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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72권 / 묘갈명(墓碣銘)
대곡(大谷) 성 선생(成先生) 묘갈명 병서(幷序)
성씨(成氏)는 예로부터 어진 이가 많다고 하였다. 퇴계 선생이 말한 ‘은성(隱成)’이란 바로 선생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선생은 온순(溫純)한 자품에 호매(豪邁)한 기질로서 그의 학문이 존양(存養) 정색(精索)만을 힘썼으므로 그의 말은 사실의 뒷받침이 있었고, 그의 행실은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세상의 쓰임이 되지 못했으므로 ‘은성’이라 말하게 된 것이고 또 당시 사람들이 그의 고상함을 모르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에서도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 한다. 선생의 나이 30여 세 때 시장(試場)에 나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후 을사년, 중형이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화를 당하자 선생은 시를 읊어 자기의 뜻을 보이고는 그 길로 보은현(報恩縣)으로 돌아와 천석(泉石) 사이에다 거소를 정하고 이름을 대곡(大谷)이라고 하였다. 나라에서 참봉(參奉)을 제수하자 왕명을 사은하고는 곧바로 돌아왔다.
명종(明宗)이 유현(儒賢)을 맞아들여 치도(治道)를 물었을 때는 선생이 서울에 들어가 병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을 표하니, 상이 의원을 보내고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선생이 먹을 곡식을 대게 하였으나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謝)한 후 다시 초야에 묻히기를 바라는 소(疏)를 올리고 돌아왔다. 선조(宣祖) 초기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주어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상은 선생에게 의자(衣資)를 특별히 하사하였고, 계속하여 도신(道臣)에게 선생의 어려움을 보살필 것을 명하였으며,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태의(太醫)에게 약을 주어 보내기도 하였는데 태의가 두 번째 갔을 때는 선생은 이미 세상을 마친 뒤였으니 바로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12) 5월 26일이었다.
선생의 휘(諱)는 운(運)이요, 자(字)는 건숙(健叔)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아버지 세준(世俊)은 부정(副正)이었고, 어머니는 박씨인데 사간(司諫) 효원(孝元)의 딸이다. 조부 충달(忠達)은 현령(縣令)이요, 증조 득식(得識)은 한성 부윤(漢城府尹)이었는데 이상은 모두 관직이 있는 명인(名人)들이었고, 백부(伯父)인 사숙공(思肅公) 세순(世純)이 아들 수침(守琛)을 두었으니 바로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 이미 도(道)에 뜻을 두었고 자라면서 더욱 방향을 굳혀 나갔다. 일찍이 이르기를, “성현(聖賢)이 남긴 글은 반드시 가슴을 활짝 열고 높은 안목으로 참뜻을 찾아야지 그렇게 못하면 구두(口讀)의 학문이 되고 말아서 아무리 상달(上達)하려 해도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事物)을 외면한 채 성명(性命)만 따지는 것도 학문이 될 수 없다. 반드시 현미(顯微)ㆍ정조(精粗)에 대하여 포괄적인 공부를 해야 비로소 이론이 허공에 뜨거나 순서 없이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공부하는 자는 우선 뜻을 세워야 한다.
만약 그 뜻을 항상 들추어 세우고 일깨우지 않는다면 아무리 바탕이 아름다워도 절대로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뜻이 확고히 선 뒤에 자신의 마음을 세밀히 살펴 혹시라도 사(私)가 끼었음을 느낄 때는 하나의 싹도 남김없이 몰아내고 나면 천리(天理)가 자연 밝게 나타나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역시 경건한 마음가짐이 모자라기 때문인데, 만약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외사(外邪)가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하였는데, 이 모두는 선생이 진실하게 쌓아 올린 체험에서 온 말이지 짐작으로 공중에 띄워 놓고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 효성과 우애가 순독(純篤)하였던 것이다.
부정공(副正公)은 성격이 준엄하였지만 선생이 곁에 있으면 언제나 기뻐하는 빛을 보였고 백씨(伯氏)를 부정공 섬기듯 하였으며, 또 중씨(仲氏)를 추도하여 언급할 때면 반드시 눈물이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부인(夫人)과도 서로 공경하여 머리가 희도록 변함이 없었다.
서울에 우거(寓居) 할 때 한번은 어떤 어여쁜 여인이 선생을 엿보았는데, 선생이 그것을 깨닫고는 곧 딴 곳으로 옮겼다. 주고받는 데 있어 더욱 삼가서 항상 말하기를, “내가 일생 동안 경계하는 것이 색(色)과 득(得) 그 두 가지 뿐이다.”하였다.
