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을 이겨 낸 주민들
전북 부안군 하서면 불등마을
지도자 이 장 권 (36세)
가난에 찌든 어촌마을
부안읍에서 변산 해수욕장 방면으로 17km 지점에 위치하여 북서로는 서해와 인접하고 동남으로는 변산 줄기에 막혀진 마을로서 1973년 까지도 주민들이 산기슭의 땅을 일구어 마련한 8ha의 경지와 연안의 조개잡이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 속에서 주민의 60%정도가 문맹자로 단합이나 새마을 사업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낙후된 마을이었다.
새마을운동으로 무지와 가난을 극복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 장권 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갯마을에서 온갖 폐습과 방탕 속에서 배회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 온 1973년도만 해도 마을은 여전히 가난 속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잘 살기 위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아가 마을마다 새마을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관심 했고 이장과 지도자마저도 마을 어른들은 젊은 이 장권 씨를 지도자로 선임하고는 원래 지도자란 면사무소 심부름이나 잘 하면 되는 것이라고 이장 직까지 겸임시키는 것이었다.
젊은 새마을지도자 이 장권 씨는 이웃 마을에서 새마을사업에 온 주민이 협동하여 추진하는 광경들을 보고 우리 마을도 잘 사는 마을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한 뒤 젊은 청년들과 단합하여 새마을사업으로 환경을 개선하고 퇴폐풍조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1973년 자신의 문전옥답에 새끼줄을 치고 청년들과 함께 마을 진입로 375m를 확장하고 이어 안길 확장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살기도 힘든데 무슨 놈의 새마을사업이냐는 식으로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몇몇 청년들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마을 안길 205m 와 우회도로 255m 를 완공함으로서 주민들은 하나 둘 씩 새마을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천수답을 전천후 농경지로
산기슭을 일구어 개간한 8ha의 마을의 전답이 매년 헐벗은 산에서 홍수로 인한 사태와 가뭄을 피할 길이 없자 계곡에 보를 설치키로 사업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주민들은 논 밭 가진 사람들이나 할 일이지 무엇 하려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추진해야 하느냐고 완강히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들을 중심으로 각 농가들을 설득하여 자재 대 80만원의 사업비로 1973년 11월 사업을 착수하였다. 살을 에는 듯 한 바닷바람 속에서도 강력히 추진하여 그 이듬해 2월까지 완공함으로써 전 농토를 수리안전답으로 만들어 전천후 영농이 가능하게 되자 완고했던 어른들도 새마을사업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문맹을 타파하고
1974년 처음 정부로부터 새마을사업용으로 양회를 지원받자 젊은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여 새마을회관을 건립키로 결의하고 15평 규모의 슬레이트 건물을 건립하게 되어 이곳에서 야학을 실시키로 하고 몇몇 청년들을 중심으로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완고한 노인네들이나 일부 주민들의 반대도 심했으나 부녀자들이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가까운 의복 국민학교 선생님들이 강사로 지원 봉사하는 등 3년 만에 마을의 전 주민이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백합 양식장의 폐사를 계기로
변산 근해의 연안지구가 백합양식의 적지로 개인들에게 허가되자 주민들은 백합양식장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여 왔으나 1975년에 백합양식장의 폐사로 인하여 마을의 전 가구가 생계의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1월 정부에서는 백합양식장 폐사지구 대책사업비로 375만원을 지원하자 이 지도자는 해마다 입는 해일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조제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군의 기술 지도를 받아가며 어린이 부녀자 노인에 이르기까지 살을 에는 듯 한 혹한 속에서도 방조제 사업에 참여하였다.
주민들은 해일의 피해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설계상 285m 의 방조제를 410m 까지 초과 완공함으로써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소득증대를 향한 집념
계속적인 새마을사업의 추진으로 마을 환경은 정비되었으나 주민들의 소득 면에 있어서는 여전했다. 부안군 수산협동조합 산하 의복리 어촌계장을 겸임하고 있던 이 지도자는 소득증대만이 새마을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으며 소득은 오직 바다에서 찾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수협을 통한 자금지원을 교섭 끝에 지도자의 열성에 감복한 수협 측의 협조로 1975년 10월 마을 개발위원들의 재산을 담보로 하여 450만원의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예전에 농협이나 수협에 진 빚으로 집안이 망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데 이러다가는 온 마을이 망하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개발위원들과 젊은 청년들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어서 군청 수산 기사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9척의 어선을 건조할 수 있었다.
