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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우(韓聖佑)
[생졸년] 1633년(인조 11)~1710년(숙종 36) / 77歲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윤(汝尹).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덕급(韓德及)이고, 아버지는 목사 한수원(韓壽遠)이고, 어머니는 이영선(李榮先)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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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참판 한성우 신도비명(兵曹參判韓聖佑神道碑銘)
근세에 사계(沙溪)ㆍ우암(尤庵) 두 선생의 도학이 전승(傳承)하여 세상의 사종(師宗)이 되었는데, 한공(韓公) 여윤(汝尹, 한성우의 자(字)은 사계의 미생(彌甥, 외손(外孫)으로 우암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어려서부터 유염(擩染, 보고 들어 몸에 젖음)하여 청수(淸修)로써 자신을 견지하였는데, 정작 세상에 나와 조정에서 드날릴 적에는 직도(直道)로써 임금을 섬겨 끝내 법문(法門)의 여서(餘緖)에 흠이 없이 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공의 천분(天分)이 그러하여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연원(淵源)의 내력이 있어서 그러했음은 또한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공의 휘는 성우(聖佑)이니 숭정(崇禎) 계유(癸酉, 1633, 인조 11) 4월 1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 단아하고 문재(文才)가 월등하여 어른들이 크게 기대하였다. 약관(弱冠)에 누차 해액(解額, 향시(鄕試))하여 기유년(己酉年, 1669, 현종 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니 사우(士友)들이 출세가 늦었음을 애석히 여겼다.
송곡(松谷) 조복양(趙復陽)공이 전조(銓曹,6部를 말함)를 맡고 있으면서 금오랑(金吾郞,의금부의 都事)으로 의망하려고 하니, 공이 마치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여기고 힘써 사양하였다. 겨울에는 외간상(外艱喪,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에는 자부인(慈夫人,어머)의 상을 당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74, 숙종 즉위년)에 사화(士禍,예송논쟁을 말함)가 곧 일어나려고 하니, 몇 백의 선비들을 이끌어 우암을 변무(變誣)하고 이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호우(湖右)에 자취를 숨겼다. 경신 경화[庚申更化, 숙종 8년의 대출척(大黜陟)/경신환국을 말함]에 맨 먼저 수록되어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제수되고, 관례에 따라 봉사(奉事)ㆍ직장(直長)으로 올랐다.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에 반제[泮製, 성균관에서 응제(應製)]함에서 장원하고, 겨울에는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자궁(資窮)으로 예조 좌랑에 올랐다. 이듬해 을축년(乙丑年,1685, 숙종 11)에는 병조로 옮겨 호남(湖南)의 장시관(掌試官)이 되었는데, 호남 사람들이 공의 공정(公正)함에 감복하였다.
이때에 사론(士論)이 분열되어 전랑(銓郞) 하나가 공을 꺼려 함경 도사(咸鏡都事)로 내보내니, 친구들이 모두 좌천을 위로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말하기를, “북도의 명산(名山)은 내가 보고싶어 했던 바이다.” 하고, 임지에 도착하자 다만 소영(嘯詠)으로 자적(自適)하고 조금도 성기(聲妓)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에 소환되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때에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상진(李尙眞,1614~1690/전의이씨)이 민희(閔熙,1614~1687)와 홍우원(洪宇遠,1605~1687)의 방면(放免)을 청하여 공이 양사(兩司)와 함께 이상(李相)을 탄핵하였는데, 요대(僚臺)에서 이의를 제기한 자가 있자 공이 인피(引避)하기를, “홍우원은 말이 동조[東朝, 왕대비전(王大妃殿)]를 침핍(侵逼)하였고, 민희는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었는데 대신이 신구(伸救)하는 것은 무슨 마음이랍니까?” 하고, 사간 이홍적(李洪迪)과 장령 안규(安圭)가 회피하는 잘못을 아울러 논박하였다.
