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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설교
제목 : ‘Pray or Nothing’ - 2. 기도에 대한 오해들
본문 : 사무엘하 6장 14절, 마가복음 7장 28절
그리고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 <새번역>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새번역>
때로 우리는 기도를 정말로 쓸데없는 곳에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도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지 않아도 될 영역에서는 기도를 아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잦은 것이 문제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험 중 마귀로부터 찾아오는 유혹, 즉 ‘Temptation’의 순간이 바로 그런 영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처럼 사탄을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도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때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바울이 귀신 들려 점치는 여인을 외면했던 것처럼, 철저히 상대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해서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그 기도가 하지 않아도 될 기도이기에 아깝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기도, 즉 ‘영적 전쟁’ 인 것처럼 보이는 나를 유혹하는 상대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때, 기도를 무엇인가를 물리치기 위한 일종의 ‘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두운 길을 걸어가면서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주기도문을 외우면 좋다거나, 갑자기 가위에 눌리면 사도신경을 외우라고 했던 옛 선배들의 조언이 그와 같습니다.
저는 시험의 순간, 그 중에서도 그 유혹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Test가 아니라 Temptation이라면 그냥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뱀을 무시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생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급도 되지 않고, 깜냥도 되지 않는 유혹 따위가 우리를 결코 쓰러뜨리거나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그냥 유혹일 뿐입니다. 그저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후 마음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노력이기에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큰 존재가 아닙니다. 정말 유혹이라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녀석으로 취급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유혹들만 상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런 유혹마저 고난이라고 하면서 삶 속으로 끌어 들여 더 큰 문제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 유혹이 너무도 커보여서 그런 유혹의 상대를 나를 쓰러뜨릴만한 존재로 인정하기에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유혹이라는 녀석이 마치 하나님이 주신 시험인냥 우리에게 파고드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 새번역>
바로 나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발생한 유혹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유혹으로 오는 시험에 얼마나 약한지 이미 평소에 약점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험을 이기느라 기도의 진을 다 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 지인 중에서는 집에만 있으면 스마트폰을 하는 바람에 일부러 운동을 하러 나가는 노력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피하면 됩니다.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다른 것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손에 붙들고 이길 힘을 달라고 아무리 기도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도가 정말 ‘싸구려 커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것들인 대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그 유혹이 내 삶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외면하며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시의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유혹하는 상대방을 나에게 영향을 주는 어떠한 의미로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이 뜨겁다는 것은 반드시 얼마나 불이 뜨거운지를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영역이 아닙니다. 뜨거운 불을 경험해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지만으로도 충분히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불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누군가가 불이 뜨겁지 않다고 하는 말에 넘어가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불이 뜨겁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은 그저 철저하게 외면하면 됩니다. 그저 나를 속이려 하는 것에 혈안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 그 사람의 말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안 그래도 부족한 기도의 시간을 써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시험은, 즉 유혹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무시해야 합니다. 그 유혹이 나에게 말을 걸 기회조차 주지 않도록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명령하며 환기를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꿀팁을 드리자면 그 순간 ‘찬양’을 듣거나 부르는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권해 드린다면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찬양을 선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찬양에 내 믿음을 담아 고백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껴진 기도는 이제 꼭 필요한 영역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험, 즉 하나님의 Test에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때 마음껏 기도를 사용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간구가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찬양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찬양을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하고, 시편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첫 번째 오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무엇인가를 ‘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유혹 따위나 ‘이기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수단도, 도구도 아닙니다. 기도 그 자체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기도는 오히려 ‘인정’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에 대해서 화답하는 인정의 순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며,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인정의 순간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이라는 말, ‘할렐루야’라는 말이 너무도 중요한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아멘’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할렐루야’로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잠잠하며 침묵하며 겸허한 태도를 동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정리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언어들을 쏟아내기 이전에, 부르짖기 이전에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내 입으로 기도를 말하기는 하지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한 마음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위치가 명확해지는 것이 기도가 주는 너무도 큰 유익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왕을 알현하고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정말 진심을 다하고, 전심을 다하여 하나하나 표현해 나가는 것이 기도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기 위하여 성경 속에서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기도의 대표자를 뽑으라면 구약에서는 다윗이고, 신약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윗도, 수로보니게 여인도 정말 기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신앙의 저울로 사용하고, 신앙의 거울로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재어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철저한 신앙적 행위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언약궤가 들어올 때 옷이 벗겨질 정도로 춤을 추었던 것은 결코 쇼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겨져 있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에는 숨김이 없었고, 거짓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다윗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 줄 아는 대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기도에 대한 두 번째 오해에 대해서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아실 것이니 기도하지 않겠다는 ‘교만’입니다. 실로 이건 정말 두려운 교만입니다. 기도하라고,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겠다고, 부르짖으라고,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다 아시기에 오히려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며 정말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마음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나를 그대로 털어놓으며 나를 아시는 주님에 대해서 더 확실한 믿음이 생길 수 있는 찬스라고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대하여!