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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독공보 12일자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피부과 전문의로 있는 성도가 캄보디아로 해외선교를 갔었는데, 그 곳의 선교사가 현지인은 미개하고 한국인은 최고이기에, 한국의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식의 선교 활동하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은 것이, 20년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또, LG상사에 있는 한 성도는, 성수주일을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는 가운데,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면, “착하게 신앙생활 잘하다 천국 가자”는 식으로 전해지는 설교에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전쟁터인 세상 속에서 살아날 힘을 원했던 것이지, 죽어야 알 수 있는 비 현실적인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교회를 등지게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저는 이들의 갈등에 동감합니다. 저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결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처음에는 이에 따라 결정되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신앙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러한 개인의 가치관보다 앞서서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주관합니다. 예전에 전도사로 사역할 때, 뵈었던 분은, “기업은 기업이고, 믿음은 믿음이며, 또는 돈은 돈이고 믿음은 믿음이다”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동과 삶의 모습이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현대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들의 삶 속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이 하나라고 합니다. 엡 4: 4 - 6을 보시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뿐인 믿음이 성도들 안에 들어가서는 제각각이 됩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한 자리에서 모두가 같이 들어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믿음으로 나타나거나, 아예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조차 없는 상황을 부교역자 시절에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으로 봉사를 하며, 기도를 한다고 해도, 믿음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열심이 불평, 불순종으로 돌아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되어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출발합니다. 성경 속에서나 역사 속에서, 신앙의 위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의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공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었고, 확신있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만남 속에서 우리는 비전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야곱, 여호수아,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그들을 지키며,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언행심사에서 부정적인 것은 사라져야 합니다. 부정적인 것은, 우리에게 비전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귀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은 낡아도 버리지 못합니다. 저는, 지난 2013년에 지리산 종주를 할 때, 청년으로부터 스틱을 선물 받았습니다. 아주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보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장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그런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장어피로 만든 반지갑을 10년 넘게 사용하다가 너무 떨어져서 몇 일전에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갑을 버리지 못하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신혼 때, 구입한 바바리가 소매가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어서 이 또한 몇 일 전에 버렸습니다. 사람이 준 선물도 이렇게 쉽게 버리지 못하고, 두고두고, 낡고 달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때까지 두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라는 선물을 왜?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잊어버리고,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믿음, 부정적인 언행을 삶 속에 담고 살아가십니까?
비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엄청난 비전들이 쌓여 있는 보석 창고와도 같습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강의 시간에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자원이 묻힌 곳이 어디겠습니까?” 수강생들은 강사의 질문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비싼 자원이 어디 있을까? 알래스카의 빙산 속에 매장된 광물일까?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일까? 사우디아라비아에 매장된 거대한 유전일까? 그런데 놀랍게도 답은, 무덤이었습니다. “왜? 무덤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무덤에는 일생의 비전을 다 이루기 전에 죽은 사람들의 비전이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강사는, 무덤에 묻힌 것을 시신 뿐 아니라, 그가 생전에 지닌 비전도 함께 보았던 것입니다. 역사 속으로 지나간 사람들 가운데는, 참으로 자신의 비전을 모두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품은 비전을 얼마만큼이나 이룰 수 있겠습니까?
