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군수 이공 묘지명(郡守李公墓誌銘)
공은 휘가 심(𧀯)이고 자는 자방(子芳)이니 좌의정 외재(畏齋) 휘 단하(端夏)의 아들이요 이조 판서 부제학 택당(澤堂) 휘 식(植)의 손자이다. 두 세대가 경술과 문장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덕수 이씨(德水李氏) 집안이 더욱 성대해졌다. 의정공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씨의 부친은 참판 필원(必遠)이다.
공은 숭정(崇禎) 을유년(乙酉年, 1645, 인조 23)에 태어나 기유년(己酉年, 1669, 현종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동지들과 결의하여 매달 강학하였는데, 우암(尤菴) 선생이〈상관회서(相觀會序)〉를 지어 면려하였다. 의정공이 조정에 있을 적에 항상 물러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한번은 뜻밖의 일에 연좌되어 하옥되었다.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나는 장차 돌아가리니 너희들은 몸소 농사를 지어서 봉양하거라.”
하였다.
공이 부친의 편지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우리 부친의 뜻을 상하게 했으니 나의 죄이다.”
하였다.
이후로 세운(世運)이 변천하는 가운데 의정공이 물러난 적이 많고 나아간 적이 적었다. 공이 그때마다 책을 지니고 초야로 가서는 몸소 농사를 지어 변변찮은 음식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봉양하였으며, 처자식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더라도 부친이 모르게 하였으니, 의정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나를 잘 봉양하는구나.”
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의금부 도사로 옮겼는데 작은 혐의로 인해 나아가지 않았다.
을축년(乙丑年, 1685, 숙종 11)에 금정 찰방(金井察訪)에 제수되었다. 큰 흉년을 만나 공이 녹봉을 덜어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였는데 넉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였다.
당시에 의정공이 진휼청을 관리하였는데, 공이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여 모속(募粟)을 넓혀서 역인(驛人)들을 살린 다음 추수 이후에 환곡을 거두어들이고 이어 속역(屬驛)에 사창(社倉)을 설치하도록 청하였다. 관찰사가 공의 치적을 위로 보고하자 수령에 제수하는 명이 내렸다.
의정공과 함께 직책을 맡았던 자가 모속첩문(募粟帖文)의 일을 들추어내어 공의 죄를 묻고 의정공까지 화가 미치게 하여 사적인 유감을 풀려고 했으나 계획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대관(臺官)이 또 그 말을 부풀려서 논핵하자 의정공이 상소를 올려 실상을 아뢰며 공이 받은 상전(賞典)을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온화한 말로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집안에 누를 끼친 것을 마음 아파하여 사직상소를 올리고 돌아갔는데 훗날 어사가 또 추후에 포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성 현감(石城縣監)으로 승진하였는데 즉시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공은 지극한 효행이 있었으니 의정공이 병을 앓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아 올려드렸고 장사 지낼 적에는 정성을 다하여 작은 예법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받은 부의(賻儀)는 모두 제사 지내는 데 사용하고 집안의 이익으로 삼지 않았다. 상례에는 한결같이 택당공(澤堂公)의 제식(祭式)을 준수하여 미리 물품을 갖추어놓고 기물과 용구 또한 일상의 것과 구별하였다. 유집(遺集)을 손수 베껴 거의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았다. 마을 안의 사창을 수리하고 외가 가운데 궁핍한 친족을 보살핀 것은 모두 선대의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었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형조 좌랑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다. 이듬해 흉년이 들자 공이 9등급에 해당하는 가난한 백성을 선별하여 달마다 세 차례 마른 양식을 주고 더욱 궁핍한 백성에게는 죽을 먹였으며, 또 솔잎으로 죽어가는 이를 구제하는 처방을 가르쳤다.
백성과 규약을 만들어 도적이 모처에서 일어나면 경보를 연이어 전파하여 길을 막고 구원하기로 하니, 도적의 경보가 있을 때마다 사방에서 즉각 호응하였다. 당시 도내에 굶어죽은 시체가 그득했으나 제천의 백성만은 굶어죽지 않았고 도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고을 안의 예부(例賻 규례에 따른 부의)를 사용하지 않았고 백성이 공의 집에 부의를 보냈으나 끝내 물리쳤으니 송덕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경진년(庚辰年, 1700, 숙종 26)에 익위사 익위를 거쳐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나갔다가 풍비(風痹)에 걸려 벼슬을 그만두고 여강(驪江)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서울에서 의원의 치료를 받다가 신사년(辛巳年, 1701, 숙종 27) 8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실(正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진사 구성(九成)의 딸이니 그 조부는 판서 처량(處亮)이다. 유순하고 은혜로워 부녀자의 도를 지녔는데 45세가 되던 경오년(庚午年, 1690, 숙종 16)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의진(義鎭)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2남 정진(靜鎭)은 익위사 시직을 지냈고 3남 귀진(龜鎭)은 상중에 지나치게 슬퍼하다 병으로 요절하였으며 4남은 후진(厚鎭)이다.
세 딸은 각기 정자 김성중(金聖重), 현감 김신행(金愼行), 사인 김진부(金鎭符)에게 출가하였다. 경진(敬鎭)과 덕진(德鎭) 그리고 송거원(宋巨源)과 정회(鄭悔)는 측실(側室)의 아들과 사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를 지니고 있어 남의 어려움을 구원하고 의로움을 좋아한지라 자신의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정사는 주밀하여 항상 백성을 사랑하는 데 주력하였으니 그가 역참과 고을에서 시험한 것으로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낮은 관직의 선비가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시험할 바를 크게 펼쳐 선대의 지업(志業)을 끝마치지 못하였구나. 공의 아우인 자(𤲸)가 일찍부터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았는데 공이 한번은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글을 지어 내 마음을 밝혀줄 이는 동생이다.”
하였는데, 나중에 과연 그러하였다. 나는 시직군(侍直君)의 부탁으로 공의 가장에서 가려 뽑아 무덤에 들이며 다음과 같이 명(銘)을 덧붙인다.
부친을 계승하여 일을 주관하였으니 위태로워도 허물이 없었네 / 幹蠱承考厲無咎
재능은 컸으나 지위는 낮았으니 시운을 만나지 못해서라네 / 材鉅位細命不偶
내가 삼가 취한 바에 대해 남들도 이견이 없을 것이네 / 人不間言余竊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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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군수 이공 묘지 :
저자가 이심(李𧀯, 1645~1701)을 위해 쓴 묘지명이다.
[주02] 상관회서(相觀會序)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8에 수록되어 있다.
[주03] 모속(募粟) :
기근이나 병란이 있을 때에 국가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면역
(免役) 또는 면천(免賤)해 주는 일을 말한다.
[주04] 9등급에 해당하는 :
그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눈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가운데 가장 궁핍한 경우를 가리킨다.
[주05] 낮은 …… 있다 :
정호(程顥)가 말하기를 “낮은 관직의 선비가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면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다.[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必有所濟.]”라고 하였다.《小學 嘉言》
[주06] 부친을 …… 주관하였으니 :
《주역》〈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되리라.[幹父之
蠱, 有子, 考无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7] 위태로워도 허물이 없었네 :
《주역》〈건괘(乾卦) 구삼(九三)〉에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君子終日
乾乾, 夕惕若, 厲無咎.]”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