남의 착한 일을 듣고는 칭상(稱賞)해 마지않으면서 성취(成就)하도록 하였고, 착하지 못함을 들었을 때는 덮어 주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화기가 넘쳐 흘러 귀천(貴賤)ㆍ현우(賢愚)할 것 없이 각기 성의를 다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동화되어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아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곧 사양하였고, 자기 스스로 고심 끝에 와서 묻는 자가 있으면 자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일가들 사이에 있어서도 은의(恩義)가 주도(周到)하였으며, 보통 때는 옳고 그른 것이 없는 듯하다가도 의리(義理)를 판단하고 성패(成敗)를 가늠하거나 사람의 현부(賢否)를 논하는 일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진복창(陳復昌)이 한창 이름이 있을 때도 선생만은 그를 좋지 않게 여겼었는데, 그후 선생의 중씨가 과연 그의 해독에 걸려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은 덕기(德器)가 혼성(渾成)하였고 화광(和光)이 감추어져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으나, 그의 개결(介潔)한 풍채는 훨씬 물외(物外)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달갑게 여기는 일 보기를 초개와 다름없이 여겼다.
항상 속리산(俗離山)의 맑은 풍치를 좋아하여 훌쩍 혼자서 갔다가 여러 날 만에야 돌아오기도 하고, 또 좋은 계절 좋은 날이면 혹 관동(冠童)을 이끌고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기도 하였으며, 술이 거나해지면 거문고를 뜯거나 시를 읊조렸는데 그 곡조가 너무 청고(淸古)하여 듣는 이들이 모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 산수 사이를 거닐면서 세상 밖에 뛰어나게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다만 그에게 유정(幽靜)한 지조가 있다는 것과 그가 구름ㆍ달을 읊조리면서 세속 일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고는 다만 그에게 고아(古雅)한 정취가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가 참으로 경사(經史)에 마음을 담고 의리를 즐겨 찾아 자기가 따로 즐기는 것을 남 모르게 즐기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 선생의 역량과 학식이 그토록 훌륭했는데도 끝내 세상에는 쓰이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닌가. 선조(宣祖)가 그의 죽음을 듣고 제물과 부의를 내렸으며 장례까지 돕도록 명하여, 마지막 길을 슬퍼한 은전이 상례(常例)와 달랐다.
부인은 경주 김씨(慶州金氏) 부사직(副司直) 벽(碧)의 딸인데, 아들이 없어 선생의 처남(妻娚) 천부(天富)의 아들 가기(可幾)를 조카사위로 맞아 후사(後事)를 맡겼는데 아마 일시의 편의를 위해서였던가보다. 가기가 선생의 여러 문인들과 함께 고을의 동쪽 종곡(鍾谷) 남녘 기슭에다 선생의 장례를 모셨다.
나라에서 선생에게 제수한 관직으로는 참봉(參奉)에서 시작하여 인의(引儀) 사지(司紙)ㆍ판관(判官)ㆍ도사(都事)를 거쳐 사재감 정(司宰監正)까지였고, 인조(仁祖) 때에 포장하여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문인들이 사우(祠宇)를 세우고 충암(冲菴 김정(金淨)) 김 선생(金先生)을 함께 모셨으며, 유집(遺集)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친구는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ㆍ서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ㆍ이토정(李土亭 이지함(李之菡)) 같은 이들로서 다 세상에 드문 명현(名賢)들이었고, 남명과는 더욱 막역(莫逆)한 사이였다. 대체로 남명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의연한 기상이 있었는데 선생은 온후한 기상으로 대하였다.
그러므로 남명이 말하기를, “건숙(健叔 성운(成運))은 정금(精金) 미옥(美玉) 같아서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다.”하였고, 상국(相國) 노수신(盧守愼)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연(經筵)에서 말하였으며,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은 퇴계와 같은 비중으로 칭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은 다 낭묘(廊廟)의 큰 그릇이요, 세상을 요리할 훌륭한 재목들이다.”하였으니, 남에게서 받은 인정 또한 깊다고 하겠다.
집안의 어진 이들만 하더라도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ㆍ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ㆍ우계(牛溪 성혼(成渾))ㆍ판곡(板谷 성윤해(成允諧))이 연이어 빛을 내어 한때 장관을 이루기에 충분하였다. 동주가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있을 때 남명ㆍ토정ㆍ화담이 모두 먼 곳에서 찾아와 밤을 새워가며 얘기하고 놀았는데, 상국 이준경(李浚慶)이 그 소식을 듣고, “필시 덕성(德星)이 하늘에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평소 선생은 당시 인물을 논하면서 청송을 제일로 쳤다. 일찍이 그의 사적을 기록하기를, “그 자신 한 세상을 도화(陶化)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세도는 쇠퇴하고 사람들은 떠들기만 하여 손을 붙일 곳이 없음을 보고는 자취를 감싸고 물러가 산야(山野)에 서식하면서 성리(性理)의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홀로 자신을 지키며 가꾸다가 여유 있는 자세로 세상을 마쳤다.”하였다.
