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 관하여 (2) - 주의자에서 목자로
2024.03.17.(사순절제5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0/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12/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14/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15/ 베드로가 예수께 "그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1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는 줄 모르느냐? 18/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19/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태 15:10-20)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10) 군중들 역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에 관한 대답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군중들에게 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죄책감이 들게 하는 것이며, 무거운 돌덩이를 늘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과 같이 그들을 항상 짓누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전통을 어기는 것인가?’ ‘안식일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전통을 어기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병에 걸리거나 불운이 닥치는 것은 아닌가?’ 이때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군중들과 뒤섞여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분명하게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주십니다.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20)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물었을 때는 이 대답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이들도 결과적으로는 이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전통으로 온갖 굴레를 씌우는 ‘율법주의자’들의 강요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의자’가 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11)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위선자(7)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위세와 강요에 눌려 있는 군중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전통의 굴레에서 벗겨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장로들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전통을 지키지 않은 채로 입에 들어간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해서는 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그들과 벌일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논쟁은 언제나 너의 주장과 나의 주장이 있을 뿐, 이긴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군중들에게 폭로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자들의 온갖 ‘주장’들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가 되어 내뱉는 그 주장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부에 대한 탐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주장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말씀은 율법주의자들 앞에서 책잡히지 않기 위해 말 한마디 못한 채 숨죽이고 살아가는 군중들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그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전통을 어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행동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고 있을 뿐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란, 군중들의 때론 무식하고 거친 말이 아니며 때때로 튀어나오는 욕설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적 욕망 때문에 타인을 억압하는, 유식한 듯 세련되고 때로는 부드럽고 친절하기까지 한 ‘이것이 옳다’는 주장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전통은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혹은 지켜야 하느냐 안 지켜도 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군중들을 가까이 부르신 예수님에게 전통이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의 문제였습니다.
‘주의’를 무너뜨리는 예수
예수님은 전통의 준수를 문제 삼는 대신, 전통을 주장하는 행위(legalism)와 주장하는 자(legalist)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전통의 문제는 군중들과 제자들의 문제가 되지만, 예수님에게 전통의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전통의 멍에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덮어씌우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멍에를 벗겨내어 다시 율법주의자들에게 되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서 군중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율법주의자에게 저항하는 ‘진보주의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 다만 이런저런 ‘주의자’(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법치주의자 등)가 되어버린 우리가 예수님을 같은 ‘주의자’로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돌보는 이들의 목자인가, 아니면 율법주의자들처럼 그들에게 전통과 법을 주장하면서 권력과 욕심을 채우려고 그들의 머리 위에 자신의 짐을 대신 씌우고 있는 이기주의자들인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주의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와 그것을 깨려는 진보에 관해서, 예수님에게서 명확히 드러나는 바는 그것을 주장하면서 타인을 구속하는 자들을 문제 삼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12)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13)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심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전통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통을 주장하는 자들을 가라지 취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자’에서 목자로
보수와 진보는 인간의 성향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를 자처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으며, 하늘나라와 상관없는 자입니다. 그가 ‘주의’를 내세우며 거세게 주장하면 할수록, 그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자’들은 이루어지고 있는 하늘나라를 보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추구하며,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과거와 달리 어느 한쪽에 독점적으로 힘이 쏠려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것도 주장하지 못하면서, 권리를 빼앗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들을 위한다며 ‘주의자’가 되는 대신, 이들과 함께하는 진정한 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가 되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부모로부터 소외되고 방치된 아이들을 볼 때, 사람들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 아이들에게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돌봄이 부족해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잘못된 모습과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흔한 말로 버릇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균형 있는 영양식을 먹어본 적이 없기에 이것저것 편식하는 것도 봅니다. 도덕성의 결핍도 봅니다. 함께 하면서는 그들의 잘못된 습성을 고쳐주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줄곧 방임되었던 초등학생 남매가 우리 공동체에 와서 살 때 오빠는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물건들을 곧잘 훔쳐왔고, 직원에게 몇 번이나 발각되고 나서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식탐이 심했습니다.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어보면서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나가는 말
‘전통’ 즉 사회적 규범이란 면에서 이 남매는 잘못되어 있고 잘못하고 있음이 명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동과 청소년들의 돌봄과 치유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결핍된 부분들을 보충하고, 잘못된 부분들을 교정하며 때로는 치료하는 곳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보호, 치유,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청소년 기관들의 역할이란 우리 사회가 지켜야하는 ‘전통’을 그들에게 숙지시키는 것이며, 그들이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관들이란 사회가 요구하는 전통들을 청소년들이 지키도록 길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기관들은 부모 되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사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기관들은 자기들이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전통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전통을 주장하는 자들이라면, 우리 역시 아이들을 사회적 규범에 먼저 적응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이들을 전통의 규범에서 먼저 해방시켜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전통을 지키라고 훈계하는 것이지만, 목자가 해야 할 일은 전통을 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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