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삼거리
이 향 숙
이십 여 년 전 지인의 결혼식에 가던 길이었던 것 같다.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이 웬 지 낯설지가 않았다. 고향의 삼거리 모습과 너무나 닮아서였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려는데 기차의 기적이 울렸다. 긴 여운을 남기며 스러져가던 기적소리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던 남편이 물색한 장소가 이곳이었고 우리부부는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아이들을 낳고 사업장을 키워가며 긴 세월을 살고 있다. 눈을 감고 걸어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곳, 미호삼거리다.
지금 이곳에는 변화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눈앞에 보이던 푸른 들녘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세종시와 청주시를 잇는 도로를 중심으로 흡사 바둑판같은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고향을 닮아 좋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가다보니 왜 이곳에는 그 흔한 개발바람도 불지 않나 조바심하기도 했었는데 막상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는 아마도 거리 곳곳에 녹아 있는 내 젊은 날의 삶에 흔적들이 사라진다는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싶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반쯤 떨어져나간 간판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발소, 한약방, 페인트가게, 조막만한 이름도 없는 구멍가게까지 이제는 마지막 해체의 시간들에 직면하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내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제 몫을 감당하던 저들이 마지막을 고하려 하고 있다. 저들을 바라보며 지난 일을 추억한다. 커브머리에 있던 이발소에는 혼례를 앞둔 이웃 총각이 머리를 깎고 몸단장을 하러 오면 이발소 주인은 부조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머리매무새를 다듬어 주었었다. 한약방은 어떤가. 밤새 열에 들뜬 아이를 어르다가 조급한 마음에 새벽미명이 채 밝기도 전에 대문을 두드려도 귀찮다 내색 않고 문을 열어주던 약방아저씨가 있었다. 한약방 옆 작은 기와집에는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남편의 소식도 모른 채 유복자를 낳아 기르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 자라 결혼을 해 손자들이 태어난 얼마 후 이산가족 찾기 프로를 통해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된 아주머니가 구순의 지아비를 만났을 때는 온 동네가 잔칫날이었다. 그 뿐인가. 야트막한 집들이 많았던 거리는 페인트가게 덕분에 알록달록 채색으로 단장한 집들이며 가게들이 정다웠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사색이 되어버린 폐허를 둘러본다. 이제는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어야 할 것 같다. 낯선 곳이면서도 웬 지 낯설지 않게 다가 왔던 곳, 우리가족과 이웃들과 더불어 내 삶의 근간을 알차게 가꿀 수 있는 터전이 되어주었던 곳, 이곳 미호삼거리의 옛 모습은 온전히 우리 모두의 가슴에 추억으로 남으리라.
이제 미호삼거리는 변화의 물살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낡은 가게들이 있던 자리엔 커피전문점이며 대형 식당들, 핸드폰가게,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적은 한약방 대신 한의원이며 병원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어 안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다가오고 있음이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이곳을 사랑한다. 이전의 미호삼거리가 고향을 닮아 있어 정이 갔다면 지금은 내 젊음이 녹아 있고 삶의 근간을 마련 할 수 있었던 곳이기에 쉽게 떠날 수가 없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아이들과 손잡고 걸었던 거리, 크게 주고받지 않았어도 이웃들이 있었기에 훈훈했던 삶의 편린들을 가슴에 안고 이 거리의 주인임을 자처하면서 새로운 꿈을 펼쳐 갈 것이다. 지난 날 타지 사람인 우리가족이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이웃들이 함께 해 주었듯이 새로운 이웃들과 더불어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고 싶다.
삶이란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토대위에 세워져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여 비록 하찮은 일들이었다 할지라도 오밀조밀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이 거리의 어제의 모습들을 아주 소중한 기억들로 내 안에 머물며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는 주춧돌이 되리라.
더러는 고향을 떠났던 이들이 옛날을 추억하며 찾아오기라도 할라치면 예나지금이나 구멍가게 안주인인 나는 버들잎 띄운 물은 아닐지라도 시원한 물 한잔을 나누며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속으로 들어가 정담을 나누리라. 사랑한다. 미호삼거리.
첫댓글 스러지는 것들을 수정해서 문미에 올렸던 글~~~
정리하다가 찾아서 올려 봅니다.
미호의 그 자리에 안주하실 수 있었던 운명같은 인연은 이선생님의 무던한 애정으로 이룩하였다 생각됩니다.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만 모두를 사랑하면서 켜켜이 얻는 행복일 것입니다.
전에 감상했던 '미호삼거리'가 오늘의 '미호삼거리'와 느낌이 새삼스럽습니다.
더위가 일찍 옵니다
작년,폭염에 시달렸던 기억을 꺼내어 상기하면서 대처해야 하겠습니다.
신변잡기에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무더위 잘 이겨 내시고요~~
객지가 고향이 되지요.
사랑한다. 미호삼거리.