아, 선생도 그 자신 청송과 상통된 점이 있어 그렇게 쓴 것이 아니었을까. 옛날 정이천(程伊川 정이(程頤))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행장을 쓰면서 이르기를, “후일 나를 알고 싶은 이가 있다면 이 글에서 찾아보면 될 것이다.”하였는데, 지금 나도 선생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고 싶다.
청송은 퇴계ㆍ율곡ㆍ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가 행장을 쓰고 비명을 써 더할 수 없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선생은 그렇지 못하여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두 선생의 법도와 이른 경지가 거의 같다고 볼 때 살아서 뜻이 같았고 죽어서 전(傳)이 같다고 하겠는데, 두 선생을 꼭 구별해서 볼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퇴계가 선생을 칭인(稱引)한 것만으로도 백세(百世)를 전할 만하여 가령 청송의 입장에서 논한다면 누가 일인자가 될지 모를 일이다. 두 선생이야말로 난형난제의 사이가 아니겠는가. 아, 장하도다. 성씨 가문에 어진 이가 많다는 말이 과연 틀림없는 말이었다.
묘도에 비를 세우지 말라는 선생의 유명(遺命) 때문에 우계 선생이 두어 마디 적료(寂寥)한 말을 비의 후면에다 기록했을 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고을의 선비들이 빗돌을 마련하여 글쓰기를 청해 왔다. 내가 ‘선생의 뜻이 아니지 않느냐.’ 하자 그들은 모두 많은 선비들이 바라는 바라고 대답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윽한 빈 골짜기 / 空谷之窈兮
서식할 만한 곳이로세 / 可棲而息
태고를 흐르는 맑은 시내 / 古澗之淸兮
마실 만도 씻을 만도 하네 / 可飮而濯
그러나 선생의 마음은 / 先生之心兮
그것을 즐김이 아니었다네 / 匪此之樂
이치의 오묘함 / 惟理之奧兮
내 그를 탐구하여 규명하고 / 我玩而明
덕의 아름다움 / 惟德之懿兮
내 그를 가슴에 새겨 실천하리 / 我服而行
저 다른 은자들은 / 惟彼隱者兮
혹은 담을 넘고 혹은 문을 닫았었지만 / 或踰或閉
선생만은 그렇지 않아 / 先生不然兮
오직 의에 맞게 하엿네 / 惟義之比
자신만 결백코자 인륜을 어지럽히지 않았음이여 / 不潔而亂兮
무슨 의착한 데가 있었을 것인가 / 焉有所倚
다 받아들이고도 따라 옮길 줄 몰랐으니 / 通而不流兮
개결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았다네 / 介而不激
평거엔 목연했고 / 穆然其居兮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였네 / 溫然其卽
선생이 걷던 길 / 先生之道兮
뉘라서 감히 흠잡을 것인가 / 疇敢瑕謫
내 그 연유를 생각해 보니 / 我思其由兮
오직 학문의 힘이었네 / 惟曰有學
아, 후세 사람들이여 / 嗟後之人兮
행여 장저 걸익 무리라고 나무라지 말게나 / 其毋曰沮溺儔匹
<끝>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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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谷成先生墓碣銘 幷序
