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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 Eugene Bell 배유지) 미국 선교사는 1895년에 입국하여 나주를 거쳐 1897년 개항도시인 목포에 선교부를 설립한다. 그리고 북쪽으로 나아가며 선박을 이용한 복음 전파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교회가 없는 상태에서 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유진벨은 1908년 4월 5일 이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염산리교회로 호칭했다. 이후 1939년에 염산면 소재지에 염산교회가 들어서자 1947년 마을 이름을 따서 야월교회로 개명하게 되었다. 야월리는 천일염전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야월교회 순교기념관
영광군은 사회주의자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조직책 김삼룡의 영향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공산당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다. 따라서 70년이 지난 지금도 6.25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후손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피해자의 가족 중에는 갯벌의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다. 한국전쟁 때 갯벌에 던져진 시신들을 고기가 파먹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전쟁은 끝났다 해도 잔당들은 남아있었다. 공산당들과 좌파 세력들은 1951년 9월까지 야월교회 성도들을 설도 분주소(지금의 파출소)에 끌어다 때려죽이고, 허리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등 잔인하게 학살을 이어갔다. 목격자 이시성 씨는 ‘김성종 영수, 조양현 영수, 최판섭 집사, 유영섭 집사, 최판원 집사, 김두석 성도 등 전 교인을 수문 앞에 개별적으로 끌고 가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고 증언했다.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는 해방 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가족들도 같은 날 희생되었는데 마을 공동묘지 앞에 10m 넓이의 깊은 구덩이를 파고 떠밀어 생매장되었다. 이날 주민 80명도 학살당했다.
최판섭 집사는 어머니가 울면서 “네 장형 최판원 집사가 잡혀 죽게 되었다. 네가 분주소에 들어가면 네 장형을 살려준다고 하니 네가 들어가거라.” 하자 최판섭은 찬송을 부르며 설도 분주소로 갔다. 결국, 최판섭 집사는 설도 수문에서 돌을 목에 걸고 칠산 바다에 빠뜨려져 장렬히 순교했다. 최 집사의 부인 유영섭 집사는 죽음의 형장에서 살인자를 향해 “아저씨도 꼭 예수 믿으세요!” 전도한 후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하면서 칼에 맞아 죽었다. 최판원 집사와 함께 남석우 씨는 예수 믿는 반동분자라 해서 돌에 맞아 두개골이 파열됐다. 숨을 겨우 건져 집으로 옮겨진 후 결국 회생하지 못해 순교했다. 이처럼 야월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노인부터 젖먹이까지 전 교인이 순교한 것이다.
야월교회와 순교기념탑
공산세력은 교회당 건물도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렸다. 야월리는 여러 해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다. 1952년이 되어서야 안창건 전도사(천호동성결교회 원로)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전도자로 헌신했는데 안창건 전도사의 사랑채에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부임한 배길양 목사는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순교자들의 이름을 찾아내 65인의 명단을 확정하고 순교 기념탑에 이름들을 하나씩 새겼다.
이후 야월교회 출신으로 통합교단 총회장이 된 안영로 목사가 총회 결의를 얻어 ‘야월교회 순교기념관’ 건립을 성사시킴으로써 2009년 7월 연건평 250평 규모로 ‘기독교인 순교기념관’과 ‘교육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불갑산의 상사화가 계곡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영광 군민은 이 장관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고 ‘피해자들의 피흘림’ 이라고 아픔을 토설한다. 현재 심재태 목사가 담임하며, 교회가 지역사회를 사랑으로 잘 품고 있다고 강조한다. 순교의 영성을 한국교회에 나타내기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수고하고 있다.
야월교회 순교지 십자가와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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