우의정 정재숭(鄭載嵩)이 연경(燕京)에 들어갔는데, 임금의 신상에 벌환(罰鍰)의 욕(辱)이 있어 동료와 함께 탄핵하였고, 또 차자를 올려 제궁가(諸宮家)에서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논하기를, “하루 사이에 혁파하게 하였다가 또 그대로 두라 하니, 실로 말 한 마디로 흥방(興邦)도 하고 상방(喪邦)도 하는 그런 기미(幾微)가 있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는데, 이에 앞서 교리 이징명(李徵明,1648~1699)이 궁금(宮禁)의 일을 밝히면서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 공이 소구(疏救)하고 그 뒤에 전론(前論)을 거듭 신명(申明)하면서 말이 극히 절직(切直)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차마 듣기 민망한 엄교(嚴敎)를 내리고, 즉시 간직(諫職)을 체대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복역(覆逆, 반론을 제기함)하고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차론(箚論)하니 수환(收還, 명을 거둠)을 명하고 비답의 사연을 고쳐 내렸는데, 이때에 중외(中外)에서 남의 일이지만 모두 두려워 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내ㆍ외직에 무려 40여 차례나 공을 의망하였지만 끝내 낙점(落點)이 되지 않자 노봉(老峰) 민 상공[閔相公,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공을 천거하여 금위영(禁衛營)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4)에 원량(元良, 세자)이 탄생하자 처음으로 공을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제수하였다. 이듬해 기사년(己巳年, 1689)에는 대처분(大處分)이 있었고 또 우암 선생이 제주(濟州)로 귀양 가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서울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임금이 크게 깨닫고 맨 먼저 소명(召命)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매양 강연(講筵)에 오를 때마다 문의(文義)의 해석이 끝나면 널리 경사(經史)를 원인(援引)하여 일에 따라 개도(開導)하고, 또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임금의 일용 행사(日用行事)에 가장 절실하니 때때로 올려 보시면 반드시 도움됨이 있을 것이라’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는 지극히 지당하니 특별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교리(校理)로 옮겨 좌의정 윤지완(尹趾完,1635~1718)에 대한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대찬(代撰)하면서 ‘이륜 두패(彛倫斁敗)’의 말이 있자, 윤상(尹相)이 자기를 기롱(譏弄)하는 뜻으로 은유(隱喩)하였다고 의심하고 심히 노하였는데,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본 뜻이 아닙니다.” 하고, 끝내 변명하지 않았다.
기사방(己巳榜) 가운데 명가(名家)의 아들 한 사람이 병조의 낭관(郎官)이 되자 공이 말하기를, “만일 알아서 처신(處身)하지 아니하면 내가 논박하겠다.” 하였는데, 관록(館錄, 홍문록(弘文錄)을 할 때에 장관(長官)인 오도일(吳道一, 1645~1703)과 다투어 기사방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참여해 뽑힌 사람이 없게 하니, 이로부터 청의(淸議)는 다소 신장(伸張)할 수 있었으나 시배(時輩)들의 미워함은 심하게 되었다.
이때에 칠(漆) 3두(斗)와 호초(胡椒) 40두를 들이라는 명이 있었는데, 공이 응교(應敎)로 있으면서 차론(箚論)하기를, “지금 이 몇 가지 품목은 너무 방대한데 전하께서는 어디에 쓰시렵니까? 만약 부음(浮淫)하거나 용두(冗蠹)의 소용이 된다면 성심(聖心)이 점점 사치(奢侈)의 경지로 들까 두렵습니다.
옥루(屋漏, 집의 가장 으슥한 곳)의 깊은 곳에서도 마음이 싹트기만 하면 하늘은 훤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더욱 긍긍 업업(兢兢業業, 조심스러워하는 마음)한 심지(心志)를 가지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교체되어 집의(執義)에 제배되었는데, 그때에 묘향(廟享)을 재감(裁減)하자는 논의가 있자 공이 주자설(朱子說)을 인용하여 헌의(獻議)하기를, “지금 대계(大計)를 세워 상하(上下)의 용비(冗費, 긴요하지 않은 잡비)를 모두 절감하지 못한 터에 먼저 묘향에서 감하는 것은 어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 큰 뜻을 발휘하여 먼저 성궁(聖躬)에서부터 검약하소서.” 하였다.
일찍이 추국(推鞫)하는 자리에 참좌하였는데, 위관(委官) 남구만(南九萬,1630~1711) 상공이 이의징(李義徵,1643~1695)을 감사(減死)하자고 발의하여 공이 쟁변(爭辨)하기를, “이의징은 화심(禍心)을 품고 누차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국가에 해를 끼쳤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몇 차례 말을 해도 듣지 않자 공이 떨치고 일어나려고 하니, 위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수찬에 제수된 적이 두 번, 교리ㆍ응교ㆍ사간에 제수된 적이 각각 세 번, 집의에 제수된 적이 두 번이었고, 동부승지에 올라 병으로 체직되어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나갔다. 을해년(乙亥年, 1695, 숙종 21)에 승지로 돌아와서 이듬해 병자년(丙子年, 1696, 숙종 22)에 예조 참의를 거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고 다음 해 정축년(丁丑年)에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홍뢰(虹雷)의 변괴로 인하여 응지(應旨)해 글을 올려 재이(災異)를 없애는 실사(實事)에 대해 극언하고, 또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갈 것과 세자(世子)를 보익(輔翼)할 것과 군덕(君德)을 닦고 조정을 바르게 하며 염치를 장려하고 장법(贓法)을 엄히 하는 방도 등 몇 천 마디를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에는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고, 이듬해 기묘년(己卯年)에는 대사간으로 돌아왔다가 가을에는 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이듬해에 인수(印綬)를 던지고 돌아오니 광주 백성들이 덕을 기리어 절벽에 새기고 쇠로 지어붓어 비(碑)를 만들었다.