成氏古稱多賢。退陶先生所謂隱成。卽先生也。先生資稟溫純。志氣豪邁。其學專務存養精索。故其言有物。其行有常。然終不爲世用。故謂之隱成。而又惜時人不知其高云爾。先生年三十餘。就有司中司馬試。旣而乙巳。仲氏與群賢罹禍。先生作詩以見志。遂歸報恩縣。卜築泉石間。名曰大谷。朝廷授參奉。謝命卽還。明廟收擧儒賢。訪以治道。先生入京辭。以病不能登對。上遣醫賜食。命所司繼粟。先生詣闕拜謝。再疏乞骸而歸。宣廟初。屢召以官。皆辭。特賜衣資。再命道臣周急。及以病聞。太醫齎藥再至。則先生已沒矣。卽萬曆己卯五月廿六日也。先生諱運。字健叔。其先昌寧人。考世俊副正。妣朴氏。司諫孝元女。祖忠達縣令。曾祖得識漢城尹。已上皆達官名人。而伯父思肅公世純有子守琛。是聽松先生也。先生髫年志道。長益涵揉。嘗曰。聖賢之書。必須大著心胸。高著眼目以求之。不然則句讀而已。其於上達。豈能有望。然外事物而談性命非學也。顯微精粗。必交致其功。然後無架虛躐等之弊矣。又曰。學者立志爲先。若不激昂振作。雖有美質。決無有成之理。志立然後細察吾心。纔覺有己私。勇猛克去。不留苗脈。則自然天理昭著矣。其客念之紛起者。亦持敬之不至爾。若此心收斂凝定。則外邪自不入矣。此皆先生眞積實體之言。非懸望揣摸之可及也。故其見於行者。孝友純篤。副正公性嚴峻。而先生在傍。則日見其和豫之色。事伯氏如副正公。每追悼仲氏。言及必涕泣沾衣。與夫人相敬。白首如一日。嘗於僦居。有色盻者窺之。先生覺之卽避去。尤謹於辭受。常曰。吾平生所戒。色與得二者而已。聞人有善。稱賞不已。使其成就。其不善則覆蓋之。接人和氣藹然。無貴賤賢愚。各以誠意。鄕人無不化服焉。然不欲以師道自居。有請業者。輒辭。若見憤悱以求者。則亦爲諄諄啓發。其族黨之間。恩意周至。平居若無可否。而至於斷義理算成敗。論人賢否。則有非常情所及者。當陳復昌有名時。先生獨以爲不吉。後仲氏果中其螫以死。先生德器渾成。和光混跡。惟恐人知。而風標介潔。超然於物外。視世之所屑者。無異草芥。常愛俗離淸勝。飄然獨往。屢日而返。佳辰勝日。或携冠童。徜徉水石間。酒醺以往。彈琴詠詩。調韻淸古。聽之者無不洒然而自失也。蓋人見其逍遙山水。獨立乎塵外。則但知其有幽靜之操。見其吟哦雲月。不屑乎俗務。則但知其有古雅之趣而已。若其遊心經史。耽玩義理。以自樂其所樂。則人或不知也。噫。先生所蘊者甚重。而卒以不施於世。豈不惜哉。宣廟聞其喪。賜以祭賻。命庀窆葬。隱卒之典。迥出常例。夫人慶州金氏。副司直碧之女。無子。先生以夫人兄天富子可幾。妻以兄子。託其後事。或謂一時之便也。可幾與諸生。葬先生于縣東鍾谷之南麓。朝廷前後授官。自參奉歷引儀,司紙,判官,都事。終司宰監正。仁祖朝。褒贈左承旨。先是諸生爲建祠宇。與沖菴金先生同享。有遺集數卷行于世。先生所友曹南冥,徐花潭,李土亭。皆間世名賢。先生與南冥最爲莫逆交。蓋南冥有壁立千仞底氣象。而先生濟以溫厚。南冥曰。健叔如精金美玉。吾所不及也。盧蘇齋相國亦以一行無虧稱於筵席。而趙重峯則並以退陶稱之曰。是皆廊廟大器。濟世高材。其引重亦深矣。至其一門之賢。如聽松,東洲,牛溪,板谷。連芳幷彩。大爲一時之壯焉。東洲嘗宰報恩。南冥,土亭,花潭皆遠至。爲對床連夜語。李相國浚慶聞之曰。應有德星見於天矣。然先生論一時人物。必以聽松爲第一。嘗書其事曰。陶化一世。身可任也。而及見世衰人訛。顧無著手之地。則斂跡而退。棲息山野之間。探窮性理之奧。修身獨善。卒歲優游。嗚呼。此豈先生默契而相感者耶。昔程叔子嘗作明道狀曰。異時欲知我者。求之此文可也。吾於先生亦云。然聽松則如退陶,栗谷,高峯狀德鐫行。無不至矣。而先生猶未焉。甚可歎也。然其模範大致無不同者。則生同志。死同傳可也。何必差殊觀哉。況退陶之稱引先生者。亦自可傳於百世。而假如自聽松論之。則未知誰之爲第一也。抑將兄弟之難爲耶也。噫盛矣哉。信乎成氏之多賢也。先生遺命勿立墓刻。牛溪先生只以寂寥數語。記其表陰矣。今者鄕之章甫。伐石請辭。余曰。非先生志也。皆曰。雖然。多士之願也。遂爲之銘曰。
空谷之窈兮。可棲而息。古澗之淸兮。可飮而濯。先生之心兮。匪此之樂。惟理之奧兮。我玩而明。惟德之懿兮。我服而行。惟彼隱者兮。或踰或閉。先生不然兮。惟義之比。不潔而亂兮。焉有所倚。通而不流兮。介而不激。穆然其居兮。溫然其卽。先生之道兮。疇敢瑕謫。我思其由兮。惟曰有學。嗟後之人兮。其毋曰沮溺之儔匹。<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二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