사적을 새긴 비문을 숭복사에 남겼다면 견강부회일까?
두기의 동서탑은 멸실이 심하다. 상기단에는 팔부신상 모습을 조각하였다. 초층 탑신에는 문비를 두었고. 옥개석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신라 하대 탑임을 알 수 있다.
팔부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으로서 천(天), 용(龍), 야차(夜次), 아수라(阿修羅), 건달바(乾達 婆), 긴나라(緊那羅), 가루라(迦樓羅), 마후라가(摩 羅伽)를 말한다.
탑층수를 야무락지게 구분하던 꼬마도 어른들도 포항님들이 준비해온 고구마, 지천에 널린 감홍시로 허기를 채우고 있다. 동행한 꼬맹이는 저렇게 과자 봉지를 내동댕이 쳐 놓고 있다.
그럼!!! 배가 불러야 제대로 보이지!!! 어차피 손에 들어온 과자인데 고매부터 먹어야지! ㅎㅎㅎ
흩어진 부재들 속에 소맷돌을 발견하고 버선코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불국사 소맷돌을 어떤이는 영암사지 소맷돌 가릉빈가를 최고라고 한다.
그대!!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원성왕과 쿠데타 세력, 괘릉, 종교 지도자, 외척 김주원, 최치원 숭복사 비문, 경주박물관 쌍귀부...
무궁무진한 소재를 배경 삼아 만추에 소설 한편 탈고 해보세요.
2006.10.03
첫댓글 멋지네요. 떠나고 싶습니다. 소설은 꿈도 못꾸지만요........()
소설까지야 안되지만요 ㅎㅎ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네요. 덜 슬프게도요.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