신사년(辛巳年, 1701, 숙종 27)에는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스스로를 검속함이 매우 엄하고 호령이 명숙(明肅)하였다. 도내에는 제궁가(諸宮家)에서 널리 산택(山澤)을 점거한 것이 수십 군데가 되어 장계를 올려 혁파하기를 청하여 자기의 거취(去就)를 걸고 다투었으나, 조정에서는 미루고 시행하지 않았다.
계미년(癸未年, 1793, 숙종 29)에는 누차 상소하여 체직하고 돌아와서 호조ㆍ병조ㆍ예조의 좌이(佐貳, 참판을 말함)를 지내고, 승지ㆍ대사간ㆍ판결사도 두루 거쳤는데, 더러는 두 번 지낸 적도 있었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 가을에는 또 대사간이 되어 세 가지 일을 소론(疏論)하였는데, 하나는 선혜청의 쌀을 끌어다가 시전(市廛)에서 빌려 쓴 물건의 값을 갚는 일이고, 또 하나는 대관(臺官) 김만근(金萬謹,1667~1705)을 변방 수령으로 내보내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지평(持平) 김재(金栽)가 아유 구용(阿諛苟容)하여 말을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듬해 을유년(乙酉年,1705, 숙종 31)에는 또 승지에서 예조로 옮겼는데, 그때에 존호(尊號)를 올리자는 논의가 있자 공이 직무상 간언(諫言)을 올리되 육선공[陸宣公, 당(唐)의 육지(陸贄)]의 ‘안태(安泰)할 때에도 겸양의 덕을 쌓아야 하지만 상란시(喪亂時)에는 더욱 사체(事體)를 손상하시킨다.’는 말을 정성을 다하여 개진(開陳)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과궁(寡躬)을 충애(忠愛)한다는 하교가 있었다.
가을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승진하여 무비(武備)를 전부 새롭게 하고 창고를 가득 채우는 등 쇠잔함을 소생시키고 없어진 것을 일으키는 치효(治效)가 크게 있었다. 정해년(丁亥年, 1707년 숙종 33)에는 병조 참판에 제배되었고, 이듬해 무자년(戊子年,1708)에는 중추부(中樞府)로 옮겨 의금부 당상을 겸하였다.
그때에 직신(直臣) 이동언(李東彦,1662~1708)이 다분히 시인(時人)의 미움을 사서 불효의 죄에 무함(誣陷)되어 3년이나 옥에 갇혀 있었으나 성상의 생각도 좌우에서 영향을 받은 터라 세상에서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논하되 시초부터 분석하고 나열하여 증거를 대고 이어 이동언이 충효스러운 실상을 명백하고 간절하게 말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으나 임금의 비지(批旨)가 극히 엄중하여 벼슬길에 막힘을 당한 지 1년이 지난 뒤에 임금이 이동언의 신원(伸寃)을 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의 상소가 장본(張本)이 되었다.”고 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709, 숙종 35)에 비로소 병조ㆍ예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에 이조 참판이 되어 청의(淸議)를 확장하며 직언(直言)을 견지하여 굽히지 않았으므로 시배(時輩)들이 못마땅해 하였다.
마침내 권첨(權詹)이 상소하여 지척(詆斥) 당하여 그로 인해 체대되어 공조 참판ㆍ대사성에 이배(移拜)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강교(江郊)로 물러나 있으면서 일곱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기고 파직되어 호산(湖山)에 소요(逍遙)하면서 노년을 보낼 계획을 세웠는데, 이해 11월 13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수(壽)는 78세이다.