붐 벡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이르러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다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주님, 주님께서 주신 것을 다 쓰고 왔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다 쓰고 간 사람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는 갈렙입니다. 그의 나이 85세에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합니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아, 출애굽을 이끌어서,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피카소는 88세까지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에디슨은 85세에 등사기를 발명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88세까지 말타고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올 때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철학서들을 쓰기 시작했고, 미켈란젤로는 90세 때,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본문 8 - 9을 보시면,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갈렙의 생애 속에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그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개인적인 결단이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시면, 갈렙은 하나님을 가리켜, “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야곱, 모세, 룻, 다윗등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호칭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였던 자들이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인격적이기에, 독대관계입니다. 함께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여도,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개인적으로 섭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시 23: 1을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을 부를 때, 뭐라고 부릅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 23편을 많이 외우지만, 그 속에서 이러한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요, 과학자였던 파스칼이 믿음 안으로 들어온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대목을 보며, 하나님이 “파스칼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천지창조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파스칼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갈렙은, 여호수아 앞에서, 정탐을 마치고, 모세에게 와서, 믿음과 진실로 고했던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9 - 10에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란,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내가 고백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나의 삶을 위탁하여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도는 하는 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믿지 않습니다. 선포는 하는데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믿는 것과 내 주변의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 밖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롬 12: 2을 보시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는 것은, 세상을 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갈렙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와서 보고하는 가운데,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는 다르게, 긍정적으로 보고함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합니다. 왜 죽을 뻔했습니까? 믿음의 부정적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았고, 다르게 보았고,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탐지역의 주민들이 아낙자손의 후예였고, 거기에 비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초라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는 것이 갈렙의 결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갈렙과 같은 결단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0 - 12을 보시면,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을 붙들고, 광야 길을 걸어왔습니다. 갈렙이 요구한 헤브론에는 아낙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후손으로, 골리앗과 같이 신장이 거대하고 힘이 센 족속들입니다. 그러니 정탐꾼들이 놀라서, 우리는 그들과 대적이 못된다고 말하며, 절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성읍은, 일반성읍이 아니라, 요새였습니다. 그 성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성읍 자체가 요새와 같이 견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민 13: 33을 보시면, 다른 정탐꾼들이 말하길,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갈렙이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이런 곳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서, 꼭 집고 넘어갈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진 자세입니다. 요즘, 또다시 신천지로부터 우편이 날아옵니다. 자칭 신천지 목사라는 익명인 그는, 자신이 신학 할 때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것을, 신천지에 와서 알았고, 신천지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과 함께 성경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와, 또 말씀을 알아도,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증명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쉽게쉽게 신앙생활을 하며, 신비한 것만 찾아다닐 것입니다. 신천지가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아니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과거의 백백교를 비롯한 이단들이 출현해서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것은 사라집니다. 아무리 반짝이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하여도, 가짜 다이아가 진짜 다이아가 될 수 없습니다.
갈렙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철저히 쫓았기에 다르게 살 수 있었고, 다르게 볼 수 있었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독공보에 실렸던 두 분의 경우처럼, 또는 개인적으로 뜻하지 않는 어려움이 닥칠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봉사하지 않으면 겪지 않을 일들입니다. 그런데, 봉사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려면, 아파야 합니다. 아픈 것을 이기고 나면, 기어다니고, 아픈 것을 이기고 나면 말을 하고, 아픈 것을 이기고 나면, 더욱 성장합니다. 그렇듯,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하는 상황에서 부딪치는 것이 있고, 그것을 극복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며,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지도 알고, 내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당만 밟는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렙이 본문 속의 자리에 있기까지는, 수많은 전쟁 속에 있었습니다. 갈렙은 그 전쟁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불충했다면, 그래서, 전쟁이 두려워서 피했다면, 전쟁 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알았을까요? 이제, 우리에게도 갈렙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르게 살아야 하고, 다르게 보아야 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쉽고 편안한 믿음생활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조금 어려운 길, 어려운 방법도 선택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고 합니다.
갈렙은, 자신이 40세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던 말씀, 그 말씀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갈렙에게 주셨던 말씀인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는 그 말씀을 회상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않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서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올 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지난 번, 젊은이들의 모임 헌신예배에서 그들은 각자가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암송하였습니다. 올 해 내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셨나요? 혹시, 장식품으로 아니면, 어느 서랍 속에 방치되지는 않았나요? 말씀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갈렙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며, 헤브론을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것은, 그 땅에 대한 욕심으로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겠다고 하신 것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을 이루고자 하였고, 또, 헤브론을 차지함으로, 이스라엘이 아낙자손으로 인해, 위협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자 한 것입니다. 내가 안 해도 누군가는 하겠지 하는 책임회피가 아니라, 내게 주신 사명이니 내가 하겠다는 사명의식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귀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도 담대히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의 요구는, 욕심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말씀을 확고하게 붙잡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 어디에서 난다고 했죠? 롬 10: 17을 보시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 갈렙의 믿음은, 자신이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고,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성경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온전히 좇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좌우명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낙관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놀라운 낙관은, 어디에 근거합니까?” 그러자 링컨은,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사람들이,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당신 편에 계시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자, 링컨은 “하나님이 내 편에 어떻게 계실 수가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당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을까?를 고민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갈렙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그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하는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렙의 삶은 세상과 달랐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다르게 보았고, 다르게 생각했고, 다르게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젠, 본문의 갈렙처럼,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이젠 세상과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이젠 세상과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말씀에 투신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투신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에 투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한 갈렙처럼, 우리의 비전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믿음으로 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