고기를 잡아 잘 살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마을의 부녀자들은 열성적인 공동 작업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어구의 공동구입으로 그 이듬해 2월부터는 조업에 나설 수 있었다.
1976년 초봄 오징어의 풍어로 많은 수익을 본 주민들은 개발위원들의 결의에 따라 450만원의 융자금과 외상으로 공동구입한 어구의 대금 150만원의 부채를 청산하게 되었다. 이제는 내 배를 가지고 바다를 누비며 고기를 잡아 생계 걱정이 없게 되자 새마을사업에 전 주민이 협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6년 부안수협의 우수새마을로 선정도 되었으며 전북도와 부안군으로부터 공동 어판장 건축을 양회 570대와 현금 20만원을 지원받아 연장 30m 의 견고한 선착장과 30평의 어판장, 공동창고 1동을 건립함으로써 생산기반 시설을 완비하여 이 마을 및 인근에서 잡은 고기를 현지 판매함과 동시에 부안수협 및 군산수협과 협조하여 갑오징어의 일본수출과 개발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어판장 소득으로 마을의 부채 670만원을 청산할 수 있었다.
1977년 주민소득이 높아지고 마을 부채를 청산하자 새마을사업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부녀회에서는 새마을금고 육성의 주축이 되어 근검절약의 기쁨을 조성하면서 바다에 나간 남편들을 대신하여 마을 노인과 부녀자들과 함께 새마을사업의 주역이 되어야 했다.
지붕개량 사업으로 자제대금 72만원을 지원받고 수협융자 100만원으로 자재를 일괄 공동구입하여 불량주택 5호를 재외하고 지붕개량 및 도색까지를 완료하여 마을의 환경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다.
해일이 앗아간 10년간의 피와 땀
1980년 10월, 60년대 처음이라는 해일피해는 70년대 새마을사업의 성과를 송두리째 휩쓸어갔고 이 지도자와 주민들은 허탈과 무기력으로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선 전파 7척, 반파 4척과 410m 의 방조제 및 수백 점의 어구 유실 등 1억 7천만 원의 피해는 그 간의 주민들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의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군과 면사무소에서는 불등마을의 주민들을 격려하는 한편, 1,180만원의 방조제 복구 공사비와 수협을 통한 어업자금 지원으로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지도자와 주민의 피나는 노력으로 조상 대대의 명절인 구정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작업을 계속하여 1981년 3월 650m 의 방조제를 완전 복구하는 한편 어선 7척도 건조하였다.
1981년 4월부터는 주민의 오랜 숙원이던 식수난 해결을 위하여 간이급수시설 지원 자금 280만원과 자체기금 170만원으로 간이급수시설사업을 추진하였으나 2.5km 나 되는 이웃 마을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 지도자와 마을주민들은 한데 뭉쳐 어려운 고난을 이겨내고 공사를 완료하여 위생수를 공급하고 부녀자의 일손을 덜어주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어서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소하천 정비 사업을 시작했다.
계속되는 철야작업으로 주민들도 지쳤으며 지도자도 피로가 누적되어 작업현장에서 쓰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협동 단합의 노력으로 튼튼하게 석축을 쌓아 마을인 환경을 깨끗하게 정비하였다.
복지어촌 건설을 향한 푸른 설계
이제는 가난과 해일의 악몽에서 깨어나 무한한 소득자원의 바다를 향하여 만선의 부푼 꿈을 안고 80년대 복지어촌 건설을 위하여 20여척의 배들이 쉴 사이 없이 서해를 누비고 있다. 마을 노인과 부녀자들은 새마을 시설물을 정비하고 환경 개선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날 생활의 빈곤과 교통 불편으로 국민학교도 졸업하기 전 조개잡이에 나섰던 쓰라린 아픔을 이지도자와 마을주민들은 말끔히 잊어버린 채 복지마을 건설을 위하여 피조개 양식장 30ha를 설치하여 소득원 개발에 힘쓰는 한편 인근 임야를 이용한 축산단지의 조성과 2층 50평 규모의 다목적회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또한 협동사업 기금을 바탕으로 마을 전 학생의 장학금지급 추진과 노인복지를 위한 경로회 운영을 강화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기금을 조성 중에 있다.
이와 같이 80년대 복지 어촌 건설을 향하여 오늘도 서해바다를 누비며 힘차게 전진하는 이 마을의 억척같은 힘은 기필코 푸른 설계를 실현하고야 말 것이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1981 내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