병중에 1백여 마디를 입으로 불러 자손에 남겼고, 임종 때에도 임금의 환후가 더함을 듣고는 더욱 간절히 걱정하여 잠꼬대처럼 쉴 사이 없이 말을 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관례대로 부의(賻儀)를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광주(廣州)의 월곡(月谷)에 장사지냈다가 을미년(乙未年, 1715, 숙종 41) 9월에 광주 부곡촌(富谷村) 인좌(寅坐) 언덕에 이장하였고 부인 홍씨(洪氏)를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천성이 경직(勁直)하고 특달(特達)하여 몸은 깡말랐으나 정신은 청수(淸秀)하였으며 뜻은 개결(介潔)하고 행실은 방정(方正)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좌우로 받들어 사랑과 존경을 극진히 하고, 질병이나 연고가 없으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가 가벼운 병이라도 있으면 걱정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일찍이 이르기를,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의학(醫學)을 몰라서는 안된다” 하고, 각 방문(方文)을 두루 상고하여 의술을 대충은 이해하였다.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애훼(哀毁)함이 예제(禮制)에 지나쳤고, 여묘(廬墓)하고 곡배(哭拜)함에 비바람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말이 부모의 일에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고 울먹여 늙어서도 덜하지 않았다.
외선조(外先祖)의 비갈(碑碣)을 혼자 독담하여 세웠고, 두 형을 섬기기를 엄부(嚴父)와 같이 하였으며, 막내 동생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토지를 분할해주어 살게 하였고, 아버지를 여읜 세 조카를 지성으로 가르쳤으며 당종(堂從, 종항간 재종간 삼종간의 총칭)을 대하기를 친형제와 다름 없이 하였다.
일찍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숭모(崇慕)하여 대현(大賢)에게 귀의하였는데, 스스로 유자(儒者)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행기(行己)와 처사(處事)가 법도에 맞지 않은 일은 극히 적었다. 날마다 반드시 얼굴빛을 가다듬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야비스럽고 기변(機變)이 있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삼분 오전(三墳五典)을 즐겨 읽었으며 더욱 주자학(朱子學)에 힘을 써 완미(玩味)하고 침잠(沈潛)하여 밝히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고 일생의 체험(體驗)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소학(小學)≫ 한 질을 정사(精寫)하여 손에서 놓지 않고 이르기를, “사람이 이를 알면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섬김에 거의 도리를 터득하게 된다.” 하였다.
글을 지음에는 기력이 굉건(宏健)하여 조식(彫飾)한 티가 없었는데, 주어문자(奏御文字)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박식하고 다문(多聞)하다고 일컬었다. 시를 지음에는 침착(沈着) 전중(典重)하여 부화(浮華)를 일삼지 않으니, 문단(文壇)의 제로(諸老)들이 감상하는 자료로 많이 삼고 있다.
사람을 대함에는 반드시 성신(誠信)으로써 하고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남의 착한 일을 보면 반드시 포양(襃揚)하려고 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보면 자기까지 더립힘을 당하는 것처럼 하였다. 항상 염정(恬靜)으로 자신을 간직하고 남과 추축(追逐)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집안이 적막하고 잡객(雜客)의 내왕이 없었다.
검소함을 숭상하고 자봉(自奉)은 하지 않아 한소(寒素)한 선비와 같았고 염절(廉節)에 힘써 청명(淸名)이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집을 팔고 남의 집에 우거(寓居)하는 것을 사람들은 그 옹색함을 감내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천석(泉石)을 유난히 좋아하여 역내(域內)의 명산(名山)에 두루 노닐다가 가장 잊지 못해 하는 열 곳을 그림에 담아 병풍을 만들고 누워서 노닐었다.
사물에 자상하고 인자하여 비록 곤충 같은 미물에게도 부질없이 해를 가하지 않았고, 정사(政事)를 함에는 엄격함을 위주로 하였으나 한번도 인명(人命)을 상손(傷損)하지는 않았다. 저술한 바는 매우 많았으나 수습하여 간수하지 않아 태반이 산실(散失)되고 약간 권(卷)만 집에 보관되어 있다.
상당(上黨)의 한씨(韓氏)는 고려 때 태위(太尉) 한난(韓蘭)을 상조(上祖)로 삼고 있는데, 고려에서 아조(我朝)에 이르도록 대대로 대관(大官)이 있었고 헌면(軒冕)으로 이어져 동방의 갑을족(甲乙族)이 되었다. 근세에는 우의정 충정공(忠靖公) 한응인(韓應寅,1554~1614)이 큰 훈업(勳業)이 있어 중흥(中興)의 명상(名相)이 되었다.
충정공이 한덕급(韓德及,1577~1660)을 낳으니 지돈녕(知敦寧)으로 청녕군(淸寧君)에 습봉(襲封)되었는데, 사계(沙溪) 집안의 사위가 되었다. 이분이 한수원(韓壽遠,1602~1669)을 낳으니, 목사(牧使) 증 이조 참판으로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이 있었는데 바로 공의 고(考)이다. 비(妣)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증 승지 용계 처사(龍溪處士) 이영원(李榮元,1565~1623)이 그 아버지이다.