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8절, 새번역>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그냥 주실 수 있고, 찾게 하실 수 있고, 열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구하라고 하시고, 찾으라고 하시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시지만 기도를 통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그 약속을 보증삼아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오해하면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알아서 다 해 주실 것처럼, 마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척하며, 그저 시간이 흘러가면 기도의 달인으로 성숙되어질 것처럼, 기도하지 않은 채 기도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삭의 30년처럼 그냥 시간만 ‘순삭’, 순간 삭제될 따름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하라는 것 자체가 말씀이시고, 명령이시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발 하늘 우러러 고개 끄덕이며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때가 되면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그런 겉멋만 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스스로 보기에 찌질하더라도 부끄럽더라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 취급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면서 소위 ‘앙.떼.때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앙탈을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떼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도, 수로보니게 여인도 여느 조선시대 양반집 대감님이나 규수처럼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부좌를 틀고, 수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누군가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 같은 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앙탈을 부리면서, 떼를 쓰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프랑스어로 이 앙떼때(entêté)는 ‘고집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앙떼때의 기도를 통하여 은혜 받기 위한 고집스러운 행동을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배우는 것이라고 저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그리스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한 여인에게 말도 안 되는 대접을 하고 계셨습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의 소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이런 소원에 흔쾌히 응답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은 자녀들을 먼저 배불려야 한다고 자신이 유대인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라고 선을 긋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선을 긋는 것을 넘어 선을 넘어 버리십니다.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이라면 여기서 더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기도 제목을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귀신 들린 딸이고 뭐고 자존심이 이미 상해 버렸으니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순간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마가복음 7장 28절, 새번역>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기도입니다. 자신을 상 아래에 있는 개로 만든 기도입니다.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에 만족한다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 장면에서 바로 세 번째, 기도에 대해서 오해 하지 않기 위하여 반드시 넘어야 할 부분으로서의 오해와 동시에 우리가 닮아야 할 기도에 대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철저히 자존심을 배제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까지 대하셔도 되는지 아십니까? ‘개’ 취급을 하셔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우리를 낮추실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하찮고 별 볼 일 없어 보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는 분이 고작 우리의 상황을 눈여겨보시지 않더라고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분의 눈에 우리는 그저 먼지 한 톨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변함없는 기도의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까? 그런 취급을 받고도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사모할 수 있으십니까? 기도가 정말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까? 평소에 고백한 대로 기도는 드리는 것이라 했으니 받은 이가 마음대로 하셔도 상관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그런 취급을 당하더라도 그 취급과 대접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앙탈 부리실 수 있겠습니까? 떼를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녀의 모습으로 기도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이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앙탈을 부리곤 합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곤 합니다. 왜 그러는 줄 아십니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그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고, 소원이 있는 대, 그 것을 들어줄 사람에 대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 모습이 부담스러울까요? 그 모습이 보기 싫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괜스레 장난 치고 싶어 신발을 정리하면 들어준다고 말하면 냉큼 달려가 신발을 정리하고 옵니다. 저는 순간 아이들을 신발 정리꾼 정도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방 정리를 제대로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평소에 가진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정리하기 바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안쓰럽고 마음이 불편할까요? 아닙니다.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렇게까지 구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마가복음 7장 29절, 새번역>
그렇게 앙탈을 부리고, 떼를 쓰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아주 놀라운 행동이 이어집니다. 자신에게 빈정거리시는 예수님의 말이 자신을 놀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금까지 자신을 놀린,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완전히 짓밟아 버린 예수님의 말을 믿어버립니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자존심 상했으니 결과는 아무 소용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반대로 결과를 보니 자존심이고 뭐고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마가복음 7장 30절, 새번역>
기도에 대한 마지막 오해는 ‘결과’에 대한 문제입니다. 기도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 정답입니까? 거절이 정답입니까? 침묵이 정답입니까? 어떤 결과든 정답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기도는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결과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조금도 결과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장 39절, 새번역>
결과는 기도를 들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수 있게 되면 이제 기도를 잘 마무리해도 될 시간이 온 것입니다. 하지만 내 뜻대로 해 달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꿈꾸며 하나님을 ‘답.정.너’로 만들고 있다면 아직 기도를 더 하셔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아직 ‘기도’에 도달하지도 못하셨으니 한참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더디 이루어진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자신의 기도에 대한 태도를 원망하시고 수정하시는 게 훨씬 더 빠를 수도 있단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기도에 대한 오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도를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나의 뜻을 이룰 수단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기도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주인이 나인줄 압니다.
넷째, 기도에 대한 결과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면 절대 수긍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수단이 아니라 ‘찬양’ 되어야 합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다 아시는 것을 오히려 믿으며 더욱 더 기쁨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통하여 나를 얼마나 변화시킬지 토기장이의 손에 맡긴 진흙이 되어야 기도가 기도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허락도, 거절도, 침묵, 즉 무응답까지도 모두 결과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Pray or Nothing’을 선포하고 기도의 여정을 떠나는 동역자 여러분, 기도에 대한 오해를 제거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적은 기도 시간 쓸데없는 영역을 상대하느라 힘 빼시지 마시고,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영역에서 여러분의 기도가 빛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에 대한 모든 오해들을 걷어내는 오늘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항상 진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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