(공의 배위) 홍씨 부인(洪氏夫人)은 당성[唐城, 남양(南陽)의 고호]의 대성(大姓)으로 도관찰사(都觀察使) 성암공(醒庵公) 홍처후(洪處厚,1599~1673)의 딸인데, 단장(端莊) 정일(靜一)하여 매사를 예법에 따라 행하였으므로 친가(親家)에 있을 때는 부모가 어질게 여겼고, 시집을 와서는 시부모가 미덥게 보았다.
동서간에는 친자매처럼 대하고 아버지를 잃은 여러 조카들을 무양(撫養)함에는 기출(己出)과 다름없이 하였다. 고리짝에는 패물이 없고 문에는 무당을 들이지 않았으며, 공을 따라 임지로 가서는 장사치가 통래하지 않아 안팎이 숙연(肅然)하니 육친(六親)이 모범으로 삼았다.
4남 1녀를 길렀으니, 아들로 맏이는 정랑(正郞) 한배의(韓配義,1660~?)이며, 다음은 한배도(韓配道)ㆍ한배문(韓配文)ㆍ한배기(韓配琦)요, 딸은 조명휘(趙命徽)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한배희(韓配熙)요 딸은 박필무(朴弼懋)에게 출가하고 하나는 출가하지 않았다.
한배의의 아들 한사범(韓師范)은 진사요, 두 딸은 이홍좌(李弘佐)ㆍ유세모(柳世模)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한배도의 계후자(系後子)는 한사식(韓師軾)이요, 3녀는 윤지(尹志)ㆍ윤득검(尹得儉)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막내는 출가하지 않았다. 한배문의 아들은 한사일(韓師逸)이요, 딸은 신진하(申鎭夏)에게 출가하였다. 한배기는 조몰(早歿)하였고, 조서(趙壻)의 아들은 조한종(趙漢宗)ㆍ조한명(趙漢明)ㆍ조한장(趙漢章)이며,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50여 인이다.
오호라! 공은 명문의 화주(華胄)로 재학(才學)이 무리에서 뛰어나 장보(章甫, 유생(儒生))로 있을 때부터 명성과 인망이 성하게 드러났고 늦게는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풍범(風範)이 한 세상에 떨쳤으니, 의당 암랑(巖廊, 의정부)에서 조복(朝服)을 늘어뜨리고 크게 경륜을 펼쳤어야 했는데, 누차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고 시론(時論)을 거슬려 미움이 쌓여서 진용(進用)이 항상 탄토간(呑吐間,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음)에 있었으므로 날아도 날개짓을 못하여 지하에까지 한을 싸 가지고 갔으니, 이것이 혹 이른바 명(命)이란 것인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공이 조정에서의 본말(本末)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 대각(臺閣)에 있어서는 옛날 유직(遺直, 옛사람의 유풍(儒風)이 있는 곧은 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강연(講筵)에 올라서는 참다운 학사(學士)의 일컬음이 있어 풍성(風聲)이 늠름(凜凜)하여 죽백(竹帛, 사책(史冊))에 빛이 더하고 있으므로 백세(百世) 뒤에는 반드시 나부(懦夫, 나약한 사람)로 뜻을 세우게 하고 완부(頑夫, 완악한 사람)로 첨렴스럽게 할 것이니, 세상의 살아서는 극히 존귀했음에도 죽어서는 칭도(稱道)할 것이 없는 사람과 비교하여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어떻다 하겠는가?
옛날 구양공[歐陽公, 송(宋)의 정치가 구양수(歐陽修)]은 정사(政事)를 가장 오래 했는데도 문장(文章)에 가렸는데, 지금 공의 행의(行誼)는 순비(淳備)하면서도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하는 것은 혹 이것도 직절(直節)에 가려서 그런 것인가?
나는 공과 세교(世交)의 호의(好誼)가 있고 동문(同門)의 정분(情分)도 있다. 비록 은현(隱顯)의 길이 달라 서로 자주 종유(從遊)하면서 봉마(蓬麻, 봉생마중(蓬生麻中)의 뜻)의 도움됨에 이바지하지는 못했으나 고풍(高風)을 멀리 회앙(懷仰)한 지는 오래이다.
지금 공의 묘목(墓木)은 이미 한 아름이 되었는데, 정랑군(正郞君, 한배의)이 묘비문(墓碑文)을 울면서 청하니, 내가 어떻게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삼가 장문(狀文)에서 간추려 다음과 같이 서차(序次)하고, 아래와 같이 명(銘)을 쓰는 바이다.
여기 한 사람이 있어 강직함이 철석과 같은데,
일찍이 사문(師門)에 종유(從遊)하여 그 방직(方直) 배워서라네.
예송(禮訟)이 화계(禍階)가 되어 대로(大老)가 위리 안치(圍籬安置)되니,
수백의 선비 창솔(倡率)하고 글을 올려 소석(昭析)하였네.
경신년(庚申年)의 경화(更化)에 공이 비로소 사적(仕籍)에 올라,
대단(臺端)에서 정색(正色)을 하니 가을 하늘의 일악(一鶚)이었네.
위언(危言)으로 면절(面折)하니 조야(朝野)가 움출했는데,
겁화(劫火)는 하늘에 뻗치고 시사(時事)는 망극하였네.
의관(衣冠) 걸어놓고 아주 가니 임학(林壑)에서 두둥실 춤을 추었는데,
황도(黃道)에 빛이 도니 정사(正士)들 다시 찾아왔다네.
정성스러운 충성심으로 경악(經幄)에서 주선하였고,
대읍(大邑)과 명번(名藩)에서 빙벽(氷蘗)의 지조 드러냈다네.
구경(舊京)에서 유수(留守)하니, 임금의 의지 더욱 두터웠고,
들어와 이조의 좌이(佐貳)되니 격탁(激濁) 양청(揚淸) 먼저 했다네.
백안(白眼, 질시하는 눈)은 세상에 가득하고
청승(靑蠅, 소인)은 옥(玉)을 더립히나니,
끼이지 않으면 무슨 병폐 있으랴, 우한(優閑)을 즐겼네.
나의 농사 윤기 나고 나의 호산(湖山) 푸르른데,
갑자기 승화(乘化)하니, 부앙간(俯仰間)에 부끄러움 없다네.
효자가 옥돌 다듬어 명덕(明德)을 현양(顯揚)하니,
청방(淸芳)은 사라지지 않고 운수(雲水)와 함께 희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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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兵曹參判韓聖佑神道碑銘 - 權尙夏
近世沙溪、尤菴二先生傳承道學, 爲世師宗, 韓公汝尹以沙溪之彌甥, 出入於尤菴之門, 自少濡染, 淸修自持。 及其出而颺庭, 直道事君, 終不疚法門之餘矩, 人謂公天分然矣, 而淵源所自亦不可誣也。
公諱聖佑, 以崇禎癸酉四月一日生。 聰穎端雅, 文才邁等, 長者期以遠到。 弱冠, 累占解額。 己酉, 中司馬, 士友惜其晩。 松谷趙公復陽秉銓, 欲擬金吾郞, 公力辭若浼。 冬, 丁外艱。 翌年, 又喪慈夫人。 甲寅, 士禍將作, 率累百多士, 卞尤菴誣, 因與世絶, 屛跡湖右。 庚申更化, 首膺收錄, 拜崇陵寢郞, 例遷奉事、直長。 甲子, 魁泮製。 冬, 應殿試, 以資窮陞禮曹佐郞。
乙丑, 移兵曹, 掌試湖南, 湖人服其公正。 時士論已岐, 一銓郞忌公, 出補咸鏡都事, 親舊皆唁屈, 公無幾微色, 辭曰: “北路名山, 吾所願見。” 到幕, 只以嘯詠自適, 一不近聲妓。 丙寅, 召拜司憲府持平。 時原任大臣李尙眞, 請放閔熙、洪宇遠, 公與兩司駁李相。 僚臺有立異者, 公引避曰: “宇遠語犯東朝, 熙罪關宗社, 大臣之伸救, 是誠何心” 幷論司諫李弘迪、掌令安圭規避之失。 右相鄭載嵩赴燕, 有上躬罰鍰之辱, 與同僚劾之。 又箚論諸宮家折受之弊曰: “一日之間, 旣許革罷, 又令仍舊, 實係一言興喪之幾。” 俄移司諫院正言。 先是, 校理李徵明明宮禁事忤旨, 公疏救之。 其後復申前論, 語極加切, 上震怒, 下不忍聞之嚴敎, 卽遞諫職。 政院覆逆, 玉堂陳箚, 乃命收還, 改下批辭。 是時中外莫不代怖, 而公不少挫。 由是銓司擬公於內外官不翅四十餘, 而終靳天點, 老峯閔相公辟公爲禁衛從事。
戊辰, 元良誕生, 始除公禮賓寺正。 己巳, 有大處分, 且尤齋先生謫耽羅, 公棄官下鄕, 足不到京輦。 甲戌, 聖心大悟, 首被召命, 爲弘文
館修撰。 每登講筵, 解釋文義訖, 博引經史, 隨事開導。 又請: “《聖學輯要》最切於人主日用行事, 時時進覽, 則必有裨益。” 上曰: “所達切至, 當別留神。” 俄遷校理, 代撰右相尹趾完不允批, 有“彝倫斁敗”之語, 尹相疑寓譏於己怒甚, 公笑曰: “非余本意。” 然終不卞。 己巳榜中, 名家子一人有爲兵郞者, 公曰: “如不自處, 吾當駁之。” 至館錄時, 與長官吳道一相爭, 榜中人一無與選者。 由是淸議稍申, 而時輩之媢嫉甚矣。 時有漆三斗、胡椒四十斗入納之命, 公以應敎箚論, 略曰: “今玆數目浩多, 殿下欲用於何地 若未免浮淫宂蠹之歸, 則臣恐聖心入於奢汰之域。 屋漏之邃, 一念纔萌, 天已洞見, 伏願益守兢業之志。” 上嘉納之。 遞拜執義, 時有廟享裁減之議, 公引朱子說獻議曰: “今不能大計上下宂費, 悉行減罷, 而先減廟享, 豈不未安? 願聖明奮勵大志, 先自儉約。” 嘗參鞫坐, 委官南相九萬發李義徵減死之議, 公爭之曰: “義徵包藏禍心, 屢起大獄, 魚肉縉紳, 貽害國家, 不宜容貸。” 屢言, 不聽。 公欲起出, 委官不得不從。 由是拜修撰者二, 校理、應敎、司諫者皆三, 執義者再, 陞同副承旨, 以病遞, 以戶曹參議, 出爲淮陽府使。
乙亥, 還承旨。 丙子, 以禮曹參議, 補三陟府使。 丁丑, 拜司諫院大司諫, 因虹雷之變應旨上章, 極言弭災之實, 且陳頻御經筵、輔翼世子、修君德、正朝廷、勵廉恥、嚴贓法之道, 殆累千言, 上優批。 戊寅, 爲鐵原府使。 己卯, 還諫長。 秋, 又拜光州牧使, 翌年投紱, 光民誦德, 鑱崖鑄鐵爲碑。 辛巳, 拜全羅道觀察使, 自律甚嚴, 號令明肅。 道內諸宮家廣占山澤者, 至於數十處, 狀啓請罷, 以去就爭之, 朝家寢不行。 癸未, 累疏得遞, 還拜戶・兵・禮三曹佐貳、承旨、諫長、判決事, 或有再踐者。
甲申秋, 又爲諫長, 疏論三件事: 其一引用惠廳米, 以賞市廛貸物也: 其一臺官金萬謹, 斥補邊邑也; 其一持平金栽, 阿諛不言也。 乙酉, 又自承旨移禮曹。 時有尊號之議, 公以職事進諫, 以陸宣公 “安泰之日, 已累謙沖; 喪亂之時, 尤傷事體” 之語, 竭誠開陳, 上允之, 有“忠愛寡躬”之敎。 秋, 陞開城留守, 武備一新, 府庫充溢, 大有蘇殘起廢之效。 丁亥, 遞拜兵曹參判。
戊子, 以西樞兼金吾堂上。 時直臣李東彦積忤時人, 陷不孝之罪, 繫獄三年, 聖意亦有所左右, 爲世諱言。 公上疏論之, 劈破原頭, 鋪列證端, 因言東彦忠孝狀, 明白剴切。 見者咸快, 而聖批極嚴, 見枳仕塗者踰年。 後上命伸東彦之冤, 人謂公之疏爲張本也。 己丑,
始拜兵・禮曹參判、左・右尹, 皆以疾免。
庚寅, 爲吏曹參判, 恢張淸議, 秉直不撓, 時輩銜之, 終被權詹疏詆, 因此呈遞。 移工曹參判、大司成, 皆不就, 屛居江郊, 七違召命而罷, 徜徉湖山, 爲終焉計。 其年十一月十三日, 以疾卒于正寢, 壽七十八。 病中口呼百餘言, 以遺子孫, 臨終聞聖患添重, 憂焦益切, 諄諄若夢中語。 訃聞, 上遣官致祭, 弔賻如儀。 翌年正月, 葬廣州月谷。 乙未九月, 遷于本州富谷村寅坐之原, 夫人洪氏祔焉。 公天姿勁特, 貌臞而神淸, 志潔而行方。 事親至孝, 左右奉承, 曲盡愛敬, 非有疾故, 須臾不離側, 父母有微𧏮, 憂形於色。 嘗曰: “奉親者不可不知醫。” 遍考諸方, 略曉其術。 及罹巨創, 哀毁踰制, 廬墓哭拜, 不避風雨, 語及先故, 必嗚咽泣下, 至老不衰。 外先碑碣, 躬自辦立。 事二兄如嚴父, 季弟貧甚, 割土而資業之。 失怙三侄, 至誠敎噵, 待堂從無間同氣。 夙慕爲己之學, 以大賢爲依歸, 雖未嘗以儒者自居, 行身、處事不合繩墨者鮮矣。 日必卞色而作, 端坐終日, 絶無鄙野機變之言。 耽嗜墳典, 尤用力於朱子書, 玩索浸灌, 不明不措, 爲一生體驗。晩年精寫《小學》一部, 手不停披曰: “人若知此, 則於事親、事君幾矣。” 爲文氣力宏健, 無藻飾態, 至於奏御文字, 人皆稱博識多聞。 爲詩沈鬱典重, 不事浮華, 藝苑諸老多所賞音。 待人必以誠信, 不置畦畛。 聞人之善, 必思褒揚, 如見不善, 若將浼己。 恬靜自持, 不喜馳逐, 門庭寂寥, 雜客遠跡。 尙儉素, 不奉如寒士: 礪廉節, 淸名冠朝右。 販屋僑居, 人不堪苦, 而晏如也。 癖於泉石, 遍遊域內名山, 畫出於最難忘者十區, 作屛臥遊。 慈良於物, 雖昆蟲之微, 不忍枉害, 爲政尙嚴, 而一未嘗傷損人命。 所著述甚富, 而不自收藏, 散失過半, 只略干卷藏于家。 上黨之韓, 以太尉蘭爲上祖。 自麗至我朝, 代有大官, 承繼軒裳, 爲東方甲乙族。 若近世右議政忠靖公諱應寅, 有大勳業, 爲中興名相。 忠靖生諱德及, 知敦寧, 襲封淸寧君, 館甥于沙溪之門。 生諱壽遠, 有士林重望, 官牧使, 贈吏曹參判, 是公之考也。 妣咸平李氏, 其考龍溪處士榮元, 贈承旨。 洪夫人, 唐城大姓, 都觀察使醒菴公處厚之女。 端莊靜一, 動遵禮法。 在家, 父母賢之; 旣歸, 舅姑宜之。 待妯娌如同胞, 撫視諸孤姪, 無間己出。 筐無珠貝, 門絶巫卜。 隨公赴邑, 市買不通, 內外肅然, 六親以爲型範。 育四男一女: 男長配義, 正郞; 次配道、配文、配琦。 女適趙命徽。 側室子配熙。 女朴弼懋, 其一未算。 配義男師范, 進士。 二女: 李弘佐, 柳世模。 配道所後子師軾。 三女: 尹志, 尹得儉, 季未字。 配文男師逸, 女申鎭夏。 配琦早沒。 趙婿男漢宗、漢明、漢章。 內外曾玄摠五十餘人。
嗚呼! 公以名門華胄, 才學拔群, 自在章甫, 聲望蔚然。 晩結主知, 風稜振一世, 宜若端委巖廊, 大展厥施, 而屢攖尺鱗, 積忤時論, 進用常在呑吐間, 飛不盡翰, 齎志泉壤, 倘所謂命也歟? 雖然, 竊迹公立朝本末, 處臺閣則有古遺直之風, 登講筵則有眞學士之稱, 風聲凜凜, 輝映竹帛, 百世之後, 必有立懦、廉頑者, 其視世之生極尊貴而沒無可稱者, 其賢不肖何如也? 昔歐陽公政事最長, 而掩於文章, 今公之行誼淳備, 而人或有未盡知者, 抑亦爲直節所掩耶 余與公有世講之好, 同門之誼, 雖隱顯殊道, 未克數相遊從, 以資蓬麻之益, 而其所以緬懷高風者稔矣。 今公之墓木已拱, 而正郞君泣請揭阡之文, 余何敢以不文辭? 謹摭狀文, 序次如右, 系之以銘。 銘曰。
若有一人, 其剛鐵石。 夙遊師門, 學其方直。 禮訟階禍, 大老栫棘。 倡數百士, 抗章昭析。 白猿更化, 公始通籍。 正色臺端, 秋天一鶚。
危言面折, 朝野瑟縮。 劫火彌空, 時事罔極。 掛冠長往, 婆娑林壑。 黃道回光, 正士來復。 侃侃忠規, 密勿經幄。 大邑名藩, 淸氷苦蘖。
居留舊京, 倚畀益篤。 入佐天官, 政先揚激。 白眼滿世, 靑蠅點玉。 不容何病? 優閑可樂。 我稼油油, 我湖澄碧。 翛然乘化, 俯仰無怍。
孝子劖珉, 思顯名德。 淸芬不沫, 雲水俱白。 <끝>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속고3 경재(卿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